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나라 불교의 포교사(布敎史)는 삼국시대 불교의 유입에서부터 시작된다. 372년(소수림왕 2) 고구려에 순도(順道)가 들어와 불법을 전하였고, 백제는 384년(침류왕 1) 호승(胡僧) 마라난타가 동진(東晉)에서 와서 불교를 전하였으며, 신라에는 불교가 공식 인정된 528년(법흥왕 15) 이전에도 묵호자(默湖子) 등의 고승들이 들어와 민중을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전개하였다.
삼국시대는 공식·비공식적으로 불교를 토착화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포교에 몰두하던 시기였다. 그 중 크게 포교활동을 한 승려로는 고구려의 경우 순도와 아도(阿道), 진나라의 승려 담시(曇始), 전제(前齊)로 가서 불학(佛學)을 공부하고 돌아온 의연(義淵) 등을 들 수 있다. 백제는 마라난타를 비롯하여 인도에서 율부(律部)를 공부하고 돌아온 겸익(謙益) 등을 들 수 있다.
신라에는 묵호자·아도를 비롯하여 고구려에서 귀화한 혜량(惠亮)과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안홍(安弘)·원광(圓光)·담육(曇育), 진나라에서 돌아온 지명(智明) 등의 고승들이 있다. 그리고 삼국시대의 신라 사회에 서민층의 포교를 위하여 노력한 고승으로 혜숙(惠宿)·혜공(惠空)·대안(大安)·원효(元曉) 등 무애(無碍)의 대성자들을 빠뜨릴 수가 없다.
또한, 삼국시대의 포교 중 크게 평가받고 있는 것은 일본에 대한 포교활동이다. 고구려의 경우, 왕실과 조정이 불교를 등한시하고 박대하는 태도를 노골화하자 많은 승려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포교활동에 주력하였다. 일본 포교에 주력한 고승으로는 혜편(惠便)·혜자(惠慈)·승륭(僧隆)·담징(曇徵)·혜관(慧灌)·도등(道登)·도현(道顯)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불교 포교뿐만 아니라 문물(文物) 전파에도 크게 기여하였다.
또 백제는 일본인에 처음으로 불교를 전파해 준 나라로 그 활동이 지대하였다. 백제의 성왕이 일본에 불상과 경론(經論)을 보낸 이후 544년(성왕 22)에는 담혜(曇惠)·도심(道深) 등 16인의 승려들이 일본에 포교를 위하여 건너갔고, 그 뒤에도 계속 일본으로 건너간 백제 승려들이 일본 승려를 탄생시켰으며, 이와 동시에 천문(天文)·지리(地理)를 포함한 많은 문물들을 전하기도 하였다.
이들 중 대표적인 포교승으로는 관륵(觀勒)·담혜·일라(日羅)·풍국(豊國)·혜미(慧彌)·의각(義覺)·도장(道藏)·도령(道寧)·다상(多常)·원각(願覺)·원세(願勢) 등을 들 수 있는데, 이들은 모두 일본 불교를 중흥시키는 주춧돌 구실을 하였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불교문화의 황금기로 그 포교활동이 극대화되었다. 원효를 비롯한 수많은 고승들이 민중 속으로 파고드는 포교활동과 함께 종파(宗派)를 중심으로 포교의 중심사찰을 넓혀가는 한편, 저술을 통한 수준 높은 교학 전파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 대표적인 고승으로는 원효·의상(義湘)·경흥(憬興)·의적(義寂)·도증(道證)·승장(勝莊)·도륜(道倫)·태현(太賢)·지인(智仁)·영인(靈因)·행달(行達)·현일(玄一)·순경(順璟)·오진(悟眞)·지통(智通)·도신(道信)·표원(表員) 등을 들 수 있다.
또한, 각 사찰에는 대부분의 경우, 강당(講堂)을 두어 항상 재가(在家) 및 출가 승려들이 교육받을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이 밖에도 진표(眞表)는 참법(懺法)을 통하여 불교를 포교하였고, 원효·충담(忠談)·월명(月明) 등은 시(詩)나 노래를 통하여 불교 홍포에 노력하였다.
