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신신앙 해변이나 도서의 어촌에서 어업종사자들이 수호신에게 바치는 제의와 민간 신앙이다. 해신신앙은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및 도서 지역에서 성행하였다. 어민들은 삶과 직결된 해일과 풍랑을 피하기 위해 바다의 신을 숭배하고 제의를 올리는 해신제를 지냈다. 제의는 개인적, 공동체적 또는 국가적인 행사로 실행되었다. 해신제의 역사는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세시기』의 기록으로 보아 최소한 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2009년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 대표 목록으로 등재되었다.
인류사에 있어 해상은 천연자원의 보고이자 중요한 교통, 생계수단 및 불의의 해난사고로 생명과 직결되는 외경의 대상이었다. 해신신앙은 동해안, 서해안, 남해안 및 도서지역에서 성행하였고, 제주도는 사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섬으로 본토를 내왕하거나 어로작업을 할 때 해상안전이 무엇보다 중요하므로 해신제를 오래 전부터 지내왔다. 한국의 해신신앙을 대표하는 ‘제주칠머리당영등굿’은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인정받아 1980년 11월 17일 국가무형문화재(현, 국가무형유산)로 지정되었고, 2009년 9월 30일 유네스코 세계인류무형문화유산(世界人類無形文化遺産) 대표목록으로 등재되었다.
고대에는 자연신앙이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믿어졌다. 그 중에서 천신신앙이 가장 중심을 이루었으며, 태양숭배신앙과 산신신앙이 일반적이었다. 이는 농경을 생업으로 하는 주민들에 의해 이루어진 반면 바다에 사는 어민들은 바다를 경외시하는 해양신앙이 보편적이었다. 고기잡이를 생업으로 하는 어민들은 삶과 직결된 해일과 풍랑을 피하기 위해 바다의 신을 숭배하고 제의를 올리는 해신제를 지냈다. 이러한 제의는 개인적, 공동체적 또는 국가적인 제의로 이루어졌다.
우리나라는 일찍부터 산천과 바다에 제사를 지냄으로써 풍요와 안녕을 기원하였다. 세운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고려사』를 통해 고려시대에 이미 나타나 조선 초기에 국가 제사 장소로 정비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530년(중종 25)에 편찬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권38 「제주목 」「풍속」조에는 “2월 초하루에 제주의 귀덕(歸德), 김녕(金寧), 애월(厓月) 등지에서 영등굿을 했다”는 기록과 이원진(李元鎭, 15941665)의 『탐라지(耽羅志)』를 비롯해 1849년(헌종 15)에 편찬된 홍석모(洪錫謨, 17811850)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에 제주도의 영등굿에 관한 기록으로 보아 해신제의 역사는 최소한 500년 이상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에는 제주도 산간을 포함하여 해안가 마을에서 행해졌다고 하나, 현재는 주로 해안가에서만 행해지고 있다.
제주도에는 마을마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을 모신 본향당이 있다. 이 가운데 건입동 본향당은 원래 일곱 개의 머리 모양을 한 칠머리에 있어서 ‘칠머리당’이란 이름을 붙여서 ‘칠머리당영등굿’으로 부른다. 이 굿은 영등신을 모시고 해상에서의 안전 및 어업과 해녀가 채취하는 해산물의 풍요를 기원하는 굿이기도 하지만, 마을을 수호하는 본향당신을 모시고 마을의 안과태평을 기원하기도 하여 당굿도 겸하고 있다. 당에는 세 개의 바위가 있는데, 각각의 바위에는 두 분씩의 신명(神名)이 적혀 있다. 서쪽에는 ‘영등대왕 · 해신선왕’, 중앙에는 ‘도원수감찰지방관 · 용왕부인’, 동쪽에는 ‘남당하르방 · 남당할망’이다. 중앙의 신들이 마을의 본향신 부부이며 동쪽의 신들은 제주시 일도동 막은골이라는 곳에 있던 남당의 신이었으나 이 당이 헐리면서 여기에 함께 모셔졌다. 칠머리당영등굿은 예전에는 건입동 사람들이 대부분 참여하던 성대한 굿이었다고 한다.
또한, 경상북도 울릉군 북면 천부리에 있는 예선창 해신당[鬱陵天府里古船昌海神堂]에서도 음력 삼월 삼짇날에 해신제를 지내는데 제단에 모신 신위는 ‘사해용왕신위(四海龍王神位)’이다. 제물로는 삼실( 밤 · 대추 · 곶감)과 과일 · 돼지머리 · 나물 · 탕 · 메 · 막걸리 · 어물 등을 올린다. 천부리는 어민들이 많이 거주하는 곳으로 해신에 대한 신앙이 깊은 곳이다. 도동2리(道洞2里) 해신당에는 ‘해신당’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고, 안에는 ‘동해해신신위(東海海神神位)’라고 적힌 신위가 있다. 어촌계에서 부정이 없는 사람을 골라 제관, 제주, 축관 각 1명씩 선출하여 삼월 삼짇날에 제를 올린다. 예전에는 풍물을 치면서 가장 행렬과 노래 자랑, 씨름 대회 등도 하였으나 현재는 음복만 한다. 유교식 제의를 따르고 있으며, 과거에 비해 규모가 간소화되었으나, 해신에 대한 신앙은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
이 외에도 강원도 양양군에 위치하고 있는 양양동해신묘지(襄陽東海神廟址)는 나라에서 동해신에게 풍농풍어(豊農豊魚)와 마을의 안녕을 기원하기 위하여 제사를 지내던 곳이었으며, 강릉안인진해랑당(江陵安仁津海娘堂)에서도 음력 정월 15일과 9월 9일에 유교식 제사와 때에 따라서 12거리굿의 풍어굿을 지내기도 한다.
제주도에서는 바다의 신을 모신 신당이 많다. 특히, 할망당은 배를 가진 사람이나 어부들이 모시는 신당이다. 매년 정초에는 이 당에 바다의 안정과 풍어를 비는 의례를 한다. 개인적으로 행하는 곳도 있고 무당이 사제하여 주는 곳도 있다. 그 밖에도 뱃고사나 용왕제 등이 있다.
또한 울릉 지역 동제에서도 산신제와 해신제를 함께 지내기도 한다. 산신제가 이주민들의 생활 터전을 중심으로 형성되었다면, 해신제는 어업의 발달과 함께 창출된 새로운 현상으로 볼 수 있다. 해신제의 경우 당의 명칭이 ‘해신당’으로 나타나며, 당은 마을에서 바다가 잘 내려다보이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제일(祭日)은 대부분 음력 3월 삼짇날인데, 정월 대보름에 제를 지내는 마을도 있다. 산신이 동신의 지위를 함께 가지고 있는 것에 반해 해신은 해신의 지위 이외에 다른 격은 획득하고 있지 않다. 이것은 어업이 중단된 마을에서 산신제는 지내고 있으나, 해신제는 사라진 것에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울릉 지역에서 해신제는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 문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여진다. 이는 당시 일본인이 바다에서 해신제를 지내는 곳이 있었으며, 해방 이후 한국인들이 이곳을 부수고 근처에 새로운 해신당을 세웠다는 증언을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학포의 경우 한 마을 안에 산신당과 산왕각이 함께 있으나, 산왕각의 신위가 ‘해왕신위울릉도산신대왕지위(海王神位鬱陵島山神大王之位)’인 것으로 보아 해신의 지위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