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박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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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성사진사협회는 1926년 서울의 북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이 조직한 결사체이다. 이 단체의 결성은 직업윤리와 매체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인 사진단체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남촌에서 주로 활동한 일본인 사진관들에 대항해 회원 상호 간의 연구 활동을 통해 사진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사진표현 능력을 향상시키며, 사진교육을 실시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사진의 저변을 확산하려고 노력했다.
경성사진사협회 (京城寫眞師協會)
경성사진사협회는 1926년 서울의 북촌에서 사진관을 운영하던 한국인 사진사들이 조직한 결사체이다. 이 단체의 결성은 직업윤리와 매체의 가치를 바탕으로 하는 한국인 사진단체의 첫 등장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만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남촌에서 주로 활동한 일본인 사진관들에 대항해 회원 상호 간의 연구 활동을 통해 사진에 대한 지식을 확보하고, 사진표현 능력을 향상시키며, 사진교육을 실시하고 후학을 양성하여 사진의 저변을 확산하려고 노력했다.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이란 8·15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고양된 사회의식과 더불어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나타난 대표적인 사진 경향이다. 1950~60년대 한국사진의 지배적 미학으로, 사진의 본질은 기계적 기록성과 사실성이며 사진은 역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기록이며 현실의 시공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사진 창작의 경향이다. 일제시기부터 유행한 예술 사진과 영업 사진 등 기존의 사진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 (生活主義 ―寫眞)
생활주의 리얼리즘 사진이란 8·15 광복과 한국전쟁을 겪고 난 후 고양된 사회의식과 더불어 사진의 기록성에 대한 중요성을 인식함으로써 나타난 대표적인 사진 경향이다. 1950~60년대 한국사진의 지배적 미학으로, 사진의 본질은 기계적 기록성과 사실성이며 사진은 역사적인 내용을 구체적으로 묘사하는 기록이며 현실의 시공간에 기반을 두어야 한다는 사진 창작의 경향이다. 일제시기부터 유행한 예술 사진과 영업 사진 등 기존의 사진계 질서를 재편하려는 장치로 작동하기도 하였다.
『사진문화』는 1948년 7월 조선사진문화사에서 창간하여 1950년 6월까지 발행한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잡지이다. 당시의 사진 작품, 사진 제도, 사진론, 사진 기술 등 한국의 사진 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사진 전문 종합지로 당대의 사진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마지막 12호 발행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자동으로 종간되었으며, 발행인이 납북되면서 복간 없이 폐간되었다.
사진문화 (寫眞文化)
『사진문화』는 1948년 7월 조선사진문화사에서 창간하여 1950년 6월까지 발행한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잡지이다. 당시의 사진 작품, 사진 제도, 사진론, 사진 기술 등 한국의 사진 문화를 총체적으로 반영한 사진 전문 종합지로 당대의 사진 문화를 파악할 수 있는 중요한 사료이다. 마지막 12호 발행일에 한국전쟁이 발발하면서 자동으로 종간되었으며, 발행인이 납북되면서 복간 없이 폐간되었다.
『사진문화』는 1956년 5월 한국사진문화사에서 창간하여 1958년 11월까지 발행한 사진 전문 종합잡지이다. 월간을 표방했지만 부정기적으로 발행하였고, 통권 제1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 1948년에 나왔던 『사진문화』와 이름이 같고 판형도 같아서 복간 혹은 속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잡지이다. 다만 발행인 조명원은 창간사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된 과거 잡지 『사진문화』의 뜻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사진문화 (寫眞文化)
『사진문화』는 1956년 5월 한국사진문화사에서 창간하여 1958년 11월까지 발행한 사진 전문 종합잡지이다. 월간을 표방했지만 부정기적으로 발행하였고, 통권 제11호를 마지막으로 폐간하였다. 1948년에 나왔던 『사진문화』와 이름이 같고 판형도 같아서 복간 혹은 속간으로 보일 수 있지만 다른 잡지이다. 다만 발행인 조명원은 창간사에서 6·25전쟁으로 중단된 과거 잡지 『사진문화』의 뜻을 계승한다고 밝혔다.
