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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

근대사제도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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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임시정부 청사
분야
근대사
유형
제도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19년 중국 상해에서 한국독립운동자들이 수립했던 임시정부.
영역닫기영역열기개관
임시정부란 정식정부를 수립하기 위한 준비정부를 가리키는 말이다. 국내외에서 3·1운동이 전민족운동으로 확산될 때, 독립정신을 집약하여 우리 민족이 주권국민이라는 뜻을 표현하고, 또 독립운동을 능률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조직하였다.
그 뒤 1945년 8·15광복까지 27년 동안 상해(上海)를 비롯한 중국 각처에서 한국인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투쟁하였다. 그런데 정부라고 하면 국제법상 통치권이 미치는 국토와 국민이 있어야 하는데, 통치권을 행사할 대상이 없었으므로 일반 정부와는 성격이 달랐다.
그리고 망명정부도 아니었다. 대한제국과 시간적 연속성이 없고 주체세력이 다르고 이념이 달랐으므로 망명정부가 될 수 없었다. 그러나 전민족운동이었던 3·1운동에 의해 수립된 임시정부였으므로 전민족의 의지와 이념적 기반 위에 설립된 정부적 조직임에는 틀림없었다. 따라서, 국제적으로는 주권국민의 대표기관(정부)으로서, 또 대내적으로는 독립운동의 통할기구로서의 구실을 가지고 탄생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연원 및 변천
3·1운동을 전후로 국내외 7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나, 상해를 거점으로 1919년 9월 개헌형식으로 통합되어 대한민국임시정부가 되었다. 상해에 있던 시기(1919∼1932)에는 국내외동포사회에 통할조직을 확대하면서 외교활동이나 독립전쟁 등을 지도, 통할하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초기의 독립전쟁은 만주와 연해주(沿海州)의 독립군단체에 일임하고, 연통부와 교통국 등 비밀조직의 운영과 외교활동에 전념하였다.
그런데 베르사이유 강화체제에 의한 국제적 안정기조를 고집하는 열강의 냉대와 일제의 추격에 의한 국내조직의 파괴, 그리고 상해·만주·연해주·하와이 등 해외 각처에 산재한 동포사회 사이의 교통·통신의 장벽과 당해국가인 중국·소련·미국 등의 방해 또는 방관적 비협조로 애초의 계획대로 독립운동을 계속하기에는 어려움이 많았다.
그 위에 헌정을 기초로 한 민주공화정부 체제였으나, 운영 기술이 미숙하여 국민적 지지기반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렇지만 독립의지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국민적 기반을 회복하는 어떤 방도를 찾아야만 하였다.
그래서 정부 외곽에서는 공론(公論) 수합을 위해 국민대표회(1923)가 소집되었고, 두 차례에 걸쳐 헌법개정을 단행하였으며(1925·1927), 민족유일당촉성운동(1927) 등을 추진하였지만, 침체성을 벗어나지 못하였다.
그런데 1932년 4월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로 활로를 찾게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발악적인 반격으로 상해를 떠나게 되었고, 뒤이어 일어난 중일전쟁(1937)으로 중국 각처를 옮겨 다녀야 하는 수난을 겪어야만 했다.
상하이[上海, 1919]·항저우[杭州, 1932]·전장[鎭江, 1935]·창사[長沙, 1937]·광둥[廣東, 1938]·류저우[柳州, 1938]·치장[綦江, 1939]·충칭[重慶, 1940] 등지를 차례로 이동하며 기착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1939년 치장으로 옮긴 뒤부터는 전시체제로 정비함으로써 정상적 운영을 회복할 수 있었다. 그 뒤 곧 충칭으로 옮겼는데, 그 곳에 있는 동안(1940∼1945)에는 상해시대처럼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었다.
이 시기에 가장 주목할 성과는 광복군(光復軍)을 창설하여, 때마침 일어난 태평양전쟁에 임하여 대일선전포고(對日宣戰布告)를 발하고 연합군과 함께 중국·인도·버마 전선에 참전하였던 점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주로 중국정부를 통로로 국제외교도 강화하여 카이로선언(1943) 이후 우리나라의 독립에 대한 열강의 약속도 받았다.
그리하여 건국강령(建國綱領)을 발표(1941)하고 헌법을 개정(1940·1944)하면서 광복 한국의 새로운 통치기반을 다져나갔다. 이와 같이 한때 침체를 벗어나지 못하였던 것은 사실이나, 27년 동안 전개한 활동과 그간의 세계사를 고려하면 영고성쇠의 과정은 당연하게 이해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한국인의 이념적 정부로 독립운동의 통할을 시도하였다는 점, 실제 독립운동을 전개하면서 8·15광복까지 단절되지 않고 존재한 유일한 기구였다는 점, 또 국제적으로 한국인의 독립의지가 감상이 아닌 현실적인 요구라는 것을 보여준 실체로서 존재하였다는 점 등에서 평가되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8·15광복 때도 한국 문제가 한국민족이나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뜻과는 다르게 처리되고 말았다. 그것은 영국·미국·소련 등 열강의 제국주의적 독단에 의한 결과였다. 그러나 주체적 역량이 미흡하였던 점은 27년간(1919∼1945)의 대한민국임시정부사에 있어서 반성점으로 지적되어야 할 것이다.
