납속책은 조선시대 국가 재정이나 구호 대책을 보조하기 위해 행했던 재정 마련을 위한 정책이다. 변란이나 흉년과 같은 긴급상황에 대응하기 위한 재정을 확보하기 위해 국가에서 일시적으로 일정한 특전을 내걸고 정해진 양의 곡식이나 돈을 받는 정책이다. 노비·서얼 등의 신분적 제약 해방, 군역·향리역 면제, 품계·관직 제수 등의 특전을 주고 공명첩으로 이를 보증했다. 그 외에 자발적으로 곡식을 낸 부유한 자들을 포상하는 ‘부민권분논상’식 납속책도 있었다. 조선 후기 들어 공명첩의 남발과 강매 등의 폐단을 낳았고 전통적 신분제 유지를 위협하는 요인이 되었다.
변란으로 인한 재정적 위기의 타개와 흉년 시 굶주린 백성의 구제에 필요한 재정 확보를 목적으로 국가에서 일시적으로 일정한 특전을 내걸고 소정량의 곡식이나 돈을 받는 것을 납속(納粟)이라 하였다. 납속 시 부여하는 특전의 종류에 따라 노비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는 납속 면천(免賤), 양인에게 군역의 의무를 면제해 주는 납속 면역(免役), 양인 이상을 대상으로 품계나 특히 양반의 경우 실제의 관직까지 제수하는 납속 수직(授職) 등이 있다.
이 같은 특전 부여의 문서로서 면천첩(免賤帖) · 면역첩(免役帖)과 교생이 강경 시험(講經試驗)에서 떨어지면 군역에 나가게 되므로 강경을 면제해주는 특전을 기록한 교생 면강첩(校生免講帖), 그리고 향리역 면제의 특전을 기록한 면향첩(免鄕帖) 등이 있다. 그 밖에 품계와 관직을 기록한 관리 임명서로서 이를 받는 자의 이름 쓰는 난을 비워두는 공명 고신첩(空名告身帖)이 있다. 여기에는 훈도첩(訓導帖) · 노직 당상첩(老職堂上帖) · 추증첩(追贈帖) · 증통정첩(贈通政帖) · 가설실직첩(加設實職帖), 그리고 서얼에게 과거(科擧)와 벼슬에 나가는 것을 허용하는 서얼 허통첩(庶孼許通帖) 등이 발행되었다.
납속의 사례는 조선 전기부터 있었는데 1485년(성종 16)에 기근으로 기민 구제책이 막연할 때 사노 임복(林福)이 쌀 3,000석을 납속하고 그 아들 네 명을 면천시킨 적이 있었다. 1553년(명종 8)에도 재해로 인한 전라도와 경상도의 기근 구호를 위해 납속사목(納粟事目)을 만들어 공사천(公私賤)으로 쌀 50∼100석을 바치면 면천 · 종량(從良)시켰으며, 1583년(선조 16)에는 여진족의 6진 침입 때 병조 판서 이이(李珥)에 의해 서얼에게 납속(혹은 말을 바치게 했음)하고 허통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전기의 납속은 대개 노비에게만 국한된 것으로 그 액수도 후기에 비해서는 상당한 고액이었고, 그나마 공식적으로 제도화되지도 못하였다.
납속이 대규모로 시행되고 제도화된 것은 임진왜란 때부터이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군량미의 조달이 매우 어려워지자, 식량을 모으기 위한 임시 변통책으로서 중앙 정부와 순찰사 및 체찰사 등의 파견 관리에 의해 납속책이 대대적으로 실시되었다. 1593년(선조 26) 호조에서 작성하여 실시한 납속사목에 나타난 납속과 거기에 따른 특전 부여는 〈표 1〉과 같다.
납속자(納粟者)의 구분(區分) | 납속액(納粟額) | 특전(特典) | |
---|---|---|---|
향리(鄕里) | 3석(石) | 3년간 면량(免良) | |
15석 | 평생 면량 | ||
30석 | 참하(參下) 영직(影職) | ||
40석 | 참하영직, 자(子) 2인 면량 | ||
45석 | 군직(軍職) 부여 | ||
80석 | 동반실직(東班實職) | ||
서얼(庶孼) | 5석 | 겸사복(兼司僕) 혹은 서반 6품 실직(西班 六品 實職) | |
15석 | 허통(許通) | ||
20석 | 자식의 허통 | ||
30석 | 참하 영직 | ||
40석 | 6품 영직(影職) | ||
50석 | 5품 영직 | ||
60석 | 동반(東班) 9품 | ||
80석 | 동반 8품 | ||
90석 | 동반 7품 | ||
100석 | 동반 6품 | ||
사족(士族) | 무품자(無品者) | 3석 | 참하영직 |
8석 | 6품 영직 | ||
20석 | 동반 9품 | ||
25석 | 동반 8품 | ||
30석 | 동반 7품 | ||
40석 | 동반 6품 | ||
50석 | 동반 5품 | ||
60석 | 동반 종4품 | ||
80석 | 동반 정4품 | ||
90석 | 동반 종3품 | ||
100석 | 동반 정3품 | ||
유품자 | 10석 당(當) | 승품(陞品) 단, 자궁자(資窮者) 30석 납속시(納粟時) 당상관(堂上官) 승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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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 1〉 1593년(선조 26)의 납속사목 |
이 납속사목에는 향리 · 서얼 · 사족 신분층만 규정하고 있으나, 종전부터 간헐적으로 허용되었던 천인의 납속 종량 역시 함께 실시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전란이 끝난 후인 1600년(선조 33)에 그 동안 발행하고서도 미처 사용하지 못했던 면향첩 · 허통첩 · 공명첩 등 1만 2000여 장을 소각하였으나, 납속제 자체는 전후의 복구, 특히 궁궐 영건이나 축성 등의 수리 사업에 필요한 재정 확보와 물량 조달을 위해 계속되었다. 광해군 때는 은돈과 무명을 받고 동지(同知) · 첨지(僉知)를 제수함과 함께 당상 3품 실직을 부여했고, 인조 · 효종 때에는 납속한 사족에 대해 수령이나 변장(邊將)에 임명하려는 움직임도 있었다.
