멋은 한국인이 ‘미적인 것’을 가리킬 때 ‘아름다움’·‘고움’과 함께 사용하는 미학용어이자 문학용어이다. 미감을 표현할 때 한국인의 생활 전반에서 널리 쓰이는 개념이지만 미학적으로 명확히 정의하기는 어렵다. 한민족의 이념과 정서가 배양한 그 어떤 미적 요소 정도로 정의할 수 있다. 멋은 단일 자연물보다는 여러 자연물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러난다. 또 인간의 창조물 또는 창조 행위에서 느껴지는 내면적 정신미의 성격까지 포함한다. 그리고 정지된 대상보다는 동적인 움직임이 포함된 현상이나 상황에 대한 표현이다.
우리들은 ‘멋있는 집이다.’, ‘멋있는 글씨다.’, ‘저 사람의 옷맵시는 멋있다.’, ‘저이는 멋쟁이다.’, ‘멋있는 풍경이다.’라는 말들을 종종 사용한다.
이 때 멋이란 말은 단일하고 명백한 개념 내용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 생활 전반에 걸쳐서 미감으로 작용되고 있는 것을 지시하는 광의의 개념이다. 그런 만큼 말뜻이 명백하지 않다.
이 때의 ‘명백하지 않다.’란 말은 불분명하게 사용되고 있다는 것보다 개념 정의가 정확하게 행해지고 있지 못하다 라는 뜻에 가깝다.
즉 멋은 우리 삶 속에서 광범하게 쓰이고 있는 말이면서도, 그 개념의 미학적 정의가 뚜렷하지 못한 말이다. 이는 1958년에 있었던 멋에 대한 논쟁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당시 논쟁자의 한 사람이었던 이희승(李熙昇)은 멋이 “우리 민족만이 가진 특이한 정서”라고 정의하고 나서 “버선코가 뾰족하게 솟아오른 것이라든지 부드럽고 긴 옷고름이 바람에 포르르 날리는 것을 댄디(dandy)하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요, 어깨를 으쓱거리고 엉덩춤을 추는 모양을 포피쉬(foppish)하다고 표현할 도리가 없는 것처럼 멋은 우리의 풍속정서와 조형감각에서만 도출될 수 있는 것.”이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윤제(趙潤濟)는 각 민족의 생활환경과 역사에 따라 상이성이 있을 뿐 멋이란 그 어느 민족에게나 있는 것이라고 반박하였다.
즉 “영국 사람이 모닝코트에 실크 해트를 쓰고 스틱을 흔들고 다니는 것도 그들의 멋”이라는 것이다. 이희승이 멋을 민족의 특수성에 의거하여 보았다면, 조윤제는 보편성에 의거하였다고 하겠다.
이 논쟁은 다시 조용만(趙容萬)이 참가하고, 이 논쟁과는 별도이지만 오석천(吳石泉) · 윤태림(尹泰林) · 조지훈(趙芝薰) · 장덕순(張德順) · 정병욱(鄭炳昱) 등이 멋에 대한 글을 발표, 이 문제는 잠시 학계의 일각을 떠들썩하게 하였으며, 그와 함께 멋이 우리나라의 고유한 미적 특성으로 부각되기도 하였다.
멋에 대해서는 이보다 앞서 1934년에 고유섭(高裕燮)이 「한국미술의 별난 성격」에서 논의한 적이 있으며, 1941년에는 신석초(申石艸)가 그에 대한 소견을 『문장』지에 발표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들은 우리나라의 역사적 조형물과 언어에 한정하여 멋에 내포된 의미를 살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떤 역사적 배경을 지니고 있으며, 어떤 발전과정을 거쳐 왔는가, 그리고 또 어떤 미적 범주에 속하는 것인가를 밝히지 않았다. 피상적인 논의에 그친 것이다.
멋이 우리나라 고유의 미적 특성임을 입증하기 위해서는, 그것이 역사적 전개과정 속에서 어떻게 그 특질을 심화시켰으며 어떤 미적 성질을 띠고 있는가를 정의해야 될 것이고, 그 위에서 그것의 특수성과 보편성을 추출해야 될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먼저 멋이란 말에 대한 확실한 의미 파악을 해둘 필요가 있으리라 생각된다.
어원적(語源的)으로 볼 때 ‘멋’이 ‘맛’에서 연유하였으리라고 보는 것은 연구자들의 공통된 견해인 것 같다. 조윤제는 멋이 맛에서 유래하였을 뿐더러, 그 두 단어는 감성적(멋)이거나 감각적(맛)인 어감상의 차이가 있을 뿐 유사한 말이라고 하였다. 이희승도 멋은 맛에서 발생되기는 하였으나, 경험과 사실의 표현 욕구에 따라 점점 다른 말로 변하여갔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조지훈은 두 견해가 다 타당한 것 같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멋이란 말은 “애초에 맛이란 말 뜻을 좀 다른 어감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발음적인 왜형(歪形)으로 시작되었고, 그것이 차츰 특이한 관념형태로 바뀌어 원의와는 별반의 의미를 가지게 되었다고 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멋과 맛이 같다는 조윤제의 견해는 주로 멋이란 말의 발생초기의 의미에 중점을 두었고, 멋과 맛은 다른 개념이라는 이희승의 견해는 멋이란 말이 맛에서 연유하여 다른 뜻으로 바뀌어진 뒤의 의미에 관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조지훈은 거기에 다시 게일(Gale,J.S.)의 1891년판 『한영사전(A Korean-English Dictionary)』이 ‘멋’과 ‘맛’을 동일하게 ‘taste, interest’라 번역하였음에 반하여 최근의 한영사전들에는 전혀 다른 내용으로 번역되고 있음을 주시하였다.
즉 1890년대에서는 멋과 맛이 그다지 뜻에 차이가 없는 단어였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서 의미가 다른 별개의 언어로 분화되었으리라고 보고 있다.
여기에 다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족을 붙일 수도 있으리라 생각된다. 즉, 맛이란 1800년대 말까지는 주로 상류사회에서 쓰여왔고 멋은 하층사회에서 쓰였으나, 하층사회의 언어가 서민들의 활동영역의 확대와 더불어 보다 일반적인 언어로 대두되었으리라는 것이다.
물론 맛이 상류사회의 언어이며 멋이 서민사회의 언어라는 것을 단정지을 수는 없지만 시조에서 ① 숙속(菽粟)의 맛을 아넌동모르넌동, ② 매일에 영균(靈筠)을 맛드리며 학록(鶴鹿) 함께 놀리라, ③ 평생에 덜 먹은 맛을 다시 담가 보리라 등 여러 곳에 ‘맛’이라는 단어가 나타남에 반해 ‘멋’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다.
