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염업은 일정 기준의 시설을 갖추고 소금을 제조하는 산업이다. 소금은 인간의 생리작용에서 필수 물질이고 대체식품이 없다는 점에서는 곡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우리나라는 제염에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데다가 국가에서 징수하는 염세가 국가 재정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면서 국가의 중요한 산업이 되었다. 화력에 의해 채염하는 전오제염 시기와 연료를 일광·풍력을 이용하여 채염하는 천일제염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전오제염 시기는 고대에서 20세기 초기까지이며, 천일제염 시기는 1907년 이후 현재까지이다.
우리나라의 제염업은 지형 · 기후 · 온도 · 강우량 등 제염에는 좋은 자연조건을 갖추고 있는 데다 염제(鹽制)가 확립되면서 국가에서 징수하는 염세(鹽稅)는 국가 재정수입의 중요한 원천이 되었다.
이같이 제염업은 중요한 산업활동의 하나로 우리나라의 정치 · 경제 · 사회 · 산업 · 군사 등 여러 방면에 걸쳐 상당한 역할을 하였으며, 역대 왕조와 정부는 제염업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소금의 제조 및 관리를 국가가 통제함으로써 국익을 도모하고 국민생활을 돕고자 했던 것이다.
소금은 식료품의 하나로 인간의 생리작용에서 양곡 못지않게 잠시도 없어서는 안 될 필수 물질이고 대체식품이 없다는 점에서는 도리어 곡물보다 더 중요한 의미를 갖게 된다. 더욱이 현대와 같은 산업사회에서는 화학공업의 중요한 기초 원료로서 용도가 매우 다양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소금의 소비량은 그 나라 공업 발전의 정도를 판단하는 지표가 된다고도 한다.
이와 같은 소금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어떠한 국가나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중요시되어온 것은 다시 말할 나위도 없으며, 우리나라에서도 원시사회로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필요불가결의 물질인 소금을 생산하는 제염업이 발전하여온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소금은 그 산지에 의해 해염(海鹽)과 육염(陸鹽)으로 크게 구분할 수 있는데, 중국에서는 해염 외에도 육염이라고 할 수 있는 지염(池鹽) · 정염(井鹽) · 애염(崖鹽) · 석염(石鹽) 등 많은 종류의 소금을 제염해 오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육염의 산출은 없고 반도라고 하는 지형적인 특수성 때문에 바닷물을 이용한 해염만을 생산해 왔다.
우리나라는 온대지방에 위치하고 있으며, 국토의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반도이다. 해안의 토양은 동서가 그 질을 전혀 달리하고 있으니, 동해안 쪽은 사질토이며 해안선이 매우 단조롭다. 그러나 서해안 쪽은 점질토이며, 해안선이 극히 복잡한 데다 간만의 차가 심하고 넓은 간석지는 곳곳에서 염전(鹽田) 등으로 이용할 수 있는 곳이 많은 지역이다.
기후와 온도는 남북과 동서 간에 심한 차이가 있다고는 하지만 강우량은 적은 편이다. 더욱이 계절풍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기인 여름철 이외에는 공기가 건조하여 제염상 매우 양호한 조건이 된다. 그러므로 국토의 면적에 비해 해안선의 길이가 길고 온화한 기후와 계절풍의 영향 및 바닷물을 이용하는 무진장한 소금원료 등 제염업에 적합한 자연조건을 두루 갖추고 있다.
우리의 제염업은 그 제조방법에 따라 크게 두 단계로 구분할 수 있다. 첫째 단계는 소금을 생산하는 데 연료를 사용하는 화력(火力)에 의해 채염하는 전오법(煎熬法)으로 제염하는 단계로, 옛날부터 전승해 온 원시적인 전근대적인 방법이다. 둘째 단계는 연료를 사용하지 않고 일광 · 풍력을 이용하여 채염하는 천일법(天日法)으로 제염하는 단계로, 근대적인 방법이다.
따라서 우리나라 제염업의 시대 구분은 전오제염 시기와 천일제염 시기로 구분할 수 있고, 전오제염 시기는 고대에서 20세기 초기까지이며, 천일제염 시기는 1907년 이후 현재까지로 구분이 된다. 여기에서는 전오제염 시기도 왕조의 교체와 관련하여 제염업의 제도적인 측면을 중심으로 19세기 말까지를 각 시대순으로 놓고 그 전개과정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만, 제염업에 대한 연구가 자료의 빈곤 등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충분한 성과를 얻지 못하고 있으므로 앞으로 연구의 진전에 따라 수정, 보완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우리나라는 원시사회로부터 삼국시대와 통일신라시대에 걸쳐 염업에 관한 문헌이나 기록이 거의 없어 언제부터 제염업이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을 정확하게 추정하기는 매우 어렵다. 해염만을 생산할 수 있는 자연적 조건으로 미루어 보아 오랜 시일에 걸쳐 제염기술상 가장 원시적인 방법으로 해수에서 염분(鹽分)을 채취했으리라고 짐작할 수 있다.
