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롱유고(晩聾遺稿)』는 조선 후기 문신 유협기의 문집이다. 유일한 필사본이 연세대학교에 소장되어 있다. 유협기는 정조 대에 소론으로서 노론과의 정쟁에도 일정 정도 참여한 바 있다. 『만롱유고』는 이러한 유협기의 현실 인식과 인적 교류, 문학과 가족 관계 등을 보여준다.
저자 유협기(柳恊基, 17321801)의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사인(士寅), 호는 만롱(晩聾)이다. 1768년(영조 44)의 진사시(進士試)에 입격(入格)하였고, 1774년(영조 50)에 증광시(增廣試)에 급제했다. 벼슬은 예조참의, 이조참의, 성균관 대사성에 이르렀다. 1792년(정조 16)에 경연(經筵)에 성실히 참석할 것을 간언한 유성한(柳星漢)의 상소에 대한 공격이 사도세자(思悼世子)를 죽음으로 내몬 노론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비화될 당시, 정창순(鄭昌順, 1727?)과 함께 소두(疏頭)로서 노론을 공격한 바 있다. 이로 인해 유협기의 사후까지도 사헌부(司憲府)의 탄핵과 관직 추탈 요구가 있어, 1806년(순조 6)에 이르러서야 정계(停啓)의 명에 의해 사건이 종결되었다.
『만롱유고』에는 편찬 경위를 알려 주는 서발문(序跋文)은 없다. 다만 유일본인 연세대학교 소장 필사본의 권수제가 『선조유고(先祖遺稿)』로 되어 있어, 유협기의 사후에 후손들이 그의 원고를 정리한 것으로 추정된다. 7권 부록의 말미에 조카 유진목(柳鎭穆) 형제들과 사위 홍세연(洪世淵)이 유협기의 부인 전의 이씨(全義 李氏)를 위해 지은 제문이 첨부되어 있어, 이들이 편차에 관여했을 가능성도 있다.
『만롱유고』는 7권 7책의 구성이다. 10행 18자의 필사본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권13에 시 300여 수, 권34에 서(書) 78편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문효세자(文孝世子)의 만장을 비롯해 교우들의 시를 차운한 것과 여러 사람이 함께 지은 연구(聯句) 등, 폭넓은 제재의 시가 고루 실려 있다. 조중진(趙重鎭) · 조정진(趙鼎鎭) · 여경인(呂景仁) 등 동료 관료들과의 차운시가 많다. 송대(宋代) 소식(蘇軾)을 비롯하여 당송(唐宋)의 시에 대한 차운시도 다수 있다. 단편의 절구도 있고, 영남을 유람하며 지은 「남운(南韻)」처럼 수십 편의 차운시로 구성된 작품도 있는 등, 작품의 편폭이 큰 편이다. 또 작품들을 시의 체제〔詩體〕 별로 분류하지 않았다. 다만 권3에 수록된 시 중에 백거이(白居易)의 구로회(九老會)를 염두에 둔 시제(詩題)들이 다수 수록된 것으로 볼 때, 대체로 창작 시기 순으로 편차한 듯하다. 이 외에도 다양한 시회(詩會)의 이름들이 등장한다.
서에는 이조원(李祖源) · 조중진 · 성대중(成大中)을 포함한 다수의 주변 인물들에게 위문하는 편지가 주를 이루고 있다. 대체로 길이가 짧고, 병환 · 유람 등 유협기의 일상을 이야기했다. 그 가운데 조익현(趙翼鉉)에게 보낸 「답조자구(答趙子久)」에는 지방의 조세 징수에 관한 내용이 상세히 언급되어 있어 당시의 세제를 이해하는 데 참고가 된다. 「여지주(與地主)」는 흉년을 겪고 있는 백성들을 구휼하라고 촉구한 글이다. 편지들을 수신인 별로 분류하지 않고, 시와 동일하게 작성 연대 순으로 편차한 것으로 보인다.
권5·6에는 행장 3편, 비문 2편, 제문 5편, 기(記) 3편, 전문(箋文) 13편, 잡저 1편, 책문(策文) 2편, 소(疏) 4편, 계 3편이 수록되어 있다.
묘도문자(墓道文字)들은 외사촌형인 박일원(朴一源)의 행장, 장인인 훈련원 도정 이의풍(李義豐)과 처남 함경북도 절도사 이방엽(李邦曄)의 묘표, 부인 전의 이씨와 장인 이의풍의 제문 등, 가족들을 위해 지은 것이다.
기(記)는 할아버지인 함평 현감 유성하(柳星河)의 사적과 관련된 「동영유씨세관기(桐營柳氏世官記)」와 「충신증호조좌랑유공정려기(忠臣贈戶曹佐郞柳公旌閭記)」, 딸을 위해 지은 「기망녀홍실유사(記亡女洪室遺事)」이다.
전문은 설날 · 동지 등의 명절에 국왕과 혜경궁 홍씨(惠慶宮洪氏) 헌경왕후 등, 왕실에 올린 하전(賀箋)들이다. 책문은 1774년(영조 50) 증광 문과에 응시할 때 지은 답안들로서 그의 학문과 정치적 경륜을 표현했다.
소에는 저자가 해주 유생들을 대신해 지은 삼학사(三學士)의 서원 배향을 청하는 상소와, 홍국영(洪國榮) 일파를 공격한 이동형(李東馨)에게 얽혀서 정직되었다가 8년 만인 1793년(정조 17)에 복권되자 그간의 심정을 실토하고 사헌부의 관직을 사양하는 내용으로 올린 소 등이 있다.
이밖에 홍국영의 세도정치를 둘러싼 당시 조정의 암투 · 모략 등을 살피는 데 참고가 되는 「원계(院啓)」 · 「부계(府啓)」 · 「소회(所懷)」 등이 수록되어 있다.
권7은 부록으로, 조중진이 유협기를 위해 지은 「선고묘지명(先考墓誌銘)」 · 「수만롱옹칠십서(壽晩聾翁七十序)」와 주변인들이 지은 만사(輓詞), 전의 이씨를 위해 조카와 사위가 지은 제문 등을 수록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