그 시기의 소설에서도 맛의 용례는 보이지만 멋은 보이지 않는다. 또한 양반사회의 전도자였던 게일의 사전에도 ‘멋’의 주석에 ‘see 맛’이라고 기입하여 ‘맛’을 본디말로 취급하고 있다.
이를 보면 당시에는 ‘멋’이 쓰여지기는 했으나 그다지 애용되지는 않았으며, 양반사회에서는 맛이 널리 쓰여졌음을 알 수 있다.
말의 생명이 전달력과 사용빈도수에 있는 것이라면 양반사회에서는 멋보다는 분명히 맛이 생명력 있는 언어였음을 엿볼 수 있다. 조선 후기의 서민언어의 특성이 음성어(陰性語)였음에 비추어볼 때 멋이 맛에서 변화된 서민어였음을 또한 유추할 수 있다.
이러한 언어의 음성화 현상 내지 서민어적 음성어의 수용은 ‘맛→멋’의 경우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언어에 두루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나’라는 접속사를 두고볼 때도 이 단어만으로는 ‘1’ 이외의 다른 의미가 얼른 연상되지 않는다. 그러나 서민언어의 특성인 음성화를 시켜보면 ‘허나’의 접속사적 성격은 명료히 드러난다.
이 같은 현상은 ‘다랍다→더럽다’, ‘고소하다→구수하다’, ‘담방대다→덤벙대다’, ‘놀→노을’ 등 한없이 널려 있다. 사전은 이러한 어감차(語感差)를 대개 양성의 경우 작은말, 음성의 경우 큰말로 처리하고 있다.
이러한 처리는 일부의 형용사나 동사에서는 가능하지만 명사 같은 경우에서는 소용되지 않는다. 그래서 ‘허나’ 같은 경우에는 그것의 사용 빈도수와 전달력에도 불구하고 방언으로 취급되는 것이며, 맛과 멋을 다른 말로 간주하는 것일 터이다.
물론 맛과 멋은 이제는 다른 말이 되었다. 맛이 ‘짭짤하다, 구수하다, 시큼하다’와 같이 감각적이라면, 멋은 ‘구성지다, 텁텁하다, 능청거리다, 거들먹거리다’처럼 감성적이다.
전자가 미각적 개념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고 있는 감각개념어라면, 후자는 그런 감각을 내포하면서도 삶의 기쁨과 슬픔을 수용하는 내면적이며 감성적 개념어로 발전해 간다. 이 같은 맛과 멋의 의미 변화과정이 양반어와 서민어의 변화과정과 무관하지 않다는 것은 강조할 필요도 없다.
언어의 변화과정과 역사의 변화과정을 하나의 시각에서 통일적으로 파악하지 않기 때문에 그 말이 거느린 의미망과 시대의 이념이 서로 맞물려 어울리지 못하게 되며, 그에 따라 그 말은 ‘시대’라는 동시적이며 통일적인 시각을 잃어버리고 제멋대로의 시각으로 사물을 의미화하게 된다. 이런 점은 멋의 논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사실 멋의 성질을 세련된 장인의 장기에 의해서 나타나는 것보다도 생활의 필요에 따라서 만들어진 민예적인 것으로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단아하고 섬세한 것으로 보는 측도 있다.
또 어울리지 않은 행동을 통하여 나타나는 다양성이라고 보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조화를 바탕으로 한 원상(原相)에 변화를 줌으로써 멋이 우러난다는 견해도 있다. 심지어 이색(李穡)의 시조와 『춘향전』의 어사 출두 장면에서 멋을 찾는 견해도 있다.
이러한 여러 견해들은 모두 시각의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논자들이 서민적 안목으로 멋을 천착하는가, 양반적 아취로 천착하는가, 민구(民具)나 건축물 같은 조형물을 통해서 보는가, 춤이나 노래 같은 추상적 예술양식을 통해서 보는가 하는 것은 ‘어떻게 현실을 보는가’라는 역사관에 따라서 다른 것일 터이다.
따라서 그것을 종합정리한다는 것은 잘못하면 도식적이며 기계적인 일이 될지도 모른다. 봉건사회의 가치관에서 볼 때는 어떤 시조에 나타난 바와 같이 날마다 죽순이나 먹으며 학 · 사슴과 더불어 사는 데서 멋을 볼 것이다.
이도령이 암행어사로서 남원에 내려와 불의를 밝히는 서릿발 같은 시 “金樽美酒千人血 玉盤佳肴萬姓膏 燭淚落時民淚落 歌聲高處怨聲高(금준미주천인혈/옥반가효만성고/촉루낙시민루락/가성고처원성고)”에서 조선시대적 멋을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 좋은 예를 우리는 신석초(申石草)의 ‘멋설’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멋을 “은둔과 한적의 자연에 접한, 생활을 초탈한 정신성”이라고 하면서 멋의 초속적(超俗的) 성질, 즉 양반적 성질을 강조한다.
세속적 삶의 조건들을 벗어났거나 혹은 그것들에 매이지 않을 수 있는 사회적 조건이 주어질 때만이 추구될 수 있는 멋은 특수적이라 할 수 있으나 일반적이라 할 수는 없다. 일반적이 아니라면 그 멋은 민족적일 수는 없다.
민족적 미감 혹은 미적 정조로서의 멋은 양반은 양반대로, 서민은 서민대로, 선비는 선비대로, 촌부는 촌부대로, 자기의 경험정조(經驗情操)를 통해서 나타낼 수 있는 어떤 것이어야 한다. 멋은 고도로 수련된 초인 세계만의 것일 수 없고 애상적인 속인 세계만의 것일 수도 없다.
멋은 묵향(墨香) 그윽한 서실에서 서책과 벗하며 사는 늙은 선비의 성성한 백발에서 느낄 수도 있고, 산전수전 다 겪은 퇴기(退妓)가 이별한 춘향 신세를 구성지게 노래할 때의 그 꺾어 넘어지는 소리에서도 느낄 수 있다. 또 추수가 끝난 뒤 마을에서 꽹과리를 두드리며 춤추는 농악대의 율동에서도 느낄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양반사회의 멋은 그 사회의 지배이념과 연면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며, 서민사회의 멋은 서민들의 가난과 질병과 노동과 사랑 속에서 우러나온 그 어떤 것이다.
이렇게 보면 멋은 단순하게 ‘민족의 고유한 것’이라고 하기보다는 민족의 이념과 정서가 배양한 그 어떤 미적 요소라고 정의하는 것이 보다 타당할 것이다. 이 점은 멋이라는 말의 용례를 보면 더욱 뚜렷해진다.
