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속도 중 새참
풍속도 중 새참
식생활
개념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내용 요약

술은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이다. 과일이나 곡류를 발효·증류하여 만든다. 주세법상 알코올 함량 1도 이상의 음료이다. 우리나라의 전통 술은 크게 탁주, 청주, 소주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탁주, 청주는 발효상태의 술이고 소주는 여기에 증류과정을 거쳐서 도수를 높인 술이다. 술은 모든 의례와 세시풍속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며 탁주는 농주(農酒)라 부를 정도로 힘든 노동과 함께 하기도 했다. 하지만 약도 되고 독도 되는 술이 가진 양면성 때문에 취하되 실례하지 않기 위한 고유의 음주 예절이 등장하기도 했다.

정의
알코올 성분이 들어 있어 마시면 사람을 취하게 하는 음료.
개설

「주세법(酒稅法)」에 의하면 알코올 함량 1도 이상의 음료를 말한다. 예로부터 알려진 과실주나 곡물주를 비롯, 근대의 증류주에 이르기까지 이른바 주정음료는 모두 술이다. 술은 일부 민족을 제외한 거의 모든 민족이 지니고 있으며 그 용도도 다양하여 굿이나 관혼상제와 같은 의례적 행사에서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의 여러 경우에 두루 쓰이고 있다. 술에 대한 우리의 관념은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 견해와 부정적으로 보는 견해가 공존하여왔다. 술은 사람에게 유익한 것으로 생각되어 ‘백약지장(百藥之長)’이라 불리는 반면에 부정적인 면에서 ‘광약(狂藥)’이라고도 불렸다.

술을 마시니 근력이 생기고 묵은 병이 낫는다고 하여 음주를 권장함은 옛 기록에서 흔히 보는 예이다. 『성호사설(星湖僿說)』에 주재(酒材)의 노인을 봉양하고 제사를 받드는 데에 술 이상 좋은 것이 없다고 하는 내용이나, 『청장관전서(靑莊館全書)』에 이목구심서(耳目口心書)의 기혈(氣血)을 순환시키고 정을 펴며 예(禮)를 행하는 데에 필요한 것이라 하는 내용은 모두 술을 인간생활에 필요한 것으로 보는 긍정적인 견해이다. 도소주(屠蘇酒: 설날 아침에 차례를 마치고 마시는 찬술로, 나쁜 기운을 물리친다고 한다.)를 들고, 이명주(耳明酒)를 마시며 또 어른께 만수무강을 빌며 술로 헌수(獻壽)하는 것도 모두 건강과 장수를 바라던 뜻에서 비롯된 것이다.

술을 부정적으로 보는 이유는 술이 사람을 취하게 하여 정신을 흐리게 하기 때문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주정이 심하여 몸을 해치고 가산을 탕진하기도 하고, 임금으로서 주색에 빠져 나라를 망치는 일도 있었기 때문에 ‘망신주(亡身酒)’ 또는 ‘망국주(亡國酒)’라는 말이 생기기도 하였다.

우리나라 전통적인 술은 크게 탁주 · 청주 · 소주의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탁주는 예로부터 주로 농군들이 마시던 술이라 하여 ‘농주(農酒)’라고도 하고, 즉석에서 걸러 마신다 하여 ‘ 막걸리’, 그 빛깔이 희다고 하여 ‘백주(白酒)’라고도 한다. 청주는 탁주에 비하여 더 정성을 들여 빚은 고급술로 ‘ 약주(藥酒)’라고도 한다. 소주는 고려 이후 우리나라에 널리 보급된 술로 재래주 가운데 가장 독한 술이다. 그밖에 이양주(異釀酒)나 향양주(香釀酒) 등의 갖가지 특별한 술이 있었다. 근대 이후로는 맥주나 양주 등도 들어와 술의 종류는 더욱 다양하여졌다.

술 제조의 역사

인류가 사냥과 채집으로 생활하고 있던 구석기시대에도 과실주는 있었을 것이다. 과실은 조금이라도 상처가 나면 과즙이 스며 나오고 과실 껍질에 붙어 있는 천연효모(天然酵母)가 쉽게 번식하여 술이 된다. 보름달 아래 원숭이들이 바위나 나무둥지의 오목한 곳에 잘 익은 산포도를 넣어두고 그 위에서 뛰놀다가 다음 달 보름날에 다시 찾아와서 술을 마시며 논다는 전설이 여러 나라에 있다. 이것으로 미루어 선사시대에 술을 빚던 방식을 짐작해볼 수 있다. 벌꿀을 물에 풀어서 놓아두면 어느 새 천연효모에 의하여 술이 되고 만다. 이러한 현상이 우연히 발견되어 벌꿀술도 등장하였을 것이다. 젖에서도 같은 이치로 젖술[乳酒]이 만들어진다. 이와 같은 우연한 기회에서 만들어진 과실주나 벌꿀술 · 젖술이 인간에 널리 쓰였다. 그러나 인구가 늘어나고 술의 수요가 늘어남에 따라 그 양이 부족해져서 술의 원료를 다른 곳에서 찾아야만 하게 되었다.

농경문화의 발달에 따라 곡물 생산량이 늘어나자 곡물로 술을 빚는 방법을 개발하게 되었다. 곡물로 술을 만들려면 우선 곡물의 녹말을 당분으로 바꾸고, 이것을 다시 알코올로 분해하는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야 한다. 첫 단계인 녹말을 당분으로 바꾸는 반응은 처음에는 사람의 침에 의하여 행하여졌다. 침 속에는 전분분해효소(澱粉分解酵素)인 프티알린이 있어 곡물을 입 속에 넣고 씹으면 녹말이 당분으로 분해된다.

조선시대 때, 유구(琉球)에 표류되었다 돌아온 제주도 사람이 유구의 풍속을 말하면서 “그곳에는 탁주가 없고 청주가 있다. 쌀을 물에 담갔다가 여자로 하여금 입에 넣고 씹게 하여 나무통에 뱉어내어 술을 만든다.”고 하였다. 세조 때에 우리나라에 온 유구의 사신 보수고(普須古)는 이 술을 ‘일일주(一日酒)’라 하였고 『지봉유설(芝峯類說)』에서 미인이 씹어 빚는다는 뜻에서 ‘미인주(美人酒)’라 하였다. 오늘날 이 미인주는 주로 열대지방에서 만들어졌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위나라의 역사책인 『위서(魏書)』에서는 “물길국(勿吉國: 숙신 · 읍루)에서는 곡물을 씹어서 술을 빚는데 이것을 마시면 능히 취한다.”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고대 우리나라에서도 미인주와 유사한 술이 있었다고 짐작된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술

고구려의 주몽신화(朱蒙神話)에서는 유화(柳花)가 술에 만취된 상태에서 해모수(解慕漱)와 잠자리를 같이 하여 주몽을 낳았다고 한다. 그리고 부족국가시대에 영고 · 무천 · 동맹 등과 같은 제천의식 때에 춤추고 노래하며 술을 마시고 즐겼다고 하니, 이때에 술을 빚은 것은 확실하지만 그 술의 종류와 성격은 알 길이 없다. 『삼국사기』 고구려 대무신왕 11년조에 ‘지주(旨酒)’라는 말이 나오고 『위지(魏志)』 「동이전」에서는 “고구려 사람은 발효식품을 잘 만든다.”고 하였으며, 중국의 유명한 곡아주(曲阿酒)의 전설에도 고구려 여인의 사연이 얽혀 있어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으나 중국과 비슷한 수준의 술빚기가 발달되어 있었던 것만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또한 당나라의 시인이 “한 잔 신라주의 기운, 새벽 바람에 쉽게 사라질 것이 두렵구나.”라고 읊고 있는 것으로 미루어 당시 우리나라 술의 명성이 중국에까지 알려져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백제 사람 수수보리는 일본 왕 오진(應神) 때에 술 빚는 방법을 일본에 전하였다고 한다. 이때 일본의 왕은 “수수보리가 빚어준 술에 내가 취했네. 마음을 달래주는 술, 웃음을 주는 술에 내가 취했네.”라고 노래하였다. 당시 일본문헌인 『연희식(延喜式)』(901∼922)에 실린 “술 여덟 말을 빚는 데 쌀 한 섬, 누룩 너 말, 물 아홉 말을 쓴다.”고 한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수수보리가 전한 술도 누룩을 이용한 술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일본의 「쇼소원문서(正倉院文書)」에 청주 · 탁주 · 술지게미 · 예주(禮酒: 감주와 비슷한 술) 등이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미루어 삼국시대의 우리나라에도 이러한 종류의 술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우리의 문헌만으로는 당시의 술 빚는 자세한 방법을 알아낼 수 없다. 그러나 산둥반도를 무대로 하여 엮어진 『제민요술(齊民要術)』에는 매우 자세한 술 빚기의 방법이 설명되어 있다. 당시의 술 수준으로 미루어 볼 때에 이 책에 실린 술 빚는 방법이 바로 우리의 술 빚는 방법과 같을 것이라고 판단하여도 좋을 것 같다. 누룩의 형태는 떡누룩 · 막누룩으로 불리는 병국(餠麴)과 낱알누룩인 산국(散麴)이 있었다. 이들은 주로 밀로 만들어지고 있다. 병국은 밀을 볶거나 찌거나, 날것 그대로를 섞는데, 그 방법과 섞는 비율에 따라 종류가 달라진다. 병국이 산국보다 많이 쓰인다. 이것을 물에 침지(沈漬)하여 이른바 ‘주모(酒母)’를 만든다. 술의 원료는 기장을 많이 쓰고 있다. 원료처리방법은 지에밥 5, 두번 찐 밥 3, 죽 1, 설익은 밥 1의 비율을 이룬다.