다만, 『삼국사기』와 『삼국지』 위지 동이전 등의 단편적인 기록에 의하면 고구려에는 대가라고 하는 상류층 사람들이 있어서 직접 농사나 생업에는 종사하지 않고 있는데, 하호(下戶)라고 하는 평민은 미곡이나 어염을 멀리서 운반 · 공급하였고, 귀족의 창고에는 어 · 염 등을 쌓아 두고 있었다고 한다.
한편, 함경도지방의 동해안 일대에 위치하고 있던 옥저(沃沮)에서는 농업과 더불어 어염 등이 풍부하게 생산되고 있었다. 특히 옥저가 고구려에 예속된 이후부터 옥저인들은 조세 외에 어염 등을 멀리 운반하여 항상 고구려에 공납하였다.
신라에서는 9세기 초 애장왕 때 서형산성(西兄山城)에 염고(鹽庫)가 있었고, 9세기 후기 경문왕은 염분(鹽盆)을 사원에 희사한 일이 있었다.
이와 같은 내용으로 미루어 압록강 중류 통구지방에 자리잡은 고구려는 멀리 떨어진 발해 연안이나 정복사업에 의해 얻은 동해안에서 소금을 조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한편, 신라는 군국의 필요에서 산성에 소금을 저장했을 뿐만 아니라 염분, 즉 제염장을 사원의 재산으로 기진한 것은 많은 양의 염분을 왕실에서 점유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는 것이다.
고려시대의 제염업에 관해서는 관계자료가 적기 때문에 자세한 제도를 밝히기 어려우나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의 기사에 의해 편의상 전후기로 구분하여 살펴보기로 한다.
고려 전기는 왕조의 기초가 굳어지고 제도와 문물이 점차 정비 · 발달되었으며, 송 · 요 등 외래 문화를 수용함으로써 흥성시대를 이루었다. 고려 전기의 염업은 국초부터 염무행정(鹽務行政)을 담당하는 관청으로 도염원(都鹽院)을 설치하여, 염분을 국가 소유로 하고 제염을 감독하며 염분을 관리하고 염세 징수와 소금의 배급 · 판매 등 국가가 제염업에 관한 모든 정책을 관장하는 전매제도로 운영하였다.
도염원의 관원으로는 녹사(錄事) 2인과 기사(記事) 2인이 있었는데, 이것은 문종 때 강력한 업무처리를 위해 정해진 것으로, 그 뒤 충선왕 때 새로운 염업제도가 시행되면서 민부(民部, 戶曹)에 병합되기까지 도염원제가 계속되었다.
그런데 태조는 동왕 21년(938)에 12세로 태조 앞에서 『논어』를 암송한 상으로 최승로(崔承老)에게 염분을 하사한 바 있고, 현종은 동왕 7년(1016)에 왕자를 출산한 궁인(宮人) 김씨에게 금은기 · 전장 등과 함께 염분을 하사하였다.
그리고 정종은 동왕 5년(1039)에 동북로의 제주는 지난해에 대홍수로 곡식이 수재를 입어 백성들의 살림이 어려우니 창고에 있는 쌀과 소금을 방출하여 백성을 구원하라는 교를 내렸는데, 이 창고는 의창(義倉)을 지칭하는 것으로 쌀과 함께 소금도 저장한 듯하다. 충선왕 당시에는 이같이 소금을 저장하여 민간의 수요에 응하는 것을 의염(義鹽)이라고 하였다.
문종은 동왕 10년(1056)에 관기가 문란하여 관리는 공무에 성실치 못하고 오직 사리만을 꾀하며 권문호족과 결탁하여 어 · 염 · 재(梓) · 칠(漆) 등이 모두 침탈당하므로 각 지방에 무문사(撫問使)를 파견했는데, 이는 왕권의 약화로 인하여 어염 등 국가 수입이 감소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며, 국가의 재정제도가 점차 문란해지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런데다 문종 이후 계속된 외척의 전횡과 무신들의 집권으로 사회경제제도는 극도로 문란해지고 전매제하의 제염업도 크게 타격을 받아 전국의 염분은 원칙적으로 국가 소유였으나 그 중 일부분은 이미 국초부터 왕실에 귀속되었다. 또 왕권이 점차 약화되면서 여러 궁원(宮院) 및 사사(寺社)와 권문세가에 의해 분점되었으며, 사사로이 소금을 판매하는 염상(鹽商)까지 나타나게 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 전기의 제염업은 도염원의 전매제 아래서 불의의 재난이나 흉황에 대비하여 진휼(賑恤)할 수 있도록 상당량의 소금이 비축되어 있었다.
또 국가의 강력한 통제를 받으면서 영위되어 오다가 점차 왕권이 약화되면서부터 귀족 부호들의 염분 강점과 제염업의 사영(私營) 등으로 염세 수입은 감소되고 국가 재정에 큰 손실을 가져왔기 때문에, 고려 후기 충선왕에 의해 염제(鹽制)의 개혁을 보게 된다.