당초 임시정부 수립을 발표한 7군데였다. 그것은 1917년 대동단결선언(大同團結宣言) 이후 3·1운동이 확산되는 가운데, 민족적 욕구가 넘치고 있었던 결과라고 하겠다.
특히, 식민통치하에 서로 연락이 부자유한 처지에서 우선 각기 나름으로 정부수립을 추진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막상 발표하였을 때는, 여러 곳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므로 곧 통합을 추진하여 하나로 묶어 나갔다.
7개의 정부 중에 조선민국임시정부(朝鮮民國臨時政府)·고려공화국(高麗共和國)과 간도임시정부(間島臨時政府)와 신한민국정부(新韓民國政府)는 누가 추진한 것인지, 어떻게 수립된 것인지를 알 수 없고, 다만 전단으로 발표된 것에 불과하였다.
하지만 서울의 대조선공화국(大朝鮮共和國), 즉 통칭 한성임시정부(漢城臨時政府)와 블라디보스토크의 국민의회(國民議會)에서 수립한 통칭 노령정부(露領政府)와 상해의 대한민국임시정부 등은 각기 그곳 독립운동자가 추진한 것으로 수립과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한성정부는 1919년 3월 중순부터 서울에서 비밀리에 추진하여, 4월 2일 인천에서 13도대표자대회를 열어 구체화한 뒤, 4월 23일 서울에서 국민대회를 개최하여 공표한 것이다. 그런데 추진기간이 길어, 4월초에 추진인물의 일부인사가 상해로 망명하여 그곳에서 임시정부수립을 촉구하기도 하였지만, 몇 가지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다.
첫째, 국내의 서울에서 수립되었다는 점, 둘째,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되었다는 점, 셋째, 정부조직과 각료구성이 어느 것보다 짜임새가 뛰어나고 해외지도자를 총망라한 대표자로 조각되었다는 점 등에서 주목을 받았다.
당시 『연합통신』을 통해 세계에 보도됨으로써 국제적 선포효과도 컸기 때문에 국내외에 가장 강력한 임시정부로 부각되었고, 그리하여 임시정부의 통합에 있어 정통성을 가지게 되었다.
상해의 민족지도자들이 베르사이유강화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과정에서 신한청년당을 조직하고 독립운동 방안을 논의하고 있던 중, 1919년 4월초 서울에서 망명한 인사들로부터 한성정부수립추진의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이에 영향을 받아 13도대표로 임시의정원(臨時議政院)을 구성하고, 4월 13일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 선포하였다. 이 때 임시의정원에서는 한성정부의 각료구성을 수정하는 형식으로 절차를 밟아 나갔다.
노령에서는 1919년 2월 중순 종전까지 있던 전로한족중앙총회(全露韓族中央總會)를 국민의회로 개편하고, 3월 21일 임시정부의 체제를 정비하였다. 그 결과 상해와 노령정부는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성정부는 집정관총재로 선임된 이승만(李承晩)이 워싱턴에서 집정관총재사무소를 설치, 운영하고 있어 마치 세개의 정부로 분열된 것처럼 보였다. 그래서 의회를 가지고 있는 상해와 노령에서 통합작업을 추진하여, 1919년 9월 6일 제1차 개헌형식을 거쳐 대통령중심제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통합되었다.
국호를 상해정부의 것으로 정한 것은 다른 두 곳의 경우는 국호의 명시가 없었으므로 당연하였다. 그리고 각료구성을 한성정부의 것으로 따른 것은 한성정부가 국민대회라는 국민적 절차에 의해 수립되었으므로 정통성의 명분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워싱턴에 이미 집정관총재사무소가 설치, 운영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성정부의 조각이 노령동포의 대표격인 이동휘(李東輝)를 국무총리로 선임하고 있어, 통합정부에서 노령동포의 의사가 반영될 수 있는 기회도 유리하게 주어졌으므로 통합 추진이 순탄하게 이뤄졌다. 그리하여 집정관총재를 대통령으로 바꾸었던 것 외는 한성정부의 조직과 각료구성을 그대로 인수하였다.
그리고 통합정부의 헌법은 상해정부의 헌법을 개정하는 형식으로 제정되었다. 그런데 상해임시의정원 단독으로 헌법이 제정된 것에 대한 불만을 가지게 되면서, 노령동포 가운데 이동휘를 중심으로 한 한인사회당 이외의 인사들은 임시정부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그 뒤 그들은 이르쿠츠크파[Irkutsk派] 고려공산당에 합류하였다.
통합정부 성립 이후, 1919년 임시헌법(제1차 개헌), 1925년 임시헌법(제2차 개헌), 1927년 임시약헌(제3차 개헌), 1940년 임시약헌(제4차 개헌), 1944년 임시헌장(제5차 개헌) 등 다섯번에 걸쳐 헌법 개정이 있었다. 따라서 권력구조를 나타내는 정부형태도 다섯번 바뀌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정부형태의 주류는 의원내각제에 이상을 두고 있었다. 다만 1차 개헌에서 대통령중심제를 도입한 절충형을 취하였고, 3차 개헌에서 국무위원중심제에 의한 스위스방식의 관리정부형태를 채택하고 있었을 뿐 대개는 의원내각제를 따르고 있었다.
