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이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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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자강론은 1880년대 미국에 문호를 열고 국부 증진, 군사제도 정비 등의 정책 추진을 주장한 강위의 개국론이다. 1880년대 초 강위가 중국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 지향해야 할 부국강병 외교 노선으로 주장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에 맞서 일본과의 수교에서 더 나아가 미국과 수교함으로써 자주적 개국을 완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문호개방론이다.
연미자강론 (聯美自强論)
연미자강론은 1880년대 미국에 문호를 열고 국부 증진, 군사제도 정비 등의 정책 추진을 주장한 강위의 개국론이다. 1880년대 초 강위가 중국의 황준헌이 쓴 『조선책략』의 영향을 받아 조선이 지향해야 할 부국강병 외교 노선으로 주장한 것이다. 중국을 제외한 외국과의 수교를 반대하는 위정척사파에 맞서 일본과의 수교에서 더 나아가 미국과 수교함으로써 자주적 개국을 완수할 수 있다는 적극적인 문호개방론이다.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이다. 일본이 1930년대까지 영유했던 ‘일만지[일본, 만주, 중국]’ 블록에, 1940년대에는 동남아시아까지 편입시켜 일본을 맹주로 하는 지역 위계 구조로 만든 개념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금도 패권적 지역주의의 망령으로써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존공영의 구호와는 달리 위안부, 징병, 징용, 강제연행 등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아시아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대동아공영권 (大東亞共榮圈)
대동아공영권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이 아시아의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내세운 정치 슬로건이다. 일본이 1930년대까지 영유했던 ‘일만지[일본, 만주, 중국]’ 블록에, 1940년대에는 동남아시아까지 편입시켜 일본을 맹주로 하는 지역 위계 구조로 만든 개념이다. 일본의 패전과 함게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지만, 동아시아 지역에서 지금도 패권적 지역주의의 망령으로써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공존공영의 구호와는 달리 위안부, 징병, 징용, 강제연행 등 식민지배의 폭력성을 드러내며 아시아에 많은 상처를 남겼다.
『조선공론』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발행된 대표적인 종합 잡지이다. 31년 8개월 동안 조선공론사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장수 잡지인데, 처음에는 도쿄에서 간행했지만 1920년 11월부터는 경성에서 간행하였다. 『조선급만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간행된 종합 잡지의 쌍벽을 이루었다.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여러 정책을 일본 지식인층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글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사생활을 고발하는 글을 자주 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황실 중심, 국가 본위’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었다.
조선공론 (朝鮮公論)
『조선공론』은 1913년부터 1944년까지 발행된 대표적인 종합 잡지이다. 31년 8개월 동안 조선공론사에서 일본어로 발행된 장수 잡지인데, 처음에는 도쿄에서 간행했지만 1920년 11월부터는 경성에서 간행하였다. 『조선급만주』와 함께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간행된 종합 잡지의 쌍벽을 이루었다. 초기에는 조선총독부의 여러 정책을 일본 지식인층의 입장에서 비판하는 글과 조선총독부 관료들의 사생활을 고발하는 글을 자주 실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황실 중심, 국가 본위’의 성격을 더욱 강하게 띠었다.
『부산일보』는 1907년 10월 1일 창간되어 부산 지역에서 발행하던 일본어 신문이다. 1905년에 『조선일보』로 창간하였고, 1907년 『부산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이래 일제강점기 말까지 발행된 부산 경남 지역의 유력 일본어 일간지였다. 창간 이후 부산 경남 지역의 일본인들이 경영과 편집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경영을 옹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부산일보 (釜山日報)
『부산일보』는 1907년 10월 1일 창간되어 부산 지역에서 발행하던 일본어 신문이다. 1905년에 『조선일보』로 창간하였고, 1907년 『부산일보』로 제호를 변경한 이래 일제강점기 말까지 발행된 부산 경남 지역의 유력 일본어 일간지였다. 창간 이후 부산 경남 지역의 일본인들이 경영과 편집을 주도하였다. 일제의 한반도 침략과 식민지 경영을 옹호하는 데 적극적이었다.
『신문계』는 1913~1917년 신문사가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이다. 1913년 4월 5일 일본인 다케우치 로쿠노스케가 '신문사'를 세우고, 『신문계』를 발간하였는데, 2개월 전에 발행한 『신문세계』를 개제한 것이었다. 다케우치는 1904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뒤 잠깐 상업에 종사하다가 1910년대 조선의 출판계를 이끈 대표적인 재조 일본인이었고,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주장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동화주의의 관점에서 『최신실용 조선백과사전』[1915년], 『조선상업총람』[1915년] 등의 책을 펴냈다.