고려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무신의 집권과 몽고의 침략으로 국가의 제도가 전반적으로 해이해졌는데, 염제도 예외는 아니었다. 이같이 문란해진 염제는 충렬왕 때에 이르러 개혁을 시도하게 되었으니, 충렬왕은 동왕 5년(1279)에 도평의사사에 전지(傳旨)를 내려 염호(鹽戶)를 점검하여 염세를 징수토록 하였다.
또한 왕은 염세의 징수권을 국가에서 장악하기 위해 동왕 14년에는 사신을 여러 도에 파견하여 각염(榷鹽)하게 하였다. 각염이란 현대의 전매에 상당하지만 실은 전매보다도 염세의 징수권을 지방호족 등의 손에서 국가로 거두어들이도록 방침을 세워 실행하는 것이다.
충렬왕은 각염법을 실시한 뒤 동왕 18년에는 경상도 · 전라도 · 충청도 등 3도의 제염지(製鹽地)에 염세별감(鹽稅別監)을 파견하여 염세를 징수하게 하였다. 그러나 충렬왕의 염제개혁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 각염제는 실효를 거두지 못한 듯하니, 동왕 22년 중찬(中贊) 홍자번(洪子藩)은 상소를 통해 각염법이 실시되어 염세가 이미 정해져 있는데도 불구하고 염세 이외에 주현에서 과렴(科斂)을 강행하니 이를 금해 줄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 같은 과렴의 징수는 염세의 부담을 더욱 가중시켜 염호는 날로 줄고 백성은 심한 고통을 당하게 되는 등 염제가 문란한 가운데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충선왕의 염제개혁이 단행된 것이었다. 충선왕 1년(1309) 왕의 전지로 단행된 염제개혁(각염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염의 생산 부문과 염무행정의 획일화에 관한 것으로, 고려 초부터 오랫동안 국유의 염분을 사점하여 그 이익을 독점해 오던 여러 궁원과 사사 및 권귀부호들의 사염분을 모두 관에서 접수하여 이를 관리하면서 염의 증산을 꾀하고, 염무를 전담해 오던 도염원을 민부에 병합하여 전국의 염분을 민부에서 통제함으로써 염무행정을 일원화하였다.
둘째, 소금의 유통 부문에 관한 것으로, 먼저 소금의 가격을 정하여 은 한 근에 64석, 은 한 냥에 4석, 포 한 필에 2석으로 하고, 이것으로 예를 삼아 소금을 쓰려고 하는 자는 모두 의염창(義鹽倉)에 나가 사도록 하고 군현의 사람들은 모두 본관관사(本管官司)에 포를 납부하고 소금을 받도록 하였다.
이것은 하나는 염을 필요로 하는 자가 은 또는 포로 소금을 구입하는 방법과, 다른 하나는 관에서 포를 징수하고 그 대상으로 소금을 배급하는 방법이다. 그리고 이러한 유통구조를 확립하기 위해 사사로이 염분을 설치하거나 소금을 매매하는 자가 있으면 엄하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후 연해 각지에는 염창(鹽倉)이 설치되고 이전의 제염자와 군현의 백성을 징발하여 염호로 삼아 제염에 종사하게 하였다.
전국의 염분 수와 염호 수를 살펴보면 〈표 1〉과 같다. 〈표 1〉에 의하면 대개 1개의 염분을 1호 내지 2호의 염호가 공동으로 경영한 듯하며, 이 같은 염분의 분포는 대체로 고려의 동북부를 제외한 전국의 연안에 걸쳐 있으며, 특히 양광도 · 경상도 · 전라도의 남해안 및 서해안에 치중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道別\區分 | 鹽盆 | 鹽戶 | 道別\區分 | 鹽盆 | 鹽戶 |
---|---|---|---|---|---|
楊廣道 | 126 | 231 | 江陵道 | 43 | 75 |
慶向道 | 174 | 195 | 西海道 | 49 | 49 |
全羅道 | 126 | 220 | |||
本壤道 | 98 | 122 | 계 | 616 | 892 |
〈표 1〉 고려 후기의 염분과 염호 |
한편, 의염창을 비롯하여 각 염포(鹽鋪) 및 판매장소에서 판매한 관염(官鹽)의 수입 총액은 매년 포 4만 필로, 당시 국가가 취급한 소금의 판매량은 연간 8만 석이 훨씬 넘었을 것으로 보인다.
염무행정의 획일화와 소금의 증산정책 및 유통질서의 확립 등을 내용으로 한 각염법을 기간으로 하는 충선왕의 제염업제도는 이후 고려 말까지 시행되었는데, 말기에 내려올수록 법이 오래되자 폐해가 속출하게 되었다. 이 같은 폐해를 종합해 보면 다음과 같다.
