훈지문집 ()

훈지문집
훈지문집
유교
문헌
조선 후기의 학자, 정만양, 정규양 등 2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09년에 간행한 시문집.
정의
조선 후기의 학자, 정만양, 정규양 등 2인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1809년에 간행한 시문집.
편찬/발간 경위

1809년(순조 9)에 문집을 간행한 것을 시초로 그 뒤 3∼4차에 걸쳐 속집·어록·부록·예서 등을 간행하였다. 권두에 정종로(鄭宗魯)의 서문과 두 저자가 합의하여 쓴 자서(自序)가 있다. 이 자서는 막내 동생 정몽양(鄭夢陽)을 시켜 태고와(太古窩)에서 쓰게 하였다. 1987년 10대손 정순극(鄭淳克)이 분산되어 있던 유고 62권 33책을 취합해서 상하 2책으로 축쇄하여 영인·간행하였다.

서지적 사항

62권 33책. 목판본. 규장각 도서·장서각 도서·국립중앙도서관 등에 있다.

내용

권1∼6에 세계도·훈지삼십이취도(塤篪三十二吹圖)·훈지구도(塤篪舊圖)·훈지신도(塤篪新圖)·훈지삼십육취도(塤篪三十六吹圖)와 시 790수, 권7∼20에 서(書) 463편, 권21·22에 잡저 51편, 권23에 서(序) 9편, 기(記) 14편, 권24에 발(跋) 16편, 잠(箴) 1편, 명(銘) 26편, 상량문 3편, 축문 11편, 권25에 제문 46편, 권26에 뇌문(誄文) 24편, 묘표 4편, 묘갈명 3편, 묘지명 6편, 권27∼30에 행장 18편, 유사 7편, 행록 4편, 행기 2편, 가장 2편, 가전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속집(續集)은 권1에 곤지록내편(困知錄內篇), 권2에 곤지록외편(困知錄外篇), 권3∼6에 치도의설(治道擬說) 등이 실려 있고, 어록(語錄)으로 훈지어록(塤篪語錄) 4권이 있다. 별집(別集)은 1권으로 심경석의보유(心經釋疑補遺)·계몽해의(啓蒙解疑)·원괘획제이(原卦畫第二)·명시책제삼(明蓍策第三)·계몽해의후어(啓蒙解疑後語)·상지록(尙知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부록 권1에 정만양의 언행록·묘갈명·만사·애사·제문, 권2에 정규양의 연보·유사·묘갈명·만사·뇌문·제문·행장이 실려 있다. 이밖에 한훤서(寒暄書) 1권, 개장비요(改葬備要) 1권, 의례통고(疑禮通攷) 12권, 의례통고별집(疑禮通攷別集) 3권, 동문록(同門錄) 1권, 목록 1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훈지도(塤篪圖)」는 훈·지 두 악기의 연주 방법과 악보를 도식과 아울러 소상하게 설명한 것이다. 시는 790여 수에 달하는데, 대부분 자연을 인간 생활에 비유하여 읊은 것이다. 체재는 오언과 칠언이 주된 형태이고, 『시경』의 시체도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한 편의 시를 두 형제가 서로 한 구절씩 읊어서 연구(聯句)를 이룬 것이 많으며, 각 제목 밑에 ‘塤(훈)’과 ‘篪(지)’를 표시하여 누구의 시라는 것을 밝혀 놓았다. 대체로 자연 환경을 소재로 한 것으로 미루어, 벼슬을 싫어하고 평생 자연에 묻혀 공부하면서 보낸 저자의 생활 태도와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다.

서(書)는 약 300여 편으로, 두 저자가 친지들과 왕복한 서신이다. 그들의 학문적 경향을 가장 잘 나타내는 부분이라 할 수 있다. 도학에 관한 의론, 의례(儀禮)에 관한 문제 등 당시 풍물에 관한 그들의 견해가 실려 있다. 「상갈암이선생문목부답(上葛庵李先生問目附答)」은 스승 이현일(李玄逸)에게 예설에 대해 질문한 것과 그의 회답을 함께 기록하여 실증하고 있다. 그밖에 성리학(性理學)·팔괘설(八卦說)·사단칠정설(四端七情說) 등에 관한 논설과 근방의 지방관이나 관리들과 교신하면서 시정(施政)에 관해 논의한 것도 간혹 들어 있다.

