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국권 상실의 위기감이 고조되던 시기 갑신정변, 갑오개혁, 독립협회운동으로 이어지는 개화 자강 계열의 운동을 계승하여 전개된 국권회복운동이다. 지식인들은 교육, 계몽, 언론 활동 등을 통해 우리나라 민족의 실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는 것을 목적으로 정치사회단체, 학회, 학교를 설립하여 애국계몽운동을 펼쳤다.
실력 양성과 문명 개화를 목적으로 한 계몽운동단체가 설립되기 시작한 것은 을사늑약이 체결되기 이전부터였다. 1904년 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이 대한제국 정부에 한일의정서 체결을 강압하여 우리나라를 일본의 보호국으로 만들려 하자, 국망의 위기를 느낀 지식인들은 보안회(保安會), 국민교육회(國民敎育會), 공진회(共進會),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 등 계몽운동단체를 설립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05년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이 체결되고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여 통감 정치가 실시되면서부터였다. 대한자강회를 시작으로 여러 계몽운동단체가 설립되고 각 지역을 기반으로 교육운동을 실시하기 위한 학회도 설립되었다.
애국계몽운동단체의 설립과 활동을 시기별, 내용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을사늑약 체결 이전에 설립된 계몽단체로는 보안회, 공진회, 헌정연구회, 국민교육회 등이 있었다.
보안회는 일제가 러일전쟁 중 우리나라의 전국 황무지 개간 점유권을 획득하기로 결정하고 대한제국 정부에 허가를 강요하자 이를 막기 위해 설립된 단체였다. 보안회는 1904년 7월 13일 서울 종로 백목전에서 송수만, 원세성, 양한묵 등을 중심으로 100여 명의 서울 시민들에 의해 설립되었다.
설립 직후 회원 수는 3,000명으로 증가하였고, 반대 집회와 가두 행진에는 약 5,000명의 회원과 시민들이 참가하여 일본의 요구에 반대하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처럼 우리나라 국민들의 격렬한 저항에 직면한 일제는 보안회의 운동이 전국적인 반일 운동으로 확대할 것을 염려하여 결국 황무지 개간권 요구를 철회하였다.
공진회는 1904년 8월 독립협회 관련자 일부가 중심이 되어,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결성하자 이에 반대하는 독립협회 관련자와 러일전쟁 발발 이래 반일적인 활동을 벌이던 보부상이 결합하여 12월에 설립된 단체였다.
공진회의 주요 활동은 계몽운동과 정부에 대한 시정 개선의 요구에 집중되었으며, 특히 관심을 기울인 것은 정부에 대한 시정 개선의 요구였다. 하지만 공진회의 시정 개선 요구는 제도적인 개혁보다는 탐관오리의 부패부정 척결과 궁정 잡배를 축출할 것을 요구하는 수준에 그쳤다.
공진회는 1904년 12월 25일 일진회의 활동을 비난하는 공개 연설회를 개최하고, 정부에 대해 황실의 권위를 지킬 것과 정부의 명령과 국민의 권리, 의무 등에 관해 건의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다. 공진회와 일진회의 대립이 격화되고 정부에 대한 요구도 거세지자 정부는 이준 등 공진회의 간부를 체포하였다.
공진회 지도부가 구속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가 발발하고 일진회하고도 충돌하였다. 결국 일본군의 개입과 탄압을 받은 공진회는 더 이상 활동을 이어 가기 어려웠고 1905년 2월 12일 해산 명령을 받고 해산되었다.
한편 1904년 8월에는 국민교육회가 결성되어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국민교육회는 1904년 8월 24일 이준, 이원긍, 전덕기 등을 중심으로 설립되었다. 1903년에 재조직된 상동청년회와 같은 해 설립된 황성기독교청년회 등 기독교 계열의 단체들을 중심으로 교육활동, 정치활동 등을 전개하고 있었으나, 정치활동이 아닌 교육에 중점을 둔 단체를 설립할 필요성을 느낀 지식인들이 국민교육회를 설립하였던 것이다.
헌정연구회는 1905년 5월 중순에 이준, 윤효정, 양한묵 등이 발기하여 5월 24일에 설립되었다. 헌정연구회 지도부와 회원들은 주로 독립협회와 공진회 계열의 인사들이었으며 국민교육회에서 활동하던 인물들도 있었다.
