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워드 : 동지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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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유학생 단체.
동경조선고학생동우회 (東京朝鮮苦學生同友會)
1920년 일본 동경에서 조직되었던 유학생 단체.
민찬호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합성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소약소국동맹회의와 필라델피아 대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민찬호 (閔贊鎬)
민찬호는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1905년 미국으로 이주하여 한인교회 목사로 재직하면서 합성협회, 국민회,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 흥사단 등에서 활동하였다. 1918년 대한인국민회 중앙총회의 결정에 따라 소약소국동맹회의와 필라델피아 대한인자유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동지회, 조선민족혁명당 하와이 총지부 등의 지도자로서 활약하였다.
강진은 일제강점기 때, 대회파 공산당 책임비서, 사회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강나후렌치, 권성만, 김용칠, 김와시리, 백인석, 술리모프 등으로도 불렸다. 1922년 국립고등소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7년 간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경성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맡았다. 1946년 사회노동당 준비위원으로 이북을 방문 후 11월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50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강진 (姜進)
강진은 일제강점기 때, 대회파 공산당 책임비서, 사회노동당 부위원장 등을 역임한 사회주의 운동가이다. 강나후렌치, 권성만, 김용칠, 김와시리, 백인석, 술리모프 등으로도 불렸다. 1922년 국립고등소학교에 재학 중 공산주의에 대한 교양과 훈련을 받았다. 1927년 간도 용정에서 조선공산당에 가입했다. 1928년 경성에서 고려공산청년회 중앙위원과 조직부장을 맡았다. 1945년 9월 조선공산당 결성에 참여해 중앙위원 및 정치국원을 맡았다. 1946년 사회노동당 준비위원으로 이북을 방문 후 11월 부위원장에 추대되었다. 1950년 이후 행적은 알려져 있지 않다.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친일승려들을 규탄하는 등 불교계 중심인물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한 승려·독립운동가.
김상호 (金尙昊)
일제강점기 때, 임시정부를 지원하고 친일승려들을 규탄하는 등 불교계 중심인물이 되어 항일투쟁을 전개한 승려·독립운동가.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무산자동맹회 (無産者同盟會)
무산자동맹회는 1922년 3월 서울에서 사회주의자들이 조직하였던 사상단체이다. 무산자동지회(無産者同志會)와 신인동맹회(新人同盟會)가 통합하여 설립된 단체이다. 1922년 12월 22일 서울 천도교당에서 개최한 강연회에는 1,500여 명의 청중이 참여하였고, 참석자 가운데 양화공(洋靴工)만도 200여 명에 달하였다. 1925년 4월 사회주의단체인 화요회(火曜會) · 북풍회(北風會) · 조선노동당과 함께 ‘4단체 합동위원회’를 구성하였으며, 1926년 4월 이들 세 단체와 함께 정우회(正友會)를 발족시키고 발전적으로 해산되었다.
김치정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악한국혁명동지회,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사, 노동계급사 결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2년 11월 일제 경체에 체포되어 1936년 순국하였다.
김치정 (金致廷)
김치정은 일제강점기 사회주의운동가이자 독립운동가이다. 중국으로 건너가 유악한국혁명동지회, 재중국본부한인청년동맹, 중국공산당 상하이시위원회에 가입하였다. 1930년 일본으로 건너가 무산자사, 노동계급사 결성과 조선공산당재건투쟁협의회에 참여하였다. 1932년 11월 일제 경체에 체포되어 1936년 순국하였다.
