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한규무"
검색결과 총 19건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흥업구락부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목사·독립운동가.
박동완 (朴東完)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흥업구락부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목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평양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여성계몽에 힘쓴 교육자·독립운동가.
이애라 (李愛羅)
일제강점기 때, 평양의 독립만세시위에 참여하였으며, 여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고 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며 여성계몽에 힘쓴 교육자·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목사·정치인·독립운동가.
이규갑 (李奎甲)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목사·정치인·독립운동가.
최흥종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대동의상회를 조직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윌슨의 어학선생으로 있다가 1914년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광주 지역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무등산에 칩거하며 병자와 빈민들과 활동하였다.
최흥종 (崔興琮)
최흥종은 일제강점기 조선노동공제회 광주지회장, 신간회 광주지회장 등을 역임한 독립운동가이다. 1880년(고종 17)에 태어나 1966년에 사망했다. 전라남도 광주 출신의 기독교인으로 광주지역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1907년 국채보상운동이 전개되자 대동의상회를 조직하여 적극 참여하였다. 1908년 미국남장로회 의료선교사 윌슨의 어학선생으로 있다가 1914년에 장로교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였다. 1919년 대한문 앞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다. 출옥한 후 광주 지역의 단체에서 독립운동을 하였는데, 무등산에 칩거하며 병자와 빈민들과 활동하였다.
조선기독청년동맹은 1945년 8월 19일 창립된 장로교·감리교 기독청년들의 연합조직이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를 지지하며 신탁통치와 단정수립에 반대했다. 귀환동포를 위한 모금 및 숙식 제공, 해방 기념 예배, 미군 환영 행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7년 세계기독청년대회,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국제 연대도 모색했다. 1948년 교파환원 결정으로 해산되었지만, 해방 후 최초의 기독청년 연합단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기독청년동맹 (朝鮮基督靑年同盟)
조선기독청년동맹은 1945년 8월 19일 창립된 장로교·감리교 기독청년들의 연합조직이다. 서울 새문안교회에서 결성된 이 조직은 김구·김규식 등 중도파를 지지하며 신탁통치와 단정수립에 반대했다. 귀환동포를 위한 모금 및 숙식 제공, 해방 기념 예배, 미군 환영 행사 등의 활동을 펼쳤다. 1946년 좌우합작운동과 남북협상을 지지하였다. 1947년 세계기독청년대회, 1948년 세계교회협의회(WCC) 창립총회에 대표를 파견하는 등 국제 연대도 모색했다. 1948년 교파환원 결정으로 해산되었지만, 해방 후 최초의 기독청년 연합단체로서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는 1914년 4월 결성된 각지 기독교청년회(YMCA)의 연합조직이다. 1903년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모태로 1914년 이상재에 의해 결성되었다. 1924년 세계YMCA연맹에 가입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계몽운동·농촌운동·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환경운동 등을 선도하였다. 2015년 현재 전국 62개 지역, 10만여 명의 회원, 2천여 명의 실무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청년운동의 효시로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 (朝鮮基督敎靑年會 全國聯合會)
조선기독교청년회 전국연합회는 1914년 4월 결성된 각지 기독교청년회(YMCA)의 연합조직이다. 1903년 창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를 모태로 1914년 이상재에 의해 결성되었다. 1924년 세계YMCA연맹에 가입하였다. 일제강점기 민족운동·계몽운동·농촌운동·사회운동을 주도하였다. 1970년대 이후 시민사회운동과 민주화운동, 평화통일운동, 청소년운동, 환경운동 등을 선도하였다. 2015년 현재 전국 62개 지역, 10만여 명의 회원, 2천여 명의 실무자로 구성되어 있다. 한국 청년운동의 효시로서 일제강점기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사회운동을 전개하였다.
『코리아, 더 허밋 네이션』은 미국인 목사 그리피스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1882년 미국과 영국에서 영문으로 발간한 책이다. 그리피스가 일본에서 구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저술·발간한 책으로 495쪽(초판)이며, 중판을 거듭해 발행되었다. 한국어판은 『은자의 나라 조선(한국)』으로 번역되었다. 서양에 조선을 널리 알리는 소개서 역할을 하였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고대부터 한말까지의 역사, 제2부는 지리·제도·사회·풍습, 제3부는 한말부터 1906년까지의 역사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영문저술이다.
