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때 참지정사(參知政事) 유천우(兪千愚)는 몽골에 있는 세자 왕심(王諶)[훗날의 충렬왕]이 귀국할 때까지 거사를 연기할 것을 주장하였다. 하지만 문하시중(門下侍中) 이장용(李藏用)은 사태를 돌이킬 수 없음을 알고 원종을 폐위하는 대신 양위(讓位)의 형식을 취할 것을 제안하였다.
임연이 원종의 폐위를 강행했던 것은 김준이 원종 및 몽골과의 대립으로 제거되었듯이, 그 역시 원종을 중심으로 한 친몽골 세력들에게 언제든지 제거당할 수 있다는 위기감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이에 임연은 삼별초(三別抄)와 도방(都房)의 군사를 이끌고 백관(百官)을 위협하면서 안경공(安慶公) 왕창(王淐)을 옹립하였다. 이후 진암궁(辰嵓宮)에 있던 원종을 핍박하여 별궁(別宮)으로 옮기도록 하였다. 뒤이어 임연이 교정별감(敎定別監)에 올라 무신의 집정이 되었다.
임연은 중서사인(中書舍人) 곽여필(郭如弼)을 몽골로 보내 양위의 사실을 알리도록 하였다. 그러나 국내에서는 장군 유원적(愈元績)과 낭장(郎將) 정수경(鄭守卿) 등이 임연을 죽이고 원종의 복위를 꾀하려다 실패한 사건이 발생하였고, 서북면에서는 최탄(崔坦)과 한신(韓愼) 등이 임연의 처단과 원종의 복위를 기치로 저항하여 이후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또한 몽골에 갔던 세자가 귀국하는 길에 파사부(婆裟府)에서 이 소식을 듣고 급히 몽골로 되돌아가 양위의 부당함을 호소하였다.
임연은 그해 9월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 김방경(金方慶)과 대장군(大將軍) 최동수(崔東秀)를 몽골에 보내 양위의 사유를 재차 밝혔다. 하지만 몽골에서는 이를 믿지 않고 같은 해 11월에 병부시랑(兵部侍郎) 흑적(黑的)을 보내 원종과 안경공 왕창 및 임연의 입조(入朝)를 명하였다. 이러한 몽골의 압력에 의해 임연은 원종을 복위시키게 되었고, 안경공 왕창을 추대하려던 임연의 계획은 실패하고 말았다.
원종은 복위 이후 스스로 몽골에 입조할 것을 제의하여, 세자가 돌아오지 않은 상태에서 작은아들 순안후(順安侯) 왕종(王悰)에게 국사(國事)를 맡기고 몽골로 갔다. 원종이 복위하자마자 서둘러 몽골로 갔던 것은 몽골에 의지해서 무신정권을 타도하고자 함이었다. 1270년(원종 11) 원종은 몽골 군대를 이끌고 귀국하여 강도(江都)에 출륙령(出陸令)을 반포한 뒤 어사중승(御史中丞) 홍문계(洪文系)와 직문하(直門下) 송송례(宋松禮)의 도움을 받아 무신정권을 종식시켰다.
이 사건은 임연의 무신정권과 몽골의 직접적인 대립을 유발한 것으로 무신정권을 붕괴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또한 원종이 복위하는 과정에서 고려 왕실이 몽골에 밀착되면서 무신정권 종식 이후 몽골의 영향력이 절대적으로 커지게 된 사건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