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하문집』은 조선 후기부터 대한제국기까지 생존한 학자 송은성(宋殷成, 1836~1898)의 시가와 산문을 엮어 간행한 시문집이다. 1936년에 석인본으로 간행하였다. 조선 말기에 벼슬에 나가지 않고 산림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힘썼던 저자의 문자 생활과 학문적 자취를 살펴볼 수 있다.
4권 2책의 석인본이다.
1936년 아들 송한준(宋漢駿)이 편집하여 간행하였다. 권두에 노상직(盧相稷)의 서문, 권말에 종손 세재(世再) · 안효진(安孝珍) · 송세윤(宋世允)의 발문이 있다. 1925년에 작성한 노상직의 서문에 따르면 을축년 여름에 아들 송한영(宋漢榮), 송한준(宋漢駿)과 외손 안효진(安孝珍)이 저자의 시문 4책을 가지고 찾아와 교정을 부탁하였다고 하였다. 또한 향음시(鄕飮詩)가 뛰어나다며 기리어 칭찬하였다. 1936년에 종손 송세재(宋世再)가 작성한 발문에 따르면 저자가 서세한 지 39년이 지나 간행된 것을 감개해 하면서, 출간은 송한준의 지극한 정성으로 이루어졌으며 교정은 안효진이 전담하였다고 명기해 두었다.
권1∼3에 부(賦) 1편, 사(詞) 1편, 시 159수, 소(疏) 3편, 잡저 11편, 서(序) 4편, 기(記) 3편, 발(跋) 1편, 명(銘) 1편, 찬(贊) 10편, 송(頌) 2편, 제문(祭文) 7편, 권4는 부록으로 가장(家狀) · 행장(行狀) · 묘갈명 · 묘지명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에는 시대적인 분위기를 반영하여 비감(悲感)과 우수 및 강개를 노래한 것이 많다. 사(詞)인 「추풍사삼첩(秋風詞三疊)」에서는 선비와 임금의 관계를 부인과 남편의 관계로 비유하여 임금을 사모하는 심경을 표현하였다.
소(疏) 중에서 「복정국태공직곡한거(伏呈國太公直谷閒居)」는 민비(閔妃) 일파에게 정권을 빼앗기고 재야에 물러나 있던 대원군(大院君)의 심경을 위로하기 위하여 올린 정문(呈文)으로, 그의 보수적 입장을 보여 준다.
「청물개의제소(請勿改衣制疏)」는 1884년(고종 21) 갑신정변으로 의복을 비롯하여 문물제도가 일시에 개정되자 그에 반대하여 올린 상소이고, 「갑신삼월봉사(甲申三月封事)」 역시 같은 해에 올린 것으로, 나라를 다스리는 도는 기강을 바로잡고 조정을 바르게 하며 백관을 바르게 하고 백성을 바르게 다스리는 데 있음을 강조하고, 전정(田政) · 교육 · 환곡 · 세금 · 국방 · 축성 · 금도(禁盜) 등의 9개 사항의 실천을 요구한 글이다.
잡저는 의(議)와 론(論) 등을 수록하고 있다. 그중 장편의 「정의(政議)」는 정치에 대한 소견을 진술한 것으로, 선비의 국가 · 사회에 대한 책임을 논하고 당시 관료들의 폐습, 흉년의 대비책, 군인의 임관, 사치의 금지 등을 지적하였다.
서(序) 중에서 「수성재선생팔십팔세생조서(壽性齋先生八十八歲生朝序)」는 스승인 성재 허전(許傳)의 88세 생일에 쓴 수서(壽序)로 입덕(立德), 입공(立功), 입언(立言)에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다고 하였다.
송(頌)은 「미복송(微服頌)」과 「창복궁헌수송(昌福宮獻壽頌)」으로, 「미복송」은 고종이 미복 차림으로 궁궐의 동악(東岳)을 소요하고 이튿날 동악에 올라 이소(二所) 시원(試院)을 내려다보았는데 이는 단순한 유람이 아니라 과거 시험이 공정해지기를 바란 것이라고 하였다. 「창복궁헌수송」은 1890년(고종 27) 창복궁 대왕대비의 83세 수연(壽宴)을 맞아 경무대(景武臺)에서 기로연(耆老宴)이 열렸을 때 참석하여 올린 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