또, 신라 말에는 선문구산(禪門九山)의 성립과 함께 선학(禪學)의 전파에 많은 고승들이 힘을 기울였다. 그들은 서라벌에서 멀리 떨어진 지방까지 가서 새로운 불교인 선학을 직지인심(直指人心)·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는 표방 아래 포교하였다. 대표적인 선승으로는 도의(道義)·홍척(洪陟)·혜철(惠哲)·무염(無染)·현욱(玄昱)·도윤(道允)·범일(梵日)·신행(神行)·혜소(惠昭) 등을 들 수 있다.
고려시대에도 왕실의 신불(信佛)과 함께 불교는 널리 민중들 사이에서 신봉되었지만, 신라시대처럼 교학(敎學)을 깊이 있게 탐구하거나 전파하는 양상보다는 부처에게 복을 비는 타력 신앙이 두드러졌다. 지리 도참신앙 쪽으로 기울어졌으므로 그 포교 또한 기대할 만한 것이 못 되었다. 그러나 몇몇 고승들의 포교를 위한 노력은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려 광종 때의 고승 체관(諦觀)은 중국으로 건너가서 고려의 천태교학(天台敎學)을 역수출하였고, 의통(義通)도 중국 천태종의 16조(祖)가 되어 천태학 전파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국내에서는 균여(均如)가 화엄학(華嚴學)의 포교에 진력하였고, 의천(義天)은 고려에 천태종을 개창하여 새로운 불교운동을 전개하고자 노력하였다.
고려 중기에는 보조국사(普照國師)가 중심이 되어 수선사(修禪社)를 결성하여 우리 나라 특유의 선학을 널리 전파하였다. 그의 제자 요세(了世)는 백련사(白蓮社)의 결사(結社)를 중심으로 새로운 참회불교운동(懺悔佛敎運動)을 전개하였는데, 이 두 결사는 고려 말기까지 포교의 중심이 되었다. 또, 왕실에서는 대비원(大悲院)을 비롯한 수많은 불교구호기관을 두어 불교의 포교를 간접으로 도왔으며, 민간에서는 자발적으로 수행을 위한 결사(結社)를 만들어 포교에 임하였다.
조선시대에는 억불정책(抑佛政策)으로 인하여 불교의 공식적인 포교는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승려들이 산중(山中)의 사찰로 찾아오는 신도들에게 불법을 가르쳤을 정도이며, 따로 포교원을 개설하여 포교를 할 수가 없었다. 다만 불교가 다소나마 비호를 받을 수 있었던 세조·명종 때에는 공식적인 포교집회 등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조선 중기 이후에는 지방사찰을 중심으로 화엄회(華嚴會) 등의 법회를 열기는 하였으나, 그 또한 승려 중심의 법회로서 일반인들을 위한 대중 포교 수단은 되지 못하였다.
근대에 들어 와서 민족종교인 불교의 포교가 다시 주목받게 된 까닭도 조선시대의 억압정책으로 인한 올바른 불교 전파가 이루어지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1896년 승려의 입성해금령(入城解禁令)이 내려지자 이때부터 불교는 자유롭게 포교활동을 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오랜 억압 속에서 지냈던 불교가 다시 정상적으로 포교활동을 하기에는 미약한 점이 많았고, 사회의 혼란과 함께 실효를 거두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때부터 불교계에서는 명진학교(明進學校)를 비롯한 종립학교(宗立學校)를 세워 포교사(布敎師)의 양성에 주력하였고, 현대적인 포교교육에도 힘을 기울였다. 그러나 포교사의 자질에 대한 논란은 계속되었고, 전국에서 포교사 자격이 있는 사람을 찾아도 그럴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이 지배적인 여론이었다.
그리하여 1927년 8월 대구 선종포교당(禪宗布敎堂)의 포교사 금담(錦潭)을 비롯하여 경상남북도의 포교사 12인과 서울 포교사 1인 등 13인이 동화사(桐華寺)에 모여 제1회 전국포교사대회를 갖기에 이르렀다. 이 대회에서 교전 편찬, 포교의식 방법, 교육제도, 예식, 조선불교사업연구회 조직, 포교 기관지 발행 등 재래식 포교방식을 탈피하기 위한 광범위한 모색이 시도되었다.
1928년 3월에 열린 제2차 회의에서는 교전의 간행 문제 등 대체로 1차에 나왔던 안건들이 좀더 구체적으로 논의되었으며, 교회제도와 사설 포교원에 대한 논의가 추가되었다. 이 포교사대회에 자극을 받은 서울 각황사(覺皇寺) 포교당은 포교사업을 확장하기 위하여 대은(大隱)을 포교사로 청하여 새로운 포교방법을 시도하였다.