잡저의 「논이병옹이기변(論李甁翁理氣辨)」은 이형상(李衡祥)의 「이기변」을 논한 것이다. 정주학설(程朱學說)을 절충하여 이가 기를 생(生)한다는 이생기설(理生氣說)을 주장하고 있다. 「정성설(定性說)」은 존심양성(存心養性)에 근본을 두고 성인(聖人)의 본성과 중인(衆人)의 사욕을 들어 논한 것이다.

「유술설(儒術說)」은 유학자란 학술(學術)을 알아야 하며 강유(剛柔)를 겸해야만 지조와 의리를 지키는 참다운 선비라는 논설이다. 「육학설(陸學說)」은 육구연(陸九淵)의 효친제형설(孝親悌兄說)과 육경시오위주각설(六經是吾爲註脚說)이 잘못된 의론이라고 반박한 것이다. 그밖에 많은 예설과 「대월상제도(對越上帝圖)」·「경학연원도(敬學淵源圖)」·「노인관성도(老人觀省圖)」 등으로 유학의 덕목을 설명하고 있다.

발의 「서기자지후(書箕子志後)」는 『기자지(箕子志)』의 발문을 쓴 것이다. 『동사(東史)』·『사기(史記)』·경전(經傳) 등을 참고하여 기자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의 신하가 되지 않았음이 확실하다고 설명하고,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은 뚜렷한 문헌이 없어 시인할 수는 없다고 하였다. 그러나 기자가 은(殷)나라를 피해 우리나라로 왔다면 우리나라 사람들이 질박했기 때문에 문(文)을 숭상하게 했을 것이며, 기자가 아니었으면 저자 자신도 오랑캐의 행동을 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

본집의 제명(題名)을 ‘훈지록(塤篪錄)’이라고 한 까닭은 훈수(塤叟)·지수(篪叟)라는 두 형제의 호를 딴 것이다. 또는 『시경』에 백씨(伯氏)는 훈을 불고 중씨(仲氏)는 지를 분다는 뜻을 인용하여, 훈과 지의 악기는 두 개를 같이 불어야 화음이 잘되기 때문에 형제가 화목함을 비유하기도 하였다.

속집의 「곤지록내편」에는 심성정(心性情)에 대한 묘리와 학문을 닦는 방법을 천명하였다. 「곤지록외편」에는 천문·지리·흠경각(欽敬閣)·율려(律呂)·관명(官名)·녹질(祿秩) 등을 서술하였다. 「치도의설」에는 전정(田政)·군정(軍政)·공거(貢擧)에 대한 경국지책(經國之策)을 저자의 소신대로 밝혀 놓았다. 「훈지어록」에는 문인 이홍리(李弘离)가 정문(程門)의 『정자어록(程子語錄)』을 모방하여 평소 두 스승에게 견문했던 성정(性情)·이기(理氣)·인륜(人倫)·격물(格物)·귀신(鬼神)·천문·지리·율력(律曆)·상수(象數) 등에 대한 논리를 모두 수록하였다.

별집의 「심경석의보유」에는 『심경(心經)』 가운데 의심나는 문구를 해석해 놓았다. 「무신창의록(戊申倡義錄)」에는 이인좌(李麟佐)의 난 때 저자 두 형제가 의병장이 되어 창의한 기록이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의례통고」에는 관혼상제에 대한 절차를 심도 있게 편술하였다.

의의와 평가

이 방대한 글은 조선 중기에서 후기로 접어드는 시기의 시문학 연구와, 서(書)나 잡저에 나타난 사상·예설·철학 등 당시 유학 사상을 연구하는 데 귀중한 자료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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