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성산 내원사 ( )

불교
유적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천성산(千聖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가 창건한 사찰.
유적/건물
건립 시기
삼국시대 신라
소재지
경상북도 양산시 하북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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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내원사는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천성산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가 창건한 사찰이다. 원효가 신통력으로 구원한 1,000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에 와서 제자가 되어, 그들이 머물 곳을 위해 사찰을 지었다는 창건 설화가 『송고승전(宋高僧傳)』에 전한다. 일제강점기에는 경허(鏡虛)의 제자인 혜월(慧月)이 주석(駐錫)하면서 선풍을 크게 일으켰다. 한국전쟁으로 소실되었지만, 수덕사(修德寺) 비구니 수옥(守玉)에 의해 중건(重建)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의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 천성산(千聖山)에 있는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 원효(元曉)가 창건한 사찰.
건립 및 변천

내원사(內院寺)는 대한불교조계종(大韓佛敎曹溪宗) 제15교구 본사(本寺)통도사(通度寺)주1이다. 신라 문무왕(文武王)원효가 창건하였다. 『송고승전』에 창건 주2가 기록되어 있다.

673년(문무왕 13) 원효가 동래군 장안면(현, 부산광역시 기장군 장안읍) 불광산(佛光山)에 있는 척판암(擲板庵)주3 주4 중, 당나라 태화사의 1,000명 대중이 장마로 인한 산사태로 매몰될 것을 알고 ‘효척판구중(曉擲板求衆)’이라고 쓴 큰 판자를 그곳으로 날려 보냈다. 그곳 대중들이 공중에 떠 있는 주5을 보고 신기하게 여겨 법당(法堂)에서 뛰쳐나와 보는 순간 절 뒷산이 무너져 큰 절이 매몰되었다. 이 인연으로 1000명의 중국 승려가 신라로 와서 원효의 제자가 되었다. 원효가 그들의 머물 곳을 찾아 내원사 부근에 이르자 산신이 마중 나와 현재의 산신각(山神閣) 자리에 이르러 자취를 감추었다. 이에 원효는 대둔사(大芚寺)를 창건하고 상 · 중 · 하내원암(上中下內院庵)을 비롯해, 89개의 주6를 세워 1000명을 거주시켰다. 그리고 주7 상봉에서 『화엄경(華嚴經)』을 강론하여 1000명의 승려를 주8 하였다.

이때 『화엄경』을 설한 자리에는 화엄벌이라는 이름이 생겼다. 중내원암에는 큰 북을 달아놓고 산내의 모든 암자가 다 듣고 모이게 했으므로 집붕봉이라는 이름이 생겼으며, 1,000명이 모두 주9이 되었다 하여 산 이름을 천성산이라 하였다 한다. 조선 중기에 대둔사 및 상 · 중내원암은 없어지고 하내원암만 남았다.

그 뒤 1646년(인조 24)에 의천(義天)주10, 1845년(헌종 11)에 용운(龍雲)이 주11, 1876년에는 해령(海嶺)이 중수하였다. 1898년에는 유성(有性)이 수선사(修禪社)를 창설하고 내원사로 개칭한 뒤 주12로 이름을 떨쳤고, 일제강점기에는 혜월이 주석하면서 많은 주13들을 배출하였다. 혜월은 근대불교의 주14라 일컫는 주15로부터 주16를 받은 제자로서 내원암뿐만 아니라 파계사(把溪寺) · 통도사(通度寺) 등 남방 지역에서 크게 선풍을 일으켰다.

그리고 한국전쟁 때 산속에 숨어 있던 주17들의 방화로 완전히 소실된 뒤, 1955년에 수덕사의 비구니 수옥이 5년에 걸쳐서 13동의 건물을 재건하였다. 그 뒤 꾸준한 불사를 거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황 및 문화유산

현존하는 주18로는 법당인 선나원(禪那院)을 비롯하여 ‘선해일륜(禪海一輪)’의 현판이 걸린 큰 규모의 선원(禪院) · 심우당(尋牛堂) · 정처헌(靜處軒) · 불유각(佛乳閣) · 주19 · 일주문(一柱門) · 객실 · 창고 등이 있으며, 산내 암자로는 미타암(彌陀庵) · 성불암(成佛庵) · 금봉암(金鳳庵) · 원효암(元曉庵) · 조계암(曹溪庵) · 금강암(金剛庵) · 내원암(內院庵) · 안적암(安寂庵) · 익성암(益聖庵) · 노적암(露積庵) 등이 있다.