그것은 매주 일요일 일반 청년 남녀를 위한 통속 불교강연회의 성격을 띠었으며, 젊은 청년층의 호응을 얻어 성황을 이루었다. 이에 힘입은 대은은 불교전수학교에 다니는 청년학생을 중심으로 불교전도대를 조직하여 야간 가두 전도운동을 전개하였는데, 이것은 청년학생들이 포교운동에 나선 효시가 되었다. 뿐만 아니라 대은은 경성방송국에 가서 불교사상 강연을 4일 동안 계속하였는데, 이것은 매스컴을 통한 한국불교 최초의 포교활동이었다.
이러한 새로운 방식의 포교활동은 주로 법상에 높이 앉아 법문을 하는 재래식 포교방식에 비하여 대중 접근도가 훨씬 높았다. 또, 이 시대의 포교에 주력하였던 고승으로 박한영(朴漢永)·한용운(韓龍雲)·백용성(白龍城) 등을 꼽을 수 있는데, 이 중에서도 포교에 가장 주력하였던 승려는 박한영이었다.
그는 포교사 양성을 위한 교육에 힘쓰는 한편, ① 미신포교를 지신(智信:지혜를 신봉함)포교로 바꿀 것, ② 이론포교를 실천시킬 것, ③ 과장 포교를 실질 포교로 할 것 등을 주장하면서 포교활동에 전념하였다. 또, 이 시대에는 불교 대중화를 위한 수단으로서 끈기있게 불교지가 간행되었다.
광복 이후 재건의 기운이 돌던 불교계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다시 빈터로 돌아갔다가, 1954년 이후 정화불사(淨化佛事)의 와중에 휘말렸지만, 이 때에도 포교사업만은 중단하지 않았다. 이 무렵 포교에 헌신한 사람으로는 대은·대월(大越)·화산(華山)·소천(昭天)·석진(錫珍) 등이 있다. 대은은 탑골승방에서 ≪관음경 觀音經≫을 강의하였고, 대월은 밀양에서, 화산은 대구관음사(觀音寺)를 중심으로 포교활동을 하였다.
특히, 소천은 ≪금강경≫ 강의로 유명하였는데, 서울대각사(大覺寺) 대각회에서 많은 사람들에게 불음(佛音)을 전하였다. 이 밖에 동국대학교 총장 백성욱(白性郁)은 매주 월요일 전교생을 대상으로 불교교양강좌를 열었다.
한편, 1956년 10월 여신도들이 중심이 된 한국관음회(韓國觀音會)가 창립되었고, 1961년 6월 최초로 어린이법회인 연화어린이회를 조계사에서 창립하여 어린이 포교의 신기원을 세웠다. 또한, 1963년 9월에 창립된 대학생불교연합회는 대학생을 상대로 한 일선 포교단체의 구실을 하였다.
1964년 9월 통합종단 출범 이후 포교를 3대사업의 제1목적사업으로 한다는 종책(宗策)에 따라 포교사 강습회를 개최하였다. 1967년 7월에는 해외동포의 정신적 귀의처를 마련하고 한국불교를 해외에 진출시키기 위하여 재일(在日) 홍법원(弘法院)을 설치하여 근대 해외포교의 효시를 이루었다. 1968년 11월에는 최초로 군종(軍宗) 장교 5인이 임관되어 군인 포교를 시작하였다.
1960년대에 포교에 헌신하였던 승려로는 청담(靑潭)·운허(耘虛)·홍도(弘道) 등을 들 수 있다. 1970년대는 불교교양대학·불교기초과정강좌·순회포교·순회사상강연회 등 대중포교를 위한 적극적인 활동이 이루어진 시기였다. 이때 크게 활동하였던 승려로는 강석주(姜昔珠)·무진장(無盡藏)·광덕(光德) 등이 있었으며, 불교학자로는 이기영(李箕永)·서경수(徐景洙)·이종익(李鍾益) 등이 크게 활동하였다.
또한 조계종에서는 1977년 3월 포교원을 개원하여 포교활동을 전담하게 하였고, 1978년에는 각종 수련대회를 본격화하여 재가불자의 수련을 통한 불교 진수의 접촉을 유도하기도 하였다. 1970년대 말부터는 삼중(三中)이 중심이 되어 재소자(在所者) 교화에 힘을 기울였다.
