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장상학(張相學, 1872~1940)의 자는 신로(莘老), 호는 공실산인(孔室山人) · 화강(華岡), 본관은 인동(仁同)이다. 일제강점기 때 공실서당(孔室書堂)을 마련하고 강학에 힘쓴 성리학자이다.
편자는 저자의 아들 장재철(張在轍) 등이다.
1976년 저자의 아들 장재철 등이 편집 · 간행하였다. 서문은 없고, 권말에 장영순(張永純)과 장재철의 발문이 있다.
권1·2에 사(詞) 12편, 시 757수, 권3∼10에 서(書) 438편, 권11·12에 잡저(雜著) 20편, 권13·14에 서(序) 21편, 기(記) 36편, 권15에 잠(箴) 4편, 명(銘) 9편, 찬(贊) 7편, 상량문(上樑文) 8편, 축문(祝文) 15편, 권16에 제문(祭文) 29편, 뇌문(誄文) 2편, 애사 9편, 권17·18에 비명 3편, 묘지명 15편, 묘갈명 39편, 권19·20에 행장(行狀) 19편, 유사 3편, 전(傳) 2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부록의 권1은 만장, 권2는 제문, 권3은 가장 · 행장 · 묘표 · 묘지명 · 묘갈명 · 영정찬(影幀贊) · 공실서당기(孔室書堂記)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는 남계 서원과 선비들의 쉼터인 대고대에서 읊은 「남계대고대작만강홍사(藍溪大高臺作滿江紅詞)」를 비롯해 가야(伽倻)의 총령(冢嶺), 해운대(海雲臺)에서 바다를 보며 읊은 것 등 대부분 기행을 하면서 읊은 작품들이다.
시는 기행시가 대부분인데, 풍부한 어휘와 전고(典故)를 사용해 각처의 아름다움과 웅장함을 역동적으로 묘사하였다. 그중 「봉래기행(蓬萊紀行)」은 16수를 연작시 형식으로 지은 것이고, 「속함기행(速咸紀行)」은 31수를 연작시 형식으로 지은 것이고, 「의주기행(義州紀行)」은 11수를 연작시 형식으로 지은 것이다. 그밖에 유교적 가치를 읊은 교훈시가 비교적 많다. 특히 「공실서당잡영(孔室書堂雜詠)」은 삶에 대한 겸허하고 여유 있는 태도와 인생관 등을 반영한 시로, 담백함과 진솔함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기행시를 비롯해 「화제진수재십영(和題進修齋十詠)」, 「공실산장(7언18절)(孔室山莊(七言十八絶))」, 「쌍각(5언26절)(雙角(五言二十六絶))」, 「차퇴계집정문봉한거이십영(次退溪集鄭文峰閑居二十詠)」, 「화송순좌원동제영십절(和宋舜佐遠洞題詠十絶)」, 「우화오언잡영십절(又和五言雜詠十絶)」, 「가장화병십절(家藏畵屛十絶)」 등에서 주변 사물이나 풍경 등에 대해 읊은 연작시가 많다.
서(書)는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 및 친구, 제자 등과 시사를 논하거나 학문상의 문제점 등을 질의 · 토론한 내용이며, 별지(別紙)와 문목(問目)이 첨부된 것이 많다. 권3·4에 수록된 서는 이기설과 예설에 관해 논변한 것으로, 주로 장복추(張福樞) · 장석영(張錫英)과 주고받은 것이다. 특히, 장석영에게 답한 「답장회당장의목(答張晦堂丈疑目)」은 인심도심 · 심성론 · 사칠변 등에 대해 논변한 것이다.
권5·6의 서는 친구 및 동료들과 학문 전반에 걸친 문제점과 시사에 대해 논한 것이다. 이 가운데 「답이판서(答李判書)」는 이명상(李明翔)에게 『논어』 가운데 의문점과 중요한 곳에 대해 선유(先儒)들의 학설을 포괄적으로 수렴하여 논리정연하게 논변한 것이다. 권7∼권9의 서는 문도 · 제자 및 후배들의 질의에 응답한 것으로, 대부분 예의 문목과 절문(節文)에 관한 내용이다.
잡저 가운데 「대학질서(大學疾書)」와 「중용질서(中庸疾書)」는 『대학』과 『중용』의 경문에 대한 우리나라 선유들의 주석과 학설을 광범위하게 수렴하여 비교 · 분석하고 종합한 뒤에 저자의 평을 첨부한 것으로, 경전 연구에 도움이 된다. 「한중만록(閒中謾錄)」은 이(理) · 기(氣) · 명덕(明德) · 심(心) · 허령지각(虛靈知覺)에 대해, 저자의 해박한 지식 체계를 바탕으로 간략하고 명석하게 논변한 것이다.
「결송장보차의(決訟場補箚疑)」는 이상정(李象靖)의 『결송장(決訟場)』에 이상정의 손자 이병원(李秉遠)이 내용을 더 보충해서 저술한 『결송장보』 가운데 의심스러운 부분에 대해 저자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상례(喪禮) 가운데 예문에 나타나지 않은 예절에 대해 구체적인 사건을 예로 들어 선유들의 예설을 비교 · 분석한 글로, 예학 연구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그밖에 잠 가운데 「불원복잠(不遠復箴)」은 자연의 원리와 인륜의 순리를 음양학적 측면에서 재규명해 자신의 삶의 태도를 철학적으로 설명함으로써 속세의 강요된 욕망을 극복하려는 노력이 엿보이는 글이다.
저자는 평생 성리학에 전념하면서 예학(禮學) 관련 작품을 많이 남겨, 일제강점기 예학을 살펴볼 수 있다는 점과 일제강점기 기행시나 연작시를 살펴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