① 염세대가포(鹽稅代價布)의 몇 년분을 먼저 징수하고 염을 배급하지 않아 심한 경우에는 10년간 한 되의 소금도 받지 못한 일이 있으며, 염장관(鹽場官)이나 관리들이 부정행위를 자행하고, 정실이나 혹은 권문호족 등에게 우선 매염함으로써 일반 서민에게는 미치지 아니하며, ② 염가(鹽價)에 대하여 납입하는 포의 부과가 더욱 가중해졌다.
③ 염호로부터 염을 강제 징수하며, 또는 도망간 염호의 공염(貢鹽)을 남아 있는 염호에게 가징(加徵)하여 본수를 채우려 하였으며, 염호는 염역(鹽役)이 심한 고역인 데다가 별다른 이익이 없으므로 산망자(散亡者)가 속출하는 관계로 염의 생산량은 날로 격감하였다. ④ 염법(鹽法)이 문란해짐으로써 사염 제조와 밀매매가 성행하게 되었다.
⑤ 왜구가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남으로써 양광도 · 경상도 · 전라도 등 각 도 연해 군 · 현의 염분과 염호가 극심한 피해를 당하는 등 이러한 법의 문란과 폐해로 말미암아 결과적으로는 염의 기근을 가져오게 하였고, 염업제도는 혼란상태에 빠져 좀처럼 수습되지 못한 채 조선왕조로 정권이 교체되고 말았다.
조선을 개국한 태조는 1392년 국호를 비롯하여 모든 의장과 법제를 고려의 고사(故事)에 따르겠다고 선포하였으나 이는 민심을 회유하기 위한 것이었고, 실제로는 새로운 정치 기반을 조성하기 위해 개혁과 조직의 개편을 시행하였다. 따라서 건국 초에 정치 · 경제 · 사회 · 문화 등 제반 제도가 하나하나 재편성되어 가는 가운데 고려 말에 문란했던 제 염업제도도 그 면모를 달리하게 되었다.
태조는 즉위 교서에서 조선의 염제 정비에 관한 기본 방향을 천명하고 있는데, 이것은 즉 각 도에서 구운[燔煮] 소금은 백성과 무역하여 국용에 충당하도록 하라고 밝히고, 염세를 관장하는 의염창의 관제를 정하였다.
그리고 모든 해안지역의 주군에는 염장을 설치하여 관에서 직접 염의 생산을 담당하고 백성들은 그 생산된 소금을 시가에 의해 포나 미곡으로 교환, 판매하게 하려는 이른바 고려에서 쓰던 각염법의 성격인 전매제를 계속 시행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동왕 3년(1394)에는 공사의 염장을 모두 사재감(司宰監)에 소속시키고, 동왕 6년에는 감찰(監察)을 각 도에 파견하여 연해지역 주 · 군의 염분 및 제염지구를 답사해서 생산량의 다소를 헤아려 세를 정하고 제염장의 문서를 작성케 하였다.
그리고 해안에서 멀리 떨어진 제읍에는 염창(鹽倉)을 설치하여 관염을 저장했다가 백성의 곡포(穀布)와 무역하여 이를 군자(軍資)에 보첨하게 하였으니, 태조는 포와 아울러 쌀도 소금의 교환대상물로 확정하였으며, 염장 설치와 관영자염(官營煮鹽) 등은 상대적으로 염세의 경감을 가져오게 하였다.
태종 13년(1413)에는 포와 쌀 이외에 잡곡도 소금의 교환물로 추가되었는데, 이 같은 소금의 교환대상 물자 확대는 서민층으로 하여금 소금을 쉽게 얻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러는 가운데 중요한 사실이 드러났으니, 조선왕조가 다른 산업 부문에서도 그랬듯이 소금의 유통과정에서 상인을 흥리지인(興利之人)으로 규정하고 그들의 상업행위를 엄격하게 배제했다는 사실이다. 이와 같이 상인을 유통기능면에서 통제함으로써 벽지나 오지에 대한 소금 공급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세종 때에 이르면 국초의 염제는 문란해지고 염귀현상이 나타나며, 조신간에 염법(鹽法)에 대한 의론이 분분하나 염리(鹽利)를 꾀하여 의염법(義鹽法)의 시행을 주장하는 사람이 많아지게 되는데, 좌의정 신개(申槩), 예조판서 김종서(金宗瑞) 등이 그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세종 27년(1445) 8월에는 염법에 대해 논의하다가 관이 자염(煮鹽)을 하는 것은 의창의 부족을 보충하고 흉황에 대비하는 것으로, 이 같은 대사는 별도의 관청을 세워 주관해야 된다고 하여 마침내 특별 전매기관으로 의염색(義鹽色)이 설치됨으로써 태조 이후 사재감에서 맡고 있던 모든 염무행정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의염색에는 도제조 2인, 제조 3인, 별감 8인의 관원을 두었고, 전국의 소금 통제와 전매의 실행, 그리고 소금의 공급 · 수용을 조절하였다. 또한 의창의 부족을 보첨하며 흉황에 대비하는 등 유국편민(裕國便民)하는 데 그 설치 목적이 있었다. 이리하여 국가에서 소금의 생산과 유통을 완전히 독점하는 전매제가 실시되기에 이르렀고, 더욱 강력하게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의염색에서 사염분(私鹽盆)을 모두 수용하여 관영화하고 사매매를 금지하여 판매권도 독점하니 염간(鹽干)이 도망하는 속출하여 염가가 폭등하게 되고, 또한 관에서 자염과 매매에 대한 판매권을 관장하게 되었다.