제조법은 곡물과 누룩을 섞어서 단번에 발효, 숙성시키는 일이 많다. 이렇게 만든 술은 알코올농도가 높지 않다. 알코올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일단 속성시킨 ‘술밑[醅, 醪]’을 걸러서 이를 물 대신 이용하여 다시 곡물과 누룩을 넣어 계속 발효시킨다. 그러나 원료가 쌀인 경우에는 술밑을 거르는 동안에 산화되어 시어질 염려가 있다. 이때는 거르지 않고 그냥 술밑에 누룩과 쌀을 여러 차례 넣어준다. 곧 덧술한다. 그리하여 발효가 끝나면 단번에 여과해 버리는데 이것이 이른바 『제민요술』의 청주이다. 『제민요술』에는 누룩 · 물 · 곡물의 셋을 같은 비율로 섞어 술을 빚는다고 하였다. 이것이 일정한 규정에 따라 빚은 좋은 청주이다. 이른바 ‘ 법주(法酒)’이다. 식물약재를 쓰는 특이한 청주, 산국을 쓰는 청주들에 대한 설명도 있다. 이러한 『제민요술』의 술빚기가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우리나라에도 있었으며 이것이 일본에도 전하여졌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술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는 “고려에는 찹쌀이 없기에 멥쌀로 술을 빚는다.”, “고려의 술은 맛이 독하여 쉽게 취하고 빨리 깬다.”, “서민들은 맛이 박하고 빛깔이 짙은 술을 마신다.”, “잔치 때 마시는 술은 맛이 달고 빛깔이 짙으며 사람이 마셔도 별로 취하지 않는다.” 등으로 고려의 술을 평하고 있다. 이 내용으로 미루어보면 고려에는 청주 · 탁주 · 예주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동국이상국집』의 시에 “발효된 술밑을 압착하여 맑은 청주를 얻는다.”고 하였으니 『제민요술』처럼 압착한 청주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김극기(金克己)는 “들합에는 탁주 채워 있네."라 하였고, 이규보(李奎報)의 시에는 “나그네 창자를 박주(薄酒)로 푼다.”고 하였으며, 또 이규보 자신도 가난한 때에는 백주를 마셨다고 하였음을 볼 때에 탁주를 ‘백주’ 또는 ‘박주’라 하면서 서민들이 마셨음을 알 수 있다. 궁중에서는 양온서(良醞署)라는 부서를 두고 왕이 마시는 청주와 법주를 빚어 질항아리에 넣어 명주로 봉해서 저장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소주가 들어오게 되었다.

소주를 타이나 인도네시아 · 서인도에서는 ‘아라크’, 원나라에서는 ‘아라길주’, 만주어로는 ‘알키’, 우리나라 개성에서는 ‘아락주’라 한다. 음의 유사함 볼 때에 그 전파경로가 짐작된다. 고려를 지배한 원나라는 일본을 정벌할 계획 아래 개성과 경상북도 안동에 병참기지를 만들었고, 이 지역은 소주의 명산지가 되었다. 김진(金縝)은 일본의 해안도둑을 막기 위하여 경상도에 와 있었는데 소주를 몹시 좋아하여 그 무리를 ‘소주도(燒酒徒)’라 불렀다고 한다. 이리하여 소주가 우리나라에 널리 퍼지게 된 것이다. 일본에는 1404년(태종 4)에 비로소 전해졌다고 한다.

고려에는 특수주로서 포도주가 있었다. 고려시대의 시 속에 포도주가 나온다. 요즈음 포도주는 포도즙을 효모로 발효시켜서 만들지만, 당시의 포도주는 누룩 · 밥 · 포도즙으로 빚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이것은 끝내 이 땅의 전통주로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또 『근재집(謹齋集)』에는 정월 초하루 밤에 ‘도소주(屠蘇酒)’를 마시고 읊은 시가 나온다. 이 ‘도소주’는 후한의 화타(華陀)가 만들었다고도 하고 당나라 때 손사막(孫思邈)이 만들었다고 한다. 약재를 청주에 넣어 두어 번 끓인 것이다. 그리고 송나라의 ‘계향어주(桂香御酒)’를 이자겸(李資謙)이 소개하였고, 양이나 말의 젖으로 만든 젖술이 몽고에서 들어오고 있다.

고려의 문학작품 속에도 멋이 있는 많은 술 이름이 나타난다. 『한림별곡』황금주(黃金酒) · 백자주(柏子酒) · 송주(松酒) · 예주(禮酒) · 죽엽주(竹葉酒) · 이화주(梨花酒) · 오가피주(五加皮酒)가 나오고, 이규보의 시 속에는 이화주(梨花酒) · 자주(煮酒) · 화주(花酒) · 초화주(椒花酒) · 파파주(波把酒) · 백주(白酒) · 방문주(方文酒) · 춘주(春酒) · 천일주(千日酒) · 천금주(千金酒) · 녹파주(綠波酒) · 동동주 등이 나온다. 그 밖의 시나 글에 녹주(綠酒) · 청주(淸酒) · 국화주(菊花酒) · 부의주(浮蟻酒) · 창포주(菖蒲酒) · 유하주(流霞酒) · 구하주(九霞酒) · 탁주(濁酒) 등의 이름이 나온다.

고려시대의 문헌에는 이들 술의 제조법을 설명한 것이 없으나, 그 이름만은 우리 고유의 것이 대부분이며 멋이 있어서 이름만으로도 구미를 당긴다. 고려의 술은 대부분 조선시대에 이어지고, 조선시대의 문헌 속에 이들을 만드는 구체적인 방법이 나오게 된다.

조선시대의 술

조선시대에는 술의 제조법을 기록한 문헌이 많이 남아 있어서 술빚기에 관하여 문헌상으로 체계를 세울 수 있다.

누룩

좋은 술을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좋은 누룩부터 만들어야 한다. 조선 초기의 『사시찬요초(四時纂要抄)』에서는 보리 · 밀가루를 녹두즙과 여뀌와 더불어 반죽하여 잘 밟아서 ‘막누룩(떡누룩)’을 만들고 있다. 1680년(숙종 6)경의 『음식지미방』에서는 밀기울을 반죽하여 꼭꼭 밟아서 만든다 하였으니 이른바 막걸리용의 거친 ‘막누룩’이다. 어디까지 단단하게 밟아야 좋은 막누룩을 만들 수 있느냐에 대해서는 고사가 여럿 남아 있다. 1766년(영조 42)의 『증보산림경제』에는 술빚는 방법이 집대성되어 있는데, 여기서는 우선 누룩을 디디는 데 좋은 날을 택하고 있다.

