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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사상(法華思想)

불교개념용어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아 삼제원융과 삼천실상의 이론과 일심삼관과 일념삼천의 실천법을 제시한 불교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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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화경
분야
불교
유형
개념용어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법화경』을 근본으로 삼아 삼제원융과 삼천실상의 이론과 일심삼관과 일념삼천의 실천법을 제시한 불교교리.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법화경』은 전체가 28품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중에서도 이 경의 중심사상을 이루는 부분은 제2 방편품(方便品), 제11 견보탑품(見寶塔品), 제14 안락행품(安樂行品), 제16 여래수량품(如來壽量品), 제25 관세음보살보문품(觀世音菩薩普門品) 등이다. 이들 가르침을 중심으로 하여 법화사상의 체계를 세운 최초의 인물은 중국의 지의(智顗, 538∼597)이다.
그는 『법화현의(法華玄義)』·『법화문구(法華文句)』 등을 저술하여 삼제원융(三諦圓融)과 삼천실상(三千實相)이라고 일컬어지는 철학체계를 세웠다. 뿐만 아니라, 이 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일심삼관(一心三觀)과 일념삼천(一念三千)의 실천법을 제시하는 『마하지관(摩訶止觀)』을 저술 하였다. 또 그는 이 법화사상을 천명하는 종파로서 천태종(天台宗)을 창종하기도 하였다.
우리 나라에 천태종의 종풍이 최초로 들어온 것은 신라 혜공왕 때의 고승 법융(法融)이 중국 천태종 제6조인 담연(湛然)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귀국한 때부터이다. 그러나 『법화경』에 대한 연구는 그 이전부터 우리 나라에서 독자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었고, 그 연구 또한 활발하였다.
(1) 삼국시대
고구려의 불교관계 사료는 극히 적어서 구체적으로 『법화경』의 유통을 살펴볼 수는 없으나 596년(영양왕 7)에 중국 천태종의 지의에게서 선법(禪法)을 전수받은 파야(波若)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고구려에서 법화사상의 연구가 이루어졌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백제에서는 현광(玄光)과 혜현(惠現) 등에 의해서 『법화경』이 구체적으로 연구되고 실천되었다. 현광은 일찍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혜사(慧思)로부터 『법화경』의 가르침을 전수받고 법화삼매를 증득한 뒤에 귀국하였고, 577년(위덕왕 24) 입적하기 직전까지 회삼승귀일승(會三乘歸一乘)의 가르침을 전하였다고 한다. 특히 그의 제자가운데 화광삼매(火光三昧)에 들어간 사람이 1명, 수광삼매(水光三昧)에 들어간 사람이 2명 있었다고 한다.
또 혜현은 평생 동안 『법화경』을 독송하여 많은 이적을 남겼는데, 죽은 뒤에 호랑이가 그의 시신을 모두 먹었으나 혀만은 먹지 않았고, 그 혀가 돌과 같이 굳어졌으므로 사람들이 석탑에 안장하였다고 한다. 백제의 법화신앙은 법화삼매를 주로하는 실질적인 신행(信行)이 중심을 이루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삼국시대의 신라에서는 낭지(朗智)·연광(緣光)·원효(元曉, 618∼686) 등이 법화사상의 홍포에 힘을 기울였다.
낭지는 양산영축산혁목암(赫木庵)에 살았던 고승으로서 항상 『법화경』을 강송하였으며, 이로 인한 신통력도 있었다고 한다. 일설에는 원효가 그에게서 법화사상의 가르침을 받았다고도 하나 그 자세한 내용은 전하지 않는다.
연광은 일찍이 중국으로 유학하여 천태종 지의의 문하에서 법화사상을 배우고 도를 깨우쳤으며, 귀국하는 길에 용궁으로 들어가서 『법화경』을 강설하였다고 한다. 또 신라로 돌아온 뒤에도 법화사상을 천명하였으며, 죽은 뒤에 화장을 하였으나 혀만은 타지 않고 그대로 남아 있었고, 그 혀가 가끔 『법화경』을 독송하는 소리를 내었다고 한다.