'납량사진현상모집'은 『조선일보』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가 예술사진 운동의 일환으로 총 4회에 걸쳐 매년 진행한 신문지면 상의 사진 공모전이다. 당시 민간지로서 『조선일보』는 민족 문화 창달을 목표로 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예술사진을 공모하는 행사를 만들고 신문의 지면에 당선작들을 게재하였다. 일본인 위주의 사진 행사에서 소외된 한국인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공모전이었고, 작가의 등용문이었다.
납량사진현상모집 (納凉寫眞懸賞募集)
'납량사진현상모집'은 『조선일보』가 1937년부터 1940년까지 『조선일보』가 예술사진 운동의 일환으로 총 4회에 걸쳐 매년 진행한 신문지면 상의 사진 공모전이다. 당시 민간지로서 『조선일보』는 민족 문화 창달을 목표로 하는 문화운동의 일환으로 예술사진을 공모하는 행사를 만들고 신문의 지면에 당선작들을 게재하였다. 일본인 위주의 사진 행사에서 소외된 한국인 아마추어 사진가들을 위해서 만들어진 대표적인 공모전이었고, 작가의 등용문이었다.
홀트씨고아원은 1966년 주명덕이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었던 혼혈고아의 비극을 고발한 첫 개인전이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양식으로 분단과 전쟁이 빚어낸 한국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고발한 전시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혼혈 고아를 촬영한 95점의 사진들은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할 가장 아픈 문제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진가 주명덕의 휴머니즘까지 부각시켰다.
홀트씨고아원 (―氏孤兒院)
홀트씨고아원은 1966년 주명덕이 중앙공보관 화랑에서 열었던 혼혈고아의 비극을 고발한 첫 개인전이다. 당시로서는 생소한 다큐멘터리 사진의 양식으로 분단과 전쟁이 빚어낸 한국사회의 모순과 아픔을 고발한 전시이다. 한국전쟁의 비극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혼혈 고아를 촬영한 95점의 사진들은 우리 사회가 책임져야 할 가장 아픈 문제를 부각시켰을 뿐만 아니라 사진가 주명덕의 휴머니즘까지 부각시켰다.
「해방과 풍년」은 1946년 『자유신문』 주최 해방기념사진전에서 특선 갑을 받은 이명동의 사진작품이다. 해방을 맞이한 감격을 풍년이 들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농민들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상징화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해방과 풍년 (解放―豊年)
「해방과 풍년」은 1946년 『자유신문』 주최 해방기념사진전에서 특선 갑을 받은 이명동의 사진작품이다. 해방을 맞이한 감격을 풍년이 들어 수확의 기쁨을 누리는 농민들의 역동적인 모습으로 상징화한 표현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백두산사진환등회는 1920~30년대 사진을 통한 계몽교육의 일환으로 『동아일보』가 "특사환등사용백두산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시행한 일종의 백두산 사진이미지 전시회이다. 백두산은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산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한 『동아일보』가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관련 기사를 쓰고 기획한 행사 중 하나인 '슬라이드 쇼'였다.
백두산사진환등회 (白頭山寫眞幻燈會)
백두산사진환등회는 1920~30년대 사진을 통한 계몽교육의 일환으로 『동아일보』가 "특사환등사용백두산강연회" 등의 이름으로 시행한 일종의 백두산 사진이미지 전시회이다. 백두산은 오랫동안 한국 민족의 발원지이자 성산으로 인식되어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민족지라는 기치를 내걸고 창간한 『동아일보』가 백두산에 관심을 갖고 다양한 관련 기사를 쓰고 기획한 행사 중 하나인 '슬라이드 쇼'였다.