누룩의 재료는 밀과 쌀이 주가 되고 녹두가 다음이며 보리는 드물다. 밀은 잘게 쪼갠 알갱이를 쓰고, 쌀은 곱게 가루내어 이용하고, 쌀알갱이에 밀가루를 부착시킨 것도 있다. 재료 처리는 가볍게 찐 것도 있지만 거의 전부가 날 것을 쓰고 있다. 누룩의 형태는 대부분 떡처럼 생긴 ‘막누룩’이지만(약 90%), 일부는 쌀알갱이를 그대로 쓰는 ‘낱알누룩’(약 10%)도 있다. 쌀누룩 · 낱알누룩은 우리 전통의 것이 아니고 일본의 것이라고 착각하기 쉽지만 조선시대에는 이런 누룩들도 다채롭게 쓰이고 있었다. 1823년(순조 23)의 『임원경제지』에는 여러 종류의 중국 누룩이 소개되어 있지만 우리나라에서 뿌리를 내리지는 못하였다.

술의 종류 및 제조법

조선시대의 술은 우선 발효주와 증류주로 크게 나누어진다. 발효주와 증류주의 두 가지를 혼용한 술, 약재나 꽃향기 · 색소 · 감미료 등을 첨가한 재제주(再製酒), 특수한 방법으로 만든 술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증보산림경제』에 기록된 순발효주로는 백하주(白霞酒, 방문주) · 삼해주(三亥酒) · 연엽주(蓮葉酒) · 소국주(小麴酒) · 약산춘주(藥山春酒) · 경면녹파주(鏡面綠波酒) · 벽향주(碧香酒) · 부의주(浮蟻酒) · 일일주(一日酒) · 삼일주(三日酒) · 칠일주(七日酒) · 잡곡주(雜穀酒) · 하향주(荷香酒) · 이화주 · 청감주(淸甘酒) · 감주(甘酒) · 하엽주(荷葉酒) · 추모주(秋牟酒) · 죽통주(竹筒酒) · 두강주(杜康酒) 등이 있다.,

꽃 · 열매 · 약재 등을 넣고 함께 발효시키는 것으로는 도화주(桃花酒) · 지주(地酒) · 포도주(葡萄酒) · 백자주 · 호도주(胡桃酒) · 와송주(臥松酒) · 백화주(百花酒) · 구기주(枸杞酒) · 오가피주 · 감국주(甘菊酒) · 석창포주(石菖葡酒) 등이 있다. 순발효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내는 것으로는 소자주(蘇子酒) · 지약주(漬藥酒) · 감국주 · 구기주 · 복령주(茯苓酒) 등이 있다.

조선시대의 순발효주 제조법을 『증보산림경제』를 통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덧술을 하지 않고 그대로 발효시키는 단양법(單釀法)이 순발효주 전체의 45%이며(주모를 쓰는 경우와 쓰지 않는 경우 모두 포함), 덧술을 한 번 하는 이양법(二釀法)이 43%, 두 번 덧술 하는 삼양법이 12%이다. 원료 곡물은 멥쌀과 찹쌀의 비율이 6 : 4이고, 잡곡(조 · 기장 · 보리 등)은 거의 무시될 정도이다. 재료 곡물의 처리 방법은 밥 또는 지에밥 5, 범벅 모양 3, 구멍떡과 같은 떡의 형태 1, 쪄낸 가루 1의 비율이다. 중국에는 지에밥 모양의 것이 가장 많고, 범벅 모양은 매우 적고, 떡의 형태는 아예 없다. 일본은 밥 모양뿐이고 그 밖의 것은 없다. 범벅 모양의 것이 많고 떡 모양이 있는 것이 우리나라 곡물 처리법의 특징이다.

주모만들기는 “백미 한말을 깨끗이 씻어서 물에 담그되 겨울은 10일, 봄 · 가을은 5일, 여름은 3일을 기다려 쌀 속에 물이 스며들어 불으면 꺼내어 충분히 쪄서, 여기에 누룩을 조금 넣어 손으로 잘 주물러 항아리에 넣고, 단단히 마개를 하여 겨울에는 따뜻한 곳에, 여름에는 서늘한 곳에 두고 익기를 기다려 술 빚는 데 쓴다. 그 맛이 약간 시고 떫으며 매끄러운 것이 좋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것은 젖산을 발효시키면서 효모를 증식시킨 것으로, 신맛을 가하면 발효과정에서 유해세균을 방지하는 효과를 거둘 수 있다. 요즈음도 주모를 만들 때 젖산을 일부러 넣고 있다.

단양 또는 이양의 순발효주의 술밑에 용수를 박아서 그 속에 괸 술을 퍼낸 것이 ‘청주’이다. 이것을 조선시대부터는 ‘약주’라 이르게 되었다. 약재가 들어가지 않으면서 왜 약주인가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그 중에서 서성(徐渻)의 집에서 만든 청주가 매우 좋았고, 서성의 호가 약봉(藥峰)이며, 그가 살고 있던 곳이 약현(藥峴)이어서 청주를 약주라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백하주 · 향온주(香醞酒) · 소국주 · 경면녹파주 · 벽향주 · 청명주 · 석탄주(惜呑酒) 등이 약주에 속한다. 섬세한 방법으로 여러 번 덧술한 청주 이름에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는 ‘춘(春)’자를 붙였으므로 우리도 그에 따라 ‘춘’을 붙였다. 호산춘(壺山春) · 약산춘(藥山春) 등이 이에 속한다. 비록 ‘춘’자가 붙지는 않아도 그런 무리의 술로서 삼해주(三亥酒) · 백일주(百日酒) · 사마주(四馬酒) · 법주(法酒) 등이 있었다.

탁주는 그 말의 개념이 매우 애매하다. 일반적으로 맑은 약주에 비하여 흐린 술을 통틀어 말한다. 쌀누룩이나 가루누룩을 써서 발효시킨 뻑뻑한 술밑까지 먹는 것이 순탁주이다. 이화주 · 사절주(四節酒) · 혼돈주(混沌酒) 등이 있다. 일본의 순탁주인 백주(白酒)는 밥알 그대로 발효시킨 것을 갈아서 제품으로 삼는데 젖 같이 희고 맛이 달다. 또 청주 찌꺼기에 물을 부어가면서 손으로 주물러 짜낸 뿌연 술도 탁주이다. 제주도로 유배된 인목대비(仁穆大妃)의 어머니가 만든 모주(母酒)가 그것이다.

술을 빚는 데 쓰는 연모나 방법이 일반 발효와 다른 특이한 것을 이양주(異釀酒)라 한다. 여기에는 와송주 · 죽통주 · 지주 · 동양주(冬陽酒) · 청서주(淸署酒) · 봉래춘(蓬來春) 등이 있다. 약주에 향기를 주기 위하여 복숭아꽃 · 송화 · 송순 · 연잎 · 매화 · 동백 · 두견화 등을 이용하는 가향주(加香酒)로는 도화주 · 송화주 · 송순주(松筍酒) · 하엽청(荷葉淸) · 연엽양 · 화향입주방(花香入酒方) · 두견주(杜鵑酒) 등이 있다. 약주를 빚을 때 약재를 미리 넣거나 만들어진 약주에 약재의 성분을 우려내는 재제주로는 자주(煮酒) · 구기주 · 오가피주 · 도소주 · 밀주(蜜酒) · 송절주 · 거승주(巨勝酒) · 벽력주(霹靂酒) · 호골주(虎骨酒) · 무술주(戊戌酒) · 양고주(羊羔酒) · 서여주(薯蕷酒) · 창포주 등 많은 종류가 있다.

소주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더욱 발전하였다. ‘는지’로 만들던 소주도 흙으로 된 고리와 구리로 된 고리를 이용하여 만들게 되었다. 서울 공덕리 같은 데서는 대량의 소주를 만들었으며, 고려 때부터 유명하였던 안동소주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고급약주인 삼해주의 술밑을 증류하여 얻은 소주도 나오게 되었다. 그리고 과하주(過夏酒) · 송순주와 같은 소주와 약주의 중간형인 술도 있었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의 술은 누룩이나 빚는 방법이 지방에 따라, 가정에 따라 달라서 자랑할만한 술이 매우 많았다.

술 제조기구

술을 만드는 데 쓰이던 기구는 다음과 같다.

맷돌: 밀이나 쌀 등 곡물을 갈아 누룩을 만들고 술을 빚는 재료인 곡물을 가는 데 필요하였다.