첫째, 멋은 지각개념이 아니라 감각개념이다. 동구길에 네 사람이 서 있다고 할 때 우리들은 그 수효와 용모를 파악할 뿐이지 거기서 멋을 느끼지는 못한다.
또한 감각개념이라고 할 때도 하나의 꽃이나 나무 · 하늘 · 구름을 보고 멋있는 꽃, 멋있는 나무, 멋있는 하늘, 멋있는 구름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그 꽃이나 구름이나 하늘을 배경으로 집을 지었을 때 우리는 비로소 “그 집의 배경이 참 멋있는데.”라고 말하게 되며, 그러한 풍경을 산책하게 될 때 “듣던 대로 과연 멋있군.” 하고 말한다.
이것은 멋이 자연의 단일물(單一物)에서는 느껴지지 않으나, 여러 자연물이 조화를 이루어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을 때 우러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이것은 여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이다. 여인의 얼굴만 보고서는 “아름다운 여자”라고는 해도 “멋있는 여자”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 여자의 옷맵시라든가 행동거지를 아울러 봄으로써 우리는 비로소 멋있는 여자라고 말하게 된다.
잘 지은 건물이나, 탁자 옆에 기품있게 걸린 사군자 화폭을 보고도 “멋있군요.”라고 주인을 향해 칭찬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를 보면 멋은 미와 비슷한 내용이면서도 ① 이미 미적 가치판단이 내려진 뒤에 사용되는 개념이며, ② 하나 이상의 사물이 모여서 조화를 이루거나 인간의 창조물에서 느껴지는 내면적 정신미의 성격이 있음을 간파할 수 있다.
조윤제가 들놀이나 정자놀이, 선술집을 멋있는 것이라고 하였던 데 대해, 조지훈은 들놀이나 정자놀이, 선술집이 그것 자체로 “한국적인 풍취를 지니고 있고 한국인에게 어울리고 사랑받는 풍속이지만, 그 들놀이나 정자놀이, 선술집에 모인 사람들의 언동이 무미건조하거나 파탄되어서 멋없고 멋적고 멋모르게 되어 있다면 그것은 결코 멋의 예가 될 수 없다.”고 하였다.
이는 멋의 조화성을 잘 집어내 묘사한 것이라 하겠다. 확실히 멋의 한 성격으로서 조화감은 우리나라 사람들의 가장 깊은 내면에 깔려 있는 기본 정조이자 사고방식이다.
농본문화적 특성을 가진 우리나라는 자연과의 조화를 이상으로 삼는다. 자연은 인간의 대상물이 아니라 우리가 소속되어 있는 우주적 질서이며, 모든 생명의 모태이자 사멸의 회기점이다.
불교적으로 말하면 공적(空的) 세계이며, 도교적으로 말하면 무위적(無爲的) 세계이다. 이 때의 ‘공적’ · ‘무위적’이란 ‘색적(色的)’ · ‘유위적(有爲的)’ 세계를 존재하게 하고 의미롭게 하여주는 것이다.
동양화가 존재태를 그리는 색과 면을 버리고 선(線)에 의해 대상을 그리는 것도 선만이 유 · 무의 상생적(相生的)이며 상보적(相補的)인 세계를 드러낼 수 있는 까닭이다. 멋 또한 상생적이며 상보적인 선적 특성과 전혀 무관하지 않다.
멋이란 정지된 상태에서보다도 움직이는 상태에서 잘 나타나는 것이다. 멋이 그림이나 시보다도 음악이나 무용과 같은 동적(動的)인 예술에서 그 특성이 잘 발현되는 것도 그 까닭이다.
최초의 멋의 제창자라고 볼 수 있는 최치원(崔致遠)의 풍류설(風流說)이 가무기(歌舞技)에 능하고 무사적인 화랑들에게서 찾아졌던 것도 멋의 음악적 · 무용적 성격을 뒷받침해주는 사실의 하나라 하겠다.
신석초도 이와 유사한 지적을 하고 있다. 그는 “틀림없이 정지의 상태보다는 동작의 상태에 멋이 있지만, 그러나 과도히 움직이지 않는 율동의 상태에서라야만 더 멋을 느낀다. 말하자면 직립(直立)한 자세의 수목보다 돌풍에 흔들리는 수목의 가지가 멋이 더 있고 그보다도 춘풍에 나부끼는 수류(垂柳)가 더 멋이 있다.”라고 말한다.
즉, 멋은 움직이는 상태에서 발생하지만, 자연스럽고 은근한 율동으로서 움직여 갈 때 가장 순연한 멋을 보이며, 거기에 다시 정신미가 가미될 때 그것은 풍요하게 나타난다.
멋이란 원래 자유분방한 동적 미가 아니라 생명력을 가진 사물들의 조화미이며, 그러한 아름다움을 찾는 인간의 정신미에 소속한 것이기 때문이다.
확실히 멋은 자유분방한 가운데서 감정과 행동이 균형을 이룰 때 잘 나타난다. 가야금 탄주에서 보면, 소리가 가야금 현 위에서 격렬하게 튕겨져 나올 때보다도 그런 격정적인 탄주를 하고 난 뒤의 정지상태 속에서 현들이 저절로 울어대는 대목에서 멋은 절정의 상태를 달리게 되며, 춤추는 이가 신바람나게 돌아갈 때보다도 그 동작을 멈추고 그 신명을 어깨에 실어 천천히 올렸다 내리는 동작에서 ‘도저히 번역할 수 없는’ 우리 민족의 참 멋을 느끼게 된다.
이렇게 정지상태에 가까운 동작 가운데서 우러나오는 멋의 배후에는 기실 자연과의 조화를 추구하는 동양인의 정조가 깔려 있으며, 그 정조는 중용(中庸)의 도(道)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중용이란 곧 균형과 조화의 철학이다. 중용의 참뜻은 하늘로부터 타고난 본성을 자연스럽게 발휘하라는 것이다. 그러면 인간의 행위는 사회정의와 그 정의에 입각한 질서를 실현시킬 뿐만 아니라 나아가 우주의 자연질서와도 융화하여 자연의 생성을 돕게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인 배경에서 보면 멋은 동양인의 한 정조로 바뀌어짐을 보게 되며, 그 멋이 실려지는 행위 자체는 민족의 고유성으로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적어도 그 철학적 기반만은 동양적 일반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겠다.
사실 한 민족의 미적 사고와 정서는 그 민족의 전통적 문화와 사상의 지배를 받고 있든가, 그것에 의해 알게 모르게 구속되고 있으며, 그 민족의 주류적 사상 또한 그 민족 구성체의 역사적 경험에 의해서 싹트고 열매맺게 된다.