신문계 (新文界)
『신문계』는 1913~1917년 신문사가 발행한 월간 종합잡지이다. 1913년 4월 5일 일본인 다케우치 로쿠노스케가 '신문사'를 세우고, 『신문계』를 발간하였는데, 2개월 전에 발행한 『신문세계』를 개제한 것이었다. 다케우치는 1904년에 조선으로 건너온 뒤 잠깐 상업에 종사하다가 1910년대 조선의 출판계를 이끈 대표적인 재조 일본인이었고, 일본과 조선의 동화를 주장한 열렬한 동화주의자였다. 그리고 동화주의의 관점에서 『최신실용 조선백과사전』[1915년], 『조선상업총람』[1915년] 등의 책을 펴냈다.
북선철도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함경북도 일대에 건설한 철도 노선을 일컫는 용어이다. 청진에서 출발해 함경선 분기점 수성을 거쳐 두만강 중류의 회령에 이른 뒤, 두만강변을 따라 북상해 조개선과 접속하는 상삼봉, 도문선과 연결되는 남양을 지나, 다시 두만강의 동쪽 하류를 따라 남하해 동만주철도가 분기하는 훈융 등을 거쳐 동해안 항구 웅기와 나진에 이른다. 동해안 북쪽에 위치한 청진, 웅기, 나진의 북선3항을 동해에 접한 일본 지역 항만 도시와 선박으로 연결하는 북선항로와 함께 북선루트의 핵심이었다.
북선철도 (北鮮鐵道)
북선철도는 일제강점기 일제가 대륙 침략을 위해 함경북도 일대에 건설한 철도 노선을 일컫는 용어이다. 청진에서 출발해 함경선 분기점 수성을 거쳐 두만강 중류의 회령에 이른 뒤, 두만강변을 따라 북상해 조개선과 접속하는 상삼봉, 도문선과 연결되는 남양을 지나, 다시 두만강의 동쪽 하류를 따라 남하해 동만주철도가 분기하는 훈융 등을 거쳐 동해안 항구 웅기와 나진에 이른다. 동해안 북쪽에 위치한 청진, 웅기, 나진의 북선3항을 동해에 접한 일본 지역 항만 도시와 선박으로 연결하는 북선항로와 함께 북선루트의 핵심이었다.
『조선경제잡지』는 1916년부터 1931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이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30년 11월 이후 경성상공회의소로 바뀌었는데, 이 단체가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경성상업회의소[경성상공회의소]가 경성의 중층 이상 자본가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잡지의 구성과 내용은 조선은 물론 일본, 만주, 중국의 경제 동향 관련 논설, 자료, 통계 중심이었다. 이름이 확인되는 기명 기사의 필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기관지라는 성격을 반영해 경성상업회의소[경성상공회의소]의 주요 동향도 빠지지 않고 실렸다.
조선경제잡지 (朝鮮經濟雜誌)
『조선경제잡지』는 1916년부터 1931년까지 경성상업회의소에서 발행한 월간 잡지이다. 경성상업회의소는 1930년 11월 이후 경성상공회의소로 바뀌었는데, 이 단체가 기관지로 발간하였다. 경성상업회의소[경성상공회의소]가 경성의 중층 이상 자본가의 조직이었기 때문에 잡지의 구성과 내용은 조선은 물론 일본, 만주, 중국의 경제 동향 관련 논설, 자료, 통계 중심이었다. 이름이 확인되는 기명 기사의 필자는 대부분 일본인이었고, 기관지라는 성격을 반영해 경성상업회의소[경성상공회의소]의 주요 동향도 빠지지 않고 실렸다.
『광업조선』은 193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광업 전문 잡지이다. 1936년 6월에 조선총독부의 산금 정책에 호응해 당시 대표적인 광업 자본가이던 박용운이 주도해 창간하였다. 1937년 8월부터는 역시 당시 대표적인 광업 자본가이던 이종만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1941년 2월까지 이종만이 세운 대동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이 확인된다.
광업조선 (鑛業朝鮮)
『광업조선』은 1936년 창간된 우리나라 최초의 광업 전문 잡지이다. 1936년 6월에 조선총독부의 산금 정책에 호응해 당시 대표적인 광업 자본가이던 박용운이 주도해 창간하였다. 1937년 8월부터는 역시 당시 대표적인 광업 자본가이던 이종만에게 경영권이 넘어갔다. 1941년 2월까지 이종만이 세운 대동출판사에서 간행된 것이 확인된다.