코리아, 더 허밋 네이션 (Corea, the Hermit Nation)
『코리아, 더 허밋 네이션』은 미국인 목사 그리피스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대해 1882년 미국과 영국에서 영문으로 발간한 책이다. 그리피스가 일본에서 구한 자료와 증언을 토대로 저술·발간한 책으로 495쪽(초판)이며, 중판을 거듭해 발행되었다. 한국어판은 『은자의 나라 조선(한국)』으로 번역되었다. 서양에 조선을 널리 알리는 소개서 역할을 하였다. 총 3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는 고대부터 한말까지의 역사, 제2부는 지리·제도·사회·풍습, 제3부는 한말부터 1906년까지의 역사에 관해 기술하고 있다. 한국의 역사와 문화를 서양에 알린 최초의 영문저술이다.
『코리아 리뷰』는 1901년 선교사 헐버트가 주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기 위하여 영문으로 발행한 월간 잡지이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계승한 잡지이다. 1901년 1월부터 1906년 12월까지 총 72호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역사·문화·정치·종교·언어·문학 등에 관한 글을 통해 한국을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종종 게재하였다. 1906년 12월호를 끝으로 예고 없이 폐간되었다. 한국학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민족운동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코리아 리뷰 (Korea Review)
『코리아 리뷰』는 1901년 선교사 헐버트가 주한 외국인들에게 한국을 소개하기 위하여 영문으로 발행한 월간 잡지이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를 계승한 잡지이다. 1901년 1월부터 1906년 12월까지 총 72호가 발간되었다. 한국의 역사·문화·정치·종교·언어·문학 등에 관한 글을 통해 한국을 소개하였다. 헐버트는 러일전쟁이 끝난 1905년 이후 일본의 침략정책을 비판하는 기사를 종종 게재하였다. 1906년 12월호를 끝으로 예고 없이 폐간되었다. 한국학 연구의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으며, 민족운동사 측면에서도 의미 있는 자료이다.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1892년 미국의 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 부부가 발행한 영문 잡지이다.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로서, 선교사들의 시각에서 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올링거가 싱가포르로 떠나자 휴간되었다가 1895년 복간되었다. 189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권 분량은 40쪽 정도였고, A5판보다 약간 작은 판형(140㎝×20.5㎝)이었다. 이후 선교사들이 발간하는 영문 잡지의 전통은 『코리아 리뷰』로 계승되었다. 1890년대 외국인들의 한국 인식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코리안 리포지터리 (Korean Repository)
『코리안 리포지터리』는 1892년 미국의 북감리회 선교사 올링거 부부가 발행한 영문 잡지이다. 한국 최초의 영문 잡지로서, 선교사들의 시각에서 본 한국의 정치·경제·사회·문화·종교 등에 대한 다양한 기사가 실려 있다. 올링거가 싱가포르로 떠나자 휴간되었다가 1895년 복간되었다. 1898년 12월호를 끝으로 폐간되었다. 1권 분량은 40쪽 정도였고, A5판보다 약간 작은 판형(140㎝×20.5㎝)이었다. 이후 선교사들이 발간하는 영문 잡지의 전통은 『코리아 리뷰』로 계승되었다. 1890년대 외국인들의 한국 인식을 연구하는 데 소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광주양림교회는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이 창립한 광주교회(광주금정교회)에서 1924년 분립한 개신교 교회이다. 1904년 유진 벨(E. Bell)이 양림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양림교회). 1906년 북문 안으로 이전하며 북문안교회로 개칭했다. 1919년 교인들의 3·1운동 참여로 교회가 폐쇄되자 남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남문밖교회). 1920년 북문안교회(현 광주중앙교회)가 분립했다.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가 분립했다. 현재 양림동에는 3개 교단(통합, 합동, 기장) 소속 양림교회가 있다.
광주양림교회 (光州楊林敎會)
광주양림교회는 선교사 유진 벨(Eugene Bell)이 창립한 광주교회(광주금정교회)에서 1924년 분립한 개신교 교회이다. 1904년 유진 벨(E. Bell)이 양림리에서 첫 예배를 드렸다(양림교회). 1906년 북문 안으로 이전하며 북문안교회로 개칭했다. 1919년 교인들의 3·1운동 참여로 교회가 폐쇄되자 남문 밖에 교회를 세웠다(남문밖교회). 1920년 북문안교회(현 광주중앙교회)가 분립했다. 1924년 금정교회(현 광주제일교회)와 양림교회가 분립했다. 현재 양림동에는 3개 교단(통합, 합동, 기장) 소속 양림교회가 있다.