즉 사상과 미적 사고와 정서는 서로가 서로의 원인이 되고 결과가 되는 상생적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러나 사상과 사고 및 정서가 예술창작을 통해 드러날 때에는, 전자가 사회가 요구하는 전형성의 면으로 작용하게 된다면 후자는 보다 더 구체적이고 경험적인 성격을 띠고 나타나게 된다.
즉, 미적 사고와 정서는 주체적으로 대상을 느끼고 부리는 가운데서 창조적 힘을 지니게 된다. 여기에서 미적 사고와 정서는 상대적 규범성을 벗어나거나 초월하여 그것을 놀고 부리는 일을 하게 되는 것이다.
멋의 논자들이 “우리나라의 멋은 …… 조금 어긋난 데에 있는 것 같다.”(조윤제)라든가 “멋은 조화를 기저로 하면서 원상(原狀)에 약간 변화를 주었을 때에 느껴지는 일종의 미의식을 뜻한다.”(정병욱)라고 한 것은 미적 사고와 정서가 규범성을 벗어난 것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규범성을 벗어난 이 멋은 이제까지 우리가 논의해 왔던 조화롭고 중용적인 멋과는 약간 다른 데가 있다는 면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화롭고 중용적이다.’라는 말은 엄정하고 결곡하고 단아한 선비적 세계를 연상시켜 주고 있는데, 엄정 · 결곡 · 단아는 멋의 바탕이긴 하되 그것만으로서는 멋이 잘 느껴지지 않는다.
즉, 멋은 ‘멋있다’는 것보다 ‘멋부리다’, ‘멋들어지다’, ‘멋대가리없다’, ‘멋대가리 없는 데도 멋이 철철 넘친다.’라는 용언들에서 깊은 맛을 느끼게 된다. 여기서 우리는 멋이 ‘있다’는 단순서술보다 그 ‘있다’를 이탈하고 부정하는 논리에 가까운 것임을 엿볼 수 있다.
일본어에서는 일본적인 미에 가장 가까운 것으로 ‘구와시(くはし)’ 또는 ‘기요시(まよし)’를 든다. ‘구와시’는 육친의 사랑, 특히 처자나 자기보다 나이 어린 사람들에 대한 연민의 정을 나타내고, ‘기요시’는 더럽지 않은, 순진무구한, 청정한 것 등을 나타낸다.
다카시나(高階秀爾)는 전자보다 후자를 중시하여 오늘날의 아름답다인 ‘우쯔쿠시이(うつくしい)’는 ‘기요시’와 많은 연관관계를 가지고 있는 듯하다고 지적하고서, 일본 미의 특색을 맑고 깨끗하고 청순한 데서 찾고 있다.
다카시나의 지적이 올바르다고 한다면, 그 지적은 우리가 보는 일본문학이나 일본미술 및 그 밖의 예술에서 약여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것은 사물에 대한 순결한 느낌이라는 면에서 일차적 논리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멋은 결코 순결하고 순진무구하고 청순한 가운데서 우러나오지는 않는다. 한국적인 멋은 순결 · 순진 · 청순을 벗어나서 파격성을 띠고 나타날 때 가장 확실하게 감지된다.
멋이 시나 회화 · 조각에서보다도 음악이나 무용에서, 특히 가야금의 농(弄)이 절정에 이르렀다가 사그라져 가면서 순간의 휴지부에 들어갔을 때 더욱 더 잘 느껴지는 것도 그 때문이다. 멋이 근본적으로 율동성 · 운동성 · 경성을 띠고 있는 까닭이다.
어느 논자가 멋은 정상적인 상태에서는 약간 벗어나되 전체적인 조화를 해치지 않는 선에서 가장 잘 감지된다고 정의한 것을, 조지훈은 과감히 부인했다.
그는 “멋은 전체적 조화를 해치지 않는 소극적인 것이 아니라 중용적 조화를 깨뜨리고 나서 이룩되는 새롭고 적극적인 조화”라고 말함으로써 멋의 의미를 명백히 한다. 그 ‘새롭고 적극적인 조화’는 앞의 ‘중용적 조화’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중용적 조화가 “이것 저것이 모순되지 않고 서로 잘 어우러짐.”이라는 사전적 정의대로의 조화라면 ‘새롭고 적극적인 조화’는 사전적 조화를 깨뜨리면서 이룩하는 새로운 단계의 조화이다.
그러면 우리의 생활이나 예술작품 속에서는 위와 같은 중용적인 조화와 그것을 벗어난 부정적인 조화가 어떤 형태로 나타나는가.
생활이나 예술작품 속에서 나타나야 우리는 그것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체험할 수 있게 된다. 생활이나 예술작품 속에 나타나지 않는 멋이라면 그것은 저차원의 관습이든가 기호의 범주로 떨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생활이나 그것을 재현한 예술작품은 한 개인이나 민족이 그 무엇을 어떠한 시각으로 보고, 그것을 어떻게 향유했느냐를 잘 보여준다.
따라서 생활이나 예술작품 속에는 그들이 처한 지리적 조건이나 기후조건, 역사적 조건들이 밀접하게 관계, 작용하고 있으며 그리하여 그것들은 한 민족의, 한 시대의 사회경제적 · 문화적 생각들을 반영하게 된다.
우리나라 미의 한 특질로서의 멋 또한, 우리나라의 삶의 모습을 반영한 것이자 그 예술의 특성을 반영한 것이다. 그것을 반영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 점에서 볼 때 멋의 조화성과 부정적 조화성은 전자보다도 후자에 보다 더 강점이 놓인다.
전자, 즉 중용적 조화는 김이안(金履安)의 초상화에서 볼 수 있는 바와 같이 의관을 단정하게 차려 입고 길고 맑은 눈으로 정면을 응시하는 유학자의 정신세계라든지, 궁중 아악의 장중한 리듬, 경복궁 근정전의 위용 등에서 어느 정도 찾아볼 수 있다.
물론 우리나라의 미적 특성으로서의 조화성이 궁중 아악이나 건축과 같은 예술작품 속에만 있는 것은 아니고, 그 예술작품과 자연환경의 어우러짐 속에서 오히려 본질적인 면이 드러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자연의 어느 부분에, 그 자연미를 손상시키지 않고 그 자연미에 의지하여 자리잡을 때 가장 뛰어난 조화미를 보여준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건축은 자연의 한 부분이자 그 부분으로서의 멋, 즉 조화를 이룩하고자 하는 멋에 중점이 놓인다.