② 누룩고리: 누룩을 만드는 데 쓰이는 나무로 된 틀로, 모난 것과 둥근 것이 있다. 모난 것은 나무판으로 ‘정(井)’자 모양으로 만들고, 둥근 것은 작은 쳇바퀴를 가는 새끼로 안팎을 촘촘히 감아서 사용하였다. 누룩고리에 베헝겊을 깔아놓고 누룩재료인 밀가루나 밀기울을 반죽하여 여기에 가득 채운 뒤에 베헝겊을 덮어 씌우고 발로 밟아서 누룩을 만든다.

③ 술독: 크기가 한 말들이에서 한 섬들이까지 가지가지이다. 다같이 높은 온도에서 구워낸 것이라야 한다. 독 안에 푸른 솔가지를 꺾어 넣고 솥에 거꾸로 엎어두고 쪄서 식힌 다음 사용한다. 독 밑에는 두꺼운 나무판자를 깔고, 술을 빚어 넣은 뒤에는 이불 같은 것으로 둘둘 말아서 싼다. 겨울에는 짚으로 독을 감싸고 엮어서 옷을 입힌다.

용수: 약주를 거르는 데 쓰는 기구로서 대를 가늘게 쪼갠 줄기나 버들가지 · 싸리 · 칡넝쿨 등으로 엮어서 폭이 좁고 운두는 깊게 원통형으로 만든다. 보통 잘 익은 술독에 용수를 박아두면 그 안에 자연히 술이 배어들게 된다. 하루가 지난 뒤에 이 용수에서 술을 떠내면 된다.

⑤ 술자루: 마포로 크게 만들어 술밥과 누룩을 버무려 담고 입구를 잘 묶은 다음 술독에 넣어 물을 알맞게 잡는다. 그리고 깨끗한 돌로 눌러두었다가 술이 잘 익은 뒤에 맑은 술을 떠낸다. 자루 속에 남아 있는 재강으로는 막걸리를 만든다.

⑥ 쳇다리: 주로 술을 거를 때 체를 올려놓는 기구이다. 체받이라고 한다. 두 갈래로 아귀진 자연목을 그대로 이용하거나, 사닥다리 모양으로 틀을 짜기도 한다. 이것을 통 또는 함지 같은 그릇에 걸쳐두고 그 위에 체를 얹어서 술을 거른다.

: 가루를 곱게 치거나 액체를 거를 때 쓰는 기구로서 명주실 · 말총 · 철사 등으로 엮은 것이다. 술을 거르는 방법은 체 안의 재강을 양손으로 쥐어짜는 것이 보통이나, 체에 삼베헝겊을 깔고 재강을 넣은 뒤에 이를 잘 덮고 깨끗한 돌로 눌러두어 자연히 걸러지게도 한다. 이때 체 밑에는 싸리나 판자로 만든 받침을 깔게 된다.

⑧ 소줏고리: 소주를 고는 그릇으로 구리나 오지로 만들었다. 두 짝을 위아래로 장구통과 같이 겹쳐놓은 것 같다. 위짝은 아래가 좁고 위가 넓으며, 아래짝은 아래가 넓고 위가 좁다. 중간의 짤록한 부위에 소주가 흘러나올 수 있게 귓대가 아래로 향하여 붙어 있다. 이밖에 술을 거르거나 짜내는 틀로 술주자가 있었다.

근대의 술

근대에 접어들면서 북부에는 중국의 소주가 들어오고, 1876년(고종 13) 강화도조약이 체결됨에 따라 일본에서 알코올이 수입되고, 일본의 탁주나 청주도 만들어지게 되었다. 일본의 청주는 상품명의 하나인 정종(正宗)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퍼졌다. 1900년대에 접어들면서 맥주가 수입되었다. 1909년에 「주세법」이 발표되어 일본인은 보다 효율적으로 주세를 받아들이기 위하여 술빚기에 가지가지로 통제를 하였다. 이에 따라 그토록 다채롭던 우리의 누룩이나 술은 매우 단순하게 규격화되면서 전통적인 술은 법적으로 점차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 누룩은 ‘조국(糟麴)’과 ‘분국(粉麴)’의 둘로 통제되었고, 이것마저 1927년부터는 곡자제조회사에서 만들게 되어, 우리의 술은 단순화의 길을 더욱 치닫게 되었다.

조국은 밀을 세 조각 정도로 낸 그대로를 원료로 하여 만든 누룩으로서 탁주나 소주 만들기에 쓴다. 충청도 · 경상도에서는 밀을 부수어서 얻은 가루의 20∼40%를 체에 밭쳐낸 나머지 것을 원료로 하여 만든다. 또 밀가루를 전부 걸러낸 밀기울만으로 누룩을 만들기도 한다. 한편 분국은 약주나 과하주 제조용으로서 밀가루만으로 만든 것으로 ‘백국(白麴)’이라고도 한다. 이밖에 함경북도 등지에서는 귀리 · 피 · 호밀 등을 술지게미와 섞어 누룩을 만드는 일이 있다. 거의 자가용으로 일부 쓰이지만 판매용은 전부가 밀로써 만들게 되었다. 평양 · 원산 · 서울 공덕리 등의 곡자, 남한산의 산성곡자, 경상도 유천 · 선산의 곡자, 동래의 산성곡자 등의 곡자가 유명하였다. 약주 빚기도 단순해졌다.

「주세법」에 따른 약주는 일본의 청주보다 신맛 · 단맛이 세다. 대개의 경우 주모를 만든다. 주모는 독에다 물과 가루 낸 곡자를 넣어 이른바 물곡자로 하고, 여기에 멥쌀을 가루내어 쪄서 떡 모양으로 한 것을 넣어 주모를 만들고 다시 멥쌀 · 분곡 · 물로 빚어 이것을 젓지 않고 발효시킨 다음 술밑에 용수를 박아놓는다. 용수 속에 괸 술을 ‘전주(全酒)’ 또는 ‘순주(醇酒)’라 한다. 다음에 술밑에 물을 조금 넣어 휘저은 것에 용수를 박아 술을 다시 얻는데, 이것을 ‘후주(後酒)’라 한다. 전주와 후주를 따로 저장해 두었다가 마실 때 적당히 섞는다.

탁주는 조선시대의 순탁주에는 쌀 낱알이 남아 있는 데 비하여 근대의 탁주는 쌀 낱알이 뭉개져서 뿌옇고 신맛과 냄새가 난다. 알코올은 6∼7% 정도이다. 탁주를 만드는 방법은 곳에 따라 다르다. 이것을 크게 나누면 주모를 만들어 찹쌀 · 조곡 · 물을 버무려 10일 정도 발효시키는 것, 주모를 쓰지 않고 찹쌀 · 조곡 · 물로 버무려 10일 정도 발효시키는 것, 주모를 쓰지 않고 멥쌀 · 조곡 · 물로 버무려 5∼7일 발효시키는 것, 약주 찌꺼기나 일본식 청주찌꺼기에 물을 부어서 만드는 것 등이 있다. 이들은 탁주술밑이나 술찌꺼기를 체 위에서 물을 부어 가면서 손바닥으로 문질러 짜낸다. 서울에는 ‘백주(白酒)’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탁주와 약주의 중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술독에 물 · 멥쌀가루 찐 것, 곡자가루를 섞어 떡모양으로 하고, 찹쌀지에밥을 넣어 7∼10일간 발효시켜서 그 술밑을 탁주처럼 체 위에서 손바닥으로 짜낸 것이다.

소주고리에서 고아낸 소주는 값이 비싸다. 그런데 1897년경부터 주정(알코올)을 수입하여 이것을 재래의 소주에 섞어 물로 희석하여 마시게 되었다. 그 값이 매우 싸서 수요량이 늘어났다. 그리하여 남부는 탁주, 중부는 약주, 북부는 소주를 많이 마시는 경향을 나타내게 되었다. 소주나 약주에다 다른 물질을 섞어 조미하는 혼성주(混成酒)도 「주세법」에 허용되고 있었다. 서울의 과하주를 비롯하여 송순주 · 감홍로(甘紅露) · 이강주(梨薑酒) · 오미자주 등이 있었다. 일제치하에서는 일본식 청주제조업이 크게 발달하였다. 한편 이 땅에 사탕무를 심어 당밀로 소주를 만든 기업이 실패함에 따라 고구마로 알코올을 만들게 되었다. 대만에서 값싼 알코올이 수입되자 소주는 알코올에다 재래소주를 20% 정도 섞은 것으로 바뀌게 되었다.