유진산은 해방 이후 3, 4, 5, 6, 7, 8, 9대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5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26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광복 여러 청년 조직을 결성해 청년운동을 하던 중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4년 이래 3~9대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죽었다.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한 합리주의자로,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유진산 (柳珍山)
유진산은 해방 이후 3, 4, 5, 6, 7, 8, 9대 국회의원과 신민당 총재 등을 역임한 정치인이다. 1905년 충남 금산 출생으로 1926년 와세다 대학에 입학하였으나 독서회사건으로 투옥되었다. 광복 여러 청년 조직을 결성해 청년운동을 하던 중 정계에 투신하였다. 1954년 이래 3~9대 연속으로 국회의원에 당선되면서 야당 중진 의원으로 활약하였으며, 1970년 신민당 총재를 역임했다. 1974년 유신헌법개헌투쟁을 선언하고 나섰으나 결장암으로 죽었다. 유진산은 권모술수에 능한 합리주의자로, 민주정치의 기본을 대화와 타협에 두었던 정치인이었다.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의부 경성지부 참모 등을 역임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이병욱 (李丙旭)
일제강점기 때, 대한통의부 경성지부 참모 등을 역임하며 항일무장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
혈복단(血復團)은 1919년 11월 서울에서 조직되어 주로 경기도 수원에서 활동한 비밀결사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이 조직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혈복단의 주요 활동은 이득수(李得壽)와 박선태(朴善泰)가 조직한 경기도 수원지부에서 이루어졌다.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가입을 추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혈복단 (血復團)
혈복단(血復團)은 1919년 11월 서울에서 조직되어 주로 경기도 수원에서 활동한 비밀결사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김태원(金泰源)이 조직하였으며, 독립운동 자금 모집과 민족의식 고취를 목적으로 하였다. 혈복단의 주요 활동은 이득수(李得壽)와 박선태(朴善泰)가 조직한 경기도 수원지부에서 이루어졌다. 『독립신문』을 배포하고 대한적십자회(大韓赤十字會) 가입을 추진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흥업구락부 (興業俱樂部)
흥업구락부는 1925년 3월 이승만의 독립혁명동지회와 연계되어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이다. 서울 신흥우의 집에서 비밀리에 흥업구락부가 조직되었으며, 창립회원 대부분은 YMCA와 밀접하게 연관을 가진 민족주의 계열의 인물이었다. 이들은 실력양성운동을 수행하였으며, 사회주의 계열과 함께 민족연합전선인 신간회를 결성하는 데 참여하였다. 1938년 ‘흥업구락부 사건’으로 관련자 54명이 체포되었다. 1938년 9월 일제는 ‘흥업구락부 사건’ 관련자에게 ‘전향 성명서’를 받은 후, 이들을 기소유예 처분으로 석방하였다.
공화민정회는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이다. 당시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70명의 신정동지회가 발족되었다. 신정동지회를 견제하기 위해 의석이 적은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제휴하였는데 민주국민당이 요직을 독점하였다. 공화구락부는 반이승만세력과 합동하려는 신정동지회와 결합하여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 원외세력과 합동을 제안하여 신당의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합동이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화민정회의 신당 결성을 방해하였다.
공화민정회 (共和民政會)
공화민정회는 1951년 5월, 제2대 국회에서 공화구락부와 신정동지회가 결합하여 구성한 교섭단체이다. 당시 국회에서 교섭단체를 구성할 때 민정동지회와 국민구락부가 통합하여 70명의 신정동지회가 발족되었다. 신정동지회를 견제하기 위해 의석이 적은 민주국민당과 공화구락부가 제휴하였는데 민주국민당이 요직을 독점하였다. 공화구락부는 반이승만세력과 합동하려는 신정동지회와 결합하여 신당을 결성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은 공화민정회에 원외세력과 합동을 제안하여 신당의 성격을 바꾸려 시도하였으나 합동이 결렬되었다. 이승만은 성명서를 발표하여 공화민정회의 신당 결성을 방해하였다.
제헌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권태욱 (權泰郁)
제헌국회의원,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한 정치인.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재일의용병 (在日義勇兵)
6·25전쟁 당시 조국방위를 위해 참전한 642명의 재일동포 청년들로 구성된 의용부대.
