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에 관한 최고(最古)의 문헌은 조선 영조 30년 유진한(柳振漢)의 『만화집 晩華集』의 「춘향가」를 넘지 못하지만, 판소리가 재인 광대들이 벌이는 판놀음에서 여러 놀음 틈에 끼여 한 놀이로 구실을 하던 것은 훨씬 거슬러 올라갈 것으로 짐작된다.
큰 마을굿에는 흔히
창우(倡優)주 01)의 판놀음이 딸렸고 창우 가운데 소리광대가 벌이는 놀음이 판소리였던바, 민속적인 소리와 재담조 아니리와 발림으로 서민적인 이야기를 엮어 판놀음으로 공연하면서 판소리가 생겨난 것으로 짐작된다.
판소리는 마을굿에 딸린 판놀음에서 생겨나서 여러 놀이 틈에 끼여 놀이구실을 하다가 판놀음이 마을굿과 떨어져 따로 벌이는 놀음으로 발전하면서 순조 때 송만재의 『관우희』에 보이듯이 열두마당이나 생겨 다른 놀음보다 가장 인기있는 놀이로 자랐다고 본다.
판소리가 사대부들로부터도 인기를 얻게 되자 민중의 판놀음뿐만 아니라 사대부의 방안놀음으로도 끼이게 되었다. 이렇게 되면서 판소리는 사설과 음악이 민중의 소박하고 솔직한 것에 세련되고 어려운 것이 덧붙여져 복합적인 모습으로 발전한 것으로 보인다.
사설은 유식한 한문구(漢文句)가 많이 끼이게 되고 아니리보다 소리에 무게를 두며 소리에는 사대부들이 즐기는 정가풍(正歌風)의 가조(歌調)가 끼이고 복잡하고 세련된 시김새와 붙임새를 가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여러 가지 판소리 가운데 「강릉매화가」·「변강쇠타령」과 같이 서민적인 재담으로 된 것은 도태되고 「적벽가」·「심청가」·「춘향가」와 같이 사대부들에게 공감할 수 있는 내용을 가진 것은 계속 발달하여 오늘날과 같이 방대한 모습으로 된 것이라 하겠다.
판소리 최고(最古) 명창으로 이름이 전하여지는 이는 영조∼정조 때 우춘대(禹春大) 및 하은담(河殷譚)·최선달(崔先達)이다. 그러나 이들의 판소리 음악사 자료는 전하여지는 것이 없다.
순조 무렵에는 권삼득(權三得)·송흥록·염계달·모흥갑·고수관·신만엽·김제철·황해천(黃海天)·주덕기(朱德基)·송광록·박유전·방만춘(方萬春) 등 뛰어난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 발전에 공헌하였다.
이들의 더늠이 지금까지 전하여지는데, 이들의 더늠에 나타나는 소리제가 이들 명창들이 판소리에 처음 짜넣은 것들이라고 전해지는 것으로 보아 이들이 판소리의 음악을 확대시킨 것을 엿볼 수 있다.
판소리 명창들의 출신지는 남한강 이남 소백산맥 이서(以西)로 이 지방의 향토음악이 육자배기토리나 시나위토리가 주가 되는 것으로 보아 판소리의 토대가 되는 것은 계면조를 비롯한 패개성음으로 된 가조에 중모리·중중모리·자진모리장단이었던 것 같다.
8명창은 이러한 판소리음악을 토대로 하여 여러 가조와 장단을 확대시켰으니 권삼득은 설렁제를, 염계달과 고수관은 경드름과 추천목을, 신만엽과 김제철은 석화제를 판소리에 짰고, 송흥록은 계면조·우조를 오늘날과 같은 모습으로 짰고, 진양을 판소리에 집어넣어 소리를 짰다.
8명창 때에 명창들의 지역에 따른 음악적 특성 그대로 전승되어 동편제·서편제·중고제 등 여러 파가 생겨 전승하게 되었다. 동편제는 송흥록 소리제에서, 서편제는 박유전 소리제에서, 중고제는 김성옥과 염계달의 소리제에서 비롯된다고 한다.