또한 주로 상소를 통하여 정치개혁을 주장하였던 개신 유학자 계열의 인사들도 대거 참여하였다. 이기, 이윤종, 홍필주 등 개신 유학자들로서 전통적인 유교 지식을 바탕으로 서양 문물의 수용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던 인사들이었다.
헌정연구회의 설립을 주도한 이준, 윤효정 등은 국권을 회복하고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정치단체의 결성이 필요하다고 여겨 설립을 추진하였으며, 세계의 대세인 입헌 체제를 갖추기 위해 헌정에 관해 연구하는 것을 설립 목적으로 삼았다.
즉 입헌 체제가 서구 열강의 부강의 근원이므로 전제군주국인 대한제국도 대세의 변화를 예비하여 헌법을 제정하고 입헌정치를 실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는 것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이후였다. 러일전쟁에서 승세를 굳힌 일본은 1905년 7월의 태프트-가츠라 밀약, 8월의 제2차 영일동맹을 체결하여 미국과 영국으로부터 한국의 지배권을 인정받았고, 9월에는 러시아와 포스머스 강화조약을 체결함으로써 러시아로부터도 우리나라에 대한 지도와 보호, 감리의 권리를 인정받았다.
이처럼 열강의 ‘승인’을 받은 일제는 11월 우리나라와 을사늑약을 체결하였다. 이듬해인 1906년 2월에는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가 통감에 취임한 직후 대한자강회가 설립되었다.
1906년 3월 31일 장지연, 윤효정, 심의성, 임진수, 김상범 등은 “나라의 독립은 오로지 자강 여하에 달려 있으므로 국권 회복을 위해 자강에 힘쓰자.”라는 취지에서 4월 14일에 임시회를 개최하고 회칙에 의거하여 임원진을 구성하여 대한자강회를 설립하였다. 대한자강회의 설립 목적은 다음과 같았다.
첫째, 자강회의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둘째, 자강회의 기본 인식은 대한제국이 국권을 빼앗기고 외국의 보호를 받는 지금의 어려운 처지로 전락하게 된 것은 바로 인민이 우매하고 국력이 쇠퇴하였기 때문이고, 인민의 우매와 쇠퇴는 다름이 아닌 자강 지술을 꾀하지 않은 데서 온 결과라는 것이다.
셋째, 그러므로 지금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국으로서의 면모를 갖추기 위해서는 자강 지술을 연구해야 하는데, 그 자강 지술은 다름 아닌 교육을 진작하고 식산을 꾀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교육이 불흥하면 민지가 미개하고 산업이 불식하면 국부가 늘지 못하니 민지를 개발하고 국력을 키우는 것은 교육과 산업의 발달에 달려 있다는 것이다.
넷째, 그러나 자강의 도가 성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이천만 민족이 단결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보고 온 민족이 하나가 되어 자강에 힘쓸 것을 강조하였다.
다섯째,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먼저 국민의 정신을 배양해야 하는데 단기 이래 4천년 자국의 정신을 이천만 모두의 뇌수에 흘러들어 가게끔하여 한순간이라도 자국의 정신을 잃지 않게 해야 한다. 이후에야 자강의 마음을 닦고 복권의 활기를 만들 수 있으므로 안으로 조국의 정신을 키우고 밖으로 문명의 학술을 흡수하는 것이 지금 시국의 급무라고 강조하였다.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가 1907년 8월 강제 해산된 3개월 후인 1907년 11월 10일 권동진, 남궁준, 여병현, 유근, 이우영, 오세창, 윤효정, 장지연, 정운복, 홍필주 등에 의해 설립되었다. 당시는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정미7조약의 체결, 신문지법과 보안법의 시행, 군대의 해산 등 일련의 일제의 주권 강탈 정책에 의해 합법적 테두리 내에서의 계몽운동이 더욱 위축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대한협회의 설립 취지를 살펴보면 먼저 사회진화론적 시각에서 당시를 생존 경쟁과 우승 열패하는 시대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관점은 우리 민족에 대한 자책과 자성으로 연결되어 지금 민족의 현실은 정치가 발전되지 못하고 교육과 산업이 뒤떨어졌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시대 상황에서 대한협회는 “정치 · 교육 · 산업을 강구하여, 사회 지식을 발달케 하고 신진 덕성을 도야하며 전국 부력을 증진케 하여, 이로써 참다운 국민적 자격을 양성코자 하는 것”을 단체 설립의 목적으로 설정하였다.
