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송희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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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연휘는 현재 활동 시기와 국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화가이다. 일본 문헌인 『군대관좌우장기』에는 “고연휘는 원대 사람이고, 혹 일본에서는 그의 자가 연휘라고 전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대 화가 고극공의 자인 ‘언경’이 고연휘의 ‘연휘’로 와전된 까닭에 고언경과 고연휘가 같은 인물이며, 고극공이 고연휘로 잘못 알려져 왔다. 또한 고연휘의 전칭작인 「하경산수도」가 중국 및 일본 미법산수화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 고연휘를 한국 화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고연휘 (高然暉)
고연휘는 현재 활동 시기와 국적이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은 화가이다. 일본 문헌인 『군대관좌우장기』에는 “고연휘는 원대 사람이고, 혹 일본에서는 그의 자가 연휘라고 전해진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원대 화가 고극공의 자인 ‘언경’이 고연휘의 ‘연휘’로 와전된 까닭에 고언경과 고연휘가 같은 인물이며, 고극공이 고연휘로 잘못 알려져 왔다. 또한 고연휘의 전칭작인 「하경산수도」가 중국 및 일본 미법산수화와 다른 면모를 보이고 있어, 고연휘를 한국 화가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권돈인은 조선 후기에 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1813년(순조 13)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사간원 헌납을 거쳐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뒤 1845년(헌종 11) 영의정에 올랐다. 문사 관료와 폭넓게 교유하여 고증학과 금석학을 연구하고 서화 제작 및 감상에 심취했다. 추사 김정희와 친분이 돈독했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가 있다.
권돈인 (權敦仁)
권돈인은 조선 후기에 우의정·좌의정·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1813년(순조 13) 증광 문과에 급제하였고, 사간원 헌납을 거쳐 이조 판서, 우의정, 좌의정을 역임한 뒤 1845년(헌종 11) 영의정에 올랐다. 문사 관료와 폭넓게 교유하여 고증학과 금석학을 연구하고 서화 제작 및 감상에 심취했다. 추사 김정희와 친분이 돈독했다. 대표작으로는 「세한도」가 있다.
정선 필 「금강전도」는 1734년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금강전도’와 ‘겸재’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겸재’라고 새긴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갑인동제'라는 관기와 함께 제화시가 적혀 있다. 정선은 「금강전도」에서 비로봉을 비롯한 내금강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로 표현하여 산세를 원형으로 배치했다. 이러한 구도는 그가 총도나 전경도 형식의 금강산을 그릴 때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다.
정선 필 금강전도 (鄭敾 筆 金剛全圖)
정선 필 「금강전도」는 1734년 정선이 그린 진경산수화이다. 화면 왼쪽 상단에는 ‘금강전도’와 ‘겸재’가 적혀 있고, 그 아래에 ‘겸재’라고 새긴 백문방인이 찍혀 있다. 오른쪽 상단에는 '갑인동제'라는 관기와 함께 제화시가 적혀 있다. 정선은 「금강전도」에서 비로봉을 비롯한 내금강을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시로 표현하여 산세를 원형으로 배치했다. 이러한 구도는 그가 총도나 전경도 형식의 금강산을 그릴 때 적극 활용하는 방식이다.
김득신은 조선 후기 「파적도」, 『긍재풍속화첩』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대표적 화원 집안인 개성 김씨 출신이다. 1783년(정조 7) 실시된 초대 차비대령화원 선발에 합격했고, 이인문과 함께 정조의 가장 큰 신임을 받았다. 1815년(순조 15)까지 40여 년 동안 20여 차례 궁중 행사에 차출되었다. 1796년(정조 20)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과 함께 『화성행행도』 제작에 참여했다.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남겼는데, 김응환과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이 있다.
김득신 (金得臣)
김득신은 조선 후기 「파적도」, 『긍재풍속화첩』 등의 작품을 그린 화가이다. 대표적 화원 집안인 개성 김씨 출신이다. 1783년(정조 7) 실시된 초대 차비대령화원 선발에 합격했고, 이인문과 함께 정조의 가장 큰 신임을 받았다. 1815년(순조 15)까지 40여 년 동안 20여 차례 궁중 행사에 차출되었다. 1796년(정조 20) 이인문, 장한종, 이명규 등과 함께 『화성행행도』 제작에 참여했다. 다양한 화목의 그림을 남겼는데, 김응환과 김홍도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대표작으로는 『긍재풍속화첩』(간송미술관)이 있다.
