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신신앙은 산을 지키고 다스리는 산신에게 종교적인 믿음을 바치는 민간신앙이다. 산악신앙은 천지 및 천체 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주요 골간을 이룬다. 고대국가의 건국신화에서도 산은 건국자가 강림하는 곳이자 사후에 되돌아가는 신의 주거지였다. 고려시대에는 태조 때부터 5악과 5진의 산을 지정해 제사지내는 산으로 숭앙했고 이는 조선왕조에 계승되었다.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도 강하게 가지는데, 산신은 산신령·신령으로 불리고 노인 또는 호랑이로 믿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마을공동체에서 지내는 동신제가 산신제로 인식되기도 했다.
산신신앙은 산신 · 산령 그리고 산신령에 바치는 믿음이라고 민속현장에서 해석되고 있다. 산악신앙은 천지 및 천체신앙과 함께 자연신앙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이루게 된다.
산신신앙과 산악숭배가 자연숭배의 일단으로 상고대 북방계열의 사회에서 지켜졌음을 중국측 사료에서 볼 수 있다. “그 풍속은 산천을 존중한다. 산천에는 각기 부계(部界)가 있어서 함부로 서로 간섭할 수 없었다.”(後漢書 東夷傳 濊條)
이 기록의 뒷부분에는 “범에게 제사드려서 그것을 신으로 섬긴다.”라는 조항이 보인다. 후세에 범을 산신과 동일시하여 숭앙한 원류를 여기서 찾을 수 있다. 호랑이 자체가 산신령으로 간주되는 사례는 오늘에까지 전하여지고 있다.
산이 지닌 위용, 그 신비감, 그리고 하늘을 향해 치솟은 정서적 모양 등이 어울려서 산악숭배를 정서적 차원에서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신들의 땅다운 피안성과 죽은 이들의 땅으로서 지니는 외경감을 이 경우 고려하여야 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인간들의 위대한 보호자, 포섭하는 모성적 속성의 표상 등도 산악신앙의 연원으로 빠뜨릴 수 없다. 산악이 풍요와 보호를 마련하는 신비체로서 신앙되는 믿음은 오늘의 서낭굿에서도 확인될 수 있을 것이다.
단군신화와 수로신화는 산악신앙의 가장 오랜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두 신화에서 산은 신으로서는 그가 강림하는 자리이고, 사람들로서는 강림하는 신을 받드는 자리이다. 단군신화에서의 산은 신의 강림처이면서 아울러 신의 주거처로 관념되어 있기도 하다. 단군의 죽음이 입산 후 산신이 된 것으로 표현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 경우, 환웅(桓雄)이 강림하는 곳이 산이되, 신단수(神壇樹) 아래였다는 데에 유념하면, 산의 또 다른 의미가 부각된다. 이른바 우주산과 그에 따른 우주축(宇宙軸)의 형상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산이 신의 세계인 하늘과 인간들의 세계인 땅 사이에 자리잡아 그 두 세계 사이의 연결고리 노릇을 할 때, 그것을 세계산 또는 우주산이라 부른다. 이 산은 동시에 세계의 중심에 솟아 있는 것으로 믿어지기도 한다.
이 때 세계(우주)산은 ‘우주(세계)배꼽’이라는 관념과 겹쳐진다. 배꼽이 사람의 몸 중심이자 그 생명력이 모인 곳이라 생각되었기 때문에, 세계의 중심을 세계배꼽이라 일컫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한국의 산악신앙의 원형으로 이 우주산신앙을 지적할 수 있게 된다. 이 관념은 근대의 증산교신화에까지 그림자를 던져 금산사(金山寺)가 있는 모악산신앙(母岳山信仰)을 형성하고 있다.
고구려의 국가적 성역이었을 골령(鶻嶺)은 하늘이 동명왕을 위해 직접 성을 지어준 봉우리라 전해져 있거니와, 이 경우도 신들이 하늘에서 내왕할 수 있는 지상의 자리가 산봉우리라고 관념되어 있다.
한편, 상고대 왕조의 시조와 왕조 초기의 왕들 가운데는 산신으로 관념된 존재들이 있다. 가락의 시조모로 전해져 있는 정현모주(正見母主)와 토함산신(吐含山神)으로 신봉된 탈해왕이 그 좋은 보기이다.
