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서는 모두 6책이다. 추사 집안 문적의 전사본을 인척인 은진송씨 집안에서 보관하고 있었는데 거기에 인근 소북 집안 문적이 섞인 상태이다. 문집 전체에 대한 서문과 발문은 없다. 1책부터 6책까지 표지에 동일 필체로 『유당집(酉堂集)』이라고 쓰여 있으나 이는 상당히 후대에 제첨(題籤)한 것으로 보인다. 『유당집』과 별도로 『유당종환록(酉堂從宦錄)』이 있는데 표지 제첨이 동일한 것으로 보아 본디 은진송씨 가문에 소장되었던 책이 분명하다.
우선 책제에 해당하는 유당(酉堂) 김노경(金魯敬, 1766〜1837)의 본관은 경주, 자는 가일(可一)이다. 영조의 부마 월성위(月城尉) 김한신(金漢藎, 1720〜1758)의 손자이고, 추사 김정희의 생부이다. 20대에 음직으로 의금부 도사, 제용감 주부, 천안현감, 홍천현감 등을 지내다가 1805년(순조 5)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적, 지평 등에 등용되었다. 이후 병조참의, 예조 · 형조참판, 경기도 관찰사, 평안도 관찰사 등을 두루 거쳤다. 1809년 동지겸사은부사, 1822년 동지 정사로 2차례 청나라에 다녀오기도 하였다. 1830년 지돈녕부사로서 홍기섭(洪起燮)과 전권을 휘둘렀다는 죄와, 이조원(李肇源)의 옥사를 밝히지 않았다는 죄로 탄핵을 받아, 전라도 강진현의 고금도(古今島)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가 1833년에 석방되었다. 2책의 행장이 그의 글이다.
김노경의 글은 여기 외에도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에 소장된 『유당종환록(酉堂從宦錄)』, 동아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된 『유당집(酉堂集)』이 있다. 『유당종환록』에는 아들 김정희가 지은 제문이 있고, 동아대학교 도서관 소장의 『유당집』에는 신임사화(辛壬士禍)를 청 황조에 아뢴 「변정주문(辨正奏文)」, 정조의 두 번째 후궁 화빈윤씨(和嬪尹氏)의 묘지명인 「화빈묘지(和嬪墓誌)」, 주세붕(周世鵬)의 시장(諡狀)인 「신재주선생시장(愼齋周先生諡狀)」, 이계(伊溪) 신공제(申公濟)의 시장인 「이계신공시장(伊溪申公諡狀)」 4편이 실렸다.
그리고 1책의 행장을 지은 이는 김태제(金台濟, 1827〜?)로 본관이 경주, 호가 성대(星臺)이다. 김노경과는 같은 집안의 증조손 관계이다. 양양 부사를 지낸 김상일(金商一)의 차남으로 음직으로 도사, 내자봉사 등을 지내다가 1887년(고종 24) 문과에 급제하고, 이후 부수찬, 집의, 장령, 사간, 이천부사, 봉상사 제조 등을 지냈다. 3책에는 소북계 문인인 남태계(南泰堦, 1701〜1742)와 그의 종조 남치훈(南致熏, 1645〜1716)의 시문이 실렸고, 6책에는 담재(澹齋) 임응준(任應準, 1816〜1883)의 조관일기(朝官日記)가 실렸다.
1책은 표지 우측 상단에 ‘□中草本’이라고 되어 있는데 ‘집안에 소장된 초고본’이란 의미로 추정된다. 「선고부사군사장초(先考府使府君事狀草)」, 「선비숙인한씨가장초(先妣淑人韓氏家狀草)」, 「선백씨술암부군묘지초(先伯氏述庵府君墓誌草)」로 구성되어 있다. 모두 김태제의 글이다.
2책은 「자헌대부지중추부사겸오위도은부도은관이공행장(資憲大夫知中樞府事兼五衛都摁府都摁管李公行狀)」으로 김노경의 글은 이 한 편 뿐이다. 이 글은 이보온(李普溫, 1728〜1797)에 대한 행장이다. 이보온의 본관은 용인, 자는 성화(聖和)이다. 1756년 문과정시에 합격하여 이후 전적, 정언, 지평 등을 지냈고, 장헌세자 및 세손을 보필하였다. 정조 즉위 직후 숙의문씨와 정후겸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리고, 홍국영과 김종수에 맞서다가 흑산도로 유배되었다가 1782년 해배된다. 이후 정조의 지우를 입으면서 우승지, 부총관, 공조참판, 도총관, 지중추부사를 지냈다.