김명국은 조선 후기 「사시팔경도」, 「설중귀려도」, 「달마도」 등의 작품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도화서 종6품 교수를 거쳐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고, 각종 궁중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그림 제작에 30여 차례 선발되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통신사 수행 화원에 발탁되어 일본을 두 차례 방문했다.
김명국 (金明國)
김명국은 조선 후기 「사시팔경도」, 「설중귀려도」, 「달마도」 등의 작품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도화서 종6품 교수를 거쳐 정6품 사과(司果)를 지냈고, 각종 궁중 행사와 의식에 필요한 그림 제작에 30여 차례 선발되었다. 1636년(인조 14)과 1643년(인조 21) 통신사 수행 화원에 발탁되어 일본을 두 차례 방문했다.
김명희는 조선 후기에 홍문관 직제학, 강동현령을 역임한 서예가이다. 김노경의 아들이며 추사 김정희의 아우이다.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1822년(순조 22) 10월 연경을 방문했을 때 청대 금석학자와 활발하게 교유하였고, 그들과 김정희가 친분을 쌓는 데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학문이 깊고 시문과 서예에 능했으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련 자료에는 고려대학교 소장 『청조명가서독』과 필사본 시집인 『산천시』가 있다. 서예가로도 명망이 있었다. 구양순체를 따랐으며, 소해는 형 김정희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김명희 (金命喜)
김명희는 조선 후기에 홍문관 직제학, 강동현령을 역임한 서예가이다. 김노경의 아들이며 추사 김정희의 아우이다.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1822년(순조 22) 10월 연경을 방문했을 때 청대 금석학자와 활발하게 교유하였고, 그들과 김정희가 친분을 쌓는 데 가교 역할을 담당했다. 학문이 깊고 시문과 서예에 능했으며 금석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관련 자료에는 고려대학교 소장 『청조명가서독』과 필사본 시집인 『산천시』가 있다. 서예가로도 명망이 있었다. 구양순체를 따랐으며, 소해는 형 김정희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김석신은 조선 후기에 『도봉첩』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당시 화원 가문으로 가장 유명했던 개성 김씨 출신으로, 큰아버지 김응환의 양자이자 김득신의 동생이다. 1816년(순조 16) 장헌세자의 빈인 헌경혜빈 국장에 따른 빈궁혼궁도감의 혼궁 수리소에서 근무했다. 현존작 대부분이 한강 인근을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계승했고, 김응환과 김홍도의 실경산수 영향을 받아 한양의 산천을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 『도봉첩』이 있다.
김석신 (金碩臣)
김석신은 조선 후기에 『도봉첩』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당시 화원 가문으로 가장 유명했던 개성 김씨 출신으로, 큰아버지 김응환의 양자이자 김득신의 동생이다. 1816년(순조 16) 장헌세자의 빈인 헌경혜빈 국장에 따른 빈궁혼궁도감의 혼궁 수리소에서 근무했다. 현존작 대부분이 한강 인근을 그린 실경산수화이다. 정선의 진경산수화를 계승했고, 김응환과 김홍도의 실경산수 영향을 받아 한양의 산천을 주로 그렸다. 대표작으로 『도봉첩』이 있다.
김윤겸은 조선 후기에 『영남기행화첩』, 『금강산화첩』 등의 작품을 남긴 도화서 화원이다. 안동 김씨 김창업의 서자이다. 서얼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찰방에 등용되었고, 여러 명사와 함께 시회와 유람을 하며 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46세 이후에 금강산, 한양 근교, 단양, 영남 지방 등 전국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실경산수화를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영남기행화첩』, 『금강산화첩』, 『진경산수화첩』 등이 있다.