그러나 『법화경』을 신앙적인 측면보다는 사상적인 측면에서 발굴하고 연구한 것은 원효였다. 원효는 『법화종요(法華宗要)』 1권을 비롯하여 『법화경』에 관한 주석서 4권을 남겼는데, 종요만이 전한다. 원효의 『법화종요』는 『법화경』의 근본사상이 바로 일승(一乘)으로 돌아가는 데 있다는 것을 밝힌 책이다. 원효는 여기서 일승의 논리를 현실적으로 개척하여 놓았는데, 삼국통일의 이념은 여기에 뒷받침된 바가 컸다.
진리가 한낱 객관적인 개념에 그칠 수 없음을 갈파했던 원효는 이 종요에서도 종교가 하여야 할 구실을 명시하여 놓았다. 중국의 천태종에서는 오시교(五時敎)의 사상을 고집하여 이 때문에 법상종(法相宗)과의 논쟁에서 불리하게 몰려 곤란을 겪어야 했던 일까지도 있었으나 원효는 종파에 구애됨이 없이 『법화경』의 사상을 천명하여 그 참된 진수를 신라인의 의식 속에 심어갔던 것이다.
그는 종요의 제2장에서 일불승(一佛乘)이 무엇인가를 밝히면서, 하나라는 것은 크다는 뜻이요 모든 차별을 없앤다는 것이니 누구나 다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뜻이라 하고, 이어서 일불승을 능승인(能乘人)과 소승법(所乘法)과의 두 항목으로 나누어 차례로 설명하였다. 능승인은 일불승을 능히 나타낼 수 있는 사람을 가리키는 것으로, 보살 등의 특수한 수행지위에 올라가 있는 이를 대상으로 한정짓는 것이 아니라 성불의 가능성을 지닌 모든 중생을 능승인이자 일불승인이라고 보았다.
또 소승법에서는 일승리(一乘理)·일승교(一乘敎)·일승인(一乘因)·일승과(一乘果) 등의 네 가지로 나누어서 일불승의 경지를 구조적으로 논술하였고, 일체 중생이 다같이 성불할 수 있는 것이 어떤 교설과 원리에 의한 것인가를 따져 놓았다.
그리하여 일승리의 대목에서는 부처나 범부나 모두가 평등하고 다를 바 없다고 할 수 있는 원리가 어디에 있는가를 밝혔고, 일승인에서는 불상을 예배하거나 흩어진 마음으로나마 염불을 단 한 번만 하였어도 그것은 장차 부처가 될 길을 닦는 일이 되는 것이라고 강조하기도 하였다.
원효가 일승법을 이·교·인·과의 넷으로 설명한 것은 중국의 법운(法雲)이 교(敎)·이(理)·기(機)·인(人)으로 설명한 것이나, 지의가 교(敎)·행(行)·인(人)·이(理) 등의 넷을 내세운 것보다 논리가 정연한 바가 있고, 『법화경』에 대한 그의 독창적이고도 명석한 이해를 엿보게 해 주는 것이다.
종요의 제3장은 『법화경』이 나타내고자 하는 목적이 무엇인가를 밝힌 부분인데, 이곳에서 원효는 해답으로서 개시(開示)라는 말을 썼다. 개(開)라고 함은 편의상 보살승(菩薩乘)·연각승(緣覺乘)·성문승(聲聞乘) 등 삼승의 문을 각기 열어 젖힌다는 뜻이요, 시(示)라고 함은 삼승의 문을 열어 젖힘으로써 일불승의 참뜻을 나타내 보이게 한다는 뜻이다.
결국 일시적인 삼승이 참되고 영원한 일불승 안으로 담겨지는 것으로서 이것을 회삼귀일(會三歸一)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은 회삼귀일사상은 신라·백제·고구려의 삼국이 하나의 그릇인 불국토(佛國土) 신라로 크게 통합되는, 또 통합된 역사적 현실에 그 필연성과 당위성을 제공하여 주는 철학으로 이해되었다.
(2) 통일신라시대
통일신라시대는 『법화경』에 대한 연구가 활발하였던 시기였다. 원효의 뒤를 이어서 경흥(憬興)은 『법화경소』 16권을 남겼고, 순경(順璟)은 『법화경요간(法華經要簡)』 1권을, 현일(玄一)은 『법화경소』 8권을, 의적(義寂)은 『법화경논술기(法華經論述記)』 3권 등 4종의 저술을 남겼으며, 도륜(道倫)은 『법화경소』 3권, 태현(太賢)은 『법화경고적기』 4권을 남겼다.