이처럼 대한협회의 계몽사상은 사회진화론에 기초한 현실 인식에서 출발하여 우리나라와 한민족의 자책과 자성론으로 연결되고 현실 극복을 위한 실력양성론으로 발전하였다. 대한협회는 실력양성을 위한 급무로 교육 진흥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애국정신과 실학정신의 고취를 교육의 목표로 설정하였으며, 의무교육의 보급 확대, 교육재정의 확충, 교과서 편찬 등의 실천 방안을 제시하였다.
또한 식산흥업(殖産興業)에 의하여 국부를 증진시키는 것을 자강 실현의 급무라고 인식하였다. 특히 상업과 농업을 중시하여 그 성격을 밝히고, 발달 방안을 제시하였다. 그리고 대한협회는 정치개혁에 의한 실력양성론을 전개하였다
다음 신민회는 안창호의 발기에 의해 1907년 4월 초 양기탁, 전성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설 안창호 등 7인과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회영, 이상재, 윤치호, 김구, 신채호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되었다.
미국에 있었던 안창호는 신민회를 설립하고자 1907년 2월 20일 서울에 도착하였고, 이후 평안도 일대를 돌면서 강연을 하고 그 지역의 지도자들과 접촉을 하면서 자신의 목적을 구체화시킬 준비를 하였는데 4월 초 비밀결사의 창립을 양기탁에게 제의하였다.
기존의 합법적인 단체와 학회가 다하지 못한 구국운동을 적극적으로 그리고 투쟁적으로 전개하려는 데 목적이 있었던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1907년 4월 초 양기탁의 주도로 이동휘, 전덕기,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인이 극비리에 회합하여 창건위원회를 열고 신민회를 창건하였다.
이들 계몽운동 단체 외에도 각 지역을 기반으로 한 학회가 설립되었다. 당시 학회들은 교육운동만을 추구한 것이 아니라 지역 단체의 성격을 띠며 일반 계몽운동에도 앞장섰다. 학회운동의 시작은 앞서 보았던 국민교육회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그러나 당시 국민교육회의 활동은 애국계몽 노선의 전개 상황과도 관련하여 크게 활발하지 못하였고 후에 설립된 학회들이 각 지역민을 대상으로 구체적 활동을 하였던 것에 비하여 기반이 다져지지 않은 상황에서 광범위한 대중을 대상으로 활동하였던 만큼 크게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학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한 것은 1906년 10월에 서우학회(西友學會)와 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가 설립되면서였다. 이후 많은 학회들이 설립되었는데 1907년 7월에는 호남학회(湖南學會)와 호서학회(湖西學會)가, 1908년 1월에는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가 서북학회(西北學會)로 통합하였다. 또 1908년 1월,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가, 1908년 2월에는 관동학회가, 3월에는 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가 설립되었다.
이들 학회의 활동은 1910년 8월 국권 피탈 때까지 계속되었는데, 그 동안의 모든 학회와 활동이 일치되게 전개된 것은 아니고, 설립 시기와 구성원, 설립 지역 등에 따라 그 활동성이 다르게 나타나고 있다.
애국계몽운동은 운동의 실천 방법, 내용과 성격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하기도 한다. 즉 민중계몽운동, 교육구국운동, 경제구국운동, 정치구국운동, 민족문화운동, 독립군기지 건설운동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애국계몽가들은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의 일환으로 신문 · 잡지의 발간 및 강연회 · 토론회의 개최, 그리고 학교교육을 통하여 민중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신문 · 잡지와 강연회를 통하여 ① 세계 정세와 조국의 현실을 알려 국민의 분발을 촉구하였고, ②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 양성의 필요성을 계몽하였으며, ③ 민권사상, 애국정신, 국민국가의식을 고취하였고, ④ 교육진흥, 식산흥업, 정치개혁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또한 그들은 국권 회복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하여 사립학교를 설립하도록 계몽하였다.
이와 같은 애국계몽가들의 민중계몽운동은 사회 일반에 애국심과 교육열 그리고 독립 의지를 일깨워서 다수의 지식인과 실업가, 그리고 민중들을 국권회복운동에 매진케 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의 민중계몽운동은 인민의 지식을 계발하고 경제력을 향상하여 민족의 실력을 양성함으로써 국권을 회복하는 데 그 목적을 두었다.
