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 연산동 고분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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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연산동 고분군 전경
부산 연산동 고분군 전경
고대사
유적
문화재
부산광역시 연제구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돌덧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이칭
이칭
연산동고분군
국가지정문화재
지정기관
문화재청
종목
사적(2017년 06월 30일 지정)
소재지
부산광역시 연제구 연산동 산 90-4
내용 요약

부산 연산동 고분군은 부산광역시 연제구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돌덧널무덤·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이다. 이 고분은 연산동 일대 지배자의 집단분묘로 10기의 대형고분과 많은 소형 돌덧널무덤으로 구성되어 있다. 대형고분은 5세기 후반부터 7세기까지 순차적으로 만들어졌다. 매장시설은 깬돌로 네 벽을 쌓고 뚜껑 돌을 덮은 구덩식돌덧널무덤과 ‘일(日)’자형의 으뜸·딸린덧널식돌덧널무덤 등이 있다. 이 무덤군에서 출토된 쇠판갑옷·투구·갑옷비늘 등 철기류를 통해 이 지역 지배자가 군사적인 성격을 지녔으며 신라에 복속된 정치체였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정의
부산광역시 연제구에 있는 삼국시대 구덩식돌덧널무덤 · 덧널무덤 등이 발굴된 무덤군. 사적.
개설

1972년 6월 26일에 부산광역시기념물로 지정되었으며, 2017년 6월 30일 사적으로 승격되었다.

지형상으로 보면 해발 427m의 황령산으로부터 동래구의 좁은 곡저면을 향해 뻗어나온 능선 중 한 지맥에 형성되어 있다.

일제강점기 때 쇠판갑옷[鐵製短甲] · 투구[胄] · 갑옷비늘 · 관모(冠帽) 및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과 같은 철기류들과 각종 옥류(玉類) 등이 출토되어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으며 이후 이 고분군이 연산동 일대 지배자의 집단분묘이었음이 밝혀졌다. 그러나 이미 심하게 도굴당한 채 방치되어 왔다. 고분의 분포상태로 보면 10기의 대형고분이 능선을 따라 나란히 배치되어 있으며 그 주위로는 무수히 많은 소형의 돌덧널무덤[石槨墓]들이 분포한다.

내용

연산동고분군의 중심부라 할 수 있는 10기의 대형고분은 구릉 아래에서부터 일련번호가 매겨져 있다. 1987년 이 고분군의 성격을 규명하기 위해 신라대학교에서 가운데에 위치한 제4호분을 발굴하였고, 경성대학교에서 제8호분을 조사하였다.

1999년에는 터널공사로 인한 구제발굴이 능선 측면 하단부에서 이루어져 수 기의 소형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이 발굴된 바 있다. 대부분 높이 2m, 너비 10m 정도의 원형봉분이 남아 있고, 구조는 깬돌으로 네 벽을 쌓은 뒤 뚜껑돌을 덮은 직사각형의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추정된다. 고분은 구릉 아래로부터 순차적으로 축조되었으리라 추정되는데 대형분들은 5세기 후반에서 7세기경까지 조영되었을 것으로 믿어진다.

발굴조사되어 성격이 규명된 대형분인 제4호분은 봉분의 직경이 12.7m 가량 되는 반구형이며 매장시설은 ‘일(日)’자형으로 배치된 으뜸 · 딸린덧널식[主副槨式] 돌덧널무덤이다. 전체 무덤구덩이는 길이 10.5m, 너비 4m, 깊이 2.5m 가량 된다. 으뜸덧널은 길이 4.5m, 폭 2m, 딸린덧널은 길이 3.3m, 폭 1.7m이며 돌덧널은 무덤구덩이의 벽에 붙여 깬돌로 축조하였다. 완전히 도굴되었기 때문에 유물들은 모두 제 위치를 잃어버린 채 파편 상태로 몇 점이 수습되었을 뿐이다.

경성대학교에서 조사한 제8호분은 제4호분보다 봉분과 매장시설 모두 약간 큰 편이다. 주목되는 사실은 무덤구덩이 내에 돌덧널을 축조할 때 내부에 폭 약 50m 가량의 둑을 쌓아 형식적으로 으뜸덧널과 딸린덧널을 따로 축조했다는 점이다.

한편 2007년에는 이 고분군의 서쪽에 대한 조사가 진행되어 덧널무덤[木槨墓] · 구덩식돌덧널무덤 · 독무덤[甕棺墓] 등 모두 17기의 무덤이 확인되었다.

의의와 평가

5세기까지도 낙동강 이동지역에서는 ‘일(日)’자형의 으뜸 · 딸린덧널식 고분이 축조되나 점차 6세기에 접어들면서 단독덧널식으로 변하게 되는데 연산동 제8호분은 이러한 과도기적 양상을 반영하고 있다.

연산동고분군의 축조시기는 현재 알려진 유물들의 형식으로 보아 인접한 복천동고분군보다 약간 늦은 것으로 추정된다. 그런데 이 고분군에서는 일찍부터 쇠판갑옷이 출토되어 당시 이 지역의 지배자층이 군사적인 성격을 지녔다고 보아도 좋을 듯하다. 그러나 토기를 비롯한 유물 양식에서는 신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신라에 복속된 정치체였다고 추정된다. 이 고분군은 부산지방의 여러 고분군 중에서 지하 유구와 외부 높은 봉분이 완전하게 남아 있는 유일한 고분군으로서 이 지방의 묘제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전문사전 -고분편-』(국립문화재연구소, 2009)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1)
『부산의 문화재』(부산직할시, 1982)
「동래 연산동고분군 수습유구 조사보고」(송계현,『박물관연구논집』, 부산직할시립박물관, 1993)
「부산 연산동4호분 발굴조사보고」(안춘배, 부산여자대학교박물관, 1991)
「동래 연산동 8호분 발굴조사보고」(효성대학교박물관,『영남고고학보』5, 영남고고학회, 1988)
관련 미디어 (1)
집필자
김선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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