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한규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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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시모 사건은 1925년,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 안식교병원의 미국인 의료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 許時模)의 아동 학대가 1926년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회문제로 비화된 사건이다.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헤이스머와 기독교를 비난하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비등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반기독교운동, 일본 우익세력은 반미운동을 확산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허시모 사건 (許時模 事件)
허시모 사건은 1925년, 평안남도 평원군 순안 안식교병원의 미국인 의료 선교사 헤이스머(C. A. Haysmer, 許時模)의 아동 학대가 1926년 세간에 알려지면서 사회문제로 비화된 사건이다. 『조선일보』의 최초 보도 이후 헤이스머와 기독교를 비난하는 여론이 전국적으로 비등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반기독교운동, 일본 우익세력은 반미운동을 확산하는 기회로 이용했다.
김정식은 대한제국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일제강점기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한 청년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 경무관 출신으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중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출옥 후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했고, 서울과 도쿄에서 YMCA운동을 주도했다. 무교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일본조합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김정식 (金貞植)
김정식은 대한제국기 황성기독교청년회와 일제강점기 도쿄조선기독교청년회에서 활동한 청년운동가이다. 대한제국기 경무관 출신으로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수감 중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출옥 후 연동교회를 중심으로 계몽운동에 참여했고, 서울과 도쿄에서 YMCA운동을 주도했다. 무교회주의자들과 교류하면서 일본조합교회에서 활동하기도 했다.
강익록(康益祿)은 일제강점기 1924년 12월 대한통의부 부원 이진무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선천 삼봉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 뒤 일본 도쿄에서 은신 중 1925년 5월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체포되어 192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1년 출옥하였다.
강익록 (康益祿)
강익록(康益祿)은 일제강점기 1924년 12월 대한통의부 부원 이진무와 함께 군자금을 모집하고 선천 삼봉주재소를 습격하였다. 그 뒤 일본 도쿄에서 은신 중 1925년 5월 일본 경찰에게 발각되어 총격전을 벌이며 저항하였으나 체포되어 1926년 2월 평양복심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고 1941년 출옥하였다.
송중직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에서 파견된 윤응념과 함께 1923년 인천 앞 도서 지역과, 1925년 황해도 송화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각각 징역 6년과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송중직 (宋重稙)
송중직은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 교통부에서 파견된 윤응념과 함께 1923년 인천 앞 도서 지역과, 1925년 황해도 송화 일대에서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각각 징역 6년과 10년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신현규는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1920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신민부에 가입하여 1926~1927년 경상북도 일대에서 한국인 유지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 중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신현규 (申鉉圭)
신현규는 일제강점기 대한광복회에 가입하여 1920년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렀으며, 신민부에 가입하여 1926~1927년 경상북도 일대에서 한국인 유지들을 대상으로 독립운동 자금 모금 활동을 전개하다가 체포되어 서울 종로경찰서에 수감 중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이경호는 일제강점기 1919년 황해도 옹진의 3·1운동을 계획하였으며,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판매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직후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이경호 (李京鎬)
이경호는 일제강점기 1919년 황해도 옹진의 3·1운동을 계획하였으며, 1920년 상하이 임시정부의 독립공채 판매 등으로 옥고를 치렀다. 이후 사회주의운동에 참여하다가 1931년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직후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임성섭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단체인 천마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1922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1923년 9월 동지들과 평안북도 희천 북면의 창룡주재소를 습격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방화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임성섭 (林成涉)
임성섭은 일제강점기 항일 무장단체인 천마대를 지원하기 위하여 1922년 대한독립청년단을 조직하였고, 1923년 9월 동지들과 평안북도 희천 북면의 창룡주재소를 습격하고 주재소와 면사무소를 방화한 혐의로 체포되어 징역 1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장관주는 일제강점기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태형 90대를 맞았다. 이후 대한독립단 단원들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1920년 국외로 망명하려다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1921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장관주 (張觀柱)
장관주는 일제강점기 1919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3·1운동에 참여하여 태형 90대를 맞았다. 이후 대한독립단 단원들과 연계하여 군자금을 모금하고 1920년 국외로 망명하려다 안동현에서 체포되어 1921년 신의주지방법원에서 실형을 선고받고 3년간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정헌태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대한의군부, 신간회 동경지회 및 경성지회, 조선학생혁명당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형무소 이감 중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형량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정헌태 (鄭憲台)
정헌태는 1919년 3·1운동에 참여한 이후 대한의군부, 신간회 동경지회 및 경성지회, 조선학생혁명당 및 조선공산당 재건운동에 참여하였으며, 형무소 이감 중 '조선독립만세'를 불러 형량이 추가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이선경은 일제강점기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수원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하여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인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이선경 (李善卿)
이선경은 일제강점기 1920년 6월 경성여자고등보통학교 재학 중 수원에서 상하이 임시정부 지원을 위하여 결성된 학생 비밀결사인 구국민단에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옥고를 치르고 석방된 직후 고문 후유증으로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김사용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교남학우회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 1920년 '폭탄밀조사건', 1923년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거사 계획 사건으로 체포된 독립유공자이다.