신문스케치사진은 1920~30년대 현장에서 느낀 자연의 현상이나 계절 변화의 인상을 사진에 담아 신문에 게재한 신문사진의 한 형식이다. 뉴스 사진과 별개로 신문에 게재한 신문 편집의 한 형식으로 이 시기 한국 신문사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이 용어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매일신보』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회화에서 ‘스케치’는 사생을 뜻하는데, 그 자리에서 느낀 대체적인 인상을 간단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미술 용어를 빌려와 본격적인 뉴스 사진과 구별해서 사용하였다.
신문스케치사진 (新聞―寫眞)
신문스케치사진은 1920~30년대 현장에서 느낀 자연의 현상이나 계절 변화의 인상을 사진에 담아 신문에 게재한 신문사진의 한 형식이다. 뉴스 사진과 별개로 신문에 게재한 신문 편집의 한 형식으로 이 시기 한국 신문사진에서 빈번하게 등장하였다. 이 용어는 『대한매일신보』의 후신으로 조선총독부의 기관지 역할을 했던 『매일신보』에서 처음 사용하였다. 회화에서 ‘스케치’는 사생을 뜻하는데, 그 자리에서 느낀 대체적인 인상을 간단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것을 말하며, 이런 미술 용어를 빌려와 본격적인 뉴스 사진과 구별해서 사용하였다.
「오경석 초상」은 1872년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박규수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의 역관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찍은 사진이다. 원본 사진은 소실되었으나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이 일본 방문 중에 복사본을 만들어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다.
오경석 초상 (吳慶錫 肖像)
「오경석 초상」은 1872년 개화사상가 오경석이 박규수를 정사로 하는 사절단의 역관으로 중국 베이징을 방문했을때 찍은 사진이다. 원본 사진은 소실되었으나 오경석의 아들인 오세창이 일본 방문 중에 복사본을 만들어 집안에서 보존하고 있다.
「동대문도」는 1901년 8월 29일 『그리스도신문』에 게재된 서울 동대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동대문을 전경으로 오고가는 흰 옷 입은 인파를 넣어 촬영하였다. 『그리스도신문』에 실린 대부분의 사진이 서구의 여러 풍물과 첨단 기술 분야를 소재로 한 것과 달리 한국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담고 있어 19세기 초 서울의 모습과 주변 환경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동대문도 (東大門圖)
「동대문도」는 1901년 8월 29일 『그리스도신문』에 게재된 서울 동대문의 모습을 찍은 사진이다. 동대문을 전경으로 오고가는 흰 옷 입은 인파를 넣어 촬영하였다. 『그리스도신문』에 실린 대부분의 사진이 서구의 여러 풍물과 첨단 기술 분야를 소재로 한 것과 달리 한국의 문화유산을 소재로 담고 있어 19세기 초 서울의 모습과 주변 환경을 오늘에 전하고 있다.
「대한즉경도」는 1901년 9월 19일 『그리스도신문』에 목판 인쇄 방식으로 게재된 한국의 모습을 담은 다섯 장의 사진 연작이다. 모두가 1900년 경 한국의 여러가지 풍물 즉 가마를 메고 가는 장면, 관복을 입고 고목나무 옆에 기대 있는 무관의 모습, 어린 소년 행상, 농가 풍경 등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대한즉경도 (大韓卽景圖)
「대한즉경도」는 1901년 9월 19일 『그리스도신문』에 목판 인쇄 방식으로 게재된 한국의 모습을 담은 다섯 장의 사진 연작이다. 모두가 1900년 경 한국의 여러가지 풍물 즉 가마를 메고 가는 장면, 관복을 입고 고목나무 옆에 기대 있는 무관의 모습, 어린 소년 행상, 농가 풍경 등을 촬영한 사진이었다.
김진애는 근대 천연당사진관에서 여성 고객을 전담한 한국 최초의 여류 사진가이다. 1868년 태어났으며, 천연당사진관을 설립한 해강 김규진의 부인이다. 1907년 사진관 개업 무렵부터 사진사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최초의 여성 사진사가 여성 전용 촬영장을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자신의 직업을 사진 찍는 것이라고 답할 정도로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갖춘 사진사였다.