신문은 민중계몽의 가장 효과적인 방법의 하나였다. 당시의 신문은 국권을 수호하고 상실된 국권을 회복하려는 구국적 내용으로 채워졌다. 그 초점은 전근대적인 민중을 계몽하여 문명화된 근대적 국민으로 만들고, 민력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하려는 데 두었다.
이 시기 신문으로는 『 제국신문』(1898. 8. 10∼1910. 8. 2), 『 황성신문(皇城新聞)』(1898. 9. 5∼1910. 9. 14), 『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1904. 7. 16∼1910. 8. 28), 『 만세보(萬歲報)』(1906. 6. 17∼1907. 6. 29), 『 대한민보』(1909. 6. 2∼1910. 8. 31) 등이 있었다.
또 애국계몽 단체와 학회는 기관지 혹은 학회지로서 『대한자강회월보(大韓自强會月報)』, 『대한협회회보(大韓協會會報)』, 『서우(西友)』, 『서북학회월보(西北學會月報)』, 『기호흥학회월보(畿湖興學會月報)』, 『호남학보(湖南學報)』, 『교남교육회잡지(嶠南敎育會雜誌)』 등을 발간하였다.
애국계몽 단체들은 이러한 회지 및 학회지를 통하여 근대적 지식, 자신들의 주장을 회원뿐만 아니라 일반 민중에게도 알리고자 하였다. 애국계몽 단체들의 회지 내용은 그들 단체의 취지 · 목적 · 사업과 관련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대체로 일반논설 · 교육논설 · 식산논설과 국내외 정세와 사건에 관련된 기사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그 구체적 내용은 사회진화론 · 민권론 · 실력양성론 · 애국정신론 · 사회관습개혁론 등으로 특히 교육과 식산에 관한 내용을 중심으로 한 국권회복사상을 포함하고 있었다.
계몽 단체들은 신문, 잡지를 통해 교육의 필요성, 학교교육. 가정교육, 여성교육, 의무교육, 실업교육 그리고 상무교육의 중요성을 계몽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이 교육자강론과 함께 중요하게 다루었던 부분은 식산자강론이었다. 그들은 회지를 통하여 생존경쟁 · 우승열패의 국제사회에서 식산을 통한 국가 부강의 실현이 국권 회복의 길이라고 하여 경제구국의식을 계몽하였다.
애국계몽 단체들은 기관지와 학회지 외에도 『 소년』, 『 조양보(朝陽報)』, 『가뎡잡지』, 『자선부인회회보』, 『 여자지남』, 『 소년한반도(少年韓半島)』, 『대동보(大同報)』, 『 교육월보(敎育月報)』 등의 일반 잡지를 발행하여 국민의 독립정신을 고취시키는 데 기여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은 신문과 잡지를 통한 민중계몽운동뿐만 아니라 강연회, 연설회. 토론회를 통하여 국권 회복을 위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강연, 연설, 토론 등은 각종 단체가 주최하는 통상회, 강연회, 토론회와 학교 운동회 등에서 실시되었다. 주요 내용은 애국심의 고취, 신지식, 신사상 · 신산업을 통한 실력의 양성,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둘째, 교육구국운동은 계몽운동가들이 국권 회복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인 동시에 효율적인 실천 방법으로 여겼던 실력양성운동이었다. 1900년대 초 지식인들은 상동청년회, 황성기독교청년회와 같이 선교사나 교회와 연계하여 선교 활동과 교육계몽운동을 함께 추진하였다.
이후 이준, 이원긍, 전덕기 등이 중심이 되어 국민교육회를 설립하였고 을사늑약 이후에는 대한자강회 등 계몽 단체들과 각 지역을 기반으로 설립된 학회들이 설립되어 본격적으로 교육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하여 대한자강회와 대한협회 및 신민회 등 애국계몽 단체들은 각급 학교를 설립하고 거기에서 사용할 교과서를 편찬하여 일반교육을 비롯하여 실업교육, 상무교육에 힘을 기울였다. 즉 지식인들은 교육을 진작시키기 위해 전국 각지에 학교를 설립하는 일을 서둘렀다.
러일전쟁 이후 일제의 식민 통치의 일환으로 식민교육정책을 수립하였고, 이러한 식민교육은 관공립학교를 통하여 추진되었으므로, 지식인들은 이에 맞서 사립학교를 설립하여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선구적 애국계몽학회인 국민교육회는 일반국민의 교육, 곧 보통교육의 발달에 설립 목적을 두고, 학교 설립과 서적 편찬에 노력하였다. 국민교육회는 보광학교(普光學校), 한남학교(漢南學校), 국민사범학교(國民師範學校) 등을 설립하였다.