김윤겸 (金允謙)
김윤겸은 조선 후기에 『영남기행화첩』, 『금강산화첩』 등의 작품을 남긴 도화서 화원이다. 안동 김씨 김창업의 서자이다. 서얼임에도 불구하고 명문가 출신이었기 때문에 찰방에 등용되었고, 여러 명사와 함께 시회와 유람을 하며 시와 그림을 남겼다. 특히 46세 이후에 금강산, 한양 근교, 단양, 영남 지방 등 전국의 명승을 여행하면서 실경산수화를 그렸다. 대표작으로는 『영남기행화첩』, 『금강산화첩』, 『진경산수화첩』 등이 있다.
김응환은 조선 후기에 『해악전도첩』 등의 작품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화원 가문인 개성 김씨 출신이다. 1783년(정조 7) 윤 3월 정조가 규장각 소속 차비대령화원을 선발할 때 영조 연간부터 차비대령화원이었던 김응환은 시험 없이 원차비대령화원으로 차정되어 1788년(정조 12)까지 5년 동안 봉직했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영동 9군과 금강산을 주유하며 사경을 수행하여 『해악전도첩』을 완성했다. 주로 산수화를 남겼다.
김응환 (金應煥)
김응환은 조선 후기에 『해악전도첩』 등의 작품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화원 가문인 개성 김씨 출신이다. 1783년(정조 7) 윤 3월 정조가 규장각 소속 차비대령화원을 선발할 때 영조 연간부터 차비대령화원이었던 김응환은 시험 없이 원차비대령화원으로 차정되어 1788년(정조 12)까지 5년 동안 봉직했다. 1788년(정조 12) 정조의 어명으로 김홍도와 함께 영동 9군과 금강산을 주유하며 사경을 수행하여 『해악전도첩』을 완성했다. 주로 산수화를 남겼다.
김진여는 조선 후기에 『성적도』, 『기사계첩』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1700년에 원나라 왕진붕의 『성적도』를, 1708년에 「곤여만국전도」를 모사했다. 1713년에는 숙종 어진의 도사에 참여한 공으로 종5품 동반직을 제수받았다. 1719년 숙종의 입기로소 관련 기록물인 『기사계첩』 제작에 참여했다. 김진여는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 여러 화목에 고루 능하였다. 그중 초상화에서 안면 요철과 피부 질감으로 입체감을 살리며 이전 시기와 달라진 표현법을 선보인 점은 특히 주목된다.
김진여 (金振汝)
김진여는 조선 후기에 『성적도』, 『기사계첩』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1700년에 원나라 왕진붕의 『성적도』를, 1708년에 「곤여만국전도」를 모사했다. 1713년에는 숙종 어진의 도사에 참여한 공으로 종5품 동반직을 제수받았다. 1719년 숙종의 입기로소 관련 기록물인 『기사계첩』 제작에 참여했다. 김진여는 산수화, 화조화, 인물화 등 여러 화목에 고루 능하였다. 그중 초상화에서 안면 요철과 피부 질감으로 입체감을 살리며 이전 시기와 달라진 표현법을 선보인 점은 특히 주목된다.
김하종은 조선 후기에 『해산도첩』, 『풍악권』 등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할아버지는 김응환, 아버지는 김득신, 형은 김건종이다. 순조 대 중반경인 1816년 6월 14일부터 녹취재에 참여한 뒤, 1863년 3월 26일까지 47년간 녹취재에 참여했다. 금강산 일대를 그린 진경산수화첩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해산도첩』[1815]과 『풍악권』[1865]이 있다.
김하종 (金夏鐘)
김하종은 조선 후기에 『해산도첩』, 『풍악권』 등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할아버지는 김응환, 아버지는 김득신, 형은 김건종이다. 순조 대 중반경인 1816년 6월 14일부터 녹취재에 참여한 뒤, 1863년 3월 26일까지 47년간 녹취재에 참여했다. 금강산 일대를 그린 진경산수화첩을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해산도첩』[1815]과 『풍악권』[1865]이 있다.
