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상은 조선 전기 명종(재위: 1545-1567년) 때 장악원(掌樂院)의 첨정(僉正)을 역임한 문관이자 『금합자보(琴合字譜)』 편찬자이다. 1561년 장악원에서 홍선종 악사와 허억봉, 이무금의 도움을 받아 『금합자보』를 편찬하였고, 1572년 덕원부사 시절에 간행하였다. 『금합자보』는 여러 악곡의 거문고 악보를 오음약보, 합자보, 육보 등의 형태로 제시한 것으로, 악기 연주법과 구음, 노랫말, 장구와 북의 연주법 등에 대한 상세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다. 일부 악곡은 관악기인 적 악보가 오음약보와 육보로 병기되어 있다.
안상(安瑺, 15111579 이후)의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호는 죽계(竹溪)이다. 순흥 안씨 족보에 따르면 안상의 사망 연도는 신미(辛未)년 즉 1571년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15381593)의 1579년 10월 1일자 일기에 "덕원부사 안상이 부임한 지 이미 10년이 지났다."라고 언급된 점으로 보아 안상의 사망 연도는 1579년 이후로 추정된다.
안상은 주1 또는 주2으로서 경복궁 재건 주3에 참여하였고, 장악원 첨정으로서 주4를 편찬하는 등 중앙 관리로서 주어진 일뿐 아니라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도 적극적으로 수행하여 중요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안상은 당시 퇴계 이황과 주5 주6으로서 16세기 중엽 성리학적 사회 질서의 정착을 위한 구체적 실천으로 이산서원(伊山書院)을 건립하고 서적을 간행하는 일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안상의 주요 음악 활동은 다음과 같다.
① 장악원 첨정 시절 『금합자보』 편찬
안상은 장악원 첨정이던 1561년(명종 16)에 『금합자보』를 1차 편찬하였다. 『금합자보』 편찬의 직접적인 동기는 장악원에 소장된 악공을 시험하는 시험 감독자용 악보가 성현이 고안한 온전한 주7의 형태로 기보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안상은 악보를 온전한 합자의 형태를 갖춘 합자보로 고치기로 결심하여 장악원 악사 가운데 주8에 통달한 홍선종(洪善終)에게 당시의 ‘지법(指法)을 더한 곡[加指曲]’의 악보를 모아 합자보를 주9 하였고, 또 대금으로 유명한 허억봉(許億鳳)에게는 적보(笛譜)를, 장고로 유명한 이무금(李無金)에게는 장구보를 만들게 하여 노랫말과 육보(肉譜)도 함께 기록하였다.
아울러 시험 감독자가 이 악보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합자의 규칙에 대한 주10를 덧붙였다. 또 안상은 장악원에 소장된 『악학궤범』과 같은 문헌에서 금보에 수록할 만한 거문고 음악 관련 글이나 그림 따위를 옮겨 적었다. 이렇게 안상은 장악원 첨정 시절에 『금합자보』의 체제를 완성하였다.
② 함경도 덕원부사 시절 『금합자보』 간행
안상이 『금합자보』를 기획하고 체제의 완성을 본 것은 1561년 장악원 첨정 시절의 일이지만, 실제 간행은 1572년(선조 5) 함경도 덕원부사 시절(1570~1579년 이후)이었다. 안상은 주11 먼 시골에서 거문고를 배우고 싶어도 거문고에 주12을 가진 스승과 벗을 만나지 못하여 거문고를 배울 수 없는 사람을 위해서” 거문고 입문서인 『금합자보』를 간행하였다. 안상이 『금합자보』를 간행한 이유는 주13의 『근사록(近思錄)』의 편찬 이유인 "궁벽한 시골의 후진들 가운데 학문에 뜻은 두었지만 이끌어 줄 밝은 스승과 좋은 벗이 없는 자를 위해서"와 매우 유사하다.
안상은 『금합자보』 서문에서 『효경(孝經)』을 직접 인용하여 "풍속을 바꾸는 데는 악(樂)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라고 강조하였고, "거문고를 타되 주14을 위주로 하고 청아(淸雅)함을 근본으로 삼되, 오공(五功) · 십선(十善)은 지키고 구란(九亂) · 칠병(七病)은 경계하여 몸을 닦고 이성을 다스려야 한다."라고 당부하였다. 여기에서 오공 · 십선 · 구란 · 칠병은 중국의 금(琴) 연주를 통한 유가 악론(樂論)의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담고 있는 금도론(琴道論)으로, 17세기 중반에 우리나라 금보에 수용되어 거문고의 연주 규범으로도 활용되었다.
결국 안상은 거문고 연주를 통한 유가 악론의 실천이 개인적 차원의 주15을 넘어 향촌의 풍속 교화와 나아가 성리학적 사회 질서 정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해서 덕원에서 『금합자보』를 간행한 것으로 보인다.
안상은 『금합자보』 외에도 지방 관리로 있으면서 여러 서적을 간행하였다. 그의 활약은 평안도 중화군수로 재임한 기간(1565~1568) 중에 중화군의 청량서원(淸凉書院)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① 『속문범(續文範)』 간행(1565년)
『속문범』은 현재 목판본 2권 2책 가운데 권2의 1책만이 남아 있으며, 현재까지 남아 있는 최고의 서원 간행 서적 중 하나이다. 『속문범』 권2에는 명나라 중엽에 주16에 장원 급제한 8명의 대책(對策)이 수록되어 있고, 안상의 주17와 함께 간행에 참여한 사람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다. 부록으로 성삼문(成三問, 1418~1456)의 대책 일부가 포함되어 있다. 이 책을 간행한 목적은 과거 문과 시험의 대책을 연마하기 위한 교재로 사용하기 위함이었다.
② 『한서전 초(漢書傳抄)』 간행(1566년)
『한서전 초』는 『한서(漢書)』에서 14인의 열전을 요약한 책으로 안상의 큰 형 안위가 발췌하였고, 안상이 이 책을 청량서원에서 간행하면서 직접 책의 맽 끝에 주18을 작성하였다. 『한서전 초』는 후학을 가르치기 위한 목적으로 편찬되었다.
③ 『근사록』 간행(1566년)
『근사록』은 주19 1175년 주희 · 여조겸(呂祖謙, 주20에 의해 편찬된 성리학의 주21. 임란 이전에 7종의 『근사록』 주22이 인출되었는데 안상이 청량서원에서 간행한 『근사록』은 간행 시기가 매우 이른 서원판본에 해당하며, 특히 북한 지역(함경도 · 평안도)의 유일한 서원판본이다.
④ 『용학석의(庸學釋義)』 간행(1567년)
안상은 훈도(訓導) 문명개(文命凱)와 함께 퇴계의 『대학』 · 『중용』에 대한 학설을 조합하여 『용학석의』에 어록석(語錄釋)을 첨부한 책을 판각하여 간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용학석의』는 퇴계의 허락 없이 판각된 것이었기 때문에 퇴계는 “어록석은 알지 못하는 책이며 『용학석의』는 간행할 뜻이 없다.” 하며 크게 반발하게 되었고, 고봉(高峰) 기대승(奇大升, 1527~1572)에게 관서 지방을 지날 때 이 주23을 거두어 불살라 줄 것을 청하는 편지를 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