1차 개헌은 삼권분립을 지향하고 있었다. 그런데 사법부나 형무소도 설치할 수 없는 남의 나라에서 그렇게 한 것은 머지 않아 독립이 될 것이라는 확신에서 비롯된 이상적 규정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데 당시 의원내각제도를 이상적으로 여겼을지라도 대통령중심제와 의원내각제를 절충한 것은 한성정부의 조직이 기왕 대통령(집정관총재)제도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통령에 취임한 이승만이 대통령중심제로 운영하면서 대통령 독주라는 정치혼란을 낳기도 하였다.
이에 1925년 2차 개헌을 단행하여 국무령(國務領)을 수반으로 하는 의원내각제를 채택하였다. 그런데 이 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침체한 시기여서 정부적 권위를 상실하고 있었다. 그래서 1927년 제3차 개헌을 단행하여 관리정부형태로 행정부를 의정원에 완전히 예속시켰다.
행정부의 수반은 주석이었지만, 국무회의에서 선출한 회의의 의장 이상의 권한은 없었다. 그러므로 국무위원에 의한 집단지도체제를 채택한 것이다. 그리고 행정부는 사무실을 옮기는 문제까지 일일이 의정원의 승낙을 받아야 했을 뿐만 아니라, 의정원의 상임위원회으로부터 감독을 받아야 했다.
그리고 1927년 제3차 개헌에서는 행정부가 의정원의 철저한 감독을 받는 것 외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민족대당(民族大黨)이 결성될 경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최고 권력은 민족유일당에 속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이당치국(以黨治國)하는 소련 또는 중화민국 정부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그리고 임시정부 주변에서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이 일어난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러나 때마침 일어난 중국국민당과 중국공산당 간의 국공분열(國共分裂)로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은 분열의 소용돌이에 빠지고 말았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 헌법에서 민족대당을 부각시켰으므로, 상해 뿐만 아니라 국내외 동포사회 각처에서도 이러한 운동이 크게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운동의 거리가 자못 소란하게 되었다.
그러한 가운데 해외의 민족대당 형성은 실패하게 되고, 독립운동 진영이 개편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민족유일당이 신간회(新幹會) 조직으로 나타나게 되었다.
1927년 3차 개헌에서 정당을 크게 부각시킨 결과 유일당운동이 실패한 뒤에도, 정당의 조직과 활동이 활발한 양상을 보였다. 조선혁명당·한국독립당·한국국민당·조선민족혁명당 등의 활동이 두드러졌다.
그런데 이들의 이합집산이 특히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동하는 시기(1932∼1939)에 심하여 관리정부의 약체정부가 거센 정당의 바람을 맞아 동요가 극심하였다.
정당은 결국 조선혁명당(池靑天)·한국독립당(趙素昻)·한국국민당(金九) 등을 통합한 한국독립당(金九) 등을 우파사회주의계열인 조선민족혁명당(金奎植·金元鳳)의 양대 정당으로 통합, 정비되면서 한국독립당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지지기반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 이른바 통합의회에 조선민족혁명당이 합류한 뒤 김원봉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야당 총수 같은 존재로 부상하여 각료구성에도 참여하게 되었다. 그 밖에 소수정당으로 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과 조선혁명자연맹과 조선민족해방동맹이 있었으나 당세가 크지 못하고, 통합의회 이후 모두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하고 있었다.
1940년 제4차 개헌은 주석(主席)을 중심으로 한 내각책임제의 형태로 복귀하였다. 수반을 그대로 주석이라고 호칭하였지만, 주석은 대외적으로 국가원수였으므로 대통령중심제의 일면도 가미된 것이다. 주석은 의정원에서 선출하게 하고 권한도 증대시켰다. 그리고 의정원의 상임위원회를 폐지하여 행정부의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였다.
그런데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고, 1942년 충칭에 있는 독립운동자의 모든 당파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참여한 통합의회가 성립되면서, 다시 개헌작업에 착수하였다. 그래서 이미 1941년에 발포한 「건국강령」의 이념을 구체화하여, 1944년 제5차 개헌을 당행하였다.
이 때 정부형태는 부주석제를 신설한 것 외에는 의원내각제의 본질에는 변함이 없었으나 특이한 것은 행정부를 이중구조로 조직한 점이다. 즉, 국무위원회라는 정책결정기구가 있고, 그 밑에 행정각부를 두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의회를 자주 열지 못하였고, 또 각 정당이 새롭게 참여한 처지에서 행정부의 권한을 강화하면서 그의 독주도 막기 위해 권력구조를 이원화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1919년 9월 통합정부의 각료조직은 한성정부의 것을 인수한 것이다. 그런데 국무총리 이동휘(李東輝)가 한인사회당의 당수였으므로, 연립내각의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러나 외무총장 박용만(朴容萬)과 교통총장 문창범(文昌範)이 취임을 거부하고 있어 몇 개 부서는 공백 상태에 있었다.
