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열왕(武烈王, 재위: 654661) 8년(661) 4월에 신라군이 백제군과 싸워 패배하자 장군(將軍) 김순(金純) · 천존(天存) · 죽지(竹旨) 등과 함께 출병하였다. 이후 문무왕(文武王, 재위: 661681) 원년(661) 7월에 중신(衆臣) · 자간(自簡) 등과 함께 하주총관(下州摠管)이 되어 같은 해 8월, 문무왕 및 대장군(大將軍) 김유신(金庾信)과 시이곡정(始飴谷停)으로 나아갔다. 같은 해 9월에는 옹산성(甕山城)을 포위, 공격하여 저항하던 수천 명의 백제 유민을 죽이고 항복을 받았다. 이 공으로 검(劍)을 하사받았다.
문무왕 2년(662) 8월에 백제의 유민들이 다시 반란을 일으키자 흠순(欽純) 등 19명의 장군이 이를 진압하였는데, 이때 대당총관(大幢摠管)이었던 진주(眞珠)와 당시 남천주(南川州) 총관(摠管)이었던 진흠이 거짓으로 병에 걸렸다는 핑계를 대고 방만하게 지내며 나랏일을 돌보지 않자, 마침내 죽이고 아울러 그 일족(一族)을 멸하였다. 그런데 이때 죽었다고 한 진주가 문무왕 10년(670) 12월에 반역을 도모한 한성주(漢城州) 총관 수세(藪世)의 목을 베었다는 기사가 있어 앞서의 기사를 착오로 이해하기도 한다.
이를 문무왕 15년(675)에 숙위학생(宿衛學生)이던 진주의 아들 풍훈(風訓)이 아버지의 죽음을 원망하여 당나라군의 길잡이가 되어 신라를 침공하였다는 기사와 함께 이해하면, 진주와 함께 진흠 역시 670년 이후에 사형당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에 대해 진주 및 진흠 등을 친당파(親唐派)로 보아 당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문무왕이 이들을 숙청한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문무왕 13년(673) 7월에 아찬(阿湌) 대토(大吐)가 반란을 꾀하여 당나라에 붙으려고 하였는데, 일이 발각되어 목이 베이는 죽임을 당하고 처와 자식들을 천인(賤人)으로 만들었다는 기사를 통해서도 친당파에 대한 문무왕의 태도를 알 수 있다. 한편, 이들을 진평왕(眞平王, 재위: 579~632) 대 이래 여왕 즉위에 반대한 진골 귀족을 대표하는 세력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