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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사
제도
통일신라시대, 집사성(執事省) 및 숭문대(崇文臺), 한림대(翰林臺), 서서원(瑞書院)에 있었던 관직.
제도/관직
소속
집사성, 숭문대, 한림대, 서서원
내용 요약

낭(郞)은 통일신라시대에 집사성(執事省) 및 숭문대(崇文臺), 한림대(翰林臺), 서서원(瑞書院)에 있었던 관직이다. 집사성(執事省)의 가장 말단직인 사(史)를 경덕왕 대에 중국식으로 바꾼 직명이었고, 문한 관청의 경우 장관직이었다.

정의
통일신라시대, 집사성(執事省) 및 숭문대(崇文臺), 한림대(翰林臺), 서서원(瑞書院)에 있었던 관직.
변천 사항

통일신라시대의 관직 중 하나이다. 집사성(執事省)숭문대(崇文臺), 한림대(翰林臺), 서서원(瑞書院)에 있었다. 먼저 집사성의 가장 말단 관직으로 낭이 있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권9 신라본기9 경덕왕 18년(759) 정월조와 권38 잡지7 직관지(상) 집사성조에 집사사(執事史)를 집사랑으로 개칭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경덕왕 대에는 여러 차례에 걸쳐 관호를 개정하였는데, 집사성의 다른 관직들도 모두 이름을 바꾸었다. 장관 중시(中侍)와 차관 전대등(典大等)은 747년(경덕왕 6)에 시중(侍中)과 시랑(侍郞)으로 고치고, 3등관 대사(大舍)와 4등관 사지(舍知) 및 5등관 사(史)는 759년(경덕왕 18)에 각각 낭중(郎中), 원외랑(員外郞), 낭(郞)으로 개칭하였다.

이러한 집사성의 관호 개정은 당(唐)나라의 3성(省) 6부(部)의 관직명을 차용한 것이다. 장관직은 문하성(門下省)의 시중을 가져왔고, 그 이하 관직명들도 3성과 6부의 관직명들이다. 낭 역시 3성의 관직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상서성(尙書省) 정7품상 관직인 도사(都事)의 직무를 총괄하던 한(漢) 대 관직 상서랑이나 문하성의 기거랑(起居郎), 성문랑(城門郞), 부보랑(符寶郞) 등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직관지(상)에 의하면, 혜공왕(惠恭王) 대에 관호 복고 시 다시 사(史)가 되었다. 하지만 그 후에도 집사랑이라는 관직명이 확인된다. 836년(희강왕 1) 즈음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 경주 흥덕왕릉 비편」에 ‘전집사랑(前執事郞)’이 나오고, 『삼국사기』 권43 열전3 김유신전(하)에 김유신의 현손으로 그의 『행록(行錄)』을 지은 김장청(金長淸)의 관직이 집사랑으로 적시되어 있다.

또 872년(경문왕 12)에서 884년(헌강왕 10) 사이의 일을 기록한 여러 문헌과 금석문에서 시랑 등과 같은 경덕왕 대에 개정한 관직명이 사용된 사례가 확인된다. 이것을 보면 9세기 후반에 다시 집사사가 집사랑으로 개칭되었을 수 있다. 집사랑의 설치 연대를 정확히 알 수는 없으나, 집사성이 처음 설치된 651년(진덕여왕 5) 경까지 소급될 수 있다.

집사랑의 정원은 14명이었는데, 문무왕 대에 6명을 증원하였다. 관등이 주1에서 대사인 사람이 임명될 수 있었다. 집사랑 이외에 낭이 확인되는 사례로는 『삼국사기』 권39 잡지8 직관지(중) 숭문대조가 있다. 태자학관(太子學館)으로 설치되었다가 경적도서(經籍圖書)를 관장하고 제왕(諸王)에 대한 교수를 담당하던 당나라의 숭문관(崇文館)을 참고한 것으로 보인다.

숭문대는 관원으로 낭 2명, 사 4명, 종사지(從舍知) 2명이 있었다. 숭문대는 왕실과 궁궐 사무를 관장한 내성(內省)어룡성(御龍省) 예하의 관청이므로 중앙 행정 관청인 집사성과 직접적인 비교가 어렵지만, 낭과 사가 별도로 존재하고 있어서 집사랑과 같이 사를 개칭한 관직으로 볼 수는 없다.