그런데 1920년 이동휘는 소련에서 지원한 자금을 독자적으로 처리하여 말썽을 빚어, 1921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떠나가고 말았다. 이에 이동녕(李東寧)·신규식(申圭植)·노백린(盧伯麟) 등이 차례로 국무총리대리를 맡았다.
그 뒤 1922년 9월 노백린내각이 구성되면서 국무총리대리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러나 독립운동이 국제적으로 외면을 당하며 시련을 겪는 속에 소련자금의 소동과 이승만대통령의 독주가 겹쳐 정부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었다.
그래서 1923년 1월 활로 개척을 위해 국민대표회가 열렸지만, 임시정부는 더욱 침체하게 되었다. 국민대표회는 1923년 1월부터 5월까지 김동삼(金東三)을 의장으로 안창호(安昌浩)와 윤해(尹海)를 부의장으로 임명하고 개최되었다.
그런데 개조론과 창조론의 논쟁을 벌이다가 끝내는 이를 수습하지 못하고 해산되고 말았다. 또한 여운형(呂運亨)을 통해 들어 온 소련의 정치자금이 문제가 되어, 개조론자(여운형)와 창조론자(윤해)로 분열하면서 더욱 동요되었다.
국민대표회가 해산한 뒤, 이승만을 탄핵하고 1925년 박은식(朴殷植)을 대통령에 선출하였다. 그리고 이어 국무령을 수반으로 하는 헌법을 개정하였다. 국무령제 정부조직에서 이상룡(李相龍)·양기탁(梁起鐸)·안창호·홍진(洪震) 등이 차례로 국무령에 선임되었으나 조각이 유산되거나 길지 못하였다.
그래서 1926년말 김구내각을 구성하여 1927년 다시 제3차 개헌을 통해 집단지도체제인 국무위원제로 개편하였다. 그런데 이것은 초기 중진급 인사가 사별하거나 물러난 뒤에 발상된 집단지도체제였다.
이와 같이 임시정부의 중앙조직이 변하고 있을 때, 초기 조직에서 뺄 수 없는 것이 구미위원회(歐美委員會)이다. 이승만이 워싱턴에서 한성정부의 집정관총재사무소를 개설하였다가 대통령에 피선된 뒤 구미위원부(회)로 개편한 것이다.
구미위원부는 밑에 파리통신부를 두고 외교업무를 직접 관장하였을 뿐만 아니라, 미국 동포의 인구세와 애국금까지 독점하는 등 임시정부 업무를 전횡하여, 대통령의 독주라는 비난을 받았다. 결굴 구미위원회는 이승만이 탄핵된 뒤 1928년 해체되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지방조직은 국내의 행정을 담당한 연통부(聯通府)와 통신을 담당한 교통국(交通局) 등이 있었으며, 해외에는 거류민단조직이 있었다. 그런데 연통부, 교통국 두 조직에 겸임하는 사람이 많아, 실제 업무수행에 있어서 겹치는 경우가 많았다.
연통부와 교통국은 대개 국내 서북지방에 결성되었기 때문에, 중부 이남지방은 애국적 조직이 그를 대신하고 있었다. 강원도와 충청도 일부에서는 대한독립애국단, 속칭 철원애국단(鐵原愛國團)이 임무를 수행하였고, 그 밖에 중부 이남에서는 대한민국청년외교단이 대행하였다.
이때 대동단(大同團), 서울의 대한민국애국부인회(大韓民國愛國婦人會), 평양의 대한애국부인회(大韓愛國婦人會)·대한적십자회 등도 이와 관련된 조직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임시정부에서 파견한 조사원과 특파원의 활동이 있었다. 그런데 이상의 지방조직은 대개 1920년말부터 일제의 경찰정보망에 발각되어, 1922년 모든 조직이 파괴되는 비운을 겪었다.
연통부와 교통국의 조직 및 활동에서 주목하고 넘어가야 할 것은 만주 안동(安東)에 있던 아일랜드 사람 조지(George,L.S.)의 이륭양행(怡隆洋行)의 역할이다. 그는 외국인이라는 신분상의 이점을 이용하여, 국내연락의 거점을 만들어 통신연락은 물론, 물자와 인원수송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해외동포사회에 대한 지방조직인 거류민단은 상해 등의 중국 본토에만 있었다. 미국과 멕시코·프랑스 등지에서는 대한인국민회가 대신하였고, 만주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서간도의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와 북간도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도 있었다.
그런데 상해의 거류민단은 끝까지 임시정부와 운명을 같이하였고, 구미지역의 대한인국민회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가 간혹 단절되면서 8·15광복 때까지 이어졌다. 만주의 군정서조직은 1920년 일제의 소위 간도출병으로 파괴된 뒤, 만주에서 독립운동단체로는 재건되었지만 임시정부와의 행정적 관계는 회복되지 못하였다.
8·15광복 직전, 지방조직은 충칭의 거류민단과 미주의 대한인국민회, 그리고 중국 본토에 산재해 있는 광복군의 정보망 이외는 다른 것이 없었다. 그리고 1940년 9월 중앙조직은 충칭으로 이전한 직후, 광복군사령부를 설치하고, 곧이어 10월 단행된 개헌에 의해 조직개편되면서 새로워졌다.