우리나라의 정원도 자연경관의 연장으로서 꾸며져 자연스러움을 그 첫째로 삼는다. 그리하여 그 정원은 서양의 궁전들, 예컨대 베르사이유 궁전과 같은 인공미를 극력 배제할 뿐 아니라 중국 정원의 기괴성, 일본 정원의 작위적 단순성 또한 배제한다. 우리나라의 정원은 자연보다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상태를 가장 이상적인 것으로 여긴다.
따라서 우리가 자연으로부터 정원으로 들어갈 경우나 정원으로부터 자연으로 들어갈 때 거의 정원과 자연의 경계를 느끼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연을 모방하였으되 바로 자연인 듯한 거기에 우리나라 정원의 특색이 있기 때문이다.
이 같이 자연과의 조화를 가장 중요시 하는 우리나라의 건축이나 정원은 산의 기슭에 대개 자리잡게 되고, 강이나 개울을 끼게 되며 낙엽수들이 집을 둘러싸고 있게 된다.
그리고 그 자연적 주거공간에는 의관을 단정히 입고 있는 김이안과 같은 유학자가 사랑채의 서실에 앉아서 책을 읽고 있게 마련이다.
그것이 『춘향전』을 비롯한 여러 고전소설 속에서 기화요초(琪花瑤草)가 만발하고 학이 외다리로 서 있다고 과장적으로 묘사되고 있는 책 기운이 넘치는 선비의 세계이다.
우리의 조상들은 주자학적 이념미가 가득 서린 그 풍경을 매우 사랑하였으며, 그것을 당위적인 것으로까지 여기면서 계승, 발전시켰다.
그러나 사랑하면 그것을 배반하고자 하는 욕구가 생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주자학적 이념미를 계승, 발전시키면서도 그것을 또한 뛰어넘고자 하는 의식이 마음의 밑바닥에서 언제나 꿈틀거리고 있었다.
그 점은 이항복(李恒福)의 초상화에서도 어느 정도 엿보인다. 조선의 정신미를 뛰어나게 묘파(描破)한 이 초상화는 김이안의 초상화와는 달리 의문(衣紋)들이 상당히 추상화되었으며, 어딘지 모르게 엄격성이 흐트러져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 추상성과 흐트러짐은 일차적으로는 이항복이라는 개인적 성격에서 우러나온 것이겠으나, 그 이면을 캐고 들어가보면 그로 하여금 주자학적 엄격주의를 깨뜨리고자 하는 의식을 심어준 민족의 심리가 작용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사람들은 내면적으로 그 엄격주의를 늘 벗어나고자 하였을 것이며, 그것을 벗어나고자 하는 심리적 요구에서 더 휘청이는 듯한 멋이 농밀하게 부려졌을 것이다. 이 점은 건축을 보면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우리나라 미술의 따뜻한 이해자였던 야나기(柳宗悅)는 “조선의 서울을 방문하여 남산에 올라가 시가를 바라보면 눈에 비치는 것은 가옥의 지붕에 나타나는 한없는 곡선의 물결”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만약 그 원칙을 깨뜨리고 그 가운데 직선의 지붕이 보인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일본이나 서양식 건물이라는 것이다.
그처럼 우리나라의 건축은 곡선의 성질을 강하게 띠고 있으며, 그 지붕의 흘러넘치는 듯한 선들은 피안의 바닷가를 치는 은은한 파도 소리를 희미하게 듣는 느낌이라는 것이다.
물론 ‘피안의 바닷가를 치는 은은한 파도 소리’라는 표현은 미라는 물방울을 축여서 쓴 이방인의 감상으로서 그 건축을 이해한 데서 온 과장된 표현이겠지만, 우리나라 건축의 특성을 곡선으로 본 것만은 정곡을 찔렀다고 하겠다.
우리나라의 건축은 중국이나 일본, 서구의 건축보다는 틀림없이 곡선의 성질을 강하게 띠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곡선을 가장 많이 나타내고 있는 부분이 용마루의 긴 선을 타고 흘러내리는 처마이다.
두 손을 들어올리는 무희의 동작을 방불케 하는 단청을 한 처마의 아름다운 곡선미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단청이 없는 일반 주택의 경우라 해도 하늘로 향한 그 소슬한 아름다움은 그다지 변화되지 않는다.
사실 우리나라 건축의 아름다움은 지붕의 가지런한 기왓골과 함께 이 처마의 선에 모두 실려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용마루에서 흘러내린 곡선과 기둥으로부터 솟아오른 직선의 힘이 맞부딪쳐 일어나는 처마의 아름다움은 물이랑이 부딪쳐 일어나는 물보라처럼 두 힘의 충돌에서 비롯되면서도 조화의 율동으로 충만해 있으며, 그 율동은 건물의 모든 부분에 미치어 작용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나라 건축에서 처마의 이 선은 나타나지 않으면 안 되는 숙명적인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우리나라 건축에서 지붕의 비중은 건물의 절반을 차지할 만큼 절대적이다. 그런데도 이 지붕은 그 비중을 지탱해 줄만한 튼튼한 기둥도 없고, 또 지붕의 변화도 없다. 평면적인 기왓골의 유선(流線)이 있을 뿐이다.
이 점은 그리스의 파르테논을 보면 잘 나타난다. 그 건물은 튼튼한 역사(力士)처럼 대지에 발을 붙이고 시간의 흐름을 견디면서 고대 그리스의 의지와 감정을 전달해 주고, 그 기둥의 미가 건물의 미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온 의미를 기둥에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 건축에 오면 그러한 기둥이 거의 의미를 잃어버린다. 우리의 눈에 강하게 부각되는 부분은 기둥도 지붕도 아니고, 처마의 넘쳐흐르는 것 같은 곡선이다.
그 곡선은 오른손을 들어올리는 여인의 농염한 어깨짓이나 승무의 꺾어내리는 어깨짓처럼 한옥의 단아한 아름다움에 변화를 주고 멋을 부린다.
이 점은 여인의 의복 양식에서 보다 분명하게 나타난다. 좁은 치마말기로 가슴을 조이도록 여미고 그 위에 떠올리듯 정갈하게 받쳐입은 저고리, 자칫 흐트러질 것 같은 여체의 풍만함을 휘어린 선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어깨와 배래기, 그리고 그 풍만함을 단정하게 묶고 있는 옷고름, 무한한 양감의 치마주름들, 이것보다 더 우리네 여인들의 아름다움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또 있을까.