윤정원은 대한제국~일제강점기에 일본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힘쓴 여성 교육가이다. 1세대 여자 유학생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다.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여성 교육 기관인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윤정원 (尹貞媛)
윤정원은 대한제국~일제강점기에 일본과 유럽에서 유학하고 관립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로 근무하며 여성 교육과 계몽에 힘쓴 여성 교육가이다. 1세대 여자 유학생이자, 대한제국 시기 대표적인 여성 지식인이다. 여성 교육의 중요성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독려하는 글을 발표하였고, 대한제국 정부가 세운 여성 교육 기관인 한성고등여학교 교수를 지냈다. 일제강점기에는 중국으로 망명해 베이징에서 민족유일당운동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강향란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단발 여성이자, 근우회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이다. 기생 출신이며, 일제 강점기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단발을 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경성의 배화여학교에 다녔고, 남자 강습소에서도 배우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잠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이경손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후 1928년부터는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강향란 (姜香蘭)
강향란은 일제강점기 우리나라 최초의 단발 여성이자, 근우회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한 민족운동가이다. 기생 출신이며, 일제 강점기에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단발을 해 큰 사회적 반향을 일으켰다. 경성의 배화여학교에 다녔고, 남자 강습소에서도 배우려고 하였다. 일본에서 잠시 유학 생활을 하기도 하였다. 1925년에 기자로 활동하였고, 1926년에는 이경손 감독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이후 1928년부터는 항일 여성운동 단체인 근우회 경성지회 설립에 참여하여 적극적으로 활동하였다.
길정희는 일제강점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운영한 여성 의사이다. 1923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실을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였다. 1924년부터는 동대문여성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로제타 셔우드 홀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33년에는 강습소의 운영권을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7년 근우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길정희 (吉貞姬)
길정희는 일제강점기 경성여자의학강습소를 설립하고 운영한 여성 의사이다. 1923년 도쿄여자의학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도쿄제국대학 의학부 연구실을 거쳐 조선총독부의원 소아과에서 수련의 생활을 하였다. 1924년부터는 동대문여성병원 산부인과와 소아과에서 근무하였다. 1928년 5월 로제타 셔우드 홀과 조선여자의학강습소를 개소하였고, 1933년에는 강습소의 운영권을 인수해 경성여자의학강습소로 이름을 바꾸었다. 1927년 근우회 창립에 발기인으로 참여하는 등 여성 운동에도 적극적이었다.
김메리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다. 미국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공부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음악 교육에 힘썼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편의 동요와 가곡,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동요 「학교종」을 작곡하였다.
김메리 (金메리)
김메리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다. 미국에서 피아노와 음악 이론을 공부한 뒤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음악 교육에 힘썼다. 일제강점기에 여러 편의 동요와 가곡, 피아노곡을 발표하였다. 해방 직후에는 지금도 많이 불리는 동요 「학교종」을 작곡하였다.
김신실은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체육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여성 체육의 보급에 힘쓴 여성 체육 교육가이다.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오벌린대학의 자유주의적 학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여성 체육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체육 담당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부장이 되었다. 여성 체육의 정립과 보급에 앞장선 한국 최초의 여성 체육 전문가이다. 대한적십자사, 대한YWCA연합회 등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김신실 (金信實)
김신실은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체육학부 교수로 재직하며 여성 체육의 보급에 힘쓴 여성 체육 교육가이다. 1922년 미국 오하이오주 오벌린대학에 입학하여 1926년 졸업하였다. 재학 중 오벌린대학의 자유주의적 학풍으로부터 영향을 받아 여성 체육이 중요하다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다. 1930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 체육 담당 교수로 부임하였으며, 해방 후에는 이화여자대학교 체육학부장이 되었다. 여성 체육의 정립과 보급에 앞장선 한국 최초의 여성 체육 전문가이다. 대한적십자사, 대한YWCA연합회 등의 간부로도 활동하였다.
김앨리스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다. 1914년에 이화학당 대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의 갓스이여자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 정규 과정을 마쳤으며, 1925년에는 오리건대학에서 음악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를 만들고 음악 교육의 정착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근대적 여성상의 모범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김앨리스 (金앨리스)
김앨리스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음악과 교수를 역임한 여성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다. 1914년에 이화학당 대학과를 1회로 졸업하였다. 이후 나가사키의 갓스이여자전문학교에서 3년 동안 음악을 공부하였다. 1923년에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의 엘리슨 화이트 음악학교 정규 과정을 마쳤으며, 1925년에는 오리건대학에서 음악 전공으로 학사 학위를 받았다. 1925년 귀국하여 이화여자전문학교에 음악과를 만들고 음악 교육의 정착과 발전에 이바지하였다. 육아와 일을 병행하는 근대적 여성상의 모범으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김합라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로 가정학 교육에 이바지한 여성 교육자이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첫 번째 여성 석사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국내 최초의 가사과를 설치하고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이후 여러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가정학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 유학 이전에는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김합라 (金合羅)
김합라는 일제강점기 이화여자전문학교 가사과 교수로 가정학 교육에 이바지한 여성 교육자이다. 이화학당 대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에서 가정학을 전공한 첫 번째 여성 석사이다. 이화여자전문학교에 국내 최초의 가사과를 설치하고 초대 학과장을 맡았다. 이후 여러 제자를 길러내며 한국 가정학의 토대를 쌓았다. 미국 유학 이전에는 피아니스트로도 활동하였다.