주석(金九)·내무(趙琬九)·외무(趙素昻)·군무(曺成煥)·법무(朴贊翊)·재무(李始榮)·비서장(車利錫) 등으로 국무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고문제도를 채택하여 송병조(宋秉祚)·홍진 등이 차례로 추대되었다. 권력구조 측면에서 고문제도를 둔 것은 내각의 약체성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승만의 주미외교위원부가 새로 설립되고, 군사위원회·선전위원회·외교연구위원회·경위대(警衛隊) 등이 부설되면서 정부조직은 보완되었다. 그런데 이는 중일전쟁 확대에 따른 업무의 증대에서 기인된 바가 크다. 그리고 1942년 국무위원회에 학무(張建相)·선전(金奎植)·교통(柳東說)·생계부(黃學秀) 등을 증설하고 각 부에 차장제를 신설하였다.
1942년부터는 김원봉 등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곽에 있던 인사들이 참여하여, 그해 12월 개최된 제34회 임시의정원은 이른바 통합의회로 진행되었다. 여기에는 재정지원을 전담하고 있던 중국정부의 종용이 있었지만, 아무튼 초대 내각이 깨어진 이후 처음으로 각 정당의 거국내각이 구성되었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그리하여 1944년 새로운 정치정세와 광복에 대비하여 제5차 개헌을 단행하고, 이어 「정부조직법」도 개정하여, 임시정부잠행중앙관제(臨時政府暫行中央官制)를 공포하였다. 1944 제5차 개헌에 따른 관제는 국무위원회와 행정각부가 이중구조로 되어 있는 것이 특징이라 하겠다.
이 때 국무위원은 김구(주석)·김규식(부주석) 외 이시영·조성환·황학수·조완구·차리석·장건상·박찬익·조소앙·성주식(成周寔)·김붕준(金朋濬)·유림(柳林)·김원봉·김성숙(金星淑)·조경한(趙擎韓) 등 14명이었다.
그리고 국무위원회에서 선임한 행정각부는 조소앙(외무)·김원봉(군무)·조완구(재무)·신익희(申翼熙, 내무)·최동오(崔東旿, 법무)·최석순(崔碩淳, 문화)·엄항섭(嚴恒燮, 선전) 등으로 구성하였다. 그리고 정부직원도 증원하여 1945년 3월 광복군 외에 109명이 종사하였다. 그런데 당시 충칭에 있던 한국인은 600명 정도였다.
초창기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독립전쟁을 독립군단체에 거의 일임하고 외교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그래서 1919년 11월 예산에서 69.2%를 외교항목에 배당할 정도였다. 종전기에 광복군을 설치한 뒤에도 군사비와 외교비가 예산의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그런데 외교는 정상적인 정부외교가 아니었으므로 여러 가지 특수성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는 통치권이 유효하게 미치는 곳이 없었기 때문에, 국제법상 정부로 인정받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민족에게 현실적으로 미치고 있는 통치권은 국제법상 불법적으로 강탈한 일제의 권력이었기 때문에, 통치권의 현실적 존재는 이념상 부정되어야 했다. 그리고 외교활동은 주로 미국과 중국에 대해 이뤄졌는데, 대미외교는 초기에, 대중외교는 종전기에 보다 두드러졌다. 그리고 초기에 파리통신부가 주도한 강화회의와 유럽 각국과 소련 등의 외교가 있었다.
그런데 초기에 대미외교가 주종을 이루었던 것은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처리를 미국이 주도하였다는 점, 또 이승만·노백린·김규식·안창호 등 미국 유학 또는 미국과 인연이 많았던 인사가 집권하고 있었던 점, 그리고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도시인 상해에 있었으므로 구미와의 창구가 열려 있었던 점 등에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강화회의에 대한 외교도 주로 미국정부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그리고 3개월간 계속된 1921년 워싱턴회의(일명 태평양회의) 때도 미국정계를 창구로 교섭을 벌였다. 그러나 모두 냉대를 받고 말았다.
제국주의가 국제정계의 주류를 이루고 있던 당시, 민족자결의 원칙은 독일·오스트리아·터키 등 동맹국의 식민지에만 적용되었을 뿐 도덕적인 효과는 기대할 수조차 없었다.
그렇지만 민간외교의 역할로, 그들이 한국독립을 위한 인도주의적 고려를 심각하게 반성할 기회를 가지게 되었다. 특히 서재필(徐載弼)의 활약은 매우 커서, 미국인이 한국친우회를 결성할 정도였다.
그러나 1943년 카이로회담 때도 미국의 태도는 불투명하였다. 당시 영국은 전후에도 동남아시아에서 식민적 지배가 가능할 것으로 망상하고 식민지들의 독립분위기를 봉쇄하기 위해 한국의 독립을 방해하였다. 그런데 미국은 그에 동조하고 말았던 것이다.