세속적인 모든 욕망을 초월한 석굴암의 불상들까지도 온몸에서 육감적인 하향(下向)의 의문(衣紋)이 흐르는 것을 보면 그 옷주름들은 우리의 의식에서 떨쳐버릴 수 없는 그 어떤 것을 현시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어떤 것’은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의 어머니와 할머니의 생애, 정한(靜閑)하면서도 은근하였던 그녀들의 삶에서 온 것이 아닐까.
주지하듯이 조선의 가부장적(家父長的) 질서 속에서 여인들은 자기를 주장하고 자기에 충실한 것이 엄격하게 금지되었다. 그리하여 그녀들은 여성적 욕망을 누르고 가슴에 끓어오르는 정염의 불길을 저고리의 섶 아래 숨기고 살아야 했다.
이런 여인들의 숙명적인 삶이 양식화된 것이 우리네 여성들의 치마와 저고리였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절제와 균정(均整)의 아름다움은 번뜩이는 정염의 불길을 고요히 나타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단장을 끝내고 조용히 손을 들어올릴 때 보여주는 여인의 모습은 한 올의 흐트러짐이 없으면서도 육신의 모든 선과 굴곡이 살아올라 전신에서 물결치는 듯하다.
특히 배래기에서 비롯되는 그 풍요한 육신의 물결은 어깨의 밋밋하고 도톰한 경사와 동정의 예리한 직선에서 눈부신 빛을 발하며, 도련(두루마기나 저고리자락의 끝 둘레)의 우아한 흘림으로 치올라 보는 이로 하여금 강렬한 육감적 상상력을 발동하게 한다.
선만이 아니다. 색도 그러하다. 비교적 안정된 빛깔의 치마와 삼회장저고리의 현란한 색의 배합은 극과 극의 조화에서 우러나온 우리 옷만이 지닌 멋이다.
어쩌면 이 멋은 한복의 넉넉한 품에서 온 것인지도 모른다. 그 품은 저고리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치마에서는 잘 감지된다. 저고리 속으로 스며드는 치마허리와 땅에 끌리는 듯한 치마주름들은 풍만한 여체를 넉넉하게 감싸면서 선정적인 멋을 도출한다.
특히 치마 뒷자락을 살짝 걷어올려 잡고 시원한 대청마루를 지나 댓돌로 사뿐히 내려서는 모습은 자기의 감정을 보이지 않게 조정할 수 있는 자의 여유까지 보여준다.
이 같이 농염하면서도 여유로운 치마 저고리의 곡선의 멋은 청자나 백자에서도, 성덕대왕신종의 비천문(飛天紋)에서도, 삼국시대의 와당에서도, 가야금의 농현(弄絃)에서도, 판소리의 더늠과 농악의 흥청거림에서도 두루 찾아진다.
특히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농현은, 그것이 처마나 치마 저고리와 같이 가시적인 것은 아되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곡선미가 지니는 흥청거림을 한껏 흥겹게 느끼게 한다.
농(弄)이라는 것은 그 한자가 뜻하듯이, 악보에 나타난 음이 아니라 거기에 따라온 울림이다. 전통적인 교수법에 따르면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교수법은 처음 10년 정도는 본가락만을 가르치고 농에 해당하는 부분은 가르치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랜 기간의 본가락 연습에서 숙달하게 되면 농은 그 위에서 자연스럽게 터득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즉 농은 가르침에 의해서 터득되는 것이 아니라 그 가르침을 바탕으로 하여 스스로 깨우치고 터득하는 개성적인 소리인 것이다. 농을 개성적인 소리로 보는 것은 거문고의 주법을 보면 명료히 나타난다.
연주자는 오른편 다리를 구부려 책상다리를 하고 앉은 다음 거문고 대모를 오른편 무릎에 걸치고 왼편 무릎으로 거문고 뒷면을 곧추어 괸다. 그런 뒤 연주자는 얼굴을 왼쪽으로 비스듬히 돌리고 현을 누르는 왼손을 본다. 눈길을 현을 타는 오른손으로 돌려서는 안 된다.
거문고 주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운시(運匙)이면서도 우리나라의 음악적 전통은 운시에 울리는 소리보다도 그 소리를 조절하는 왼손의 역할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 왼손의 역할에 의해서 농은 요성(搖聲)으로, 또는 퇴성(退聲)을 울리면서 그 누구의 것도 아닌 자신의 소리를 내기 때문이다.
농의 퇴조는 흡사 무용의 정중동(靜中動)의 상태와 유사하다. 우리나라 무용은 무용의 본질이라고 할 수 있는 동작의 진행보다도 그것을 절제하고 정지시키는 데에서 멋을 창출한다. 따라서 우리나라의 무용은 다리나 손의 움직임에서 멋이 조성되는 것이 아니라 어깨의 움직임에서 조성된다. 신석초의 표현에 따르자면 어깨의 후절(後節)에 의해서 조성된다.
무용수가 박자에 맞추어 무대공간을 유유히 돌다가 두 발을 멈추고서 어깨를 잠시 올리는 모습은 ‘도저히 번역할래야 번역할 수 없는 우리만의 것’이다.
조지훈도 그와 유사한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바, “무용수가 발의 동작을 멈추고 문득 어깨를 한번 올리고 팔을 서서히 펴서 원을 그릴 때는 굉연(轟然)한 율동”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우리 무용은 ‘정중동’의 상태에서 멋을 느끼고 거기에서 미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다. 이는 한국화가 형사(形似)의 세계보다도 ‘무형사’의 세계인 여백에 의해서 세계의 무한성과 영원성을 나타내려고 하는 것과도 같다.
위에서 우리나라의 미적 요소로서의 멋이 율동미 · 곡선미를 통해서 나타난다는 사실을 대충 알아보았으며, 동시에 그 멋이 기능적 차원보다 인격적 차원에서 더욱 잘 드러난다는 사실도 알아보았다.
치마 저고리의 멋이 여인의 내면적 요소에 의해서 조절되어 나타나고 가야금이나 거문고의 농이 인격적 개성으로 나타나듯이 멋은 ‘부리는’ 차원보다 부리지 않으면서도 부려지는 차원, 즉 본래적인 의미에서의 유(遊), 즉 놀이와 불가분의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논어』에서의 ‘유’는 배우고 익혀서 능하게 된 자의 ‘유’, 즉 예(禮)의 유를 말한다. 따라서 그것은 사무사(思無邪)한 것이며, 즐거운 것이며 도덕적인 것이다. 그것은 내면적이고 인격적인 차원에서 작위성이 없이 부리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부리지 않는 가운데서 부리는 멋은 한국화(곧 동양화)의 개성론에서 잘 나타난다. 한국화의 개성은 서양화에서와 같이 회화적 대상을 그리는 데서 파악되지 않는다. 한국화에서는 대상 성격이 그다지 중요시되지 않는다. 그들은 회화적 전범을 중요시한다.