즉, 국가 권력으로 생산수단과 유통판매권을 독점하는 데 따르는 폐해와 생산자에 대한 가중한 수탈, 수송의 곤란 등을 들어 이계전(李季甸) 등 일부 신하들이 강력하게 반대하자 세종은 동왕 28년(1446) 5월에 의염색을 폐지함으로써 설치 이전으로 환원되고, 그 업무는 다시 사재감으로 이관되었다.
그 결과 사염에 대한 통제가 다소 완화되기는 했으나 염분은 원칙적으로 모두 관의 소유로 하고, 사염은 약간 있다고 하더라도 관제염이 주류를 이루었으며, 유통구조는 거의 관에서 관장하였다.
조선 초기의 제도와 정책은 중앙집권적인 왕권이 확립되고 문물제도가 정비됨에 따라 성종 16년(1485)부터 반포, 시행된 『경국대전』에서 그 내용을 찾아볼 수 있을 것 같다. 『경국대전』에 규정된 염업제도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각 도의 염분은 등급을 나누고 대장을 만들어 이를 호조(戶曹) 본도 및 본읍에 비장한다. 염분이 멀리 떨어져 있는 여러 읍에서는 염창을 두고 염세를 받아 여기에 옮기고, 곡물이나 포목과 바꾸어 군자에 보충한다. 경기도 · 충청도 · 황해도의 세염은 사재감에 상납하는 것을 제외하고 군자감 및 염창에 나누어 수송한다. 각 도의 구황염(救荒鹽)은 구황하는 데 소요되는 양을 제외하고 모두 곡물로 바꾼다.
벌칙으로 대장에서 빠진 자는 장(杖) 80의 형에 처하고, 그 이익은 관에서 몰수한다는 등의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이 같은 제도는 이후 1750년(영조 26) 균역법(均役法)이 시행되기까지 부분적인 개정과 보완이 있었으나 기본 요지는 그대로 적용되었다.
소금의 화매(和賣)에 사용된 교환대상 물자는 개국 초기에는 다만 포와 쌀 이외에는 쓰이지 않았으나 태종 11년(1411) 11월부터는 포와 쌀 이외에 저화(楮貨)도 사용했으니, 이것은 태종의 화폐 유통 장려책이기도 하거니와 원방(遠方)에 거주하는 자가 미곡을 운반하는 데 고통이 크므로 취해진 조처이기도 하였다.
조선 초기 소금의 가격은 기록상으로는 시가(市價)에 의해 매매가 이루어졌기 때문에 그 확실한 값을 알 수 없으나, 세종 12년(1430) 2월부터는 면포 1필에 소금 2석6두로 준하여 교환하게 했으며, 이 가격을 항식(恒式)으로 하였다. 그리고 시중에서는 면포 1필이 정포(正布) 2필에 준하여 통용되었다. 그러나 세종 28년 2월부터는 매삭(每朔) 시가례(市價例)에 준하여 소금 1두를 더해서 화매하기로 하였다.
또한 집현전 직제학 이계전의 상소에 보면 의염색 설치 이전에는 민간에서 쌀 1두에 소금 3, 4두 혹은 5, 6두까지 교환되었는데, 의염색 설치 이후에는 쌀 1두에 소금 1, 2두를 바꾸게 되었다고 한 것으로 보아 의염색의 설치 이후에 소금값이 폭등하여 염귀현상이 나타났음을 알 수 있다. 조선 전기의 소금 생산지는 우리나라의 전체 해안에 산재하여 연해의 군 · 현으로서 소금을 산출하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조선 전기 소금 산지의 염분과 염소(鹽所)의 각 도별 분포상황을 살펴보면 〈표 2〉에 나타난 바와 같다. 조선 전기에는 고려시대의 염분 616개 소의 2배가 넘는 1,362개 소이며, 여기에 염소까지도 염분에 포함시켜 계산하면 1,626개 소로 고려시대보다는 증가를 보이고 있다.
