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산비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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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대공탑비
고대사
문헌
통일신라 때의 학자, 최치원이 지은 비문 중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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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사산비명은 남북국시대 통일신라학자 최치원이 지은 비문 가운데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이다. 사산(四山)은 비문이 있는 4곳의 산이라는 뜻이다. 네 개의 비문은 「쌍계사진감선사대공탑비명」, 「성주사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명」, 「대숭복사비명」, 「봉암사지증대사적조탑비명」을 말한다. 이 비명은 당나라에서 귀국한 최치원이 왕명에 따라 저술하였다. 계원필경집과 함께 최지원의 대표적 저술로 뽑힌다. 불교학자들의 필독서였으며, 다수의 주해본이 나왔다. 또한 1차 사료로서 신라시대 불교사 연구와 최치원의 철학사상을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목차
정의
통일신라 때의 학자, 최치원이 지은 비문 중 자료적 가치가 높은 4편을 모아 엮은 금석문집.
내용

네 편의 비문은 ① 충청남도 보령시 성주면 성주리 성주사 터에 있는 대낭혜화상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② 경상남도 하동군 화개면 운수리 쌍계사 경내에 있는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탑비(국보, 1962년 지정), ③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 말방리 대숭복사에 있었던 초월산대숭복사비명, ④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면 원북리 봉암사 경내에 있는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탑비(국보, 2010년 지정)를 가리키며, 위의 네 군데 산 이름을 취하여 일반적으로 ‘사산비명’이라 일컫는다.

신라 불교사에서 우뚝한 위치를 차지하는 세 선사(禪師)의 일생 행적과 화엄종 계열의 왕실 원찰(願刹)인 대숭복사의 창건 내력을 적은 비문으로서, 사비명(寺碑銘)의 찬술은 『문선(文選)』에 보이는 왕건(王巾)의 ‘두타사비명(頭陀寺碑銘)’에서 그 선례를 찾을 수 있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이전에 유례가 없었던 일이다.

네 비 모두 왕명에 의해 찬술되었으며,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귀국한 뒤로부터 은거하기 이전에 걸쳐 찬술되었다. 현재 대숭복사비를 제외한 세 비가 비교적 양호한 상태로 보전되어 있으며, 임진왜란 때 절과 함께 파괴된 것으로 알려진 대숭복사비는 1931년 이후 그 잔편(殘片)이 몇 차례 발굴되었다.

진감선사비와 대숭복사비는 최치원이 직접 글씨까지 썼으며, 대낭혜화상비는 화상의 종제(從弟)인 최인연(崔仁渷, 뒤에 崔彦撝로 개명)이, 지증대사비는 분황사(芬皇寺) 승려 혜강(慧江)이 썼다. 『사산비명』은 우리나라 금석문의 신기원을 여는 웅문거편(雄文巨篇)으로서, 화려한 수사(修辭)에다 함축미와 전아(典雅)함을 잘 갖추고 있다.

『계원필경집』이 재당시(在唐時)에 이룩한 대표적 저술이라면 『사산비명』은 귀국한 이후에 남긴 저술 가운데 백미(白眉)라 할 수 있다. 『사산비명』의 자료적 가치와 중요성은 종래 불교학인들 사이에서 과외독본(課外讀本)으로 널리 읽혀져 왔다는 점과 함께 다수의 주해본이 계속해서 나올 만큼 식자층의 관심이 높았던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사산비명』은 조선 선조 · 광해군 때 명승(名僧) 해안(海眼: 鐵面老人 · 中觀)이 처음으로 『고운집(孤雲集)』에서 네 비문을 뽑아 책으로 엮고 주석을 붙인 이래, 연담 유일(蓮潭有一) · 몽암(蒙庵) · 홍경모(洪景謨) 등의 주해가 이어졌으며, 근세까지 십 수종의 주해본이 나왔다. 이 가운데 정주(精註) · 정교본(精校本)으로는 『문창집(文昌集)』(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과 『계원유향(桂苑遺香)』(崔完秀 소장), 『사산비명주』(梵海 覺岸註), 『정주사산비명(精註四山碑銘)』(石顚 朴漢永註) 등이 꼽힌다.

이 『사산비명』은 『삼국사기』『삼국유사』보다 연대상으로 훨씬 앞설 뿐만 아니라, 당시의 생생한 사실(史實)을 담은 제1차 자료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다. 우리의 고대사 연구, 특히 신라의 선종사를 비롯한 불교사 연구에 좋은 자료가 되는데, 이덕무(李德懋) · 정약용(丁若鏞) · 성해응(成海應)과 같은 저명한 실학자들이 『사산비명』을 신라시대의 귀중한 사료로 여겨 중시하고 있음이 주목된다.

『사산비명』의 문체는 만당(晩唐) 시기에 크게 유행했던 변려문체(騈儷文體)로서, 육조풍(六朝風)의 기어(綺語)와 묘구(妙句)가 많고, 변려문에서 구사(驅使)되는 각종 수사기법과 기교, 그리고 중국 역대 금석문의 법식(法式)이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그러나 지나치게 기교에 흐르거나 나열식의 기술로 꾸며진 것이 아니고, 매우 입체적이고 생동감 있게 서술되었다.

또한 문의(文意)가 창달, 원만하고 음조(音調)가 잘 맞으며, 전고(典故)의 사용이 적절할 뿐 아니라, ‘화려함이 많지만 부박(浮薄)하지 않다’는 평을 받고 있다. 비문이라는 제약된 형식 때문에 문학적 가치를 충분히 평가하기는 어렵지만, 명(銘)을 비롯하여 문학으로 접근할 수 있는 단서가 적지 않다. 문체적 특성 역시 당시의 문풍(文風)과 문장 스타일 등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참고자료가 된다.

또 『사산비명』은 글의 성격이나 형식상 최치원의 사상과 철학을 체계적으로 서술한 것은 아니지만, 여느 비문과는 달리 찬자(撰者)의 사상적 · 철학적 편린들을 많이 담고 있으므로, 그것을 통해 최치원의 철학사상까지도 추론(推論)할 수 있다. 특히 당시 학인(學人)들의 삼교관(三敎觀)에 대한 폭넓은 이해와 함께 최치원 철학사상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동인의식(東人意識)과 동방사상(東方思想)을 고찰함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자료라는 점에서 그 중요성이 높다.

참고문헌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
『朝鮮金石總覽』 上(1919)
『최치원의 철학사상』(최영성, 아세아문화사, 2001)
『역주최치원전집』1 사산비명(최영성, 아세아문화사, 1998)
『신라사산비명』(이우성 교역, 아세아문화사, 1995)
『사산비명집주를 위한 연구』(김지견,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4)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신라편(이지관,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3)
『주해사산비명』(최영성, 아세아문화사, 1987)
『한국금석전문』(허흥식 편, 아세아문화사, 1984)
「사산비명연구」(유영봉, 성균관대학교대학원박사학위논문, 1993)
「최치원의 사산비명연구」(김문기, 『한국의 철학』15, 경북대학교퇴계연구소, 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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