또한 혜공왕 때의 법융은 중국 천태종의 종풍을 이어받고 귀국하여 그의 법화사상을 이응(理應)과 순영(純英)에게 전함으로써 천태종의 성격을 띤 법화사상이 한때 크게 일어나기도 하였다. 원성왕 때의 고승 연회(緣會)는 일찍이 영축산에 은거하면서 항상 『법화경』을 독송하고 보현관행(普賢觀行)을 닦았으며, 통도사에서 법화경을 강설하여 그 이름을 떨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이 면면히 이어져 온 법화사상은 능긍(能兢)에 의해서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도 전파되었고, 왕건은 후삼국통일의 기초를 법화의 회삼귀일사상에 두게 되었다.
법화사상은 조형적으로는 이불병좌사상(二佛並坐思想)으로 전개되었다. 통일을 전후해서 신라에서는 대부분의 사찰 경내 동서쪽에 각각 나란히 탑을 세우게 된다. 이는 경내의 건물 배치에 있어서 그 기능을 이루어 놓으려는 데에도 목적이 있었겠지만, 그보다도 두 부처를 나란히 함께 숭배하려는 데에 그 근본정신이 있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경덕왕 때 세워진 불국사의 석가탑과 다보탑으로서, 석가모니불과 다보여래(多寶如來)를 동시에 숭배하는 신앙을 나타낸 것이다. 이 두 탑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할 때 땅 밑으로부터 커다란 다보탑이 솟아 올라와 그 안에 앉아 있던 다보여래가 석가모니의 설법이 추호도 진리에 어긋남이 없음을 증명하고 찬양하면서 자기 자리의 반을 비켜주어 나란히 옆에 앉게 하였다고 하는 견보탑품의 기술내용을 상징한 것이다.
(3) 고려시대
고려 초기에는 태조의 불교정책에 의해 모든 불교사상이 골고루 연구되었고, 특별히 법화사상을 천명한 고승은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신라 때 성행했던 법화사상은 면면히 그 명맥을 이어왔고, 광종 때에는 중국 천태종의 중흥을 위해서 체관(諦觀)과 의통(義通)이 중국으로 건너가서 법화사상을 역수출하기도 하였다. 1097년(숙종 2)에는 의천(義天)이 화엄종과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유능한 승려들을 모아 교관겸수(敎觀兼修)를 목표로 하는 천태종을 창종하였다.
그러나 의천의 천태종은 『법화경』을 중요시하기는 하였으나 『법화경』·『기신론』·『유식론(唯識論)』까지를 포괄하는 종파로서 창립한 것이었다. 따라서 의천의 천태종은 법화사상의 선양을 위한 종파라기보다는 전체 불교에 대한 종합적인 교리비판과 불교계의 현황에 대한 일대개혁을 바라고 창종하였다는 특색이 있다.
오히려 법화사상의 선양에 주력한 것은 1211년(희종 7)에 요세(了世)가 시작한 강진 만덕산 백련사(白蓮社)의 결사(結社)에서 찾을 수 있다. 요세는 12세의 어린 나이로 천태교관(天台敎觀)을 배우고, 23세에 승선(僧選)에 급제하여 천태종의 종지를 펼 것을 원하였다. 그로부터 36세가 되는 해에 지눌(知訥)로부터 수선(修禪)을 권하는 게(偈)를 받고 지눌의 가르침을 따랐으나 끝내 천태종풍을 버리지 못하고 자신의 길을 택하여 수련하였다.
특히 그는 참의(懺儀)를 닦음에 있어 육신이 허락하는 한 하루에도 53불에게 예배하기를 12번씩 하였으며, 남해산(南海山) 기슭에 80여 칸에 달하는 보현도량(普賢道場)을 짓고 지의가 지은 『법화삼매참의』에 따라서 왕생정토(往生淨土)를 구하는 법화삼매를 닦았다. 그가 손수 길러낸 제자는 38인, 재가인으로서 백련사에 입사(入社)한 이는 300여 인에 달하였다고 한다. 50년 동안 매일 『법화경』 1부와 아미타불 명호 1만 번을 외우는 등 그를 통한 법화사상의 현양은 다양하게 이루어졌다.