道別\區分 | 鹽盆 | 鹽所 | 道別\區分 | 鹽盆 | 鹽所 |
---|---|---|---|---|---|
京畿道 | 1 | 88 | 江原道 | 320 | - |
忠淸道 | 147 | 35 | 平安道 | 298 | 29 |
慶尙道 | - | 39 | 西海道 | 207 | 15 |
全羅道 | 143 | 58 | 咸吉道 | ||
黃海道 | 246 | - | 계 | 1362 | 264 |
〈표 2〉 조선 전기의 염분과 염소 |
특히 〈표 1〉과 〈표 2〉에 나타나 있듯이 고려시대 염분의 도별 분포상황을 보면 한수(漢水) 이남의 양광도 · 경상도 · 전라도 등 남부에 속하는 하삼도 지방에 치우쳐 있으나, 조선시대에 들어와서는 황해도 · 평안도 · 함길도 등 한수 이북 지방에도 널리 설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이 동서와 남북의 차이 없이 전체 해안에 걸쳐 제염지가 확대 설치된 것은 조선 전기의 제염업이 고려시대의 제염업에 비해 전진적인 발전을 이룩했다고 볼 수 있으며, 이는 조선 염업정책의 적극화와 염업의 안정을 의미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전국의 연안에 걸쳐 확대 설치된 제염장에는 매우 많은 인원이 제염역에 종사했으며, 제염을 신역(身役)으로 하는 염간에 의해 관염(官鹽)이 제조되었다.
제염작업에 종사하는 자를 통상 염간 · 염한 혹은 염정이라고 하는데, 조선 초기부터 이들이 제염을 전담했으나 때에 따라서는 선군(船軍)이 조운이나 영전(營田) 또는 파선(破船) 개조와 같은 작업 외에 자염하는 일에 전용되기도 하였다. 제염역에서 자염하는 일은 염한호(鹽漢戶)가 그 일을 전적으로 주관하고 선군이나 공천(公賤)은 그 역을 도와 주는 데 불과하였다.
어쨌든 염역에 징발된 인원은 각 군 · 현이나 지역에 따라서 각각 다르지만, 기록에 의해 추정하면 비단 선군뿐만 아니라 연해 거주인과 천인이 함께 징발되었다.
본래 자염에 종사하는 염간은 비록 양인 신분이었기는 하나 염역이 워낙 고역인 천역이었기 때문에 신량역천(身良役賤)으로서 천인과 다름없는 대우를 받는 까닭에 염간이 되는 것을 기피하는 경향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세종실록』에서 보면, 염적(鹽籍)에 등록하는 일을 두려워하는 것은 일단 등록이 되면 종신토록 염역을 면하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어 염간들이 염역을 피하고, 또한 폐업하여 자염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미루어 확인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상황, 즉 염간들의 염적 등록에 따르는 염역 기피와 제염장으로부터의 이탈로 인한 폐업이 자주 일어남으로써 자연히 염생산량의 감퇴를 가져오고 아울러 경외(京外)의 염귀현상을 초래하게 되었다.
이에 국가에서는 염간이 아닌 사람이 자염을 원하는 경우에는 수세(收稅)를 하지 않는 특전을 부여한다든가, 혹은 염간들에게는 염세를 감면 조처하는 등 제염업 종사자를 확보하는 데 급급하였다.
우리나라의 제염업은 20세기 초 근대적인 천일제염방법으로 생산하기 이전에는 대체로 바닷물의 수분을 화력에 의해 증발시킴으로써 소금을 결정시켜 채염하는 전오제염방법이 예로부터 전승되어 왔다.
이 같은 전오법제염은 대개 두 유형으로 구별되는데, 하나는 염전에 바닷물을 끌어들여 이것으로 함수(鹹水)를 채취한 다음, 이 함수를 염부(塩釜)에 넣고 전오함으로써 채염하는 염전식의 제염법이고, 다른 하나는 염전을 마련하지 않은 채로 염조(塩竈)만을 축조하여 해수를 직접 염부에 넣고 전오하는 해수직자법(海水直煮法)의 두 가지이다.
이러한 제염법은 원시적인 방법으로 행해졌을 뿐만 아니라 제염기술도 매우 유치했으므로 많은 시간과 인력, 그리고 연료를 필요로 하였다. 그러나 이같은 제염방법도 산업기술의 발달에 따라 제염에 필요한 도구나 제염장의 시설이 개선되고 번자(燔煮) 기술도 향상되어, 조선 전기에는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러 원시적인 해수직자술에서 서서히 탈피해 가고 있었다.
조선 전기의 제염에 관련된 제도는 성종 때에 반포, 시행한 『경국대전』의 규정과 같은데, 성종 이후에도 염무관리의 부정과 제도의 문란에 따른 제염량의 감소로 그 폐해는 적지 않았으며 염귀현상이 계속되었는데, 임진왜란으로 더욱 심하였다.
이에 1598년(선조 31)에는 소금의 전매제 실행에 대한 의론이 대두되었다. 선조는 민폐를 염려하여 주저했으나 마침내 시행되어 소금의 사매매를 금하고 관정가격(官定價格)으로써 교환하게 했으나 이전 시가의 배액에 가까워 백성들의 고충은 한결 더하였다.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후에 수세를 감축하기도 했으나 여러 궁가(宮家)의 급양(給養)을 위하여 임시방편이기는 하지만 궁여지책으로 동남연안(東南沿岸)의 염분이 제 궁가에 절수(折受)되었다.