김홍도는 조선 후기에 「군선도」, 「서원아집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원이다. 하급 무반을 많이 배출한 중인 신분의 김해 김씨 출신이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았고, 10대 후반부터 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어진 도사 및 의궤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조선 후기 최고의 규장각 화원 화가로 활동했다.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 모든 화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김홍도 (金弘道)
김홍도는 조선 후기에 「군선도」, 「서원아집도」 등의 작품을 그린 화원이다. 하급 무반을 많이 배출한 중인 신분의 김해 김씨 출신이다. 어린 시절 강세황의 지도를 받았고, 10대 후반부터 화원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어진 도사 및 의궤 제작에도 참여하는 등, 명실상부한 조선 후기 최고의 규장각 화원 화가로 활동했다. 산수화, 도석인물화, 풍속화, 화조화 등 모든 화목에서 발군의 실력을 보여주었다.
김후신은 조선 후기 「야압도」, 「대쾌도」 등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아버지는 도화서 화원인 김희겸이다. 인의, 선공감 주부, 사근도 찰방 등을 역임했다. 1773년 영조 80세 어진 도사에 수종화사로 참여해서 수령으로 승전되었다. 1781년에는 정조 31세 어진 도사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산수, 인물, 화조, 영모 등을 그렸고, 대표작으로는 「산수도」, 「야압도」, 「대쾌도」 등이 있다.
김후신 (金厚臣)
김후신은 조선 후기 「야압도」, 「대쾌도」 등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아버지는 도화서 화원인 김희겸이다. 인의, 선공감 주부, 사근도 찰방 등을 역임했다. 1773년 영조 80세 어진 도사에 수종화사로 참여해서 수령으로 승전되었다. 1781년에는 정조 31세 어진 도사에 수종화사로 참여했다. 산수, 인물, 화조, 영모 등을 그렸고, 대표작으로는 「산수도」, 「야압도」, 「대쾌도」 등이 있다.
남계우는 조선 후기 화접도를 주로 그린 화가이다. 나비에 심취하여 '남나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꽃과 나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철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각 종의 특징과 생태를 정확하게 재현한 군접도 형식을 다작했다. 소론, 남인 출신의 백과사전적 저술 태도와 박물학적 학문 경향이 엿보인다.
남계우 (南啓宇)
남계우는 조선 후기 화접도를 주로 그린 화가이다. 나비에 심취하여 '남나비'라는 별명이 있을 정도로 꽃과 나비 그림을 많이 그렸다. 철저한 관찰과 세밀한 묘사로 각 종의 특징과 생태를 정확하게 재현한 군접도 형식을 다작했다. 소론, 남인 출신의 백과사전적 저술 태도와 박물학적 학문 경향이 엿보인다.
문청은 조선 전기에 「유마거사상」, 「누각산수도」를 그린 화가이다. 관련 문헌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일본 다이토쿠지 승려들의 후원을 받았음이 확인되며, 「누각산수도」에서는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강하게 발견된다.
문청 (文淸)
문청은 조선 전기에 「유마거사상」, 「누각산수도」를 그린 화가이다. 관련 문헌 기록이 발견되지 않아 현재 조선인인지 일본인인지 명확하게 규명되지 않았다. 일본 다이토쿠지 승려들의 후원을 받았음이 확인되며, 「누각산수도」에서는 안견파 화풍의 영향이 강하게 발견된다.
산수인물화는 자연에 은일하며 다양한 행위를 하는 인물상을 표현한 회화 형식이다. 화면 구성에서 어떤 소재가 중심으로 부각되었는지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즉 대경산수인물화는 산봉우리와 넓은 대지가 화폭 중심에 위치하고 사람이 부수적 기능을 하는 회화 형식이다. 소경인물화는 인물상이 주요 소재가 되고 자연경관이 배경으로 소략하게 표현된 형식이다. 이는 산수가 일부 포함된 인물화의 성격이 더욱 강하며 자연 산수가 배경을 이루는 야외초상의 기능을 띠고 있다.