납속책이 다시 남발된 것은 현종 · 숙종 때였다. 이것은 남한 · 대흥 · 북한 산성의 축조나 보수 같은 군사 시설 확장과 거듭된 흉년에서 오는 기민 구제에서 드는 진휼 사업의 비용을 납속에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1660∼1661년 사이에 반포된 납속사목의 내용은 〈표 2〉와 같다.
종류(種類) | 납속액(納粟額) | 특전(特典) | 비고(備考) |
---|---|---|---|
노직첩(老職帖) | 5(3)석 | 통정(通政) | 60세 이상자 |
3석 | 통정 | 70세 이상자 | |
이하 약(以下略) | |||
추증첩(追贈帖) | 5(2)석 | 직장(直長) · 참군(參軍) · 금부도사(禁府都事) · 별좌(別坐) | |
6(3)석 | 좌랑(佐郞) · 감찰(監察) | ||
7석 | 정랑(正郞) · 도사(都事) | ||
8석 | 첨정(僉正) · 경력(經歷) | ||
9석 | 부정(副正) | ||
10(4)석 | 통례(通禮) | ||
15(5)석 | 판결사(判決事) | ||
17(6)석 | 참의(參議) | ||
20(6)석 | 좌윤(左尹)` · 우윤(右尹) · 동지(同知) | ||
22(7)석 | 참판(參判) | ||
25(8)석 | 지사(知事) | ||
이하 략(以下略) | |||
가설실직첩(加設實職帖) | 12(10)석 | 찰방(察訪) · 별좌(別坐) · 주부(主簿) | 사족 · 양민(단, 양역 부담자 제외)에게 서용하되 양민은 사족에 비하여 10석 가납(加納) |
15(11)석 | 판관(判官) | ||
18(13)석 | 첨정(僉正) | ||
21(14)석 | 부정(副正) | ||
24(15)석 | 통례(通禮) | ||
40(30)석 | 첨지(僉知) | ||
50(40)석 | 동지(同知) | ||
서얼(庶孼) | (4)석 | 양첩자손(良妾子孫) | |
허통(許通) | (6)석 | 천첩자손(賤妾子孫) | |
면강첩(免講帖) | 4∼11석 | 10년간 면강(免講) | 지방별 차이(地方別差異) |
15∼20석 | 종신(終身) 면강(免講) | 지방별 차이 | |
〈표 2〉 1660년(현종 1)의 납속사목 | |||
*주: ( )안은 1661년(현종 2)에 조정된 액수. |
〈표 1〉에 비해 〈표 2〉에서는 우선 납속할 수 있는 대상에 양민(良民) 즉, 상민(常民)이 포함되었는데 이는 인조 후반 이후 양민의 공명첩 매수가 허용되었던 사실이 이때 와서 공식화된 것이다.
또 납속에 의해 제수되는 위계 품직의 종류가 보다 다양해지고 있으며, 직첩의 값은 시대가 지날수록 떨어지고 있는데 이는 대개 납속가의 시대에 따른 변동말고도 납속에 따른 특전 부여가 단지 명목상에 그쳤기 때문이었다. 예컨대, 양민이 공명 고신첩을 사더라도 호적 대장에 납속 통정이니 납속 가선(納粟嘉善) 등의 단서를 붙여 기재하게 하여 군역은 면제되지 않도록 하고, 사족의 그것과 구별하는 등 실질적인 혜택이 없었기에 양민이 공명첩 사기를 꺼리게 되어 그 값이 하락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때로는 싫다는 양민에게 억지로 공명첩을 배정하는[勒定] 비리가 생겨나기도 하였다.