이보다 앞서 체찰사(體察使) 유성룡(柳成龍)은 염리 흥기와 생재지방법(生財之方法)을 상소했는데, 이에 의하면 산곡간(山谷間)이나 해변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인즉 소금의 귀함이 금과도 같으며, 소금 1말의 값이 쌀 1말이기도 하고, 혹은 그 배액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만약에 수령들로 하여금 해변에 염호를 소집해서 안심하고 집거하게 한 뒤 자염한 것을 적게 징수하고 여분은 매각하거나 먹도록 하면 염호는 모두 해변으로 모이고 염분은 날로 많아질 것이며, 관(官)에 납입되는 많은 양을 산매하면 군량(軍糧)과 종자를 1000만 석이나 얻을 수 있다고 하였다.
임진왜란 이후부터 각 도의 많은 염분이 궁방(宮房)과 세가(勢家)에 의해 점유되었고, 재정 또한 어지러워졌으므로 인조 때는 그 정리에 착수하여 각 사(司)는 누차에 걸쳐 궁가가 소점(所占)한 염분의 면세를 없앨 것을 주청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방해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병자호란 이후 염세의 과징으로 염호는 산망(散亡)하고 염분은 차차 쇠락하여 보잘것없어졌다.
1650년(효종 1) 호조의 계(啓)에 의하면 수진궁(壽進宮) 이하 내수사(內需司)에 이르기까지 그 소속된 염분은 99개 소이며, 여러 궁가에 소속된 염분은 166개 소라고 보고되었다. 이에 대사간 조석윤(趙錫胤)은 공용에 계류되지 않은 것은 모두 없앨 것을 간청하였다. 한편, 소금에 대한 관의 약탈도 심하여 태안 · 서산과 같은 소금 주산지의 염호가 많이 도산하게 되었다.
숙종 때는 연해지방의 염장을 조사한다거나, 또는 경외(京外)의 아문(衙門)이나 신구 궁가(新舊宮家)의 염분점탈(鹽盆占奪) 사실과 염세를 이중삼중으로 징렴하는 폐단을 개혁하고자 하였으나 별로 좋은 성과는 얻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처럼 염분이 점유되고 염세가 징렴되는 상황에서도 제염 관련제도는 강화되었으니, 영조 20년(1744)에 제정된 『속대전』에서 이를 실제로 찾아볼 수 있다. 『속대전』에 명시된 규정을 보면 다음과 같다.
각 도의 염분은 공안부(貢案簿)에 기록하고 수세(收稅)한다. 염세는 연말을 기한으로 하여 본호조(本戶曹)에 상납하며, 기한을 어긴 경우에 당해 읍(邑) 및 진(鎭)의 감관(監官) · 색리(色吏)는 형벌하여 추문(推問)하고 관원은 파면한다. 염분세는 매분에 대하여 다만 1년에 소금 4석을 징수한다. 경기도 · 원도(遠道)를 막론하고 본호조 및 각 아문과 모든 궁가의 소속 염분에 대해서도 이와 마찬가지다.
경상도에서는 소철부(小鐵釜) 및 사간염부(私干鹽釜)면 반을 감해 준다. 세를 돈으로 대납하면 소금 1석에 돈 1냥을 납부한다. 강원도에서는 반파분(半破盆)이면 세염(稅鹽)은 반으로 감해 준다. 세를 면포로 대납하면 소금 1석에 면포 1필 반이고 이를 돈으로 대납하면 면포 매필은 7전5푼에 상당한다.
본호조에 소속되는 염분의 액내(額內)에서 파망(破亡)된 것은, 지방관은 감영(監營) · 병영(兵營) · 통영(統營) · 수영(水營)의 소속을 물론하고 모두 파정(罷定)을 허락한다. 그러나 만일 궐액(闕額)을 그 족내(族內)에서 징수하는 폐단이 있으면 그 관원은 본도(本道)에서 결장(決杖)한다.
염세를 징수할 때 본관(本官) 및 당해 진(鎭)에 소속하는 자가 해민(海民)을 침해하는 경우에는 장(杖) 100에 처한 후 원지(遠地)에 정배(定配)하고 수령에 대해서는 제서유위율(制書有違律)로써 논죄하며, 변장(邊將)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곤장형에 처한다. 지방 토호가 어염자(漁鹽者)를 침해하는 경우에는 호강율(豪强律)로써 논죄한다.
염분을 사사로이 입안한 자는 신구(新舊)를 막론하고 일률적으로 이를 철거하되, 만일 재차 설치한 자 혹은 지주(地主) · 어장주(漁場主)라고 칭하고 사사로이 어세(漁稅)를 징수한 자가 있는 경우에는 모두 모점공전율(冒占公田律)로 논죄한다.
신궁가(新宮家)의 염분 · 어전(魚箭)은 다만 한곳에 한하여 이를 허가하고, 그 외에는 절수(折受)를 허가하지 않는다. 강화(江華)의 어전(魚箭) · 선척(船隻) · 염분은 본부(本府)에 전속하며, 군향(軍餉)에 보충한다.