그리하여 한국화의 화가들은 스승의 그림을 보고 배우게 되며, 선 하나 점 하나 긋는 데에 스승과 똑같은 경지에 이르러야 비로소 한 화가로서의 개성이 우러난다고 본다. 그 개성은 기술적, 즉 부리는 개성이 아니라 인격적 개성이다.
한국화가 ‘있는’ 세계보다는 ‘있어야 할’ 세계, ‘보이는’ 세계보다도 ‘보이지 않는’ 세계를 주시한 것은 그 때문이다. 한국화가 색(色)과 면(面)을 버리고 선(線)으로써 의표하려는 것도, 선이 심성에 의해서 사물의 내면세계를 파악하는 데 적절한 형식이어서이다.
김홍도(金弘道)의 <소림명월도(疎林明月圖)>라든지 김정희(金正喜)의 <세한도(歲寒圖)> · <부작란도(不作蘭圖)>, 전기(田琦)의 <계산포무도(溪山苞茂圖)> 등은 모두 간소한 몇 개의 선으로 이루어져 있다. 독서인(讀書人)의 시선으로 그려진 이 풍경들은 산 · 나무 · 강 · 정자 등을 간소하게 화면에 배치해 놓고서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들의 쓸쓸한 심정을 대입하여보게 하는데, 그 쓸쓸한 심정, 즉 소산지기(蕭散之氣)는 독서인의 높은 교양미인 것이다.
원래 소산지기란 한국화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중국 · 일본 등 동아문화권 회화의 보편적 특성이며, 원나라 말기의 2대가인 황대치(黃大痴) · 예운림(倪雲林)에게서 극대화된 것이다.
특히 우리나라에서는 김정희 · 전기 등의 회화를 비롯하여 가야금산조, 승무, 성덕대왕신종의 비천도, 여러 불상들의 의문(衣紋) 등에서 맑고 고요하고 온화하면서도 비감스런 것으로 보편화된다.
이를 고유섭(高裕燮)은 적조(寂照)의 미라고 이름하였으며 야나기 · 김원룡(金元龍) · 최순우(崔淳雨) 등은 곡선의 미, 자연미라고 지칭하였다.
선으로서 나타나는 ‘소산지기’는 있는 것보다도 있어야 할 것, 더러운 것보다는 깨끗한 것, 복잡한 것보다는 단순소박한 것 등을 내포한 것이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미의식이 단순소박하고 깨끗하며 고요하고 미래지향적인 데서 정신적인 공감대를 이룩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회화에 있어서는 간소한 선들을 싸고 있는 여백 면으로, 음악에 있어서는 휴지(休止)로, 무용에 있어서는 정중동(靜中動)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 단순소박하고 깨끗하고 고요함은 이성적으로 파악된 것이라기보다는 감성적으로 향수하는 것이며, 집단적인 것이라기보다는 개별적인 면이 강하다.
아름다움이란 구체적으로는 개별적이며 감성적으로 인지된다는 점에서는 동서양이 다름없다고 할지라도 그 미가 인지되는 부분에서 합리적이며 보편적인 미의 기준을 서구가 가지고자 했다면 우리나라(또는 동양)에서는 깊이 느껴 얻는 방식으로 처리하고자 한 면이 있다.
서구에서 미의 바탕을 이루는 것으로 합리적 원리가 추구되었던 것은 미의 보편성을 취하기 위해서였다. 실제로 꽃의 아름다움이나 바람의 상쾌함은 만인에게 공통적으로 감지된다.
따라서 거기에는 ‘공통적으로 감지되는’ 보편적 힘이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며, 그 ‘보편적인 것’은 개인의 감정세계를 초월한 어떤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하여 서구는 미에 있어서도 어떤 합리적이며 보편적인 근거가 추구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서구와 같은 방식으로 미를 규정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미를 받아들이는 ‘마음’을 중시했으며, 그 마음은 나의 마음이자 또 남의 마음과 같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마음의 동질성 내지 감정의 공동체를 취하고자 했다고도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미의 문제에서 제기되는 것만이 아니다. 사회경제적인 면에서도 우리는 어떤 사회현상에 대해서 이성적인 공감대보다는 감성적인 공감대를 가지려고 한다.
예컨대 대일관계라든가 대북관계에서 우리는, 우리에게 일본은 무엇이며 북한은 무엇인가를 이성적으로 파악하기보다는 감성적으로 좋고 나쁨을 결정하고, 그에 의해서 행동방향을 정한다.
단적으로 말해서 이(理)보다는 정(情)이 강한 것이다. 이렇게 마음에 의해서 감지되는 정의 미는 여름의 발이나 모시에서 느끼는 시원함, 화문석의 마르고 깔깔함, 화채의 신선함, 석가탑을 비롯한 고대 석탑들에서 보는 단순하면서도 그윽함 등에 두루 나타나고 있다.
가지런하며 단순 고요한 미는 멋의 최고 경지이자 미(美) 그것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선으로서 표상되는 멋이 궁극에 가서는 가장 한국적인 미로 포섭됨을 보게 된다.
그러면 자연과의 조화를 기저로 하는 멋이 오늘날에도 한국미의 한 특성으로서 자기 전개를 해나갈 수 있을 것인가를 물어볼 차례가 된 것 같다.
이 점에 대해서는 멋의 조화적 성격이 산업사회화로 바뀌고 있는 오늘날의 우리 사회에서 어떻게 바뀔 것인가를 물어보아야 될 것이다.
다음으로 멋은 남에게서는 볼 수 없는 우리 고유의 것인가, 이 때의 고유성이란 대체 무엇인가라는 물음이 주어진 다음에야 해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첫째의 질문에 대해서는 급격하게 산업화되고 있는 현대에서 멋의 자기 변용을 좀더 지켜봐야 할 것이다. 둘째의 질문에 대해서는 선각(先覺)들의 고구(考究)가 있는 터이므로 그들의 견해 위에 첨언을 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한 적이 있지만 이 문제는 1920년대라는 국권상실의 배경 속에서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된다.
최남선(崔南善)의 ‘밝사상’, 정인보(鄭寅普)의 ‘얼’, 고유섭 · 신석초 등의 ‘멋’이 그것이다. 이들은 다같이 ‘밝다’, ‘얼얼하다’, ‘멋들어지다 · 멋부리다’의 형용사나 동사에서 오고 있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것은 당시대의 국학, 즉 한국학이 한자문화권의 사고방식과 그 개념체계에서 벗어나 우리 생활 속에서 쓰이고 있는 언어와, 그 언어가 표상하고 있는 가치체계를 세우려고 하는 욕구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즉 1920년대의 한국학은 중국과 다른 우리 문화의 특성이 무엇인가를 문제로서 떠올리게 되었고, 그에 따라 밝사상 · 얼사상 · 멋설 등이 대두하게 된 것이다. 그것들은 밝과 얼이 사상 · 역사 쪽에서, 그리고 멋이 문학 · 예술 쪽에서 뼈와 살을 찾으려 했다고 볼 수 있다.