이 만덕산백련사는 요세의 뒤를 이어, 제2세 천인(天因), 제3세 원환(圓晥), 제4세 천책(天頙), 제5세 이안(而安), 제6세 원혜(圓慧), 제7세 무외(無畏), 제8세 혼기(混其) 등이 차례로 대를 이어 나갔다.
지방을 중심으로 한 백련사와는 달리 고려 말에는 개경을 중심으로 한 법화사상의 선양 도량들이 생겨났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충렬왕의 원찰(願刹)이었던 묘련사(妙蓮寺)로서 1284년(충렬왕 10)에 왕은 경축법회를 열어 원혜국사(圓慧國師)로 하여금 주관하게 하였고, 그 뒤에는 백련사의 제7세 무외가 묘련사의 제3세가 되었는데, 이로써 묘련사는 백련사의 별원(別院) 구실을 하게 되었다.
또 무외는 1315년(충숙왕 2)에 국청사(國淸寺)에서 천태종 산하의 승려 3,000여 명을 모아 3일 동안 낙성법회를 겸한 법화예참을 주관하여 법화사상을 크게 선양하였다. 이와 같이 왕실의 도움을 받아 법화신앙이 크게 일어남에 따라 개경에서만 해도 여러 곳에서 법화결사(法華結社)가 이루어져 갔으며, 보암사(寶岩社)와 연화원(蓮華院)은 대표적인 모임이 되었다.
보암사에서는 60세를 넘은 40여 명의 퇴관 노인들이 매월 8·14·15·23·29·30일의 육재일(六齋日)마다 모여서 『법화경』을 서로 돌아가며 읽고 토론하는 한편, 15일의 재일에는 밤을 새워가며 극락왕생을 위한 염불을 하였다. 연화원에서도 매월 육재일에 같은 모임이 있었는데, 여기서는 노소의 구별없이 개경 남쪽의 주민들이 모였다.
또 수원에는 법화도량의 중심사찰로서 만의사(萬義寺)가 있었다. 1248년(고종 35)에 창건한 이 절은 1312년(충선왕 4)에 백련사 제8세 혼기가 와서 머물게 됨으로써 법화도량으로 부각되었다. 혼기의 뒤를 이은 의선(義璇)은 이 절을 법화사상 선양의 중심도량으로 기반을 굳히게 하였다.
또 충혜왕 때의 묘혜(妙慧)는 이 절의 주지로 있으면서 요원(了圓)이 엮은 『법화영험전(法華靈驗傳)』의 간행비용을 모두 부담하였다. 이 『법화영험전』의 간행은 당시의 고려사회에서 특히 일반 사회인들이 『법화경』에 설하여진 가르침을 믿고 받드는 한편, 법화예찬의 실천과 관세음보살의 칭명을 통해서 얼마나 진지하게 생활화하려고 하였던 것인가를 말하는 것이며, 법화사상의 토착화에 대한 또 다른 일면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4) 조선시대
조선시대에는 불교의 억압정책으로 법화사상뿐만 아니라 불교의 모든 사상이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특히 종파의 통폐합으로 천태종의 명맥은 사라지게 되었고, 『법화경』과 천태사상에 관한 연구서도 김시습(金時習)의 『연경별찬(蓮經別讚)』과 김대현(金大鉉)의 『선학입문(禪學入門)』만이 저술되었다. 그러나 김시습의 『연경별찬』은 선(禪)의 입장에서 법화사상을 흡수하여 천태의 독자성을 인정하지 않았다.
조선시대에는 사상적인 측면에서보다 신앙적인 측면에서 『법화경』의 간행이 특히 많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법화경』의 사경(寫經)이나 유통이 죽은 이의 명복을 비는 데 큰 힘이 있다고 믿었던 당시의 사람들은 다투어서 이 경을 간행하였고, 세조의 경우에는 간경도감(刊經都監)에 명하여 『능엄경』 다음으로 이 경의 언해본을 출간하였다.
이와 같은 신앙적 측면은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전승되고 있다. 이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삼아서 연구하고 신행하는 현대의 불교종파로는 대한불교천태종·대한불교일승종·대한불교법화종·한국불교법화종·한국SGI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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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7년)
이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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