이 규정은 전기의 제도를 보충하고 당시의 관례를 구체화한 것이다. 그러나 『속대전』이 제정된 지 6년 만인 1750년(영조 26) 7월 이전의 양역(良役)이 서민에게 막대한 부담을 가져왔으므로 영조는 이에 대한 대책으로 균역청을 설치하고 양포 2필을 1필로 반감해 주었으며, 그 재정상의 부족액은 어세 · 염세 · 선세(船稅)와 선무군관포(選武軍官布) 및 결작(結作)의 지수로써 보충하기로 하였다.
이 같은 균역법의 실시와 함께 염세는 어세 · 선세 · 곽세(藿稅)와 같이 호조의 소관에서 벗어나 균역청이 관장하는 것으로 이관되었으며, 새로이 제정된 해세절목(海稅節目) 규칙에 따르게 되었으니, 그 대요를 들면 다음과 같다.
소금은 일체를 균역청 소속으로 하고 제 궁가 염분의 절수를 모두 없애며, 소금의 현물납(現物納)을 전납(錢納)으로 하고, 염세의 부담을 경감하며, 각각의 경중의 차이가 심한 것은 그 제염의 난이, 이익의 다과, 토지가격의 고저 등을 참작하여 공평하게 균분하였다. 이런 제도의 개정으로 염폐(鹽弊)는 많이 없어지고 염호가 부담한 고통은 경감되었지만 수백 년의 고질적인 악폐가 하루아침에 근절되었다고 볼 수 없다.
조선의 제염업은 초기에 수많은 염분 설치와 관영자염(官營煮鹽)의 증대, 염세의 감면 등 국가의 적극적인 정책 시행으로 안정된 상태이기도 했으나 후기로 내려오면서 염세의 과중 부과, 염한의 혹사, 연료의 결핍, 염분 사점,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의 전란 등으로 점차 쇠약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문호 개방과 함께 중국 · 일본 등 인접 국가와의 통교와, 공무역 및 밀무역으로 다량의 수입 염이 횡행하였으며, 이 수입염은 우리나라의 전오식(煎熬式) 제조에 의한 소금보다도 값이 저렴했기 때문에 조선의 제염업은 더욱 쇠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같은 영세성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염업의 쇠퇴화는 비록 민생의 필수품으로 공급 수용면에서 조절의 필요성을 충분히 인정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과세의 목표물로서 세액 징수에만 급급하였다.
그런 나머지 상인의 유통기능을 활용하지 못한 채 상인의 참여를 배제한 것과 같은 정책의 빈곤과, 제염업기술의 발전적인 계발을 도모하지 못하였다. 아울러 제염 시설의 효율적인 개량이 없었기 때문에 국가의 기간산업으로뿐만 아니라 식료산업으로도 진흥되지 못하였다.
그 뒤 누대를 거쳐 고종 때에 이르러 모든 세제가 매우 문란해졌다. 따라서 염세 징수에도 과세의 계통 없이 매우 난잡하였으며, 이전의 염세 이외에 염분세[通過稅類]를 부과한다든가 또는 각 궁방이 염분에서 직접 소금을 징수하는 등 전대의 악폐가 부활되어 염세의 국가 수입은 현격하게 감소되었다.
이 염세는 갑오경장이 있던 1894년에 관제개혁으로 세제가 개정되었을 때 궁내부(宮內部)에서 해세(海稅)를 조사한 뒤 그 소속으로 하고 이를 수세하였다. 그러나 염세는 1906년 11월 칙령 제69호로 「염세규정」이 발포되매 이듬해 1월부터 시행하게 하고, 동시에 본령에 저촉되는 이전의 법령을 모두 폐지하였는데, 이로부터 제염업자는 허가를 얻고 가벼운 세금을 납부하면서 자유로이 제염업을 경영할 수 있게 되었으며, 또한 봉건적인 제도에서 해방되었다.
광복 이후 1962년 제염은 전매청(현 한국담배인삼공사)에서 완전 민영화되었다. 제염의 종류는 천일염(天日鹽) · 기계염(정제염) · 이온교환막식 전기투석조(電氣透析槽)에 의한 기계염, 천일염이나 수입원염(輸入原鹽)을 물에 용해시킨 후 정제여과(精製濾過)하여 기계 속에서 다시 결정시켜 만드는 것과 용해(溶解)함수를 평부(平釜)에서 결정시켜 인편상(鱗片狀, flake)의 재제염(再製鹽)을 하는 방법, 순도나 결정의 모양이 용도에 부적합한 것을 세척 · 분쇄 과정을 거쳐 가공염을 만드는 유형 등이 있다.
현재의 국내법에는 모든 제염업을 하고자 하는 사람은 일정 기준 이상의 생산시설을 갖춘 후 정부의 허가를 얻도록 되어 있고 그 생산염은 검사기관의 품질검사를 마친 후 판매할 수 있게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