또 학회에서도 일반적인 계몽, 학술 활동뿐만 아니라 학교를 설립하여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북흥학회는 한북의숙(漢北義塾)을, 서우학회는 사범양성을 위한 서우학교(西友學校), 서북학회는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를 설립하여 인재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신민회 관련 인사들도 여러 지역에 학교를 설립하여 교육운동을 전개하였다. 안창호는 평양에 중등교육기관으로 대성학교를 설립하여 민족운동의 간부 양성과 국민교육의 사범 양성을 목적으로 하여 지식 계발뿐만 아니라 애국정신과 상무정신의 고양에 힘썼다. 이승훈은 평안북도 정주(定州)에 오산학교를, 이동휘는 강화에 보창학교를 설립하였다.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노력으로 1906년에서 1909년 사이 전국적으로 2천여 개가 넘는 사립학교가 설립되어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이 실시되었다. 일제는 한국인에 의한 민족교육을 저지하기 위해 1908년 8월 「 사립학교령」과 「 학회령」을 공포하여 사립학교를 탄압하기 시작하였다.
또 지식인들은 근대교육과 민족교육에 필요한 교과서를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교과목으로는 국사와 국어 등이 중시되었다. 그리하여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교육을 실시하면서 국사와 국어가 교과과정에 편성되었다.
또 러일전쟁 이후 국망의 위기의식이 팽배하면서 애국사상 및 독립사상 고취하는 데 국사교육이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한 지식인들은 국사 및 국어교과서를 저술, 편찬하는 데에도 힘을 기울였다.
이러한 한국인들의 교육열을 막기 위해 통감부는 학부에 일본인을 배치하여 교육과정과 교과서 등 교육정책 전반을 장악하고 식민교육정책을 실시하려 하였다. 통감부는 식민교육정책의 일환으로 일문교과서(日文敎科書)를 편찬하려고 계획하였다.
일본인 학부 참여관 시데하라 타이라〔幣原坦〕가 일문(日文)으로 초등 및 중등 교과서를 편찬하려 하자 한국 지식인, 언론은 일문교과서로 교육하는 것은 우리나라의 정신을 소멸시키려는 것이라고 하여 반대하는 입장을 밝히고 학부대신에게 강력하게 항의하였다. 이와 같은 반발에 통감부는 일문교과서 편찬을 철회하였다.
일제는 1908년 ‘사립학교령’과 ‘교과용도서검정규정’을 공포하여 민족교육의 실시를 막고 민족의식을 고취하거나 반일 사상을 심어 줄 만한 내용이 실린 사찬교과서 저술, 편찬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당시 사찬교과서 저술, 편찬자로는 현채, 장지연, 안국선, 신채호, 유근, 정인호, 원영의, 안종화, 김우식, 박정동 등이 있었다. 이들 저자는 국어독본, 국사, 수신, 지리 등 민족의식을 고취할 수 있는 교과목을 중심으로 교과서를 저술, 편찬하였다.
현채는 『보통교과동국역사』, 『 동국사략』, 『만국사략』 등 역사교과서와 『 유년필독(幼年必讀)』, 『 유년필독석의(幼年必讀釋義)』, 『 대한지지(大韓地誌)』 등을 저술하였다. 또 『청국무술정변기』, 『 월남망국사』등을 번역하여 타국의 역사를 통해 애국심과 민족의식을 고취하고자 하였다.
안국선은 『 금수회의록』, 『정치원론』, 『비율빈전사(比律賓戰史)』 등을 저술, 편찬하였고, 장지연은 『 대한신지지(大韓新地誌)』, 『 여자독본』, 『 애급근세사(埃及近世史)』 등을 저술, 번역하였다.
학교와 교육계몽 단체도 독자적으로 교과서를 저술, 편찬하였다. 사립학교 휘문의숙은 『 고등소학수신서』, 『 중등수신교과서』등을 저술, 편찬하였고, 국민교육회에서는 『 대동역사략』, 『신찬소박물학』, 『 초등소학』, 『신찬소물리학』, 『초등지리교과서』 등을 발행하였다. 유길준이 이끌던 흥사단에서도 『 초등본국약사』, 『 초등본국지리』 등의 교과서를 간행하였다.