카이로선언에서 한국이 ‘적당한 시기’에 독립한다고 단서를 붙임으로써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외교를 외면하고 있었다. 그러한 미국의 태도는 1945년 샌프란시스코연합국회에서 국제연합을 탄생시킬 때도 마찬가지였다.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참석요구를 묵살하고 여권마저도 회의가 끝날 무렵에 발급해주는 정도였다. 이러한 태도는 대한민국임시정부 대표의 여비까지 부담하고 있던 중국정부와 대조된다.
종전기에 미국의 태도가 불투명했던 것은 영국을 의식하는 것도 있었지만, 직접적인 이유는 소련이 대한제국 때 당시 제정러시아가 소유하고 있던 한국에서의 이익을 회복하는 것에 동조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와 같은 열강의 생각이 38선을 만들어 냈던 것이다.
대중관계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고, 또 많은 독립운동단체가 만주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1920년대는 중국 국내분란으로 정부간에는 손문(孫文)의 광둥정부(廣東政府)와 야간의 교섭이 있었을 뿐이다.
그래서 개인적 친분에 따라 교섭하는 길밖에 없었다. 개인적 교섭은 신규식·박찬익(朴贊翊) 등이 많은 활동을 하였는데, 그 결과 한중호조사(韓中互助社)라는 단체가 설립된 점은 큰 수확이라 하겠다.
그러나 장개석(蔣介石)이 이끄는 중국 국민당은 북벌을 완성한 1928년 뒤에도 대한민국임시정부 외교에 냉담하였다. 대중외교에서 중요한 몫은 만주, 즉 동삼성 동포의 생활문제였다. 그런데 1930년 국민당대회 때 동삼성한교문제(東三省韓僑問題)를 제안하였지만, 접수도 받지 않았다.
그러나 1932년 윤봉길(尹奉吉)의 의거를 계기로 상황은 달라졌다. 그런데 이때도 중국정부는 일본과의 관계악화를 주저하여 공식적인 지원보다는 김구 등의 대한민국임시정부관계자 또는 김원봉 등의 독립운동자를 개별적으로 비밀리 지원하는 길을 택하였다. 그런데 지원자체는 높이 평가되어야 할 일이나 개인별로 그것도 비밀지원의 방법을 취하여 많은 오해와 분란을 야기시켰다.
그러나 중국 지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로서는 절대적인 문제였다. 특히, 1937년 중일전쟁 후 중국 각처로 이동해야 할 처지였으며, 또한 중국 서부 깊은 곳인 충칭에 정착한 뒤로는 다른 나라와의 교섭이 단절된 처지였으므로, 중국정부가 지원을 외면하였다면 대한민국임시정부는 곤경에서 헤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따라서, 중국과의 관계를 강화하는 데 주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중국정부는 특히 태평양전쟁 후부터는 종전의 비밀지원과는 달리 공개적이고 정당 또는 정부적 차원에서 지원하게 되었다. 중국은 충칭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해 재정지원을 공식적으로 전담하였다. 그 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운영은 물론, 광복군의 독립전쟁이 발전하는 데 중요한 보조가 되었다.
전후 처리에서도 한국의 완전독립을 주장한 유일한 국가였다. 그것은 당시 중국 처지에서 그들의 이익을 위해 한국이 다른 어떤 국가의 영향하에 놓이게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계산이 있었으므로 광복군을 그들의 작전권하에 두고 있었다. 그러나 강력한 교섭으로 종전 때는 광복군 작전권을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접수할 수 있었다.
대중국외교에서 또 하나의 초점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문제였다. 중국의 승인이 중요했던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중국에 있었기 때문에 우선 승인을 받아야 국제법상 정식관계가 수립될 수 있었다.
또 중국의 승인을 받아야 그것을 발판으로 다른 나라에 대하여도 승인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승인문제는 전후 한국에 대한 독립의 약속이므로 절실한 문제였다.
1942년부터는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공론에 붙이며 기미 만을 엿보고 있었다. 그러나 끝내 승인을 보류하고 말았다. 그것은 중국 자기자신의 전후처리문제로 미국의 눈치에 묶여 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대소외교는 초기에 조금 이뤄졌다. 처음 대소교섭으로 자금을 지원받게 되었으나, 한인사회당 당수였던 국무총리 이동휘가 자의로 처리하는 바람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혼란만 야기시켰다.
그 뒤 1922년초 극동인민대표대회(極東人民代表大會)가 모스크바에서 열렸을 때 교섭하였으나, 소련은 제3인터내셔널(코민테른)의 계획에 따라 국제공산주의적 계산을 구상하고 있었으므로 서로의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다. 그리고 1925년 국내에서 조선공산당이 창설된 뒤로는 인연이 끊기게 되었다.
파리통신부 활동은 먼저 베르사이유강화회의에 대한 교섭이 있었다. 처음에 김규식·윤해·고창일·조소앙·황기환(黃杞煥)·이관용(李灌鎔) 등이 활약하였으나, 우리가 기대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회의 분위기였다.
그런데 국제적으로 유일하게 우리 나라의 독립을 승인한 회의는 1920년의 국제사회당대회였다. 그것은 조소앙·이관용 등의 활약에 힘입은 바가 컸다. 국제사회당이란 제2인터내셔널의 민주사회주의자의 모임이었는데, 단체가 오래 지속되지 못하여 실질적인 효과는 적었다.
