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회는 정부 수립 후 태백구락부와 무소속구락부에 참여했던 3·1구락부 계열이 결합해 만든 원내 그룹이다. 태백구락부는 한국민주당[이하 한민당] 소속 의원들 중 영남 및 독립촉성국민회 출신들이 모여 만든 단체이고, 3·1구락부는 독립촉성국민회 출신 의원 모임이다. 1948년 8월 19일 발족 당시 명칭은 연우회였으며, 9월 8일 임시총회를 열어 이정회로 개칭하였다. 국회 내에서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정당 세력을 견제하고 비판적 입장에서 정부를 편달 육성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이정회는 1948년 11월 13일 대한국민당이 창당되고 12월 들어 사회당이 발족하면서 일부 회원이 여기에 참여해 일시적인 침체를 겪었다. 그러나 1949년 2월 신익희와 이청천을 중심으로 하는 대한국민당 일부 세력이 한민당과 통합해 민주국민당[이하 민국당]을 결성하자 이에 반대하는 20여 명이 대한국민당을 탈당해 이정회로 돌아왔다. 이후 이정회는 국회내 비민국당 계열과 연합해 민국당을 견제하는 활동을 벌였으며, 1949년 3월 말 조직을 개편해 총무 정치 선전 정보 조사 재정 등 9부를 설치하고 최고령인 원용한을 의장에 추대하였다. 회원 수는 68명에 달하였다.
그러나 이정회는 1949년 4월 들어 주1 혐의로 감찰위원회로부터 주2 권고를 받은 임영신 상공부장관의 유임운동을 계기로 분열되었다. 유임운동에 찬성하던 친 이승만 계열, 즉 윤치영, 진헌식, 박준, 원용한, 신광균 등 임영신 지지파 35명이 이정회를 탈퇴하고 일민구락부를 조직한 것이다. 이정회는 30여 명으로 그 수가 줄어들었다.
이후 이정회는 야당적 성격을 강화시켜 농지개혁법 개정, 지방자치법 개정, 개헌 문제 등에서 동성회, 신정회 등 소장파와 협력하였다. 그리고 6월 중순 총회를 열어 강령과 약헌을 통과시키고 부서를 개편하였다. 회장에는 허영호, 부회장에는 이종순, 김교현을 선출하였고, 연구위원회 책임위원으로 조봉암, 강명선, 최운교 등을 선임하였다. 또한 동성회, 신정회와 함께 의회 내에서 공동 전선을 펼치기로 하고 유성갑과 강선명을 연락교섭위원으로 선정하였다. 그러나 1949년 5~6월에 걸친 국회프락치사건의 여파로 이정회의 활동도 점차 위축되었고, 1949년 7월 국회법 개정에 따른 원내교섭단체 설치를 앞두고 유성갑 등 간부급 인사들이 대거 대한노동당에 가입하면서 이정회는 자연적으로 해체되었다. 이정회 사수를 주장하던 조봉암과 강선명, 허용호는 무소속으로 남았다.
이정회는 제헌의회 초기, 의회 내에서 한민당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로 정부에 대해서는 비판적 지지 입장을 취하였다. 그러나 이후 친이승만 계열이 이탈하여 일민구락부를 구성하면서 정부에 대한 비판적 태도를 강화하였고, 의회내 진보세력을 대표하는 동성회 등과 제휴하여 소장파로서 활동하였다. 그러나 국회프락치사건으로 타격을 입었고, 내부적인 단합력도 강하지 못해 원내교섭단체 등록을 앞두고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