한편 민간에서 민족교육의 실시를 목적으로 교과서 편찬이 널리 확산되면서 교과서 편찬과 배포를 목적으로 한 출판사도 등장하였다. 1906년 4월에 설립된 광학사(廣學社)는 동서의 서적을 참작하고 우리나라의 성질을 절충하여 초등교육에서 고등교육에까지 널리 쓰일 교과서를 편찬하였다.
신민회는 1908년 평양에 태극서관(太極書館)을 설립하여 서울에 지점을 두고 경향 각지의 학교에 각종 서적과 교과서를 공급하였다. 태극서관은 『 삼국사기』, 『 동국통감』, 『 택리지』 등 고전 서적과 각급 학교에서 교과서로 사용하였던 『 한문독본』, 량치차오〔梁啓超〕의 『음빙실문집(飮氷室文集)』 등을 취급하였다.
애국계몽가들은 국민교육, 보통교육을 위한 의무교육 실시 운동을 펼치는 한편 국부, 민강을 목적으로 한 실업교육을 실시하고자 하였다. 또 국권을 회복하기 위한 무력 투쟁을 대비하여 상무교육을 중시하였다.
셋째, 경제구국운동이었다. 계몽운동가들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요인 중 하나가 식산(殖産) 부진에 따른 국가의 빈약이라고 파악하여 교육구국운동과 함께 식산흥업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식산흥업 활동이 현실적으로는 일제의 경제적 침탈을 억제하고, 교육진흥에 필요한 경제적 토대를 마련하는 것이며, 궁극적으로는 국가의 부강을 통한 국권 회복의 기초가 된다고 인식하였다.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당시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대응하여 민족의 경제적 자립을 추구하는 경제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였다. 즉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반대하는 운동을 전개하고 국채보상운동을 펼쳤으며, 민족 자본을 육성하여 민족자립경제를 건설하려 시도하였다. 경제구국운동을 사안별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①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한 반대 운동 일본은 1904년 6월 대한제국 정부에 황무지개간권을 요구하였는데 그 구체적인 내용은 토지개간권, 토지의 이용수익권을 50년 기한으로 일본인에게 위임한다는 것이었다. 이는 우리나라 전체 황무지의 개간, 정리, 척식 등 일체의 경영을 통해 얻어지는 광범위한 수익권을 포함하는 것으로, 전 국토의 30%에 해당되는 황무지를 무상으로 강탈하려는 요구였던 것이다.
이러한 일제의 황무지개간권 요구에 대해 1904년 7월 전 중추원 의관 송수만, 심상진 등은 서울에서 보안회를 조직하여 반대 운동을 펼쳤다.
보안회는 서울 종로의 백목전(白木廛) 도가(都家)에서 집회를 열어 개간권 요구를 공개적으로 반대하고 일본과 교섭을 담당했던 외부대신 이하영을 성토하였다. 보안회의 황무지개간권 반대 투쟁은 일제의 경제적 침략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던 민중들의 참여로 전국적인 반일 운동으로 확대되었다.
일제는 우리나라 국민들의 개간권 반대 운동에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1904년 7월 20일 서울 내외에 군사경찰제를 실시하고 치안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집회를 금지시켰다. 또 황무지개간권에 반대하는 신문의 발행을 정지시키고 반대 운동을 주도한 보안회 간부들을 체포 구금하는 등 강압적인 방법으로 반대운동을 저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보안회를 중심으로 한 국민들의 격렬한 투쟁의 결과 일제는 황무지개간권 요구를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
② 국채보상운동의 전개 한말 일제는 대한제국 정부에 막대한 차관을 대여하여 우리나라 경제를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정책을 추진하였다. 즉 일제는 1905년 을사늑약 체결 이후 시정개선(施政改善)이라는 명목으로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으로부터 대규모의 차관을 도입하도록 강요하였다. 그리하여 1905년 한 해만도 일본으로부터 650여 만 원의 차관이 도입되었고, 1907년 2월까지 대한제국이 일본으로부터 짊어진 외채는 모두 1,300만 원에 달하였다.
이에 일본에 대한 경제적 예속에서 벗어나기 위해 국민의 힘으로 국채를 갚자는 국채보상운동이 시작되었고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국채보상운동은 1907년 2월 16일 대구 광문사(廣文社)에서 사장 김광제, 부사장 서상돈 등 10여 명이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국채일천삼백만원보상취지서(國債一千三百萬圓報償趣旨書)’를 전국에 발송하면서 시작되었다.