신종교는 성립 초기 교주의 신비 체험이나 권능을 접한 신도들이 연고자에게 열광적으로 신앙을 전달함으로써 성장한다는 공통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신도가 된 사람은 자발적으로 적극적인 포교사가 되는 것이다. 때로는 교주의 종교적 권능이 자연스럽게 널리 알려지기를 기대하여 적극적으로 포교를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또한 새로운 세계가 도래할 때까지 일체 외부세계와 접촉을 끊고 폐쇄적인 수도공동체를 유지하는 신종교도 존재한다.
포교방식은 일반적으로 책자를 통한 간접방식과 설법·의례 등을 통한 직접방식으로 구분된다. 신종교에서는 직접방식이 주로 활용된다. 즉, 연고를 통해서나 소문을 듣고 직접 교단을 찾아온 사람에게 설법이나 의례를 통하여 권능을 보이고 새로운 삶의 비전을 제시하여 준다. 그것은 치병(治病)이나 수복(授福)의 현실적 권능일 수도 있으며, 때로는 고통스러운 현실을 넘어 조만간 건설될 후천선경(後天仙境:죽은 후 신선의 세계에 태어남)의 약속일 수도 있다.
일제침탈기에 국조신앙(國祖信仰)에 바탕을 두면서 무력항일투쟁을 전개하였던 대종교(大倧敎)는 일제의 탄압이 점점 심하여지자, 국외포교로써 교단을 유지하고자 1911년 총본사(總本司)를 한성(漢城)에서 만주 화룡(和龍) 청파호(靑坡湖)로 옮기고, 백두산을 중심으로 국내외에 사도본사(四道本司)를 두어 포교하였다.
사도본사는 동만주에서 연해주(沿海州) 사이의 지역을 관장하는 동도본사, 남만주에서 산해관(山海關) 사이의 지역을 관장하는 서도본사, 북만주에서 만주리(滿州里) 사이의 지역을 관장하는 북도본사, 백두산 동부지역에서 제주도 사이의 지역을 관장하는 남도본사로 이루어져 있다.
서일(徐一)·계화(桂和) 등은 동도본사, 이동녕(李東寧)·이시영(李始榮) 등 임시정부 요인들은 서도본사, 윤복영(尹復榮)·이상우(李相禹) 등은 북도본사, 김교헌(金敎獻)·유근(柳瑾) 등은 남도본사의 중심 인물이었다. 만주지방의 대종교는 교포의 부락마다 포교소를 두었고, 야간학교를 설치하여 민족 계몽을 도모하는 한편, 군관학교를 설립하여 무력투쟁을 위한 기반을 세웠으며, 신도 수는 30만 명에 달하였다.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는 포교 2년 만에 교단조직을 건설하였는데 접(接)이 바로 조직의 중심이었다. 즉, 도를 전하여 준 사람과 전하여 받은 사람을 30호 내지 50호 단위의 신앙공동체로 묶어 교단조직의 기본 단위로 만든 것이다. 이후 최시형(崔時亨)에 의하여 이 조직은 더 발전되어 갑오동학혁명 당시의 포접조직으로 정비되었다.
후천개벽의 오만 년 세계가 도래한다며 스스로 천자(天子)를 자처한 차경석(車京石)의 보천교는 육십방주·육임(六任)·십이임(十二任) 등의 조직을 두어 교직자 수 55만7760명, 신도 수백만 명의 세력을 과시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초창기의 열광적 신앙운동 이후 국내외의 조건 때문에 쇄락의 길을 걷게 되는 신종교들은 다른 포교방식을 찾지 않으면 안되었다. 이에 따라 열광적인 천년왕국적 신앙운동 대신 내면적 윤리운동의 성격으로 전환하는 한편, 교리의 체계화, 조직기능의 현대화, 종교전문가의 양성 및 고용 등 포교를 위한 기본요소들을 전면적으로 변화시키며 제도화 과정을 걷게 된다.
하지만, 이러한 과정을 성공적으로 치르고 있는 신종교는 몇 개 안되며, 대부분의 신종교는 소멸되거나 개별 회당(會堂)만으로 존속하고 있는 형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