1938년경부터 일본의 전쟁 때문에 우리나라에도 심한 식량부족을 가져오게 되었다. 따라서 술 원료인 쌀이 통제를 받게 되었고, 1940년부터 탁주 이외의 술은 배급제가 실시되었다. 탁주만은 농주(農酒)로서 특혜를 받았고, 이에 따른 탁주의 밀주도 성행되었다. 1934년부터 일본의 삿포로맥주회사와 쇼와기린맥주회사가 서울 영등포에 맥주공장을 세워 제품을 내게 되었다 술 원료인 곡물 때문에 일본인들은 대용청주를 개발하게 되었다. 알코올에다 포도당 · 엿 · 호박산 · 젖산 · 글루탐산소다 등을 섞어 일본인 청주와 비슷하게 하여 이것을 이연주(理硏酒)라 하였다. 이러한 것이 우리나라에서도 군용으로 조금씩 만들어지고 있었다. 1940년 일본인 나가시마(長島長治)가 청주 술밑에 알코올을 첨가하여 이른바 ‘제일청주’를 만들었다. 1942년에는 여기에다 포도당 · 젖당 또는 호박산을 첨가한 이른바 ‘제이청주’를 만들어 내었다. 그래서 우리나라에서도 1942 · 1943년에 ‘제일청주’ · ‘제이청주’를 만들게 된 것이다.

현대의 양조업

광복 후 우리나라는 만성적인 식량 부족 상태에서 해마다 외국의 양곡을 도입해야 하였던 실정이었다. 따라서 쌀로 술을 빚을 형편이 못되었다. 1962년부터 소주의 원료인 알코올제조에 잡곡만을 허용하였다가 지금은 고구마와 당밀만으로 만들고 있다. 소주업자는 국세청에서 배정 받은 알코올에 물을 부어 농도를 낮추고 설탕 · 포도당 · 구연산 · 인공감미료 · 무기염류 등을 섞는다. 결국 소주는 같은 재료가 제조공장의 조미방법에 따라 맛이 달라진 것이며, 소비자는 단순한 습관이나 상표에 대한 선입관에 의하여 구매하고 있는 것이다.

쌀을 원료로 하던 막걸리와 약주도 1964년부터 쌀의 사용이 금지됨으로써 밀가루 80%, 옥수수 20% 외 도입양곡을 섞어 빚게 되었다. 좋은 탁주는 뿌연 유백색이 잘 나타나야 한다. 여기에는 당분이 완전히 발효되지 않고 걸쭉하게 남아 있다. 이것으로 탁주 특유의 감칠맛과 혀에 닿는 촉감, 목을 넘어가는 느낌을 나타낸다. 잡곡으로 만든 것은 술잔에 따라 놓으면 위는 맑아지고 밑에 앙금이 생겨서 볼품과 맛이 떨어진다. 그러므로 탁주 대신 소주를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그러다가 우리나라에도 쌀 생산량이 늘어나 쌀이 남아 돌게 되어 쌀막거리 · 쌀약주를 만들게 되었다. 그러나 옛 맛이 아니다. 옛날에는 잘 도정한 쌀에 밀곡자를 섞어 빚었으나 지금은 종국을 써서 만든 누룩을 쓰고 있으니 만드는 법부터 다르다. 맛이 옛날과 같을 수 없다. 인기가 없어 1년 만에 다시 밀가루 막걸리를 빚게 되었다.

일제시대부터 술 정책에 국가가 지나치게 관여하고 통제함으로써 우리 고유의 토속주는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정부는 전통주가 사라지게된 것에 대한 자각을 하고 전통주를 살리기 위하여 일도일민속주(一道一民俗酒)의 노력을 전개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항상 식량정책과 「주세법」과의 상충을 조화해 나가야 할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다. 전국의 민속주 가운데서 널리 알려진 대표적인 것을 들면 다음과 같다.

서울은 삼해주 · 약주 · 송절주, 경기지방은 특주 · 백세주(百歲酒) · 부의주(浮蟻酒), 강원지방은 백주(白酒) · 옥수수술, 충북 지방은 청명주(淸明酒), 충남 지방은 한산소곡주(韓山素麯酒) · 두견주(杜鵑酒)이다. 전북 지방은 이강주 · 노산춘(魯山春) · 호산춘 · 오미자술 · 송화백일주(松花百日酒) · 과하주, 전남 지방은 진도홍주(珍島紅酒) · 법성포소주(法聖浦燒酒) · 죽력고(竹瀝膏) · 계당주(桂當酒), 경상 지방은 안동소주(安東燒酒) · 김천과하주(金泉過夏酒) · 김천청명주(金泉淸明酒), 경남 지방은 오가피주 · 산성막걸리, 평안 지방은 감홍주 · 벽향주, 황해도 지방은 강홍주 · 이강주 등이 대표적인 술이다.

술에 대한 세율은 1986년에는 위스키는 과표액의 200%, 맥주와 브랜디는 150%, 청주 120%, 약주 60%, 소주 35%, 막걸리 10%이었다. 여기에서 위스키 · 브랜디 · 맥주 · 청주 등 주세율 100% 이상인 것은 주세 30%의 방위세를 납세하고, 100% 이내의 약주 · 과실주 · 소주 · 막걸리는 주세의 10%를 납세한다. 그리고 생산자 가격에 주세와 방위세를 합한 출고가격의 10%를 부가세로 납세하게 되어 있다. 거기다가 1982년도부터는 소주 · 막걸리 · 약주를 제외한 모든 술에 교육세를 주세의 10% 납세하게 되었으므로 세금 비율은 더욱 높아졌다. 1999년 12월에 세계무역기구의 권고를 이행하기 위하여 소주 · 위스키 · 브랜디 · 일반증류주 · 리큐르 등 증류주류의 세율을 일률적으로 80%로 단일화하고, 맥주의 세율을 현행 130%에서 100%로 단계적으로 인하하여, 2000년 1월 1일부터 발효주류인 탁주는 5%, 약주 · 과실주는 30%, 청주는 70%, 맥주는 100%, 증류주류는 72%, 기타주류는 72% 또는 10%, 30%로 세율을 적용하게 되었다.

최근의 우리나라 술 소비 경향을 보면 소주와 같은 독주 소비량은 계속 늘어나고 있으며, 탁주는 크게 감소하고 있다. 그리고 탁주 감소에 따라 맥주도 늘어나고 있다. 소주에 의한 독주화와 맥주에 의한 고급화를 걷고 있다. 이들의 소비추세를 술 종류별로 주세액 비율을 산출하여 보면, 1982년도에는 막걸리 3. 6%, 소주 17. 7%, 맥주 63. 6%, 청주 4.3%, 양주 6.1%, 고량주 1%, 인삼주 0.1%, 과실주 0.3%, 약주 0.7%, 기타 재제주 2.6%이었다가, 1999년에는 맥주 65.3%, 소주 17.2%, 기타 5.6%, 위스키 10.8%, 탁주 · 약주가 1.1%를 차지하고 있다.

술의 생리

술은 알맞게 마시면 잠을 부르고 피의 순환을 좋게 하며 식욕을 돋구고 스트레스나 욕구불만을 부드럽게 한다. 또 신진대사를 높여 피로를 푸는 효능이 있다. 그러나 과음하면 대뇌피질의 작용을 저하시켜서 긴장상태를 해이시키기 때문에 비정상적인 행동을 하게 될 뿐만 아니라 숙취(宿醉) 때문에 고통을 받는다. 또 과음을 계속하면 소장점막에서의 지방의 합성을 촉진하고, 고지혈증(高脂血症)을 일으키기도 한다. 또 알코올을 계속 흡수하면 간에 병을 가져온다. 그리고 술에 함유되는 알코올은 위에서 흡수되어 피 속에 들어가서 간에서 효소에 의하여 분해될 때 아세트알데히드라는 유해한 물질이 생긴다. 이것은 숙취의 원인이 된다. 이 성분은 간에서 분해된다. 그러나 알코올이 계속 흘러 들어오면 해독작용이 뒤따르지 못한다.

알코올에 취했다가 깬 뒤에도 아세트알데히드가 미처 분해되지 못할 때는 숙취를 가져온다. 숙취를 풀기 위한 이른바 해장술은 과음을 되풀이하는 결과를 가져올 뿐이다. 술에는 알코올 이외에 미량의 단백질과 당질이 있을 뿐이고 비타민은 탁주 · 맥주 이외는 아주 없다. 알코올은 당질이나 녹말과 같은 탄수화물이기에 영양가가 매우 낮다. 따라서 젓갈 · 김치 · 과자 등을 안주로 삼을 것이 아니라, 단백질이 많은 육류 · 어류 · 달갈 · 두부 및 날채소 · 과일 등 영양가가 풍부한 것을 먹어야 한다.