김진애 (金眞愛)
김진애는 근대 천연당사진관에서 여성 고객을 전담한 한국 최초의 여류 사진가이다. 1868년 태어났으며, 천연당사진관을 설립한 해강 김규진의 부인이다. 1907년 사진관 개업 무렵부터 사진사로 능력을 발휘하였다. 최초의 여성 사진사가 여성 전용 촬영장을 개설하였다는 점에서 당시 큰 화제가 되었다. 자신의 직업을 사진 찍는 것이라고 답할 정도로 직업인으로서 자부심을 갖춘 사진사였다.
서순삼은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 사진 세계를 구축한 사진가이다. 1922년 일본 도쿄의 고니시로쿠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해 사진을 배웠다. 1925년 평양에 삼정사진관을 개업하였고, 1930년에는 조선일보 후원으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개인 사진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4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에 정착하였으며, 대한사진예술연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0~1960년대에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하였다.
서순삼 (徐淳三)
서순삼은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 사진 세계를 구축한 사진가이다. 1922년 일본 도쿄의 고니시로쿠사진전문학교에 입학해 사진을 배웠다. 1925년 평양에 삼정사진관을 개업하였고, 1930년에는 조선일보 후원으로 한국인으로는 두 번째로 개인 사진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1·4후퇴 당시 남하하여 서울에 정착하였으며, 대한사진예술연구회 고문 등을 역임하였다. 1950~1960년대에 릴리프 기법, 반전 인화 기법 등을 통해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구축하였다.
정남용은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며 여러 역사적 현장을 컬러 사진으로 기록한 군인, 사진가이다. 1938년 하와이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하와이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서울에 들어와 미군정청 농무부에 배치되었다. 근무 기간에 한국의 여러 역사적 현장을 컬러 사진으로 남겼는데, 특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사진이 상당량을 차지한다. 1948년 11월 3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한국에서 컬러 사진의 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정남용 (鄭南龍)
정남용은 미군정청에서 근무하며 여러 역사적 현장을 컬러 사진으로 기록한 군인, 사진가이다. 1938년 하와이대학 농학부를 졸업하고 하와이중학교에서 교사로 근무하다가,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군에 입대하였다. 이후 1945년 10월 서울에 들어와 미군정청 농무부에 배치되었다. 근무 기간에 한국의 여러 역사적 현장을 컬러 사진으로 남겼는데, 특히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선포식 사진이 상당량을 차지한다. 1948년 11월 3년간의 근무를 마치고 미국으로 귀환하였다. 한국에서 컬러 사진의 시대를 연 인물 가운데 한 명이다.
정해창은 한국인 최초로 예술 사진 개인전을 개최한 사진가이다. 1929년 서울에서 한국인 사진가 최초로 예술 사진 개인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진계의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첫 개인전을 연 1929년부터 예술 사진 활동을 중단한 1939년까지 10여 년간 4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들을 통해 독특한 한국적 미의식이 깃든 500여 점의 사진 작품을 발표하였다. 정해창의 풍속 사진과 인물 사진, 실험적 구성 사진은 사진이라는 서구적인 예술 방법을 가지고 어떻게 한국의 정서를 드러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정해창 (鄭海昌)
정해창은 한국인 최초로 예술 사진 개인전을 개최한 사진가이다. 1929년 서울에서 한국인 사진가 최초로 예술 사진 개인전을 개최하여 한국 사진계의 큰 전환점을 만들었다. 첫 개인전을 연 1929년부터 예술 사진 활동을 중단한 1939년까지 10여 년간 4회에 걸쳐 개인전을 열었다. 이 전시들을 통해 독특한 한국적 미의식이 깃든 500여 점의 사진 작품을 발표하였다. 정해창의 풍속 사진과 인물 사진, 실험적 구성 사진은 사진이라는 서구적인 예술 방법을 가지고 어떻게 한국의 정서를 드러낼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예이다.