이러한 관념은 고려시대의 전설에까지 이어진다. 정현모주는 왕조의 시조인 여산신(女山神)인 데 비해 탈해왕은 왕성의 시조인 남산신(男山神)이라는 점에서 서로 대조적이다. 이 경우 단군이 사후에 산신이 되었다는 점도 함께 고려하여야 이해가 쉽다.
그럼에도 이들은 다같이 왕권산신(王權山神)이라 부를만한 공통성을 지니고 세계산과 나란히 상고대 산악숭앙의 면모를 보여주고 있다. 이 경우 여산신인 정현모주가 동시에 왕족의 시조모이기도 하다는 점은 신라의 선도산성모(仙桃山聖母)와 대비될 수 있을 것이다.
“풀이하는 사람이 가로되, 이 사람(赫居世)은 서술성모(西述聖母)가 낳으신 것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중화땅 사람들이 선도성모를 기려서 어진 사람을 잉태하여 나라의 기틀을 세웠다고 한 것은 바로 이 사실(혁거세의 건국)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또한, 계룡이 상서로움을 나타내어 알영(閼英)을 낳은 것도 서술성모가 나타나게 한 바 아닌지 어찌 알겠는가!”( 『삼국유사(三國遺事)』 권1 赫居世王條)
이 기록은 서술성모(또는 仙桃聖母)가 혁거세의 모신(母神)이자 알영의 모신인 듯한 인상을 풍기고 있다. 형제혼(兄弟婚)이 있었던 것처럼 시사하고 있어 결코 신빙성이 큰 자료라고 볼 수는 없을 것 같다.
한편, 『삼국유사』 권5 선도성모수희불사조에도 선도산성모에 관한 기록이 보이고 있다. 지혜(智惠)라는 비구니가 불전(佛殿)을 지으려 하자, 그의 꿈에 선도산성모가 스스로 현신하여 불전짓기를 도운다는 이 부분 기록에 의하면, 신모는 본래 중국 제실(帝室)의 여인인 바, 신선의 술책을 얻어 해동(海東)에 와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다. 뿐만 아니라 이 부분에서도 거듭 혁거세와 알영이 이 신모에서 유래됨을 지적하고 있다.
아울러 김부식(金富軾)이 중국에 갔을 때 중국인 왕보가 “옛날 중국 황제의 딸로서 바다에 떠 진한에 가서 아들을 낳아 해동의 시조가 되고, 자신은 지선(地仙)이 되어 길이 선도산에 있게 되었다는데, 이는 그의 상이다.”라고 하면서 보여주는 선녀상을 목격하게 된 전후를 기록하고 있다. 신빙성이 적기는 하나, 이들 기록으로 보아 적어도 고려시대까지 선도산신모가 신라왕조의 시조모신으로 관념된 믿음이 전해져 있었음을 헤아리게 된다.
단군과 탈해가 산신이고 선도산신모나 정현모는 각기 여산신이다. 그런 뜻에서 왕조(王祖)와 관련된 남녀산신이 존재하였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남녀시조 산신 사이에 대조적인 차이가 있는 것도 지적할 수 있다.
즉, 여신들은 사후에 산신이 된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산신이다. 그러나 이에 비해 남산신들은 사후에 비로소 그 신격을 얻은 것이다. 탈해는 바다 출신이고 단군은 천신의 후예이며, 이들에게 있어 산신은 어디까지나 사후의 신격이다.
왕조의 시조가 산신으로 관념된 만큼 신라의 왕들 가운데는 경덕왕이나 헌강왕과 같이 산신의 친현을 보거나 산신에 빙의(憑依)되는 경험을 가진 왕이 존재하고 있다.
경덕왕은 오악삼산신(五岳三山神)이 대대로 대전 뜰에 나타나거나 시립하는 것을 보았고, 헌강왕은 포석정에서 남산신(南山神)이 나타나 춤추는 것을 혼자 보았는가 하면, 금강령(金剛嶺)에서는 북악(北岳)의 신이 역시 춤추는 것을 목격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 춤을 본떠 춤추었다고 전해져 있다. 이 경우 산신에 접신된 상태로 춤춘 것이라 하겠다.