숭문대랑은 금석문에서도 확인되는데, 872년(경문왕 12)에 만들어진 경주 황룡사 구층목탑 금동찰주본기에 "숭문대랑 겸 춘궁 중사성 신 요극일[崇文臺郞兼春宮中事省臣姚克一]"이 보인다. 또 강릉 보현사 낭원대사탑비 비문에 보이는 낭원대사 조부 김수진(金守眞)의 관직이 난성랑(蘭省郞)이었다고 적혀 있는데, 난성은 당에서 경적도서(經籍圖書)를 관장하던 비서성(秘書省)의 별칭이다.

신라에서 숭문대는 비서성과 유사한 직무를 수행하던 관청이어서, 난성랑을 숭문대랑으로 보고 있다. 한편 886년(정강왕 원년)에 건립된 양양 선림원지 홍각선사탑비 비문에 찬자를 “수병부낭중 겸 숭문관직학사 사비어대 신 김원[守兵部郞中兼崇文舘直學士賜緋魚袋臣金薳]”라고 기록된 것을 볼 수 있다.

직학사라는 관직은 직관지(중)에는 나오지 않지만, 당 숭문관과 같이 신라 숭문대에도 학사와 직학사가 있었고, 학사와 직학사가 바로 낭 2명일 것이라고 보는 견해가 있다. 다만 김원의 관직은 숭문대가 아니라 숭문관인 점을 생각할 때, 신라의 관직이 아니라 당에서 제수받은 관직일 수 있어, 신중할 필요가 있다. 또 한림대의 관직인 낭도 확인된다.

내성에 소속되어 왕명 문서 및 외교 문서를 담당한 상문사(詳文師)가 성덕왕 대 통문박사(通文博士)로 이름을 고쳤다가, 경덕왕 대 한림(翰林)으로 이름을 바꾸었다는 기록이 직관지(중)에 전한다. 한림은 한림대로 바뀌었으며, 한림대에는 낭, 대조(待詔), 서생(書生) 등의 관직을 가지고 있었다.

숭문대랑의 사례를 볼 때, 낭이 한림대의 최고 관직으로 추정된다. 771년(혜공왕 7)에 만든 성덕대왕신종 명문의 찬자 김필오(金弼奧)의 관직과 최치원(崔致遠)이 지은 제참산신문(祭巉山神文)에 김인규(金仁圭)의 관직에서 한림랑(翰林郎)의 사례가 보인다.

한편 『삼국사기』 권40 잡지9 직관지(하)에 실려 있는, “여러 전기에 보이지만 그 설치 연혁과 지위의 고하를 알 수 없는 것[其官銜見於傳記而未詳其設官之始及位之高下者]” 중에 서서랑(瑞書郞)이 있다. 같은 기록에 기실랑(記室郎)도 있지만, 이는 신라 하대 호족 예하의 관직으로 생각되어 제외한다.

서서랑이라는 관직은 다른 사료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를 『삼국사기』 권46 열전6 최치원전에 보이는 최치원과 최언위의 관직인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와 서서원 학사(學士)와 같이 서서원의 관직으로 볼 수 있다. 서서원이 어떤 관청인지 분명하지는 않지만 왕실 도서를 관장하고 국왕의 자문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한다.

의의 및 평가

숭문대랑과 한림랑의 예를 볼 때, 서서랑 역시 서서원의 장관직으로 추정된다. 이상에서 볼 수 있듯이 신라의 낭은 집사성의 실무 말단 관직과 숭문대, 한림대 및 서서원의 최고 관직이라는 두 가지 유형이 있었다. 그런데 집사성의 말단 관직 역시 왕명 출납과 관련한 문한 업무를 담당하였을 가능성이 높은 점을 고려할 때, 신라의 낭은 문한과 관련 깊은 관직이라 할 수 있다.

참고문헌

단행본

전덕재, 『삼국사기 잡지‧열전의 원전과 편찬』(주류성, 2021)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하』(신서원, 2008)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중』(신서원, 2005)
김택민 주편, 『역주 당육전 상』(신서원, 2003)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Ⅲ』(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이기동, 『신라 골품제사회와 화랑도』(일조각, 1984)

논문

이문기, 「신라의 문한기구와 문한관」(『역사교육논집』 21, 한국역사교육학회, 1996)
주석
주1

신라 때에 둔, 십칠 관등 가운데 맨 아래 등급. 사두품 이상이 오를 수 있었다.    우리말샘

집필자
홍승우(경북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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