유럽 각국에 대한 외교는 프랑스·영국·이탈리아에 대한 교섭이 비교적 활발하였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 정부적 차원에서 관계가 성립될 수 없었고 민간교섭에 불과하였는데, 한국친우회가 한때 결성된 정도에 머물렀다.
그 밖의 외교관계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상해의 프랑스조계에 있었기 때문에 프랑스 행정당국과 교섭이 있었고, 또 국제연맹·국제적십자사 등에 대한 교섭도 산발적으로 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독립전쟁은 군사활동과 의열투쟁 두 각도에서 봐야 할 것이다. 그것은 무력적인 방법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군사활동은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기부터 군사관계 제규정을 만드는 등 본격적인 활동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러나 대한민국임시정부가 국제적으로 승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남의 나라에서 무장활동을 한다는 것은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독립전쟁은 만주의 독립군단체를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에 조직하여 지원하는 정도로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북간도에 북로군정서와 서간도에 서로군정서를 두었던 것은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였다. 그런데 서북간도의 군정서의 조직이 1920년 이른바 일제의 간도출병(間島出兵)으로 파괴된 뒤로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의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이 때 당시 임시정부 군무부를 만주로 이전할 계획을 논의하였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그리고 1924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관여로 남만주에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大韓民國臨時政府陸軍駐滿參議府)를 인준하였으나 작전문제까지 관계한 것은 아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군사활동은 1933년 새로운 각도에서 계획되었다. 윤봉길 상해의거로 중국정부와의 관계가 친밀해졌을 때, 장개석의 배려로 중국의 중앙군관학교 뤄양분교(中央軍官學校洛陽分校)에 한인특별반(韓人特別班)을 설치하게 되었다.
그래서 이곳에 만주에 있는 독립군을 입교시켜 독립전쟁에 소요되는 사관을 양성할 수 있었다. 이때 만주에서 온 지청천·이범석(李範奭)이 한인특별반을 주관하였다. 그리고 한인특별반에 입교한 사관생도는 92명이었는데, 1935년 4월 62명이 졸업하였다. 이들이 후일 광복군의 기간요원이 되었다는 점에서 뜻있는 일이었다.
군사활동의 다음 단계의 것은 1940년 9월 17일 결성한 광복군의 활동이었다. 광복군은 1942년 김원봉의 조선의용대(朝鮮義勇隊)를 통합하여, 사령부(사령관 池靑天) 밑에 3개 지대로 편성하였다.
제1·2지대는 인도·버마전선에까지 출정하였고, 또 제2·3지대는 미군의 OSS라는 특수부대와 합동작전을 폈다. 그리고 제3지대는 중국전선에서 활약하며 일본군으로 파견된 한국인을 광복군에 복귀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다.
그런데 광복군은 처음 중국 군사위원회에 예속되었기 때문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작전권 밖에 있었다. 그러나 8·15광복 직전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이관됨으로써 명실 공히 대한민국의 광복군이 되었다.
의열투쟁은 한두 사람의 무장활동으로 일제 관공서나 기관을 폭파하거나, 일본의 고관이나 친일한국인을 처단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경종을 울리고, 아울러 우리 나라 사람들에게는 민족적 경각심을 불러일으켰다.
그런데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직접 관여한 의열투쟁은 횟수가 많지 않다. 1921년 소련자금문제로 이동휘의 비서였던 김립(金立) 외에, 상해에서 몇몇 주구배를 처단한 것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소라도 관여하였다.
그런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의열투쟁은 대한민국임시정부 계열단체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이 단행한 1932년 이봉창(李奉昌)의 동경의거(東京義擧)와 윤봉길의 상해의거가 가장 뛰어난 것이었다.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재정내역은 명확하게 알 수 없다. 1926년 이전에는 비밀에 붙여졌고, 그 뒤의 것은 6·25사변 때 관계문서를 분실하였기 때문에 지금까지 알 수 있는 것은 단편적인 것에 불과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는 인구세(人口稅)와 애국금(愛國金) 등으로 세입을 충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국내의 연통부와 교통국이 1922년을 전후로 일본경찰에 의해 파괴된 뒤로는 국내자금이 두절되고, 또 구미위원회에서 재미동포의 헌납금을 전용하여 1925년부터는 재원이 고갈되기에 이르렀다.
1927년부터 1930년까지의 4년간 예·결산에 따르면, 세입의 90% 정도가 인구세와 애국금이었는데, 총액이 너무 적어 세출 40% 정도를 가옥세(家屋稅)에 충당할 정도였다. 더욱이 1930년도 결산총액 511원으로 용인 1명도 채용하지 못할 형편이 되고 말았다. 결국, 1930년을 전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가장 침체했던 시기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그런데 1932년 윤봉길의거 뒤부터 재미동포의 성금이 모이면서 재정은 다소 좋아졌다. 그래서 1935년 인구세와 애국금에 의한 세입이 1,547원으로 증가하였으며, 그 중 515원을 부채상환(당시 부채액은 1,205원)으로 충당할 수 있었다. 그리고 1941년도 결산서에 의하면 인구세가 802원이나 초과수입될 정도로 여유를 보였다.