왕조와 민속의 두 부분으로 나누어 산악숭배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신라의 경우, 제5대 왕인 파사이사금이 메뚜기들로 말미암은 농사피해를 이기기 위해 두루 산천에 제사하였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는 외에 제7대 왕인 일성이사금 역시 북순(北巡)하여 태백산에 친히 제사지냈다는 기록이 보이고 있다. 백제의 경우도 비교적 초기인 제5대 왕인 초고왕시대 큰 단(壇)을 모아서 천지산천에 제사드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고구려에서는 평원왕이 여름 가뭄을 당하여 끼니를 줄이고 산천에 기도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부여에서는 왕이 자식을 구하여 산천에 제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들 기록이 앞에서 이야기한 왕들만이 어떤 특정한 경우에 산천에 제사지낸 것임을 의미하고 있는 것은 물론 아니다.
“항상 3월 3일 낙랑의 언덕에 모여 사냥하되, 잡은 멧돼지와 사슴으로 하늘과 산천에 제사지냈다.”라고 한 고구려의 기록이나, 신라가 삼산오악에 각기 대사(大祀)와 중사(中祀)를 올렸다는 기록으로 보아, 산악숭배는 신라 · 고구려 · 백제 및 부여 등 상고대 왕국의 국가적인 규모의 관례적인 종교행사였음을 알게 된다. 이것은 고려왕조를 거쳐 조선왕조에까지 이어져 천신 및 지신숭앙과 함께 가장 전통성 깊은 자연숭앙을 이루고 있었다.
신라에는 나력(奈歷) · 골화(骨火) · 혈례(穴禮) 등 대사를 바친 삼산(三山)과 토함산 · 지리산 · 계룡산 · 태백산 · 부악(父岳) 등 중사를 드린 오악이 왕가의 산악숭배의 중핵을 이루고 있었거니와, 이 밖에 소사를 바친 상악(霜岳) · 설악(雪岳) · 감악(紺岳) · 서술(西述) 등 전국에 걸쳐 무려 스물넷의 산들이 있었다. 국가수호와 재해방지를 위한 기도와 기우 등이 이 산들을 대상으로 하여 치러졌다.
고려시대에는 태조가 산천의 음우(陰祐)로 나라를 일으켰다고 한 유훈(遺訓)을 따라 신라처럼 국가수호와 왕실보존의 진산(鎭山)으로 산악을 숭앙하였다. 태종은 불타(佛陀)의 호위, 산천의 음우 등에 힘입어 창업이 이루어졌음을 지적하면서, 부처를 섬기기 위해서는 팔관회를 존중하기를, 그리고 천령(天靈)에 이바지하기 위해서는 용신 · 대천(大川)과 함께 오악과 명산을 받들도록 하라고 교리를 내리고 있다.
그러나 고려왕조는 이 창업에 앞선 선대에 이미 부소산(扶蘇山) · 송악(松嶽), 그리고 곡령(穀嶺) 등이 풍수설과 관련되어 왕조의 텃밭이 되었음을 여러 기록들은 보여주고 있다. 풍수지리설은 산악숭배의 고려왕조적인 변형이라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
“용건(龍建)이 새 집을 송악산 남쪽에 짓다. 그때 동리산(桐裏山)의 스님인 도선(道詵)이 입당(入唐)하여 지리법을 익혀 돌아오다가 백두산에 올라서는 곡령에 이르러 새 집을 보고는, ‘제(穄)를 심을 곳에 어찌 마(麻)를 심을까 보냐!’라고 하였다.
용건이 뒤쫓아 더불어 곡령에 올라 산수의 맥을 짚었다. 도선은 ‘명년에 반드시 성자(聖子)를 낳으리니 이름을 왕건(王建)이라 할지어다. 삼한(三韓)을 통합하리라.’고 하였다. 용건은 그 말을 따라 집을 짓고 거기 살았는데, 그 달에 아기를 가졌으니 이로써 태조를 낳게 되다.”( 『고려사』 세계)
이 기록은 고려왕조 창업의 기틀이 풍수지리설과 맺어진 산악숭배에 의해 잡혀졌음을 일러주고 있다. 왕조 창건이 산악에 힘입어 이루어졌다는 믿음 때문에 고려왕조는 재변이나 위기가 있을 때마다 오악명산에 빈 것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국가적인 중요 행사가 있을 적마다 이른바 산에 대한 가호(加號)를 시행하였다.