오엽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초의 미용사이다. 일본에서 영화배우로 뽑히기도 하는 등 뛰어난 외모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인 히라야마 우메코가 경영하던 경성의 여자미용원에서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미용 기술을 배웠다. 졸업 후 현희운의 경성미용원에서 일하다가 1933년 화신미용원, 1935년 엽주미용실을 개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다음 세대의 미용사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근대적 직업으로서의 미용사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선구자였다.
오엽주 (吳葉舟)
오엽주는 일제강점기 조선인 최초의 미용사이다. 일본에서 영화배우로 뽑히기도 하는 등 뛰어난 외모로 세인의 주목을 받았다. 일본인 히라야마 우메코가 경영하던 경성의 여자미용원에서 유일한 조선인 학생으로 미용 기술을 배웠다. 졸업 후 현희운의 경성미용원에서 일하다가 1933년 화신미용원, 1935년 엽주미용실을 개업하였다. 해방 후에는 다음 세대의 미용사를 길러내는 데 힘을 쏟았다. 근대적 직업으로서의 미용사의 위상을 확립하기 위해 애쓴 선구자였다.
알타리무는 북지형 작은 무 계통에 속하는 극조생종 무이다. 재래종인 서울봄무를 개량하여 육성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재배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알타리무의 표준어는 총각무이며, 알타리무의 둥글고 뭉툭한 뿌리의 모양이 묶은 둥근 머리의 모양과 흡사하여 총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알타리무의 생육 기간은 40~50일이며, 뿌리가 100g 내외일 때 수확한다. 알타리무는 주로 남부 지방 대도시 근교에 단지를 이루어 재배되고 있으며, 뿌리와 잎까지 김치로 담가 먹는다.
알타리무
알타리무는 북지형 작은 무 계통에 속하는 극조생종 무이다. 재래종인 서울봄무를 개량하여 육성되었으며 1970년대 중반부터 재배가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알타리무의 표준어는 총각무이며, 알타리무의 둥글고 뭉툭한 뿌리의 모양이 묶은 둥근 머리의 모양과 흡사하여 총각이라 불리게 되었다. 알타리무의 생육 기간은 40~50일이며, 뿌리가 100g 내외일 때 수확한다. 알타리무는 주로 남부 지방 대도시 근교에 단지를 이루어 재배되고 있으며, 뿌리와 잎까지 김치로 담가 먹는다.
고구려오부는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이다. 『삼국지』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고구려 오부 (高句麗 五部)
고구려오부는 고구려 초기, 국가 운영의 주축이 된 5개의 단위 정치체이다. 『삼국지』에는 소노부(消奴部), 절노부(絶奴部), 순노부(順奴部), 관노부(灌奴部), 계루부(桂婁部) 등 5개 ‘부(部)’의 이름이 등장하며, 『삼국사기』에는 비류나부(沸流那部), 연나부(椽那部), 환나부(桓那部), 관나부(貫那部) 등으로 표기되어 있다. 고구려 초기의 정치 권력은 국가 전체를 통괄하는 왕권과 나부의 자치권이라는 2가지 축을 중심으로 유지되었다.
고국원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재위: 331~371) 왕이다. 국원왕,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미천왕 15) 태자로 책봉된 후,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 과정에서 요동(遼東)과 부여(夫餘) 지역을 둘러싸고 전연(前燕)과 대립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경쟁하였다. 371년 10월 평양성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고국원왕 (故國原王)
고국원왕은 삼국시대 고구려 제16대(재위: 331~371) 왕이다. 국원왕, 국강상왕이라고도 한다. 314년(미천왕 15) 태자로 책봉된 후, 331년 2월 미천왕이 죽자 즉위하였다. 영토 확장 과정에서 요동(遼東)과 부여(夫餘) 지역을 둘러싸고 전연(前燕)과 대립하였고, 남쪽으로는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과 경쟁하였다. 371년 10월 평양성에서 화살에 맞아 전사하였다.
고노자는 삼국시대 고구려 신성태수를 지낸 관리이다. 293년(봉상왕 2)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의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범하자 신성재(新城宰) 북부(北部) 소형(小兄)의 자격으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를 방어하였다. 이후 296년 모용외의 재침입 시 국상 창조리의 추천으로 신성태수가 되었다.
고노자 (高奴子)
고노자는 삼국시대 고구려 신성태수를 지낸 관리이다. 293년(봉상왕 2) 고대 북아시아의 유목 민족인 선비(鮮卑) 모용부(慕容部)의 모용외(慕容廆)가 고구려를 침범하자 신성재(新城宰) 북부(北部) 소형(小兄)의 자격으로 500명의 기병을 이끌고 이를 방어하였다. 이후 296년 모용외의 재침입 시 국상 창조리의 추천으로 신성태수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