「인형의 꿈」은 1934년 서울 소공동 낙랑다방에서 개최한 인형을 주제로 한 정물사진전에 정해창이 출품한 사진 연작이다. 인형, 파이프, 책, 화병, 각종 장신구 등의 정물로 연극 무대와 같은 특정 상황을 연출한 후 각 장면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현존 작품은 1995년 사진가 구본창이 정해창의 유리원판을 바탕으로 인화해서 만든 사진이다.
인형의 꿈 (人形의 꿈)
「인형의 꿈」은 1934년 서울 소공동 낙랑다방에서 개최한 인형을 주제로 한 정물사진전에 정해창이 출품한 사진 연작이다. 인형, 파이프, 책, 화병, 각종 장신구 등의 정물로 연극 무대와 같은 특정 상황을 연출한 후 각 장면들을 촬영한 사진이다. 현존 작품은 1995년 사진가 구본창이 정해창의 유리원판을 바탕으로 인화해서 만든 사진이다.
현일영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주의 사진가이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각종 사진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개인적인 순수한 창작 사진 활동에 몰두하였으며, 아홉 번의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익숙한 한국인의 삶과 일상을 낯설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 사진 예술에 대한 기대를 가볍게 배반하는 방법을 통해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선보였다.
현일영 (玄一榮)
현일영은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구축한 작가주의 사진가이다. 일제강점기에 두 번의 개인전을 개최하였고, 각종 사진 단체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또한 각종 공모전의 심사위원 등으로도 활동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개인적인 순수한 창작 사진 활동에 몰두하였으며, 아홉 번의 개인 전람회를 개최하였다. 익숙한 한국인의 삶과 일상을 낯설게 보이도록 하는 방법, 사진 예술에 대한 기대를 가볍게 배반하는 방법을 통해 독창적인 사진 세계를 선보였다.
서순삼예술사진전람회는 1931년, 평양의 삼정사진관이 주최하고 조선일보 평양지국이 후원하여 한국사진 역사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서순삼의 제1회 개인사진전이다. 서순삼의 수십 년간의 역작 40여 점과 함께 서울의 한국인 사진사들의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에서 10점, 진남포의 '옥(屋)사진관'에서 30점을 찬조 출품하여 총 80여 점의 연합전 형태로 치러졌다.
서순삼예술사진전람회 (徐淳三藝術寫眞展覽會)
서순삼예술사진전람회는 1931년, 평양의 삼정사진관이 주최하고 조선일보 평양지국이 후원하여 한국사진 역사에서 두 번째로 개최된 서순삼의 제1회 개인사진전이다. 서순삼의 수십 년간의 역작 40여 점과 함께 서울의 한국인 사진사들의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에서 10점, 진남포의 '옥(屋)사진관'에서 30점을 찬조 출품하여 총 80여 점의 연합전 형태로 치러졌다.
'예술사진동인전'은 1949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부터 참여했던 중견 사진가들이 모여 서울 충무로의 대원화랑에서 개최한 단체전이다. 당시 사진 단체로 '조선사진동맹'이 득세하고 1948년 '임석제예술사진개인전람회'가 성공을 거두자,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핵심 회원들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든 사진전이었다. 이해선, 박필호, 현일영, 김광배, 박영진, 김정래. 임응식, 최계복 등 당시 사진계의 중견들이 참여하였다.
예술사진동인전 (藝術寫眞同人展)
'예술사진동인전'은 1949년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창립부터 참여했던 중견 사진가들이 모여 서울 충무로의 대원화랑에서 개최한 단체전이다. 당시 사진 단체로 '조선사진동맹'이 득세하고 1948년 '임석제예술사진개인전람회'가 성공을 거두자, '조선사진예술연구회'의 핵심 회원들이 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만든 사진전이었다. 이해선, 박필호, 현일영, 김광배, 박영진, 김정래. 임응식, 최계복 등 당시 사진계의 중견들이 참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