음주관

우리나라 사람은 생활의 예의를 중히 여기던 민족이다. 비록 취하고자 하여 마시는 술이라 하더라도 심신을 흐트러지게 하지 않고, 어른께 공경의 예를 갖추고 남에게 실례를 끼치지 않는 것이 음주의 예절이다. 음주 때의 이러한 예절이 주례(酒禮)이다. 우리는 이를 주도(酒道)로 지켜왔다. 주도는 특히 어른을 공경하는 데에 뜻이 있다. 온 고을사람들이 모여 향약(鄕約)을 읽고, 술을 마시며 잔치하는 예절로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행하던 때가 있었다. 이때 젊은이와 어른은 나이를 따져 차례를 정하고, 연장자에게 먼저 술잔을 올려 대접한다. 우리들의 주도는 어른을 받들며 순풍미속을 일으키던 이같은 향촌의 주례에서 민속례로 굳혀져왔다.

향음례를 중히 하던 정도전(鄭道傳)『삼봉집(三峯集)』 향음주조에서 “이때의 술은 즐겁게 마시되 함부로 하지 않으며, 엄히 하되 어른과 소원해지지 않는다.”고 하였다. 잔치 때에 지체 있는 어른께는 의자에 모시고 식탁 위의 음식으로 술을 대접하지만, 지체가 낮은 이에게는 좌상에 마주앉아 마시도록 하였던 것이 『고려도경』 향음조에 전하는 옛 주석에서의 예법이다. 음주의 예로서 우리들에게 비교적 널리 알려진 주법은 『소학』에 나타난다. 이에 의하면 어른이 술을 권할 때 일어서서 나아가 절을 하고 술잔을 받고 어른이 이를 만류할 때야 제자리에 돌아가 술을 마실 수 있다. 그러나 어른이 들기 전에 먼저 마셔서는 아니 되고, 또한 어른이 주는 술은 감히 사양할 수 없다는 것이다. 『소학』을 생활의 규범으로 삼던 사회에서는 이러한 의식을 더욱 중히 하였다.

술상에 임하면 또 어른께 술잔을 먼저 권해야 한다. “찬물에도 위아래가 있다.”고 하여 음주에는 장유유서(長幼有序)를 반드시 지켰다. 어른이 술잔을 주면 두 손으로 공손히 받아야 한다. 어른 앞에서 함부로 술 마시는 것을 삼가하여 윗몸을 뒤로 돌려 술잔을 가리고 마시기도 한다. 어른께 술을 권하는 데는 정중한 몸가짐을 하여 두 손으로 따라 올린다. 오른손으로 술병을 잡고, 왼손은 오른팔 밑에 대고, 옷소매 또는 옷자락이 음식에 닿지 않도록 조심하여 따른다. 도포를 입던 옛날 술병을 든 오른손의 긴 소맷자락이 음식에 묻지 않도록 왼손으로 지켜 올려 따르던 예가 양손으로 공손히 하는 주례가 된 것이다.

이덕무(李德懋)『사소절(士小節)』에서 받은 술이 아무리 독하더라도 못마땅한 기색을 해서는 안된다고 하였다. 그렇다고 경한 모습으로 훌쩍 마시는 것도 예가 아니다. 박지원(朴趾源)「양반전(兩班傳)」에서 술을 마실 때에 수염을 빨지 말아야 한다고 한 것도 역시 주례의 하나다. 술을 못하는 사람은 권하는 술을 사양하다가 마지못하여 술잔을 받았을 때에는 싫증을 내고 내버릴 것이 아니라 점잖게 입술만을 술에 적시고 잔을 놓아야 한다. 동배간의 주석에서는 주법이 그처럼 세밀하지 않으나 서로 존경하는 자리에서는 주법에 세심함은 마찬가지다.

우리들의 음주관은 갖가지의 음주풍속에도 나타나 있다. 예를 들어, 손님을 맞이하면 정성을 다하여 그를 대접하는 습속이 있다. 이는 인정의 표시를 술로 대신하는 예절이다. 집에서 손님을 맞이하면 간직해 둔 가양주(家釀酒)를 내놓기도 하고, 그렇지 않으면 술을 사다가 손님대접을 한다. 애주가는 평소 반주(飯酒)를 한다. 끼니때에 손님에게 반주상을 올리는 것은 상례다. 반주상에 앉아 주주객반(主酒客飯: 주인은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밥을 권하며 서로 다정하게 식사를 하는 일)의 다정한 식음(食飮)이 이루어진다. 이는 주인이 손님에게 술을 권하고, 손님은 주인에게 밥을 권하는 예절로 그만큼 손님에게의 대접은 술을 우선으로 한다.

술상에 앉으면 대작하여 술을 서로 주고받는 수작(酬酌)을 하고, 잔에 술을 부어 돌리는 행배(行杯)의 주례가 있다. 이때 권주잔은 반드시 비우고 되돌려주는 반배(返杯)를 한다. 반배는 가급적 빨리 이행하고 주불쌍배(酒不雙杯)라 하여 자기 앞에 술잔은 둘 이상 두지 않는 것이 주석에서의 예절이다. 지금에 와서는 수작이나 행배의 음주례를 꺼리는 사람이 적지 않으나, 정을 담은 술잔의 음주는 역시 이러한 권주에 있다. 술은 권하는 맛으로 마신다는 우리들의 정다운 주도가 여기에 나타난다. 손님이 떠날 때는 작별의 아쉬움을 술로 달래는 예절로서 이별의 술을 마신다.

또 밖에서 음주할 때는 흔히 주점을 찾는다. 길가에 있는 주점은 원래 길손을 위한 술집으로 이를 주막(酒幕)이라 한다. 글자 그대로 막을 쳐놓고 술을 팔 정도의 간단한 차림이 시골 길가의 주막이다. 그러나 술손님을 끌기 위하여 시장이나 큰길 등 사람의 내왕이 빈번한 곳에 주막이 성하였다. 『고려사』의 기록을 보면, 주막은 고려 성종 때부터 있었던 술집으로 사교장이었으며 주식을 팔던 곳이었다. 그러나 당시 술을 팔던 풍속은 자세히 전하고 있지 아니하여 구체적으로 말하기 어렵다.

한말의 풍속에 의하면 탁주를 담은 술항아리와 항시 물이 끓고 있는 부뚜막의 검은 큰 가마솥, 그 곁에 앉아서 술을 떠주는 주파(酒婆) 등이 인상 깊은 우리네 주점의 모습이다. 특히 겨울철 추위에 거냉(냉기를 제거함)한 탁주는 요기와 어한(추위를 막음)으로 애용되어 우리의 주점은 따뜻한 정을 찾을 수 있는 곳으로도 인식되어 있다. 근년에 이르러 도시의 뒷골목이나 도로가 으슥한 곳에 노점처럼 나타난 포장마차의 술집에서도 겨울의 추위를 녹이는 정이 오고간다. 포장마차에서는 주로 참새구이, 또는 닭의 똥집 요리 등을 안주로 하여 소주를 판다.

근래의 술집에 또 목로주점(木櫨酒店)이 있다. 이 역시 도시의 뒷골목이나 으슥한 노변 집에서 많이 보는 주점이다. 기다랗고 좁은 널빤지로 만든 술상이 목로인데, 이곳에 큰 막걸리 사발을 놓고 의자도 없이 서서 술을 마시므로 이를 ‘선술집’이라 하고, 또 ‘사발막걸릿집’ 혹은 ‘대폿집’이라고도 하였다. 지금은 처음의 모습과 달리 의자를 두고 소주까지 팔기 시작하여 선술집이나 대폿집의 느낌은 찾기 어렵다. 고급요정에서는 기생이 술자리에 나오고 색주가(色酒家)에서는 그보다 격이 낮은 아가씨들이 술대접을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술의 이미지는 농가에서 마시는 푸짐한 막걸리, 즉 농주에 있다. 길손을 불러 술을 같이 하고, 이웃집 어른과 친구를 불러 나누어 마시는 것이 이 농주다. 근래에 양조업이 산업화된 이래 양조장의 탁주가 농주로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종전 농가에서는 가양주로 이를 마련하여 맛을 내는 주부의 술빚는 솜씨는 농군들의 주흥을 돋구는 농가의 자랑이었다. 우리네의 주도는 결국 인간질서를 존중하면서 인정과 즐거움을 바탕으로 한 푸짐하고 여유있는 음주관으로 이어져온 것이다.