문화유산으로는 2011년에 보물로 지정된 양산 내원사 청동북(梁山 內院寺 靑銅북)을 비롯하여, 경상남도 유형 문화유산인 양산 내원사 아미타삼존탱(梁山 內院寺 阿彌陀三尊幀▽)과 경상남도 문화유산 자료인 석조 보살 좌상이 있다. 청동북은 고려시대 작품으로서 보존 상태가 양호하고, 주20 7년(1091년)’이라는 명문이 있어 고려의 청동북 연구에 귀중한 주21 자료가 되고 있다. 현재 본사인 통도사의 성보박물관(聖寶博物館)에 보관 중이다. 아미타삼존탱은 아미타(阿彌陀) · 관음(觀音) ·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주22의 입상형을 하고 있다. 화기에 의하면 주23 7년(1857년)’에 조성되어 통도사 취운암(翠雲庵)에 주24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석조 보살 좌상은 법기보살(法起菩薩)로서 조선 후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된다.

전국의 대표적인 비구니 수도 선원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용연리 경부고속도로 위를 지나는 육교를 건너면서부터 시작되어 내원사 입구까지 이어지는 6㎞ 길이인 계곡의 아름다움으로도 유명하여 천성산 내원사 일원이 1985년에 경상남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참고문헌

원전

『송고승전(宋高僧傳)』

단행본

한국관광문화연구소 편, 『한국의 명산대찰』 (국제불교도연합회, 1982)
권상로, 『한국사찰전서』 (동국대학교 출판부, 1979)

인터넷 자료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https://www.heritage.go.kr)
주석
주1

불교의 한 종파의 우두머리인 큰절의 관리를 받는 작은 절. 또는 큰절에서 갈라져 나온 절. 우리말샘

주2

있지 아니한 일에 대하여 사실처럼 재미있게 말함. 또는 그런 이야기. 우리말샘

주3

건물이나 조직체 따위를 처음으로 세우거나 만들다. 우리말샘

주4

선종에서, 승려가 입산하여 안주하다. 우리말샘

주5

글자나 그림을 새겨 문 위나 벽에 다는 널조각. 흔히 절이나 누각, 사당, 정자 따위의 들어가는 문 위, 처마 아래에 걸어 놓는다. 우리말샘

주6

큰 절에 딸린 작은 절. 우리말샘

주7

경상남도 양산시 하북면과 상북면에 걸쳐 있는 산. 계곡이 깊고 폭포가 많으며 경치가 빼어나서 소금강산이라 불리며, 원적산ㆍ원효산이라고도 한다. 정상에서 가장 먼저 동해의 일출을 볼 수 있는 것으로 유명하다. 높이는 920.1미터. 우리말샘

주8

불도의 진리를 깨닫다. 우리말샘

주9

지혜와 덕이 매우 뛰어나 길이 우러러 본받을 만한 사람. 우리말샘

주10

절이나 왕궁 따위를 보수하거나 고쳐 짓다. 우리말샘

주11

건축물 따위의 낡고 헌 것을 손질하며 고치다. 우리말샘

주12

선종(禪宗)의 절. 우리말샘

주13

선종의 승려. 우리말샘

주14

종문(宗門)이나 절을 중흥하여서 개산조 다음가는 공로를 세운 승려를 높여 이르는 말. 침체한 한 종문의 교세를 크게 떨치거나, 법당 따위를 다시 세우거나 증축한 승려를 이른다. 우리말샘

주15

조선 말기의 승려(1849~1912). 속성은 송(宋). 이름은 동욱(東旭). 선종(禪宗)의 중흥에 힘썼다. 우리말샘

주16

사승(師僧)이 제자의 득법(得法) 또는 설법을 증명하고 인가함. 우리말샘

주17

공산당의 유격대. 중국에서, 국민 정부 시대에 공산당의 지도 아래 활동하던 게릴라를 비적(匪賊)이라고 욕하며 부르던 데서 유래한다. 우리말샘

주18

정당(正堂)과 옥우(屋宇)라는 뜻으로, 규모가 큰 집과 작은 집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19

종을 달아 두는 누각. 우리말샘

주20

중국 서하 혜종 때의 연호(1076~1085). 우리말샘

주21

연대순으로 역사를 편찬함. 우리말샘

주22

본존과 그 좌우에 모시는 두 분의 부처나 보살을 통틀어 이르는 말. 석가 삼존, 미타 삼존, 약사 삼존 등이 있다. 우리말샘

주23

중국 청나라 문종 때의 연호(1851~1861). 우리말샘

주24

신주(神主)나 화상(畫像)이 받들어져 모셔지다. 우리말샘

집필자
김성연(동국대학교 불교학술원 전임연구원, 한국근대사(근대불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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