기독면려회는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단 산하 교회에 조직된 기독교 청년 단체이다. 면려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 C.E.라고도 한다. 기독면려회는 1881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의 목사 클라크가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 활동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한국에서는 1913년 경 새문안교회에 설립된 기독면려회가 최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면려회는 청년들의 신앙 지도를 위한 기도회·전도회 등을 개최하고,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 금주, 단연을 통한 절제 운동도 추진하였다. 해방 이후 장로교의 분열에 따라 기독면려회 조직도 교단별·지역별로 활동하고 있다.
기독면려회 (基督勉勵會)
기독면려회는 일제강점기 한국 장로교단 산하 교회에 조직된 기독교 청년 단체이다. 면려청년회, 기독청년면려회, C.E.라고도 한다. 기독면려회는 1881년 미국 메인주 포틀랜드의 목사 클라크가 기독 청년의 신앙생활과 사회 활동 증진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한국에서는 1913년 경 새문안교회에 설립된 기독면려회가 최초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기독면려회는 청년들의 신앙 지도를 위한 기도회·전도회 등을 개최하고, 계몽운동과 문맹 퇴치, 금주, 단연을 통한 절제 운동도 추진하였다. 해방 이후 장로교의 분열에 따라 기독면려회 조직도 교단별·지역별로 활동하고 있다.
용정중앙교회는 1907∽1908년경 중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간도지역 한인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 및 신앙생활 지도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1907년 경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용정에 들어와 야소교서원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구역이 조정될 때 용정중앙교회도 장로교 소속이 되었다. 1910년 조직된 간민교육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북간도 교민들의 신앙생활 및 민족운동·계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접수하면서 1946년 폐쇄되었다.
용정중앙교회 (龍井中央敎會)
용정중앙교회는 1907∽1908년경 중국 간도성 연길현 용정촌에 설립된 장로교회이다. 간도지역 한인들에 대한 기독교 선교 및 신앙생활 지도를 위하여 설립되었다. 1907년 경 장로교인과 감리교인이 용정에 들어와 야소교서원에서 예배를 드린 것이 시작이라고 한다. 1909년 장로교와 감리교의 선교구역이 조정될 때 용정중앙교회도 장로교 소속이 되었다. 1910년 조직된 간민교육회에 적극 참여하였으며, 3·1운동을 주도하는 등 북간도 교민들의 신앙생활 및 민족운동·계몽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수행하였다. 해방 후 공산주의자들이 교회를 접수하면서 1946년 폐쇄되었다.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은 전시체제기인 1940년 11월~1942년 6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이다. 1930년대 일제는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외국인의 입국, 체재급퇴거에 관한 건(법령)」(1939) 등을 통해 선교사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에 잔류했던 40명의 선교사를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하여 억류하였다. 이들은 1942년 6월 연합국이 억류한 일본인과 상호교환을 위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가 8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 (外國人 宣敎師 追放事件)
외국인 선교사 추방사건은 전시체제기인 1940년 11월~1942년 6월에 일제의 탄압으로 기독교 선교사들이 본국으로 강제 송환된 사건이다. 1930년대 일제는 신사참배 저항의 배후에 선교사들이 있다고 판단하였다. 이에 「외국인의 입국, 체재급퇴거에 관한 건(법령)」(1939) 등을 통해 선교사에 대한 탄압과 회유를 병행하였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이후 일제는 한국에 잔류했던 40명의 선교사를 적성국가 국민으로 분류하여 억류하였다. 이들은 1942년 6월 연합국이 억류한 일본인과 상호교환을 위해 일본으로 이송되었다가 8월 미국 뉴욕에 도착하였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는 1984~1985년 한국 기독교(개신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초교파적으로 거행된 대규모 기념행사이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1884년 알렌의 내한과 맥클레이의 방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을 선교의 기점으로 삼아 100주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는 1984년 8월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어 연인원 350~400만 명이 운집하였다. 1985년 10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10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는 기독교의 역사를 기념하고 교세를 과시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 (韓國基督敎 百週年 記念 宣敎大會)
한국기독교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는 1984~1985년 한국 기독교(개신교) 선교 100주년을 기념하여 초교파적으로 거행된 대규모 기념행사이다. 한국 기독교계에서는 1884년 알렌의 내한과 맥클레이의 방한, 1885년 언더우드와 아펜젤러의 내한을 선교의 기점으로 삼아 100주년 기념 대회를 열었다. 100주년 기념 선교대회는 1984년 8월 여의도광장에서 개최되어 연인원 350~400만 명이 운집하였다. 1985년 10월 서울 영락교회에서 100주년 기념 대회를 개최하고 각종 기념행사를 진행하였다. 이 대회는 기독교의 역사를 기념하고 교세를 과시하는 뜻깊은 행사였다.
