정곤수 ()

정곤수
정곤수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중기에, 좌찬성, 판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여인(汝仁)
백곡(栢谷), 조은(朝隱)
이칭
경음(慶陰)
시호
충익(忠翼)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8년(중종 33)
사망 연도
1602년(선조 35)
본관
청주(淸州)
주요 관직
도총관·예조판서|좌찬성|판의금부사·도총관
정의
조선 중기에, 좌찬성, 판의금부사, 도총관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청주(淸州). 초명은 규(逵). 자는 여인(汝仁), 호는 백곡(栢谷) · 경음(慶陰) · 조은(朝隱). 곤수는 선조가 내린 이름이다. 증 주1 정윤증(鄭胤曾)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부사직 정응상(鄭應祥)이고, 아버지는 부사맹 정사중(鄭思中)이며, 어머니는 성주 이씨(星州李氏)로 이환(李煥)의 딸이다. 주2대호군 정승문(鄭承門)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65년(명종 20) 예안 도산정사(陶山精舍)로 이황(李滉)을 찾아가 『심경(心經)』을 배웠다. 이후에도 관계를 지속해, 1566년에는 김굉필(金宏弼)의 사적 · 시문과 그에 관한 다른 선비들의 글을 모아 이황에게 보냈으며, 이황은 주로 그것들을 바탕으로 『경현록(景賢錄)』을 편찬하였다.

1555년 별거 초시(別擧初試)를 거쳐 1567년(선조 즉위년) 주3에 합격하였다. 1572년 성균관의 천거를 받아 주4로 벼슬길에 들어섰다. 이후 경력 · 전생서 직장 · 주부 · 장례원 사평을 역임하였다.

1576년(선조 9) 중시 문과에 급제했고, 부사과를 거쳐 1577년에 공주목사로 승진했다가 곧 상주목사로 옮겼다. 1581년 사과 · 파주목사, 1583년 부호군주5을 거쳐 강원도관찰사가 되었으며, 이 때 단종의 능인 영월의 노릉(魯陵)에 사묘(祠廟)를 세우고 주6을 봉안하였다.

1585년 주7 · 동부승지 · 우부승지, 1586년 상호군 · 주8 · 좌부승지 · 우승지를 거쳐, 1587년 여러 해동안 흉년을 겪은 황해도의 관찰사로 특별히 임명되어 진휼사업에 큰 성과를 거두었다.

1588년 첨지중추부사가 되고 서천군(西川君)에 봉해졌다. 1589년 도총관을 겸하고 판결사가 되었으며, 이듬 해 충훈부 공신등록을 편찬하고 동지돈녕부사주9 · 대사성 · 동지중추부사를 역임하였다.

1591년 동지의금부사 · 대사성 · 한성부 좌윤 등을 거쳐 1592년 주10이 되었다가 주11으로 옮겼다. 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주로 선조를 주12하였다.

대사간이 되어서는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도록 건의했으며, 청병진주사(請兵陳奏使)로 중국에 파견되었다. 1593년 원병을 얻어온 공로로 숭정대부에 오르고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이즈음 주13 · 주14를 맡아 명나라 장수와의 교섭을 담당하였다. 같은 해 거듭 보국숭록대부에 오르는 상을 받고 주15가 되었다.

1595년 도총관 · 주16, 1596년 좌찬성을 역임하고, 1597년 판의금부사 · 도총관 등을 겸하고 사은 겸 변무진주사(謝恩兼辨誣陳奏使)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601년 선조를 호종한 주17으로 이항복(李恒福)과 함께 주18되었다.

일찍이 수령 역임 시 학문 진흥과 주19 진작에 힘썼으며, 임진왜란 당시의 대명외교에 큰 역할을 했다.

상훈과 추모

죽은 뒤인 1604년 호성공신(扈聖功臣) 1등에 녹훈되었으며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에 추록되었다. 성주의 유계서원(柳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 『백곡집』 4권 4책이 규장각 도서에 전한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익(忠翼)이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백곡집(栢谷集)』
『한강집(寒岡集)』
주석
주1

이조의 으뜸 벼슬. 정이품의 문관 벼슬이다. 우리말샘

주2

큰아버지뻘 되는 종숙. 우리말샘

주3

‘국자감시’를 달리 이르던 말. 국자감시에 합격한 사람을 진사라고 하였기 때문에 이렇게 이른다. 우리말샘

주4

조선 시대에, 의금부에 속한 종오품 벼슬. 뒤에 종육품, 종팔품으로 나뉘었다. 우리말샘

주5

조선 시대에,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종이품의 관원으로 12명을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 뒤에 정삼품으로 하고 인원도 15명으로 늘렸으나 실권은 훈련도감에 빼앗겼다. 우리말샘

주6

단(壇), 묘(廟), 원(院), 절 따위에 모시는 죽은 사람의 이름을 적은 나무패. 우리말샘

주7

조선 시대에, 중추원에 속한 정삼품 무관의 벼슬. 태종 때 인진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8

조선 시대에, 호조에 속한 정삼품 벼슬. 참판과 함께 판서를 보좌하였다.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오위의 군사를 거느리던 장수. 종이품의 관원으로 12명을 임명하였는데, 임진왜란 뒤에 정삼품으로 하고 인원도 15명으로 늘렸으나 실권은 훈련도감에 빼앗겼다. 우리말샘

주10

조선 시대에, 병조의 버금 벼슬. 품계는 종이품이고, 정원은 1명이다. 우리말샘

주11

조선 시대에, 형조에 속한 종이품 벼슬. 참의와 함께 판서를 보좌하였다. 우리말샘

주12

보호하며 따라감. 또는 그런 사람. 우리말샘

주13

조선 시대에, 청나라 사신을 영접하던 임시 벼슬. 정조 때 선위사를 고친 것이다. 우리말샘

주14

외국 사신을 접대하던 임시직 벼슬아치. 정삼품 이상에서 임명하였다. 우리말샘

주15

조선 시대에 둔, 의금부의 으뜸 벼슬. 품계는 종일품이다. 우리말샘

주16

조선 시대에 둔 예조의 으뜸 벼슬. 공양왕 원년(1389)에 예의판서를 고친 것으로 정이품 문관의 벼슬이다. 우리말샘

주17

나라를 위한, 가장 으뜸이 되는 공. 우리말샘

주18

훈공을 장부나 문서에 기록함. 우리말샘

주19

선비의 기풍(氣風). 우리말샘

관련 미디어 (3)
집필자
오수창
    • 본 항목의 내용은 관계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 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