밝, 그리고 그에 의해 형성된 얼이 태양이 떠오르는 동쪽을 찾아서 한반도로 이주해온 사람들의 태양숭배사상이라면, 멋은 그러한 사상과 역사의 전개과정에서 정립된 조화감각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멋설의 주창자들은 앞에서도 말한 바 있는 1920년대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남과 다른 우리 문화의 특징을 당위적으로 강조하게 되고, 다른 한편으로는 역사적 조형물(시 · 그림 · 음악 · 무용을 포함)을 살피면서 그것의 우수성을 강조하려고만 한다.
예컨대 멋이란 “우리나라 사람만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지 외국사람으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것”이라든가 “탁월한 자기 훈련의 힘과 일종의 긍지로서 거기에 안주할 수 있는 것”이라는 수식 등이 그것이다.
대체 우리만이 느끼고 이해할 수 있는 고유성이란 무엇인가. 고유성이란 어떤 존재물이 존재하기 전부터, 또는 존재와 동시에 그 안에 포함되고 있는 본성을 말한 것이 아닐까? 아마도 그러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논리 아래서의 고유성이란 필연적으로 다른 문화와는 다른 성질이어야 한다. 또 변화와 수정, 첨가와 증대가 행해지지 않는 본래적인 것이어야 하며, 그러한 논리는 또다시 그 민족을 그 고유성에 의하여 다른 민족과 구별시킬 뿐 아니라 다른 민족들에 우선하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엄밀한 의미에서 고유한 우월성이란 모든 민족에게 고루 주어지는 것이며, 그리하여 그 논리는 논리 자체에 의해서 그 우월성이 부정되고 말 것이다.
따라서 한 민족문화의 고유성이란 생래생득(生來生得)의 것이라기보다는 한 민족의 경험 속에서 생성되고, 내외의 충격에 의해 부단히 재창조되는 것이라고 해야 발전적인 모습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역사발전 속에서 그것의 전개과정이 무리없이 살펴질 수 있을 것이며, 어떠한 유의 경험만이 어느 민족에게 주어질 수 있다는 경험의 폐쇄성을 물리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고유성이란 폐쇄적이거나 선민적(選民的)인 것이 아니며, 민족 현실에 배치되는 것도 아니다. 민족이 발붙이고 있는 현실의 인과율이 요구하고 배척하는 것, 민족 성원의 이익을 증진시키고 민족의 집단적 경험내용을 풍부히 하는 사회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될 수 있도록 지속적인 창조성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
그때 그 고유성에는 보편성이 따르게 되고 외래문화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을 가지게 된다. 창조란 어떤 면에서 자아 위에 타아(他我)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을 진작시키는 것을 말한다.
따라서 타아를 수용할 수 있는 힘이 결여되었다면 그것은 보편성을 상실할 뿐 아니라 고유성도 상실하게 된다. 고유성인 보편성이라는 문제가 창조성을 떠나서 논의될 수 없는 요인이 여기에 있다. 멋의 문제도 위와 같은 바탕 위에서 논의되어야 함은 물론이다.
그런 점에서 1920∼1930년대의 멋 논의는 정당성이 부여되나, 그 이후의 멋 논의는 ‘왜 그러한 논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가.’라는 현실적 근거가 빈약하다. 멋의 양반적 성격, 무실용적(無實用的) 성격, 한일적(閑逸的) 성격에 대한 부각도 바로 거기에서 비롯된다.
노동적 · 민중적 성격이 소외되는 까닭도 거기 있다. 조화적 특성으로서의 멋이 우리 사회에서 기능적으로 작용하기 위해서는 그것의 긍정적이며 현실적인 요소를 찾아내야 한다. 또 그것이 우리의 삶과 예술작품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는가를 구체적으로 검토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우리문화의 특색으로서의 한(恨)이라든가, 우리 사상의 기저적 의식으로서의 무속사상들과의 관련성 또한 검토되어야 한다. 특히 한과 멋의 관련성 여부는 한이 우리문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면 클수록 세밀하게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70년대에 들어와서 한은 시나 소설로, 또 평론으로 집요하게 추구되어 ‘억압의 침전물’로 정의되는가 하면 억압에 의해서 쌓인 원한을 내면화시켜 풀어버리는 감정적 정화작용으로 해석되기도 하였다. 전자는 현실부정적 시각과 이어지고 후자는 정신현상적 요법으로 이해되었다.
이 같은 한의 부정적이며 수동적인 성격은 멋의 놀이적 성격과는 크게 다른 듯이 보인다. 첫째로 한이 억압을 ‘내면화하여 푸는’ 것이라면 멋은 놀이적 형식에 의하여 푼다.
둘째로 접동새의 전설에서 볼 수 있듯 한이 비극적인 경험성을 띠고 있는 심리적 용어라면 멋은 미적 개념어이다. 셋째로 한이 내면적 · 비관적인 용어라면 멋은 외면적 · 조화적 용어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 둘이 합치된 부분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컨대 한적 성격을 지닌 가야금의 농은 멋이 가장 잘 나타나고 있는 부분의 하나이며, 억압의 침전물로서의 한은 멋의 부정적 요소와 많은 면에서 결부된다.
이렇게 멋과 한의 유사성 · 이질성이 찾아지고 그것이 우리 민족의 심리학에서 각각 어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가를 밝힌다면, 멋의 미적 성격은 보다 더 분명한 모습을 띨 수 있을 것이다.
그 밖에도 멋과 선의 문제, 멋과 생활용구(이는 멋의 실용성과 무실용성의 문제와도 상관된다)의 문제도 밝혀져야 한다.
특히 멋과 선의 문제는, 어째서 멋이 선적 특성을 띠고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선이 정신성을 띠고 나타날 때 어떻게 멋의 범주를 넘어서서 미의 문제로 바꾸어지는가를 살펴봐야 할 것이다.
회화(한국화)의 경우에서 선이 소산지기를 발휘할 때는 멋으로 언표되지 않고 절조미로서 미적 범주에 들게 되는데, 이를 미학적으로 추구해 들어가면 멋의 한계성, 멋과 미의 내밀한 관계 등이 밝혀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