철종 때에는 박만순·이날치·정창업·김세종·한송학·송우룡·정춘풍·장자백·김정근 등 많은 명창들이 나와서 판소리의 전성기를 이루었다. 이들은 또 8명창의 파에 나타난 특징을 전승해 주었다.
송흥록의 소리제는 박만순과 송우룡에게 전하여졌고 김세종·장자백·정춘봉도 동편제 소리를 새로 발전시킨 명창이다. 박유전의 소리제는 이날치에게 전해졌고 따로 정창업도 서편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김성옥의 소리제는 김정근에게 전해졌고 김정근과 한송학도 중고제 소리를 발전시킨 명창이다.
이 무렵에 신재효(申在孝)가 명창들에게 판소리 이론을 지도하였고 그 나름대로 여섯마당 판소리 사설을 다듬었다. 고종 때에는 황호통·이창윤(李昌允)·김찬업(金贊業)·김창환·박기홍·김석창·유공렬(柳公烈)·이동백(李東伯)·송만갑·김창룡·김채만·정정렬(丁貞烈)·유성준 등 많은 명창들이 나서서 판소리 내용을 충실하게 닦았던바, 이들 명창들에 의하여 판소리는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
이들 손에 의하여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정교한 판소리가 완성되었다. 또, 판소리의 각 파에 나타난 특징은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마쳤고 또 이들에 의하여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황호통·김석창 등은 중고제 소리의 판을, 김찬업·박기홍·유성준은 동편제 소리의 판을, 김창환·김채만은 서편제 소리의 판을 막았다 하며, 송만갑·이동백·정정렬에 이르면 지역적 교류에 의하여 판소리 각 파의 특징이 무너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리고, 다섯마당 밖의 다른 마당의 전승 또한 이들에 의하여 판을 막았다. 한말에 나라가 기울어지면서 판소리 또한 내리막길을 걸었다.
한말과 일제시대에 판소리를 이어놓은 명창들로는 장판개(張判介)·박중근(朴重根)·박봉래(朴奉來)·김정문(金正文)·정응민·공창식(孔昌植)·김봉학(金奉鶴) 등이 있었으며, 임방울(林芳蔚)·김연수(金演洙)·강장원(姜章沅) 등이 그 뒤를 이었다.
광대노릇은 본디 남자들만이 하는 것이었으나 고종 때 신재효에 의하여 진채선(陳彩仙)이 최초 여명창(女名唱)이 되었고, 이어 나온 허금파(許錦坡)와 함께 세상에 이름을 떨쳤다.
한말과 일제시대에는 강소춘(姜笑春)·김녹주(金綠珠)·이화중선(李花中仙)·김초향(金楚香)·배설향(裵雪香)·박녹주(朴綠珠) 등 수많은 여류명창들이 나왔고, 김여란(金如蘭)·김소희(金素姬)·박초월(朴初月)이 뒤를 이었다.
한말에 원각사(圓覺社)가 생기고 판소리 명창들이 창극(唱劇)을 처음 꾸며 공연한 뒤 창극이 성행하였고, 일제 때에는 협률사(協律社)·조선성악연구회(朝鮮聲樂硏究會)를 거치는 동안 많은 창극이 공연되어 판소리 명창들이 여기에 휩쓸리게 되어 판소리가 쇠퇴하는 원인이 되었다.
광복 뒤에는 한때 여성창극이 성행하여 판소리는 더욱 쇠미(쇠잔하고 미약함)하게 되고 1960년대에는 창극도 기울어졌다.
1960년대에는 판소리 부흥운동이 일어났고, 박동진(朴東鎭)이 판소리 다섯마당의 전판 공연을 시도한 것을 계기로, 박초월·김소희·오정숙(吳貞淑)·성우향(成又香)·박초선(朴初仙)이 판소리 전판 공연을 가진 바 있어 판소리 명창의 수는 극소수로 줄었으나 한때 판소리는 부흥되어 가는 듯하였다.
1960년대에 판소리가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된 뒤 정광수(丁珖秀)·오정숙(吳貞淑)·박동진·성창순(成昌順)·조상현(趙相賢)·한승호(韓承鎬)·김성권(金成權)·정철호(鄭哲鎬), 김영자(金榮子),정회석(鄭會石) 이 보유자로 인정되어 사라져가는 판소리 전수에 진력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