3책은 「제빙모문(祭聘母文)」 등의 산문을 비롯하여 교서(敎書), 표(表), 서(序), 발(跋), 서(書) 등 산문 10여 편과 시 70여 제 90여 수가 실려 있다. 표제는 ‘酉堂集’이라고 쓰여 있지만 김노경 및 그의 경주김씨 집안과는 무관한 책이다. 안에 부전지(附箋紙)로 송치규(宋稚圭, 1759〜1838)가 지은 「경주최씨족보서(慶州崔氏族譜序)」가 있어 은진송씨 집안에 내려오던 것은 분명한 것 같지만, 그 시들은 소북계 인사인 남태계(南泰堦, 1701〜1742)와 그의 종조 남치훈(南致熏, 1645〜1716)의 시문이다. 시는 만시(輓詩)가 주종을 이루고 있다. 면면을 살펴보면, 엄경하(嚴慶遐, 16781739), 이만휘(李萬徽), 이인복(李仁復, 1683〜1730), 박경후(朴慶後, 1644〜1706), 정시한(丁時翰, 1625〜1707), 김성구(金聲久, 1641〜1707), 이재춘(李再春, 1652〜1708), 박기량(朴其良, 1651〜1709), 권지(權持, 1656〜1709), 이국방(李國芳, 16311708), 이진휴(李震休, 1657〜1709), 심득원(沈得元, 1644〜1709), 엄집(嚴緝, 1635〜1710), 임당(任堂), 강총(姜銃, 1645〜1710) 경감(慶敢, 1626〜1688, 南至熏의 장인) 등 대부분 소북, 남인계 문인들이다.
4책은 「경자칠월초구일대사헌김홍근상소(庚子七月初九日大司憲金弘根上疏)」, 「봉조하남공철합부사이상황판부사박종훈이지연우의정조인영연명차자(奉朝賀南公轍頜府事李相璜判府事朴宗薰李止淵右議政趙寅永連名箚子)」, 「수찬남병철상소(修撰南秉哲上疏)」, 「부교리서유훈상소(副校理徐有薰上疏)」, 「교리이정리상소(校理李正履上疏)」, 「수찬심승택상소(修撰沈承澤上疏)」등 김노경과 관련된 상소가 실려 있다. 5책은 「경인팔월십일일정원계(庚寅八月十一日政院啓)」, 「부사과김우명상소(副司果金遇明上疏)」, 「임진이월격쟁시회계(壬辰二月擊錚時回啓)」 등이 수록되었는데 모두 김노경에 대한 탄핵의 시말과 이에 대한 변론의 글들을 모은 것이다. 아들이나 후손이 편집한 것으로 보인다.
6책은 “匈徒輩某年以前以密讒秘計謀危景慕宮〜”으로 시작되는 글과 “辛巳十二月二十一日入參席問安”으로 시작되는 글이 합철(合綴)되어 있다. 필체도, 종이 크기도 전혀 다르다. ‘甸徒輩’로 시작하는 7장 분량의 글은 『한중록』에서 장헌세자의 신원을 촉구한 글로, 세자의 처벌을 주청한 역신의 처벌을 요구하고 중신과 역신을 가려 상벌을 명확히 하는 것이 통치의 근원임을 논하였다. 유당 김노경 가문이 노론 시파의 입장에 있었기에 같은 입장에 있던 혜경궁 홍씨의 이 자료를 필사해 둔 것으로 보인다. ‘辛巳十二月二十一日’로 시작되는 글은 1881년 12월부터 1882년 12월까지의 정치 사건 및 개인 행적에 대해 기술하였는데 중간중간에 임오군란의 전말, 민비시해사건, 대일본교섭경위 왕복 문서, 청국의 개입, 종각방서사건(鐘閣傍書事件), 대일본조약서 등 본인이 작성한 문서로 보이는 한말 정치사에 중요한 사건들을 기록한 것이 보인다. 임씨(任氏) 사람의 이름을 계속 주1 쓰지 않고 있는데 예조판서 이회정(李會正)과 예문관 제학인 임씨가 청(淸)에 대한 예문(禮文)의 실수로 인해 1882년 전라도에 함께 유배되는 것으로 보건대 이 조관일기의 주인공은 담재(澹齋) 임응준(任應準, 1816〜1883)임을 확인할 수 있다.
연세대학교 학술문화처 도서관 소장의 『유당집』은 김노경 본인의 글은 단 1편 뿐이고, 관련 글 및 집안 증손자의 글이 있을 뿐이다. 게다가 엉뚱하게도 숙종 연간 소북계 문사인 남치훈 및 그 종손 남태계의 시문과, 고종 연간 소북계 문사인 임응준의 잡록이 뒤섞여 있는 문제도 안고 있다. 하지만 반대로 김태제의 집안 행장 등은 추사 이후 경주김씨의 행력을 살피는 데 다소 의미가 있고 남치훈과 남태계의 시문집이 유일본이란 점에서, 임응준 관련 기사 역시 규장각 소장 『미신록(未信錄)』을 보완해 준다는 점에서 약간의 의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