술의 의미와 민속

우리나라 사람들이 술을 마셨다는 기록은 아득한 부족국가시대부터의 일로 전한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부여의 ‘영고(迎鼓)’, 고구려의 ‘동맹(東盟)’, 예의 ‘무천(儛天)’ 등의 집단행사에서 술을 마셨다는 것이 술의 역사가 오래됨을 뜻한다. 이러한 행사를 연례적으로 치르면서 음주를 겸하였으니, 우리네의 술의 민속은 이런 식으로 하여서 전승된 것이다. 『삼국유사』 가락국기에서 매년 세시(歲時)에 술을 마신다고 하는 것은 술의 민속이 일반화되어갔음을 의미한다. 특히 세시풍속으로 쇠어오던 명절에는 그 계절에 알맞는 시식(時食)이 있었다. 그 중에서 뺄 수 없는 것이 명절마다 연례적으로 빚어 오던 술이다. 이는 시절의 미각을 찾고자 하여 빚었던 것이므로 이를 시양주(時釀酒)라 한다. 즉 매년의 세시마다 민간습속으로 마시던 술이다.

일반세시기에 전하는 시양주 중 우선 봄철의 것을 보면, 일년의 괴질과 사기를 물리친다고 한다고 하여 설에 마시는 도소주가 있다. 설을 맞이하는 술이라 하여 이를 ‘세주(歲酒)’라 한다. 세주는 차게 마시는데 이에는 봄을 맞이하는 뜻이 있다고 한다. 정월 대보름에는 ‘귀밝이술[耳明酒]’을 마신다. 이 역시 데우지 않고 차게 마시는 청주로 된 시양주다. 봄철 청명(淸明)에는 맛이 좋다는 ‘청명주’를 담근다. 이는 이익(李瀷)이 특히 좋아하였다고 한다. 3월에는 여름을 탈없이 보낼 수 있기를 바라는 뜻으로 술집에서 ‘과하주’를 빚어 판다.

시양주로 알려진 ‘삼해주’와 ‘사마주(四馬酒)’도 봄철의 술이다. ‘삼해주’는 정월의첫 해일(亥日)에 시작하여 3차에 걸쳐 해일에 담그는 삼양주이다. ‘사마주’는 정월의 오일(午日)에 시작하여 4차에 걸쳐 오일에 담그는 사양주이다. 모두 정성으로 빚었던 이름난 민속주다. 시식으로 마시는 술에는 이처럼 계절과 세시에 따른 민속상의 의미가 있다. 질병을 쫓고 건강을 위한다는 술이므로 각 가정에서는 그 양조가 뜻대로 잘되어 제 맛을 낼 때 상서롭게 여긴다. 유희춘(柳希春)의 일기에서 세주의 맛이 좋고 나쁨을 들어 길흉을 점쳤다 하는 것은 이와 같은 민간사고에서 말미암은 것이다.

술은 또 제례 · 혼례 · 향음례 등 행례(行禮)의 풍속에서 증요시 되었다. 제례에는 선조의 제삿날에 가지는 기제사(忌祭祀)와 그 밖의 속절에 가지는 세시제(歲時祭)가 있다. 후자는 명절에 가지는 의식으로서 이때의 아침 제사가 차례(茶禮)다. 차례가 끝나면 지방에 따라서는 동신제(洞神祭) · 샘굿 · 영등굿 등 가지가지의 제의를 행한다. 제례의 종류는 이처럼 여러 가지이지만 제물의 기본은 술과 과일과 포육이다. 비록 간략한 제의라 하더라도 주(酒) · 과(果) · 포(脯)는 갖추어야 한다. 그리고 격식을 갖춘 주례에는 초헌 · 아헌 · 종헌 등 삼헌(三獻)을 올린다. 이는 신위께 술잔을 세 차례 따라 올리는 의식이다. 제례가 끝나면 음복(飮福)을 한다. 음복은 제사를 지낸 다음 복을 탄다는 뜻으로 제물을 나누어 먹는 일이지만, 술 마시는 것을 위주로 생각한다. 이처럼 제례에 술은 필수적인 것이다. 술의 민속상의 뜻은 강신을 바라는 데에 있다.

혼례에도 술은 반드시 준비한다. 구혼례에는 대례를 올리는 예식장에서 근배례(卺杯禮)를 행하여 신랑 · 신부가 술잔을 교환한다. 신혼례에는 결혼식을 마친 뒤 폐백례(幣帛禮)를 행하면서 이 의식을 가지기도 한다. 이때 신랑 · 신부가 교환하여 마시는 술이 ‘합환주(合歡酒)’이다. 설사 술을 못하는 경우라도 반드시 합환주는 받아다가 입술을 적셔야 한다고 한다. 이는 민속상 이성이 만난 즐거움과 백년가약을 다짐하는 뜻을 가지게 하는 예절이다.

술의 민속은 또 향음례에서도 전해왔다. 앞에 든 우리네의 주도에서 말한 향음주례가 바로 그것이다. 향음례는 중국에서 온 풍속이지만 일찍부터 우리들의 미풍양속으로 화해버린 것이다. 『동국세시기』의 3월조에 전하는 향음례의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향촌에서는 따뜻한 봄철을 맞이하여 먼저 80세가 넘은 어른을 한 자리에 모신다. 아울러 60, 70세가 되는 어른을 또 한 자리에 모시고 60세 미만의 사람들은 다른 자리에서 나이대로 앉는다. 향약의 낭독을 들은 다음, 두 번 절하고 웃어른께 술을 대접하며 잔치를 벌인다. 가을철에도 이를 되풀이한다. 곳에 따라 다소의 다름이 있고,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해왔지만, 옛 풍습으로 행하던 이 의식은 위에 든 내용의 예법과 비슷하였다. 이때의 음주는 향약으로 지키던 윤리의 도를 숭상하면서 상하의 화합과 동족으로서의 일체감을 가지게 하는 데에 의의를 지닌 민속이었다.

술과 예술, 그 멋과 흥취

멋있는 생활은 반드시 흥을 바탕으로 한다. 정신적 · 육체적 활동이 미적으로 나타나는 것도 대개 이 흥으로 말미암는다. 술을 마시고 흔히 예술활동에 민감하게 되는 것은 바로 이러한 흥취 때문이다. 『삼국지』 등 옛 기록에 의하면 우리 민족은 상고 때부터 여러 가지 제의를 가지면서 음주와 가무를 즐겼다고 한다. 그때의 노래와 춤이 음주에서 생기는 흥취로 말미암은 것임은 물론이다. 원시시대부터 있었던 제의에는 제수품으로 제주(祭酒)를 올리는 일이 필수적인데, 이 제의에서 음복이라는 종교의식이 이루어진다. 그러는 사이 주흥이 일면 종교성은 희박해지고 시(詩) · 가(歌) · 무(舞)의 예술적 서정에 빠져들게 마련이다. 그것이 집단적일 때 그 흥취는 더욱 고조된다. 부여의 ‘영고’, 고구려의 ‘동맹’, 예의 ‘무천’ 등 종교적 행사가 그 한 예이다. 예술의 기원은 대개 원시시대의 종합예술에까지 소급되는데, 우리네의 예술활동은 이처럼 술과 연관되어 성하였다. 이리하여 술의 흥취는 예로부터 문학이나 음악, 또는 회화 등 여러 가지의 미적 형상화를 통하여 발산되었다.

고전문학의 경우를 보면, 신라 유리왕 9년의 가배(嘉俳) 행사의 주식(酒食)이 마련되고 백희가무(百戱歌舞: 온갖 놀이와 노래와 춤)가 성행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어느 여인의 입에서 나오던 ‘회소회소(會蘇會蘇)’라 한 시적 탄사는 「회소곡」의 연유가 되었다. 이때 부르던 노래는 필시 술을 마시고 흥겹게 놀던 주흥과 관계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구지가(龜旨歌)」도 구간(九干) 등의 3월 계욕제의(禊浴祭儀: 몸의 부정을 없에는 제의)에서 부른 것으로 전하여 제주(祭酒)에서의 작흥과 관계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상고문학에 대한 기록은 많지 아니하여 상세한 언급이 어렵다.