가호란 신호(神號) · 덕호(德號) · 훈호(勳號) · 존호(尊號) · 작호(爵號) 등을 산에다 붙여주는 것을 뜻한다. 산의 자체를 높임으로써 그 이름을 영예롭게 한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그 밖에 총정(總正)이나 지기(知幾) 같은 상자(上字)를 산에다 붙여주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산에 대한 가호는 가령, 태자책봉 · 선왕선후(先王先后)에 대한 가상존호(加上尊號) · 대묘친제(大廟親祭), 왕의 순행과 귀환 등과 같은 국가의 중요 행사에 즈음하여 베풀어졌다.
그와 같은 국가적 행사가 산들의 음우가호(陰祐加護)로 이루어졌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삼별초(三別抄)가 진압되었을 때, 무등산 · 금성산 · 감악산 등의 음우가 있었다고 믿고, 치제(致祭)하게 한 사례들도 산 가호에 준하는 산악숭배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산천에 묘사를 짓고 신병(神兵)이 전쟁에 이기게 도와주도록 빈 경우도 앞에서 말한 사례들과 더불어 그 기능이며 뜻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국가에 변고가 있을 때 대궐 뜰안에 산천의 신들을 모셔다가 왕이 친제하는 것을 초(醮)라고 하였다.
고려왕조의 산악숭배는 대체로 조선왕조에 의해 계승되었다. 동(東)금강산 · 남(南)지리산 · 중(中) 삼각산 · 서(西) 묘향산 · 북(北) 오대산 등의 5악과, 동오대산 · 남 속리산 · 중 백악산 · 서구월산 · 북 장백산 등의 5진이 태조 때 이미 제사지내는 산으로 지정되어 있었다.
이와 같은 왕조의 산악숭배는 국가수호 · 왕조보존 및 천재지변의 극복 등과 관련되어 있었다. 진산이라는 개념 속에 이와 같은 산악의 성격이 포괄되는 것이라 보아도 좋을 것이다.
민속신앙 속의 산악숭배에서도 지역수호신, 즉 진산의 개념은 매우 농후하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왕조의 여시조들이 정현모주 · 선도산성모 · 성거산성모(고려왕조의 시조여신) 등으로 일컬어진 여산신인 것과 같이, 왕족이 아니면서도 치술령신모로 일컬어진 산여신이 존재하고 있어, 이 방면에서도 민속신앙과 왕조의 산악숭배 사이에 존재하는 공질성을 엿보이게 하고 있다.
남해왕의 부인인 운제산성모(雲梯山聖母)이며 오늘날에도 전하고 있는 지리산성모천왕 등과 함께 이들 여산신들은 모두 산모신(山母神)으로 간주되어도 좋을 것이다. 이 경우, 오늘날 각지에 노적봉전설을 남기고 있는 ‘미륵할미’도 빠뜨릴 수 없다.
그럴 경우 산모신은 당연히 ‘산할미[山姑]’나 산노고(山老姑)라는 관념과 맺어질 것이다. 물할미와 지모신(地母神)과 더불어 산모신은 자연모신(自然母神) 신앙의 3위를 이루고 있는 셈이다.
민속신앙에서의 산악과 산신은 지역수호신의 성격을 가장 강하게 가지고 있다. 이 경우, 산신은 산신령 · 신령 등으로 불리고, 때로 노인으로 관념되거나 아니면 호랑이로 관념되기도 한다. 그런가 하면 호랑이는 단순히 산신의 말 정도로 관념되는 경우도 있다.
산신령이 노인, 그것도 흰 수염의 선풍도골(仙風道骨)의 노인으로 관념될 때, 산신숭배는 신선사상과 같은 유대를 가지게 된다. 가령, 선산(仙山)이라는 개념이 전해진 것과 최치원(崔致遠)이 입산화선(入山化仙)하였다든가 하는 믿음이 이 경우에 작용하고 있는 것이다.
지역수호신으로서의 산신은 서낭신과 겹쳐서 동신, 곧 마을신으로 섬겨지면서 동신제(洞神祭) · 서낭굿 · 별신굿 · 당산굿 등의 주신(主神)이 되어 민간신앙에서 가장 중요한 신으로 부상하게 된다. 지역에 따라서는 동신제가 아예 산신제로 관념될 정도이다. 산신각(山神閣)신앙이라는 형태로 불교에 편입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