변홍규는 해방 이후 『신학원론』, 『창세기강해』 등을 저술한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189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으로, 공주 영명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 목수안수를 받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1931년)하였다. 하와이, 만주, 한국에서 목회 활동 및 감리교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감리교회의 자립과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1940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3개월간 투옥되었으나, 이후 친일적 행위를 보였다. 경건주의 신앙인이자 보수주의 신학자로, 해방 후 감리교회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 정년퇴직 후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76년 별세하였다.
변홍규 (卞鴻圭)
변홍규는 해방 이후 『신학원론』, 『창세기강해』 등을 저술한 신학자이자 목사이다. 1899년 충남 공주에서 출생으로, 공주 영명학교 졸업 후 미국으로 떠나 목수안수를 받고 신학박사 학위를 취득(1931년)하였다. 하와이, 만주, 한국에서 목회 활동 및 감리교신학교 교수를 역임하며 감리교회의 자립과 교역자 양성에 힘썼다. 1940년 신사참배에 반대하다 3개월간 투옥되었으나, 이후 친일적 행위를 보였다. 경건주의 신앙인이자 보수주의 신학자로, 해방 후 감리교회 재건 활동을 전개하였다. 1970년 정년퇴직 후 미국의 한인교회에서 목회하다가 1976년 별세하였다.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 달성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부흥 운동이다. 1909년 10월 복음주의선교부통합위원회에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라는 대규모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부흥사 채프만과 알렉산더를 초빙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연합기도회, 매일기도회 개최, 호별 방문전도, 복음서 판매 등의 활동을 하였다. 초교파적 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2년 교인 수는 157,902명이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한국기독교 부흥운동의 원형이 정립된 계기가 되었다.
백만명 구령운동 (百萬名 救靈運動)
백만명 구령운동은 1909년 9월부터 1911년 3월까지 한국 기독교계에서 100만 명 신자 달성을 목표로 세우고 전국적으로 전개한 초교파적 부흥 운동이다. 1909년 10월 복음주의선교부통합위원회에서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라는 대규모 부흥 운동을 전개하였다. 1910년에는 부흥사 채프만과 알렉산더를 초빙하였다. 기독교인들은 연합기도회, 매일기도회 개최, 호별 방문전도, 복음서 판매 등의 활동을 하였다. 초교파적 부흥 운동에도 불구하고 1912년 교인 수는 157,902명이었다. 성과는 미미했지만 한국기독교 부흥운동의 원형이 정립된 계기가 되었다.
일제강점기 선천YMCA 총무, 중앙YMCA 간사 및 이사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
계병호 (桂炳鎬)
일제강점기 선천YMCA 총무, 중앙YMCA 간사 및 이사 등을 역임한 사회운동가.
동석기는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북청에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인 함전그리스도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목사, 독립운동가이다. 1881년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이다. 1903년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3년 귀국 후 감리교 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 1927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자가 된 후 귀국해 한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고 그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1년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으며, 1996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동석기 (董錫基)
동석기는 일제강점기 함경남도 북청에서 최초의 그리스도 교회인 함전그리스도교회를 설립하였으며, 교인들의 민족의식을 고취시킨 목사, 독립운동가이다. 1881년 함경남도 북청군 출생이다. 1903년 하와이 농장에서 일하다가 대학에서 신학을 전공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1913년 귀국 후 감리교 목사로 목회를 시작하였다. 3·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다 옥고를 치렀다. 1927년 미국 ‘그리스도의 교회’ 신자가 된 후 귀국해 한국에 그리스도의 교회를 설립하고 그 발전을 위해 노력하였다. 1971년 캘리포니아에서 별세했으며, 1996년 대통령표창을 받았다.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
박학전 (朴鶴田)
박학전은 해방 이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등을 역임한 관료이자 목사, 농촌운동가이다. 1905년 평안남도 안주군 출생으로, 평양 장로회신학교 입학 후 조만식의 지도 아래 농촌문제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1933년 일본에서 종교교육과 사회사업을 공부한 후 이듬해 귀국해 목사 안수를 받았다. 이후 농사강습회 개최, 농촌지도자 양성, 협동조합·소비조합 결성 등 다양한 농촌운동에 힘썼다. 1937년 동우회사건으로, 이듬해 농우회사건으로 체포되었다. 해방 후 서울시 사회국장, 인천시장, 국제인권옹호회 경기도 본부장 등을 역임하였고, 1972년에 사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