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사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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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정운(권1,6)의 서문
동국정운(권1,6)의 서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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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승정원 승지 또는 규장각 각신이 특정의 문신 · 관원 및 관서 · 사고 · 향교 · 서원 등에 내려준 책. 내사본.
이칭
이칭
내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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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반사본은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승정원 승지 또는 규장각 각신이 특정의 문신·관원 및 관서·사고·향교·서원 등에 내려준 책이다. 내사본이라고도 한다. 책을 반사한 사례는 고려조에서 볼 수 있으며, 조선조에서는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책을 반사받았을 때 책을 미리 나누어 주고 장책하게 한 다음 승정원에 제출하여 ‘선사지기’의 보인을 찍어 받는 것을 법식으로 정한다고 나와 있다. 임금이 내려준 하사품인 까닭에 그 후손들이 가문의 명예로 여겨 잘 보존하고 있다.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반사본은 함께 찍어낸 다른 활자본의 인출 연대를 고증하는 데 기여하고 있다.

목차
정의
임금의 명령에 의하여 승정원 승지 또는 규장각 각신이 특정의 문신 · 관원 및 관서 · 사고 · 향교 · 서원 등에 내려준 책. 내사본.
내용

‘내사본(內賜本)’이라 일컫기도 한다. 그러나 고려 때부터 쓰인 예를 포괄하는 넓은 개념의 용어는 반사본이다. 을 반사한 사례는 일찍이 고려조에서 볼 수 있다.

1045년(정종 11) 4월 경적(經籍)과 축소(祝疏)를 맡아보던 비서성(祕書省)이 『예기정의(禮記正義)』 70부, 『모시정의(毛詩正義)』 40부를 새로 간행하여 어서각(御書閣)에 1부를 간직하고 나머지는 문신에게 반사하였다는 기록이 최초의 것인 듯하다.

숙종은 1096년(숙종 1) 7월 문덕전(文德殿)에 나아가 역대로 간직해 온 문서를 열람한 다음 부질(部帙)이 완전한 것을 가려 문덕전· 장령전(長齡殿) · 어서방(御書房) · 비서각(祕書閣)에 나누어 간직하고, 나머지는 양부(兩府)의 재신(宰臣) · 고원(誥院) · 사관(史館) · 한림원 등의 관원과 문신들에게 차등있게 반사해 주었다.

조선시대에는 책의 반사가 빈번하게 이루어졌다. 반사본에는 목판본도 있었지만 주로 활자본이 많았다. 『세종실록』 1440년(세종 22) 8월 10일조에 의하면, 주자소에서 찍은 책을 반사받았을 때 장책(粧冊)을 소홀히 하여 책을 손상시키는 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책을 미리 나누어 주고 장책하게 한 다음 승정원에 제출하여 ‘선사지기(宣賜之記)’의 보인(寶印)을 찍어 받는 것을 영구적인 법식으로 정한다고 하였다.

또 1429년 3월 26일조에는 경연 소장의 책에 ‘ 경연(經筵)’과 ‘내사(內賜)’의 도장 찍을 것을 주청하니 그대로 따랐다는 기록이 있다.

그 실례로 1429년 8월에 인출된 경자자본 『서산선생진문충공문장정종(西山先生眞文忠公文章正宗)』(서울대학교 도서관 가람문고 소장본)을 들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세로 3.7㎝, 가로 1.9㎝의 조그마한 약식 보인에 지나지 않는다.

5㎝ 방형(方形)의 정식 ‘선사지기’가 찍힌 것은 1447년 10월에 반사된 『용비어천가』 목판본과 1448년 11월에 반사된 『동국정운』 활자본에서 볼 수 있다. 그리고 책가위 안쪽에 내사기가 쓰여진 것은 언제부터인지 자세하지 않으나, 16세기 이후 반사된 책에서 많이 볼 수 있다. 내사기의 형식은 개인과 단체에 따라 다소 다르다.

개인의 경우는 첫째 줄에 반사 연월일을 쓰고 둘째 줄은 첫 줄의 수자(首字)보다 한 자 올린 상일자(上一字) 또는 두 자 올린 상이자(上二字)의 형식으로 ‘내사(內賜)’의 용어를 쓴 다음 반사를 받는 이의 직함 · 성명 · 서명 1건의 차례로 쓴다. 이것을 한 줄에 다 못 쓰는 경우는 개항(改行)하여 수자의 위치로 이어진다.