국채보상운동 지도부는 ‘취지서’에서 국고로 상환할 수 없는 국채 1,300만 원을 국민 된 의무로서 갚아 국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며, 그 방법으로 이천만 인민이 3개월 동안 담배를 끊고 그 대금으로 1인당 매달 20전씩을 거두어 1,300만 원을 갚자는 단연(斷煙)에 의한 모금을 제시하였다.
국채보상운동 ‘취지서’가 발표되자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보』, 『제국신문』, 『만세보』 등 언론에서도 이를 적극적으로 홍보하여 전국 각계 각층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국채보상운동 결과 1907년 4월말까지 4만여 명의 국민이 모금에 참여하였고, 5월 말까지 230여 만 원의 기금이 모금되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러나 국채보상운동은 통감부가 배일 운동으로 간주하고 탄압하여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넷째,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정치적 구국운동을 전개하였다. 일본은 1905년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고 통감부를 설치한 후 통감 정치를 실시하였다. 이후 통감부는 대한제국의 외교권뿐만 아니라 내정까지 장악해 갔다.
1907년에는 헤이그특사사건을 빌미로 고종 황제를 강제로 퇴위시키고 우리나라 군대를 해산시켰으며, 1910년에는 결국 대한제국을 강제 병합하였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이러한 일본의 국권 침탈에 맞서기 위해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을사늑약 반대 운동, 고종 양위 반대 운동, 한일 강제 병합 반대 운동을 펼쳤다.
① 계몽운동 단체의 을사늑약 반대 운동 1905년 11월 을사늑약 체결 후 황성기독교청년회, 상동청년회, 국민교육회, 동아개진교육회, 대한구락부, 공진회, 헌정연구회 등 계몽 단체들은 일본의 보호 정치에 찬성하는 일진회를 규탄하며 반일 운동을 전개하였다.
또한 『황성신문』, 『제국신문』, 『대한매일신보』등 언론에서는 을사늑약 체결의 무효를 주장하며 경향 각지의 조약 반대 운동을 상세히 보도하였다. 황성신문사 사장 겸 주필이었던 장지연은 「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통하여 일제의 침탈을 비난하고 을사늑약에 찬성한 대신들을 비판하여 민족적 분노를 일으켰다.
『대한매일신보』는 죽음으로써 일제에 항거한 민영환과 조병세의 순국을 찬양하고, 그 유서 전문을 신문에 공개하여 항일 의식을 고취하고 국권 회복에 매진할 것을 호소하였다. 애국계몽언론을 통한 이들의 순국 소식은 온 국민의 반일 감정을 격화시켰다.
②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반대 운동 1907년 고종은 을사늑약의 강제성을 국제여론에 호소하고자 이상설, 이준, 이위종 3명의 특사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만국평화회의에 파견하였다. 1907년 6월 25일 헤이그에 도착한 특사 일행은 외교 활동을 펼치며 우리나라 대표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열강은 대한제국에 외교권이 없다는 이유로 사절단의 회의 참석과 발언권을 거부하였다. 이에 특사 일행은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등 각국 대표들을 만나 협조를 구하려 했으나 역시 이루지 못한 채 만국기자협회에서 일본의 대한제국 침략상과 을사늑약의 강제성을 폭로하는 데 그치고 말았다.
일제는 헤이그 특사 파견을 이용하여 대한제국의 내정에 관한 전권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고종 양위와 통감의 동의에 의한 행정, 대신 및 차관 등 주요 관직에 일본인 임명 등을 실현할 방안을 통감 이토 히로부미에게 훈령하였다. 통감은 고종에게 밀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하며 고종의 양위를 강박하였다.
통감 이토로부터 책임 추궁을 받은 이완용 내각이 고종의 양위를 요청하자 7월 16일경부터 대한자강회, 대한구락부, 기독교청년회, 국민교육회의 회원을 비롯한 서울 시민 수천 명이 궐기하여 종로에서 민중대회를 열고 대한문 앞에서 일본 경찰과 충돌하였다.
또 7월 19일 황태자가 대리청정한다는 소식을 들은 대한자강회 등 계몽 단체 회원들은 종로에서 대중 시위를 조직하여 내각대신들을 성토하고 결사회를 구성하여 일진회 기관지인 국민신보사(國民新報社)를 습격하였다.