미주한인회총연합회(약칭 미주총련)는 1977년에 창립된 재미한인사회의 대표 단체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이민정착과 그들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하며 미 주류사회 참여에 필요한 제반 활동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안창호가 1903년에 설립한 한인친목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모금해 전달하였다. 전 미주의 지역한인연합회 및 지역한인회와 연대하며 한인회 간 친목도모, 미국에서의 한인 전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협조체제의 구축, 정보의 상호 공유 등을 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미주한인회총연합회 (美州韓人會總聯合會)
미주한인회총연합회(약칭 미주총련)는 1977년에 창립된 재미한인사회의 대표 단체이다. 미국에 거주하는 한민족의 이민정착과 그들의 법적, 경제적, 사회적 지위 향상을 도모하고, 한국 고유문화를 보존하며 미 주류사회 참여에 필요한 제반 활동을 돕는 것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 단체는 안창호가 1903년에 설립한 한인친목회에서 시작하였는데, 일제강점기에는 독립군에 군자금을 모금해 전달하였다. 전 미주의 지역한인연합회 및 지역한인회와 연대하며 한인회 간 친목도모, 미국에서의 한인 전체와 관련된 문제에 대한 협조체제의 구축, 정보의 상호 공유 등을 위한 네트워크를 갖고 있다.
김종림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고종 23)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여 ‘쌀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방침에 호응하여 자신의 농장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나성(LA)한인공동회, 대한인국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김종림 (金鐘林)
김종림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인국민회 교육위원,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집행위원, 북미지방동지회 대표회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6년(고종 23)에 태어나 1973년에 사망했다. 함경남도에서 태어나 캘리포니아로 이민하여 ‘쌀의 대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실업가로 크게 성공하였다. 임시정부의 비행기대 편성 방침에 호응하여 자신의 농장에 비행훈련장을 건설하고 비행사양성소를 설립하였다. 광주학생운동을 후원하고 선전할 목적으로 한인공동회를 설립하였다. 나성(LA)한인공동회, 대한인국국민회, 조선의용대 미주후원회 등을 결성하여 활동하였다.
다뉴바 한인장로교회는 1912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다뉴바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세운 장로교회이다. 다뉴바는 유명한 과일 생산지로 이 지역 과일농장에서 일하는 한인근로자들이 증가하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치완 전도사의 인도로 설립되어 한때 교인이 15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한인의 급감으로 1958년 폐쇄되었다. 중가주 지역 한인교회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되어 이 지역 한인들과 한인교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 모금, 3.1운동 기념식 개최, 민족운동 단체의 설립, 중경 임시정부 지원 등 미주 독립운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다뉴바 한인장로교회 (Dinuba 韓人長老敎會)
다뉴바 한인장로교회는 1912년 9월 미국 캘리포니아 다뉴바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세운 장로교회이다. 다뉴바는 유명한 과일 생산지로 이 지역 과일농장에서 일하는 한인근로자들이 증가하자 교회를 설립하게 되었다. 이치완 전도사의 인도로 설립되어 한때 교인이 150명에 이르기도 했으나 한인의 급감으로 1958년 폐쇄되었다. 중가주 지역 한인교회 가운데 가장 먼저 설립되어 이 지역 한인들과 한인교회들의 구심점이 되었다. 독립운동 모금, 3.1운동 기념식 개최, 민족운동 단체의 설립, 중경 임시정부 지원 등 미주 독립운동사에서 큰 위치를 차지한다.
일제강점기 때, 신흥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사업가·독립운동가.
송철 (宋喆)
일제강점기 때, 신흥학교 교사로 근무하다가 미국에서 대한인동지회 총회장,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집행부위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사업가·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
전수산 (田壽山|Susan Chun Lee)
일제강점기,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하고, 대한부인구제회 회장을 역임한 여성 독립운동가.
제2대 국회의원, 자유당 중앙당 산업부 차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박승하 (朴勝夏)
제2대 국회의원, 자유당 중앙당 산업부 차장 등을 역임한 정치인.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
송필만 (宋必滿)
송필만은 일제강점기 때, 이승만 지지 세력 규합을 위해 힘쓰던 정치인이다. 1890년 충북 진천 출생으로 일본 유학 후 연희전문학교 교수로 재직했다. 미국 유학을 전후로 하와이와 워싱턴에서 이승만을 도왔다. 해방 후 이승만 비서로 근무하며 신탁통치반대운동을 벌였다.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지방부 부장, 민주당 중앙상무위원 등을 역임하였다. 1948년 한국민주당 후보로 충북 진천군 제헌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5·16군사정변 후 정치활동을 금지당했다가 1963년 해금되었다. 1972년 10월 유신 지지 성명 발표에 참여하였으며, 1978년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