물론, 이것이 흑자예산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충칭시대의 재정세입의 대종을 이뤘던 것은 인구세와 애국금(혈성금 포함), 그리고 중국정부의 지원금 등이었다. 지원금은 1932년 윤봉길의거 후 김구 개인의 활동비로 지급되어오다가 충칭시대는 처음으로 정당별로 주어졌다.
그래서 한국독립당에 지원된 자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세입이 되었다. 그리고 1942년 조선민족혁명당의 조선의용대가 광복군에 편입되면서, 정당별 지원금을 통합하여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불하였다.
1941년 결산액이 55만 2,816원이었는데, 이것은 전쟁인플레이션 영향이기도 하였지만, 1935년 결산액에 비하면 크게 증액된 것이다. 그 중 50%가 중국정부 또는 중국인사의 후원금이었는데, 광복군이 본격적으로 활동한 8·15광복 직전에 이르면 중국정부의 지원금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운영의 절대적 재원이 되었을 뿐 아니라, 충칭에 살던 600명 한국인의 생활비가 되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정형편은 『독립신문』의 운명과도 유관하다. 즉, 초기와 종전기는 신문을 발행할 수 있을 정도로 다소 유족한 형편이었다. 초기 상해판 『독립신문』은 1919년 8월 21일 ‘독립’이라는 이름으로 창간되어, 그해 10월 25일부터 『독립신문』으로 고쳐 간행되었는데, 총 189호가 발행, 배부되었다.
그리고 충칭판 『독립신문』은 상해판과 달리 한문으로 편집하였는데, 1943년 6월 1일 창간하여 1945년 7월 20일 제7호까지 발행하였다. 그와 같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화공보활동은 초기와 종전기에 활발하였다.
『독립신문』 외 관보로서 『공보(公報)』가 있었고, 임시사료편찬회에서는 『한일관계사료(韓日關係史料)』와 박은식이 저술한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간행하였다.
그리고 구미위원부에서는 『Korea Review』, 파리통신부에서는 『La Coree Libre』를 발행하였는데, 파리통신부의 『자유한국』은 간추려서 『구주(歐洲)의 우리사업』이라는 책자로 나온 것이 오늘날까지 전해온다.
8·15광복 직전 선전위원회와 선전부에서 각종 홍보전단을 만들어 중국전선에 살포하였는데, 선전위원회에서는 『한국독립운동문류(韓國獨立運動文類)』라는 소책자를 간행하여 오늘에 전하고 있다.
임시정부는 애초 일곱 곳에서 정부수립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서 공통적인 것 두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정부수립을 추진한 인물은 각료구성에 거의 참여하지 않은 애국적 표현이다.
또 하나는 민주주의에 입각한 민주공화정부를 이념으로 한 점이다. 그러므로 1919년 9월 통합정부의 이념도 당연히 민주주의였다. 구황실의 예우문제로 봉건적인 잔영이 다소 있었지만, 민주주의이념이 관철된 위에 삼권분립의 이상을 철저히 나타낸 초기 헌법이었다. 이러한 민주주의이념은 8·15광복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 지도이념의 기조를 이뤘다.
한편, 초기 『독립신문』(상해판)의 논조나 정부지도자의 행적들을 살펴보면, 러시아혁명이나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오히려 사회주의에 대한 명확한 이해에 미치지 못하여 사상적 방황의 흔적을 보이고 있기까지 하다.
대한민국임시정부 주변에서 사회주의, 특히 공산주의의 실체에 대해 상당한 이해를 가지게 된 것은 1927년 민족유일당촉성운동을 전후한 일이었다. 그래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민족유일당촉성운동 이후부터는 공산주의를 완강하게 배척하게 되었다.
그리고 1931년 삼균주의(三均主義)를 제창하였다. 삼균이란 인균(人均)·족균(族均)·국균(國均)을 이르는 것으로, 인류평등·민족평등·국가평등과 정치·경제·교육의 균등을 내용으로 한 정치·경제·사회적 민주주의 원리였다.
삼균주의이념은 1941년 건국강령에서 더욱 구체화되어, 1944년 새 헌법에 반영되어 광복한국의 기초이념으로 다져졌다. 그리하여 1948년의 신생 「대한민국헌법」에도 반영되었던 것이다.
독립운동에서 또 하나의 이념적 측면은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어떠한 제한독립도 부정하고 있었던 점이다. 때문에 독립운동 기간에 일제와의 어떠한 흥정도 배격하고 있었다. 자치론이 부정되었던 것은 물론, 대한민국임시정부 초기에 이승만이 제기한 바 있었던 위임통치론이 신랄하게 비판받았던 것도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완전독립이념 때문이었다.
그리고 1942년부터 제기된 전후 한국의 국제관리설(신탁통치)을 철회하기 위해 임시정부가 외교적 노력을 경주하였던 것도 완전독립 또는 절대독립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이러한 이념이 광복 후 우리나라에서 신탁통치반대운동으로 맥락이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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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6년)
조동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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