이에 비하여 고려 이후에는 술의 문학이 적지 아니하다. 「청산별곡」「쌍화점」 · 「한림별곡」 등은 술과 관계된 고려의 노래다. 술 노래는 대개 주흥에서 제작되기 때문에 내용은 취락을 주로 하기 마련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고종 때의 「한림별곡」의 제4연이다. 거기에는 황금주(黃金酒)와 백자주(柏子酒) 등 일곱 가지의 다양하고 사치스런 술과 앵무잔(鸚鵡盞) · 호박배(琥珀杯) 등이 열거되어 있다. 주호로 이름난 중국의 유령(劉伶)과 도잠(陶潛)을 선옹(仙翁)이라 하여 그들과 같은 낭만을 즐기는 멋이 담겨 있다.

고려의 이규보(李奎報)도 술 없이는 시를 짓지 않았다는 문인이다. 그는 『동국이상국후집』 권11 찬(贊)의 「주호명(酒壺銘)」에서, “술이 거나하여 몸이 풀리고 마음이 활달해지면 춤도 추고 노래도 부르나니 이는 모두 네[酒]가 시킨 것”이라 하여, 평소 즐겨하던 가무가 주흥에서 이루어진다고 하였다. 이규보는 술의 전기로 「국선생전(麴先生傳)」을 지었다. 이는 술에 밝은 작자가 이에 얽힌 고금의 이야기를 전기식으로 서술하여 가전체(假傳體)로 의인화한 작품이다. 임춘(林椿)도 술의 전기로 「국순전(麴醇傳)」을 지었지만, 고려 때의 술의 문학은 시와 문을 종합해 볼 때 역시 이규보를 으뜸으로 한다.

조선시대의 술의 문학은 시조와 가사를 통하여 쉽게 접할 수 있다. 음주의 낙을 아는 시가시인이면 으레 술 노래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 시인의 쌍벽으로 일컫는 윤선도(尹善道)정철(鄭澈)도 시주객으로 이름나 있다. 「산중신곡(山中新曲)」에서 윤선도는 운치 있는 음주의 낭만과 격이 높은 자연애의 흥치를 잘 구사하였다. “잔 들고 혼자 안자 먼 뫼흘 ᄇᆞ라보니/그리던 님이 오다 반가움이 이리ᄒᆞ랴/말ᄉᆞᆷ도 우움도 아녀도 몯내 됴하 ᄒᆞ노라.” 송강문학에는 고산에 비하여 술의 시가가 더 많이 나타난다. 정철은 「주문답삼수(酒問答三首)」를 지었다. 지나치게 술에 탐닉됨을 반성하여 단주를 결심한 적이 있다. 그러나 결코 술과 절연할 수 없다는 것이 이 시조의 내용이다. 특히 정철이 지은 「장진주사(將進酒辭)」는 주객들에게 널리 회자되어 오던 술에 관련된 시조의 하나다.

시의 제작을 풍류적 서정의 표출이라고 볼 때 이러한 시적 서정을 자극하고 돕는 중요한 매체는 술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주흥을 시정으로 한 시문에는 다음의 두 가지 면이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산수와 풍월을 즐기고자 하던 자연애의 심정에서 음주하고 시를 짓는 경우와 인생의 무상을 탄하며 실의와 우수를 달래고자 하여 음주하며 시를 짓는 경우의 두 가지다. 앞에 든 윤선도의 「산중신곡」은 전자의 경우이고, 정철의 「장진주」는 후자의 경우이다. 그러나 이들은 다같이 술의 흥취를 노래한 데서 공통적으로 풍류적인 면을 느끼게 한다. 가사의 술 노래에서도 이 점은 마찬가지로 나타난다. 이처럼 술의 풍류는 시를 짓게 하고 또 창(唱)의 충동을 일으켰다. 술 하면 시가 나온다는 관념에서 시주(詩酒)는 짝지어진 한 낱말이 되었다. 그리고 시에 못지 않게 술로 연유되는 풍류가 음악임은 「성산별곡」에서 보는 바와 같다.

고미술에서도 이와 같은 술의 풍류는 드러나는데, 연회 등 주연의 그림에서 많이 본다. 조선조에 그려졌던 각종 계회도(契會圖)를 비롯하여 기로회(耆老會)나 수석연(壽席宴: 장수하기를 빌면서 연 잔치) 또는 시사회(詩社會) 등의 그림에서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주흥을 돋구며 시주의 풍류를 즐기던 선비들의 멋과 그 흥취를 상상할 수 있다. 16세기작으로 전하는 「독서당계회도」를 보면 한강 위에 배를 띄워놓고 허자(許磁) · 송순(宋純) 등 12명의 시객들이 계회 겸 선유하는 모습이 보인다. 그 옆에 띄워놓은 작은 배는 술동이를 싣고 물결에 출렁이고 있어 한층 풍류적이다.

영조 때의 화가 김홍도(金弘道)의 「만월대계회도(滿月臺契會圖)」에서는 술잔치의 모습이 한층 간드러지게 무르익은 듯이 보인다. 이는 개성의 송악산 기슭에 있는 만월대에서 수많은 선비들이 계회를 가지고 들잔치를 하는 주연을 그린 것이다. 각자가 주안상을 앞에 놓고 반원으로 줄지어 앉은 선비들, 중앙에는 술병을 놓은 삼족상(三足床)이 있고, 그 앞에 춤을 추는 두 무희, 그리고 젓대를 불고 현악기를 타며 장구를 치는 6명의 악대가 주연의 흥을 돋구고 있다. 그 주위에는 술에 만취한 여섯 선비가 여자의 술잔을 받고 있으며, 또 취하여 엎드러진 선비를 일으키고 있는 동자의 모습 등이 있어 주연의 만화경을 그대로 보인 듯하다. 16세기말경에 된 「선조조기영회도(宣祖朝耆英會圖)」는 나이 많은 7명의 기영들이 외상을 앞에 놓고 연주에 맞추어 추는 네 무희의 춤을 감상하며 술잔치를 벌이고 있는 그림이다. 왼쪽 구석에 놓여 있는 술동이는 음주의 흥을 자아내게 하는 회화적 표현이다.

술의 풍류는 또 주기(酒器)나 술 이름에도 나타난다. 술을 담는 그릇으로는 은은한 비색의 고려청자나 순백의 이조백자로 만든 목이 길쭉하여 곡선미 아름다운 술병이 애용되었다. 마시는 술잔의 종류도 여러 가지였다. 호박배 · 만호배(璊瑚杯) · 옥배(玉杯) · 은배(銀杯) · 금배(金杯) 등 사치스런 술잔은 물론, 그 모양에 따라 앵무배 또는 도화배(桃花杯)라 명명하고, 이에 술을 따라 마시며 즐기던 음주의 흥취는 퍽이나 인상 깊은 술의 풍류다.

술의 이름에는 술맛을 당기게 하는 낭만적인 것이 많다. 맛을 더하기 위하여 가향주(加香酒)를 만드는데 그에 따라 명명된 이화주(梨花酒) · 두견주(杜鵑酒) · 송화주(松花酒) · 연엽주(蓮葉酒)…… 등은 그 이름부터 아름답다. 술빛이 흰 아지랑이와 같다는 비유에서 붙여진 백하주(白霞酒), 푸른 파도와 같다는 데서 붙여진 녹파주(綠波酒, 일명 鏡面綠波酒), 푸르고 향기롭다는 데서 붙여진 벽향주(碧香酒), 맛이 좋아서 차마 삼켜 마시기 아쉽다는 데서 붙여진 석탄주(惜呑酒) 등은 이는 모두 주색들의 멋진 발상에서 나온 술 이름이다.

술을 즐기던 우리 조상들은 이처럼 솜씨 좋은 가향주를 자랑하기도 하고 ‘생애는 주일배(酒一杯)’라는 식의 낭만적인 멋을 터득하기도 하며, 곡수유상(曲水流觴: 굽어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주고 받는 것)의 흥취를 즐기기도 하였다. 이에서 나온 미적 감흥은 곧 술의 풍류가 되고, 또 술의 예술이 된 것이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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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 미디어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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