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안(咸安). 함안 출생. 자는 극정(克精), 호는 두암(斗巖)·반구정(伴鷗亭). 생육신 조려(趙旅)의 현손으로, 아버지는 증형조참판 조정언(趙庭彦)이며, 어머니는 성산이씨(星山李氏)로 만호(萬戶) 이희조(李希祖)의 딸이다.
이칭(李偁)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박제인(朴齊仁)·이길(李佶)과 종유하면서 학문을 강마하였다. 이황(李滉)의 「성학십도(聖學十圖)」를 깊이 연구하여 학문을 성취하였으며, 조목(趙穆)·유운룡(柳雲龍)·정경세(鄭經世)·박성(朴惺) 등과 교유를 맺고 도학에 힘썼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곽재우(郭再祐)를 따라 창의하여 정암진(鼎巖津)과 기강(岐江) 등을 지키는 등 전공을 많이 세웠다. 또한, 정유재란 때에는 화왕산성 의진(義陣)에서 군무를 도와 많은 적을 무찔러 고을사림들이 조방의 충의에 감복, 조정에 상소하여 포창을 청하였다.
그 뒤 난이 평정되자 낙동강 우포(藕浦)의 말바위[斗巖] 위에 반구정을 짓고서 마주 바라보이는 곽재우의 창암정(滄巖亭)을 수시로 내왕하면서 산수의 자연을 자신의 은둔생활에 흡수시켜 회포를 풀었다.
1607년(선조 40) 초봄에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 등 도내의 선비 35인과 함께 용화산 아래 낙동강에서 뱃놀이를 즐겼던 일을 기록한 「용화산하동범록(龍華山下同泛錄)」이 전하고 있다. 충효사상을 일생의 신조로 삼았으며, 「가훈팔잠(家訓八箴)」과 「충효실감(忠孝實鑑)」 등의 저술을 남겼다. 호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두암집(斗巖集)』 3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