서명에 『어제문집(御製文集)』과 같이 ‘어제’가 붙어 있는 경우는 다시 개항하여 상일자 또는 상이자의 형식으로 쓴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명제사(命除謝)’와 같은 ‘은(恩)’을 각각 개항하여 상일자 또는 상이자의 형식으로 쓰고, 끝줄 아래에 임금의 명을 받들어 내려주는 승지의 직함과 ‘신(臣)’에 이어 성을 쓰고 수결(手決)한다.

내사기 중 1건은 1질을 뜻하고, ‘명제사은’은 임금이 베풀어 주신 은총에 대한 인사는 하지 않아도 좋다는 것을 뜻한다. 일일이 인사하는 폐단을 없애기 위하여 명문화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단체는 개인 반사자의 경우와 같은 차례로 쓰고, ‘명제사은’만을 생략하는 것이 원칙이다. 그러나 경우에 따라 내사 다음에 반사 책명과 보낸 관서명에 이어 ‘상(上)’을 표시하기도 하고, 더욱 간략하게 쓴 경우는 반사 연월일과 보낸 곳의 관서명에 이어 ‘상’만을 적기도 한다. 상은 올린다는 뜻이다.

책의 반사는 세종 때부터 줄곧 승정원의 승지들이 맡아보았으나, 정조 원년에 규장각이 설치된 뒤로는 그 기능이 규장각으로 옮겨져 직각(直閣) · 대교(待敎) 등의 각신이 맡아보았다. 따라서 이 경우 내사기의 끝에는 각신들의 직함과 성에 이어 수결이 표시되고, 본문 첫장에는 ‘규장지보(奎章之寶)’라는 보인이 찍혔다.

1865년(고종 2) 완성된 『대전회통(大典會通)』의 예전(禮典) 새보(璽寶)에 의하면, 책과 문서에 찍히는 보인에는 그 밖에도 ‘동문지보(同文之寶)’가 있는데, 그 세주(細註)에서 책을 반사하는 데에도 사용하였음을 설명하고 있다.

그 반사인이 찍힌 책으로서는 1781년(정조 5)의 『친림이문원강의(親臨摛文院講義)』 정유자본과 『문신강제절목(文臣講製節目)』 정유자본이 있는데, 규장각의 초계문신(抄啓文臣)에게 강의용으로 반사한 활자본인 점에서 공통적이다.

그리고 ‘흠문지보(欽文之寶)’의 반사인이 찍힌 책도 볼 수 있는데, 1898년 민영익(閔泳翊)에게 반사된 『황명조령(皇明詔令)』 재주정리자본과, 1891년(고종 28) 예빈부(禮賓府)에 반사된 『이원조례(摛院條例)』 재주정리자본을 들 수 있다.

반사본이 지니는 의의는 첫째, 내사기에 의하여 책의 간인연대를 거의 가깝게 고증할 수 있음을 들 수 있다. 우리나라의 반사본은 활자본이 대부분인데, 이들 책에는 거의 인출연대 표시가 없다.

활자본을 반사하여 간혹 빠뜨린 자에게 뒤에 내려주는 경우도 있지만, 대체로 그 활자본이 인출된 해에 이루어졌다. 따라서 오늘날 전해지고 있는 반사본은 함께 찍어낸 다른 활자본의 인출연대를 고증하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

둘째, 반사본은 임금의 하사품이므로 책의 지질 · 장정 · 인쇄상태가 양호하고, 또 본문의 교정이 철저하여 오자와 낙자가 없는 우아정교한 관판본임을 들 수 있다. 특히 관주활자(官鑄活字)로 찍은 반사본은 동양 삼국 중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점에서 그 독특성과 우수성이 두드러지게 부각된다.

세째, 반사본은 임금이 조상에게 내려 준 하사품인 까닭에 그 후손들이 가문의 최대 명예로 여겨 오늘에까지 고이 간직해 왔으므로, 귀중한 전적문화유산을 보전한다는 시각에서도 그 의의가 크다.

참고문헌

『고려사』
『조선왕조실록』
『대전회통』
『한국서지학』(천혜봉, 민음사, 1997)
「내사기와 선사지기에 대하여」(백린, 『국회도서관보』 6-8, 1969)
「내사기와 내사인기」(윤병태, 『숭의여전 도서관학연구지』 8, 1987)
「朝鮮官版の內賜記と國王印について」(中村榮孝, 『朝鮮學報』 25, 19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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