김사용 (金思容)
김사용은 경상북도 상주 출신으로, 휘문의숙을 졸업한 후 1919년 3·1운동에 참여하고 교남학우회를 중심으로 경상북도 일대에서 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항일 비밀결사인 대동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 1920년 '폭탄밀조사건', 1923년 무장투쟁 단체인 의열단의 거사 계획 사건으로 체포된 독립유공자이다.
김영상은 대한제국기인 1906년 태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거부하고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만경강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며,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단식 끝에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김영상 (金永相)
김영상은 대한제국기인 1906년 태인의병에 참여하였으며, 1910년 한국을 강제 병합한 일제가 주는 은사금을 거부하고 체포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만경강에 투신하여 자결하려 하였으며, 군산형무소에 수감되어 단식 끝에 순국한 독립유공자이다.
양성진은 대한제국기 1900년대 황해도 안악에서 면학회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11년 안명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ㄷ가 이른바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양성진 (楊星鎭)
양성진은 대한제국기 1900년대 황해도 안악에서 면학회를 조직하고 애국계몽운동을 벌였으며, 1911년 안명근 등과 함께 독립운동 자금을 모집하다ㄷ가 이른바 '안악사건'에 연루되어 경성지방재판소에서 징역 10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이근주는 개항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하여 임한주 등과 함께 1896년 충청남고 홍주 의병에 참여하였다. 동료들이 체포되자 함께 구금되기를 자청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만류하는 형제들의 제지로 중단하였으며,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자결·순국하였다.
이근주 (李根周)
이근주는 개항기 1895년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분개하여 임한주 등과 함께 1896년 충청남고 홍주 의병에 참여하였다. 동료들이 체포되자 함께 구금되기를 자청하였으나, 노모 때문에 만류하는 형제들의 제지로 중단하였으며, 1910년 한국이 일본에 강제 병합되자 자결·순국하였다.
이수영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대동청년당,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열단,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2~1923년 의열단과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3년 '경북의용단사건'으로 체포되어 1924년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이수영 (李遂榮)
이수영은 대한제국기인 1909년 대동청년당, 일제강점기인 1919년 의열단, 1920년 조선노동공제회 등에서 활동하였다. 1922~1923년 의열단과 서로군정서의 군자금 모금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1923년 '경북의용단사건'으로 체포되어 1924년 징역 2년 6월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임현은 대한제국기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평남지회와 경상남도 동래에서 결성된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과 교통국에서 활동하는 등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임현 (林玄)
임현은 대한제국기 서울에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인 신민회의 평남지회와 경상남도 동래에서 결성된 대동청년단에 참여하였다. 일제강점기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임시의정원과 교통국에서 활동하는 등 국내외에서 항일 투쟁을 전개한 독립운동가이다.
김재계는 일제강점기 천도교 장흥교구장이던 1919년 3월 장흥의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36년부터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리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1938년 2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김재계 (金在桂)
김재계는 일제강점기 천도교 장흥교구장이던 1919년 3월 장흥의 3·1운동을 주도하였으며, 1936년부터 일제의 멸망을 기원하는 '멸왜기도(滅倭祈禱)'를 드리며 독립운동 자금을 모금하다가 1938년 2월 체포되어 옥고를 치른 독립유공자이다.
김영서는 일제강점기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0일 대구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대구부지방부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다.
김영서 (金永瑞)
김영서는 일제강점기 대구 계성중학교에서 교사로 재직하던 중에 3·1운동 소식을 듣고 1919년 3월 10일 대구 만세 시위를 주도하여 5월 31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렀다. 이후에도 민립대학설립기성회 대구부지방부 집행위원 등으로 활동한 독립유공자이다.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흥업구락부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목사·독립운동가.
박동완 (朴東完)
일제강점기 때, 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대표 33인 중 한 사람으로, 기독교 언론활동을 전개하며 흥업구락부와 신간회 등에서 활동한 목사·독립운동가.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목사·정치인·독립운동가.
이규갑 (李奎甲)
일제강점기 때, 임시의정원 충청도의원, 신간회 경동지회 집행위원장 등을 역임하였으며, 해방 이후, 건국준비위원회 재무부장, 국회의원 등을 역임한 교육자·목사·정치인·독립운동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