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파평(坡平). 자는 인수(仁叟). 옥당 출신. 윤염(尹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윤봉종(尹奉宗)이고, 아버지는 윤길(尹吉)이다. 어머니는 조영조(趙榮祖)의 딸이다. 대사성 윤양(尹讓)의 아버지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83년(선조 16) 알성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1587년(선조 20) 승정원주서 재직 시 병장(病狀)을 내고 체직되었다가 파직되었고, 그 뒤 영변판관(寧邊判官)으로 제수되었다가 직을 떠났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파산관(罷散官) 상태로 있었기에 편모와 함께 경기땅에 피난갔다가, 순찰사 권징(權徵)의 막하로 들어가 종군하였다. 1596년 서흥(瑞興)·정평(定平) 부사로 제수되어 목민업무를 담당하였다.
1600년 필선·우정언·장령·집의 등의 청요직을 역임했고, 이듬해 양주목사에 제수되었다. 그 뒤 성균관직강에 진출하였다가 다시 사간·집의를 맡아, 전란 중에 왕을 호종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체직을 청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604년(선조 37) 동부승지, 이듬해 병조참의로 제수되었다가 강원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실록을 봉안하기 위해 오대산을 조사하였다. 1606년 춘천부사가 되었고, 광해군 즉위 후 연안부사·예조참의·대사간·동지의금부사를 역임하였다. 1617년(광해군 9) 예조참판에 올랐고, 인목대비(仁穆大妃) 폐모론에 동조하여 서궁을 유폐시키는 일에 앞장섰으며, 『폄손절목』 제정에 간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