산수인물화 (山水人物畵)
산수인물화는 자연에 은일하며 다양한 행위를 하는 인물상을 표현한 회화 형식이다. 화면 구성에서 어떤 소재가 중심으로 부각되었는지에 따라 명칭이 달라진다. 즉 대경산수인물화는 산봉우리와 넓은 대지가 화폭 중심에 위치하고 사람이 부수적 기능을 하는 회화 형식이다. 소경인물화는 인물상이 주요 소재가 되고 자연경관이 배경으로 소략하게 표현된 형식이다. 이는 산수가 일부 포함된 인물화의 성격이 더욱 강하며 자연 산수가 배경을 이루는 야외초상의 기능을 띠고 있다.
신윤복은 조선 후기 『혜원전신첩』, 『여속도첩』,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1대손이며, 아버지 신한평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다. 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고루 잘 그렸으나,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특히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신윤복 (申潤福)
신윤복은 조선 후기 『혜원전신첩』, 『여속도첩』, 「미인도」를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1대손이며, 아버지 신한평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했다. 산수화, 화조영모화, 고사인물화 등을 고루 잘 그렸으나, 여인의 생활상을 포착한 여속도에서 특히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다.
신잠은 조선 전기 「심매도」, 「사계화조도」, 「묵죽도」 등을 그린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숙주이며, 아버지는 예조참판 신종호이다. 1519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파방되었다. 1521년에는 다시 신사무옥에 연루되었고, 이후 20여 년간 귀양과 은거를 하며 서화에만 몰두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고 평가받았다. 연작 형식의 묵죽도 병풍과 화첩을 남긴 문인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신잠 (申潛)
신잠은 조선 전기 「심매도」, 「사계화조도」, 「묵죽도」 등을 그린 문신이자 서화가이다. 증조할아버지는 신숙주이며, 아버지는 예조참판 신종호이다. 1519년에 현량과에 급제하였으나 기묘사화로 파방되었다. 1521년에는 다시 신사무옥에 연루되었고, 이후 20여 년간 귀양과 은거를 하며 서화에만 몰두했다. 시서화에 모두 뛰어나 삼절이라고 평가받았다. 연작 형식의 묵죽도 병풍과 화첩을 남긴 문인화가로 이름이 높았다.
신한평은 조선 후기 「이광사 초상」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0대손이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1784년부터 1809년까지 26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며 어용 화사에 3번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실 납품용 책가도를 잘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했다. 산수, 인물, 속화, 영모, 초충, 산수, 누각, 문방, 매죽 등을 두루 섭렵했다. 대표작으로는 「이광사 초상」, 「화조도」, 「쌍순도」, 「우경산수도」 등이 있다.
신한평 (申漢枰)
신한평은 조선 후기 「이광사 초상」을 그린 도화서 화원이다. 조선 전기 문신 신말주의 10대손이자, 신윤복의 아버지이다. 1784년부터 1809년까지 26년간 차비대령화원으로 봉직하며 어용 화사에 3번 발탁되었다. 그러나 왕실 납품용 책가도를 잘못 그려 도화서에서 퇴출당했다. 산수, 인물, 속화, 영모, 초충, 산수, 누각, 문방, 매죽 등을 두루 섭렵했다. 대표작으로는 「이광사 초상」, 「화조도」, 「쌍순도」, 「우경산수도」 등이 있다.
심사정은 조선 후기 산수화, 도석인물화, 화훼영모화, 풍속화 등을 그린 화가이다. 청송 심씨 명문가 후손이었으나, 할아버지 심익창이 연잉군 시해 미수 사건에 가담하여 고문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평생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산수화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 화조영모화, 풍속화 등을 다작했다. 특히 당시 유입된 중국 화보를 참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 「촉잔도권」이 있다.
심사정 (沈師正)
심사정은 조선 후기 산수화, 도석인물화, 화훼영모화, 풍속화 등을 그린 화가이다. 청송 심씨 명문가 후손이었으나, 할아버지 심익창이 연잉군 시해 미수 사건에 가담하여 고문사하면서 집안이 몰락했다. 평생 생활고를 해결하기 위해 산수화뿐만 아니라, 도석인물화, 화조영모화, 풍속화 등을 다작했다. 특히 당시 유입된 중국 화보를 참조한 그림을 많이 남겼다. 대표작으로는 「강상야박도」, 「촉잔도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