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15교구 본사인 통도사(通度寺)의 말사이다. 신라 문무왕 때 원효(元曉)가 창건하였으며,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창건설화가 기록되어 있다.
673년(문무왕 13) 원효가 동래군 장안면 불광산에 있는 척판암(擲板庵)을 창건하여 주석하던 중, 당나라 태화사의 1,000명 대중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이라고 쓴 큰 판자를 그곳으로 날려보냈다.
그 곳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현판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법당에서 뛰쳐나와 보는 순간 절 뒷산이 무너져 큰 절이 매몰되었다. 이 인연으로 1,000명의 중국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가 그들의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나와 현재의 산신각 자리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원효는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 · 중 · 하내원암(上中下內院庵)을 비롯, 89개 암자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천성산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오도(悟道)하게 하였다.
이 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생겼고,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성인이 되었다 하여 산이름을 천성산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에 대둔사 및 상 · 중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義天)이 중건하였고, 1845년(헌종 11)에 용운(龍雲)이 중수하였으며, 1876년에는 해령(海嶺)이 중수하였다. 1898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한 뒤 선찰(禪刹)로 이름을 떨쳤고, 민족항일기에는 혜월(慧月)이 주석하면서 많은 선승(禪僧)들을 배출하였다.
그리고 6·25전쟁 때 산속에 숨어 있던 공비들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된 뒤 1955년에 수덕사(修德寺)의 비구니 수옥(守玉)이 5년 동안에 걸쳐서 13동의 건물을 재건하였다. 그 뒤 꾸준한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존하는 당우로는 법당인 선나원(禪那院)을 비롯하여 ‘선해일륜(禪海一輪)’의 현판이 걸린 큰 규모의 선원(禪院) · 심우당(尋牛堂) · 정처헌(靜處軒) · 불유각(佛乳閣) · 종루 · 일주문(一柱門) · 객실 · 창고 등이 있으며, 산내암자로는 미타암(彌陀庵) · 성불암(成佛庵) · 금봉암(金鳳庵) · 원효암(元曉庵) · 조계암(曹溪庵) · 금강암(金剛庵) · 내원암(內院庵) · 안적암(安寂庵) · 익성암(益聖庵) · 노적암(露積庵) 등이 있다.
국가유산으로는 1972년 경상남도 유형문화재(현, 유형문화유산)로 지정된 금고가 있다. 전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도선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용연리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육교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어 내원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6㎞ 계곡의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하여 천성산 내원사일원이 1985년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