공명첩의 남발은 1690년(숙종 16)의 1년 동안 8도에 무려 2만여 장의 공명첩을 보내기도 했던 숙종 연간을 고비로 해서 국가가 백성을 속이는 처사라는 비난이 일어 경종 때 이후는 공명첩 발행을 자제해 다소 정돈되는 듯 하였다. 그러나 1731년(영조 7)부터 2∼3년간 거듭된 흉년에 진휼곡이 바닥나자, 다시 7,000∼8,000장의 공명첩을 발매하고 이와는 별도의 새로운 납속 형태로서 「부민권분논상절목(富民勸分論賞節目)」을 마련해 시행함으로써 재개되었다.
「부민권분논상절목」은 사족 · 한량 · 상민 가운데서 부유한 자들로 하여금 자원해서 곡식을 내어 기민을 구제하게 하고 그에 대한 포상으로서 사진(私賑)한 실적에 따라 실제 관직이나 통정 · 절충첩 등의 첩문(帖文)을 지급하거나 일정 기간의 연역(烟役)을 면제해 주는 내용이었다. 공명첩이 진휼곡 마련 이외에도 궁궐 영건이나 산성 수리에 필요한 재정 확보에 활용되었다면 「부민권분논상절목」은 사사로이 진휼한 실적에 대한 사후 포상의 방식을 취함으로써 오로지 기민 구제만을 목적으로 한 납속책이었다. 이제 납속책에는 공명첩과 부민권분논상 등 두 가지 형태가 있게 된 셈인데, 『속대전』의 규정[吏典 雜令條]에서 보듯이, 진휼 이외의 목적이나 도(道) 단위의 대규모 진휼 사업이 아닌 경우에는 공명첩 발매를 허용하지 않게 됨으로써 후자가 보다 유력해졌다.
그러나 각종 산성의 보수나 무기의 제작 · 수리, 왕실 원찰(願刹)의 중수 등 특정 목적을 위해 전자의 발행은 계속된데다, 특히 수령이 부민에게 억지로 사진(私賑)하도록 강요함으로써 빈민 · 부민이 모두 피해를 입게 되는 폐단이 지적되면서 부민권분이 금지되고 공명첩만 발매하도록 한 적도 있어 납속책의 주된 형태로 공명첩이 갖는 비중은 여전하였다. 영조 · 정조 연간에 정비된 납속제는 순조 이후의 삼정 문란 속에 다시 무절제해졌으며, 세도 재상에 의한 매관매직이 자행되는 상황에서 그나마 국가 재정의 보완이라는 의미마저 퇴색해 버리고 말았다.
공명첩의 발행 절차는 진휼청이나 감사 · 감진어사(監賑御史) 및 재정이 필요한 해당 관서에서 공명첩 발매를 요구하면 비변사에서 이를 논의하고 임금의 재가를 받아 이조 · 병조로 하여금 발행하도록 하여 요구기관에 보내게 하는 방식이었다. 납속에서 거둔 곡식의 양은 시기에 따라 납속가가 다르고 또 발매량의 증감이 달라 한가지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1685년(숙종 11) 600여 장의 공명첩으로 2,800여 석의 곡식을 거두어 1만여 명의 기민을 진휼했다는 것이나, 1787년(정조 11)의 경기도 진휼곡 내용에서 전체 3만 5753석 가운데 공명첩 500장 발매를 통해 3472석, 부민권분에 의해 1만 4650석, 도합 1만 8122석을 확보(나머지는 상진청(常賑廳)이나 감 · 병영의 진휼곡임)함으로써 51% 이상을 차지하였던 사실로 보아 흉년 시에 납속책이 기여한 바는 상당했다고 할 수 있다.
돈 받고 관직을 판다거나 명목상의 직첩으로 백성을 속여 곡식을 징발한다는 제도 자체의 부정적 혐의와 운영상의 폐단으로 납속책은 역대에 걸쳐 비판을 받았지만 바로 이러한 진휼을 위한 탁월한 재정 보충 효과 때문에 계속 시행되었던 것이다. 본래 납속은 명예직의 매매 이상의 의미는 가지지 않았다. 그러나 일반 농민의 경우 납속을 통해 취득한 명예상의 지위를 실제적 지위로 기정사실화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들은 때로 국가의 기만책에 항의해 공명첩 매입을 거부함으로써 국가로부터 면역 특전까지 얻어내기도 하였고, 일반적으로는 호적을 담당한 관리와 결탁해 납속에 의해 취득한 지위를 실제의 지위로 호적에 기재하였다. 이러한 경우, 그 당대는 어렵겠지만 2, 3대를 지나면 적어도 군역을 지는 상민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는 있었다. 납속이 가져온 이러한 결과는 양정(良丁)의 심각한 부족 현상을 가져와 이른바 군정문란의 큰 요인이 되었고, 나아가 신분 변동이 전통적 신분제의 유지를 위협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하층 신분의 상층 신분에로의 상승에 의한 신분제의 변동이 더욱 심하였고, 그 요인 가운데는 납속이 갖는 비중이 적지 않았다. 따라서 납속책이 비록 국가재정확보에 목적을 두어 사회이동을 가능하게 하는 통로로서의 구실은 제대로 하지 못했다 하더라도, 조선 후기 신분제의 변동에 갖는 의미는 크다고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