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전기의 관제에서는 문산계(文散階)의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무산계(武散階)의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이 이에 해당한다.
관직으로는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중서령(中書令)과 문하시중(門下侍中), 상서성(尙書省)의 상서령, 동궁관(東宮官)의 태자태사(太子大師) · 태자태부(太子大傅) · 태자태보(太子大保) 등이 설치되어 있었다.
이 가운데 중서령과 상서령은 실무를 담당하는 실직(實職)이 아니었고, 동궁관의 태자태사 등은 모두 겸직(兼職)이었으므로 문하시중이 유일한 종1품 실직으로 고려의 최고관직이 되었다.
1275년(충렬왕 1) 중서령과 상서령이 폐지되고 문하시중은 첨의중찬(僉議中贊)으로 호칭을 고쳤으며, 뒤이어 1277년 태자태사 · 태자태부 · 태자태보를 각각 세자사(世子師) · 세자부 · 세자보 등으로 고치는 변화가 있었다.
또한 1295년 중서령의 후신으로서 도첨의령(都僉議令)이 설치되었다가 곧 판도첨의사사(判都僉議司事)로 호칭을 고쳤으며, 1298년 충선왕이 즉위하여 첨의중찬이 도첨의시중(都僉議侍中)으로 고치고 광정원사(光政院使)와 자정원사(資政院使)가 종1품 관직으로 신설되는 한편, 문산계서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이전의 개부의동삼사를 대신하게 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하자 관직과 관계(官階)가 모두 이전의 것으로 환원되었으며, 1308년 충선왕이 복위하면서 첨의중찬이 첨의정승(僉議政丞)으로 호칭을 고쳤고, 문산계도 중대광(重大匡)으로 고쳐졌다가 곧 벽상삼한중대광(壁上三韓重大匡)을 거쳐 1310년(충선왕 2) 다시 중대광으로 되었다.
또 충선왕 때는 종실 및 이성제군(異姓諸君)이 종1품으로 규정되었고, 뒤에 판도첨의사사가 영도첨의(領都僉議)로 호칭을 고쳤으며, 정승은 중찬 · 시중 등으로 호칭을 거듭 고쳤다.
1356년(공민왕 5) 문종관제가 복구되면서 문하시중과 중서령 · 상서령이 다시 설치되고, 수시중(守侍中)이 종1품 관직으로 신설되었으며, 종실과 이성제군은 폐지되었다. 또한 이 해에는 문산계에서 종1품 상위를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 하위를 금자숭록대부(金紫崇祿大夫)라 하여 처음으로 쌍계(雙階)가 갖추어졌다.
그 뒤 1362년 문산계가 단계(單階)의 중대광으로 통합되는 한편, 관직에서는 중서령이 영도첨의로, 문하시중 · 수시중은 각각 우 · 좌정승으로 호칭을 고쳤고, 상서령이 폐지되는 대신 이전까지 재상의 겸직이던 판삼사사(判三司事)가 종1품 실직으로 승격되었으며, 제군 역시 종1품직으로 다시 설치되었다.
1369년 또다시 삼중대광과 중대광의 상하 쌍계로 바뀌었고, 영도첨의는 영문하(領門下)로, 우 · 좌정승은 문하시중으로 되었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각각 판문하(判門下) · 문하시중 · 수시중으로 호칭을 고쳤다. 또한 문산계에서도 1372년 이후 단계의 중대광으로 개편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