고종 황제의 강제 퇴위 사건을 계기로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의 정치 및 교육운동은 언론과 출판을 통한 계몽운동 형태에서 국권 수호를 위한 대중 시위 형태로 전환되었다. 통감부는 대한자강회를 비롯한 계몽운동 단체의 반일 시위를 탄압하고 강제 해산시켰다.
③ 강제 병합 반대 운동 일제는 대한제국을 병합하기 위해 항일의병운동을 진압하는 한편 친일 단체인 일진회를 이용하여 병합을 찬성하는 여론을 조성하려 하였다. 일제의 의도에 따라 일진회의 이용구와 송병준은 국권피탈을 추진하기 위해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제휴하려 하였다.
대한협회와 서북학회는 일진회와 달리 반일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었으나, 당시 이완용 내각에 대해서는 공통적으로 반감을 가지고 내각의 퇴진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진회는 대한협회, 서북학회와 제휴하고 이를 이용하여 합방을 주도하려 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일진회의 계획에 서북학회는 응하지 않았다.
1909년 9월 초부터 대한협회와 일진회의 제휴가 시작되었으나,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후 일제는 병합을 서둘렀다. 일진회는 이러한 정세 변화에 따라 대한협회와 공동으로 한일합방 성명서를 발표하려고 했지만 대한협회가 거부하자 12월 4일 단독으로 국권피탈 성명서를 발표하고, 정부와 통감에게 국권피탈 청원서를 제출하였다.
대한협회는 12월 4일 일진회와의 분립을 선언하고 일진회의 국권피탈 성명을 반대 성토하였다. 12월 5일에 대한협회, 한성부민회(漢城府民會), 국시연설단(國是遊說團), 흥사단 등 정치사회 단체의 회원들은 임시국민대연설회(臨時國民大演說會)를 열고 일진회의 국권피탈 성명과 매국 행위를 비판하였다.
또 대한협회는 기관지인 『대한민보』의 기사를 통해 일진회를 성토하고, 일진회의 국권피탈 성명에 관망적 태도를 취하는 이완용 내각를 비판하는 등 국권피탈 반대 감정을 고무하였다.
다섯째, 애국계몽운동을 추진하던 지식인들은 국학(國學) 연구와 교육을 통한 민족의식을 고취하려 하였다. 즉 애국계몽가들은 민족의 위기를 극복하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근대적 지식 수용뿐만 아니라 국학을 연구하고 교육시키는 노력을 기울였다.
애국계몽가들의 국학에 대한 관심은 국어국문과 국사 연구에 초점이 맞춰졌다. 그들은 국어국문의 연구와 그 대중적 보급운동에 앞장섰으며 국사를 연구하여 근대적 민족역사학(民族歷史學)의 수립에 기여하였다.
또한 한말의 천도교(天道敎)와 대종교(大倧敎)는 민족적 종교의 성격을 띠고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에 기여하였고, 기독교도 민족의식과 결합하여 애국계몽운동에 기여하였다.
이처럼 민족문화운동은 국어국문과 국사 등 국학을 연구하고 민족적 종교를 육성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고 국권을 회복하여 독립국가를 수립하려는 애국계몽운동의 일환으로 전개되었다.
여섯째, 계몽운동가들 중 일부는 국내에서 전개하였던 실력양성운동의 한계를 인식하고 국외에서 독립군을 양성하여 국권을 회복한다는 독립전쟁론을 주장하고 독립군기지 건설운동을 추진하였다. 즉 일제가 병합 정책을 추진해 가자 계몽운동가들은 실력양성운동과 같이 합법적 운동만으로 국권을 회복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무장투쟁을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계몽운동 단체 중 하나였던 신민회는 합법적 실력양성운동을 전개하는 동시에 비밀결사로서 간부들을 중심으로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일제에 대한 무력투쟁을 준비하였다.
애국계몽운동은 교육운동과 계몽운동을 통해 일반 민중의 실력을 양성하고 민족의식을 고취하는 성과를 거두었고, 이는 이후 민족해방운동의 밑바탕이 되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할 수 있다.
하지만 애국계몽운동의 한계점 역시 지적할 수 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했던 계몽운동가와 지식인들은 사회진화론을 수용하여 당 시대를 생존경쟁과 약육강식의 시대로 인식하였다.
이러한 현실 인식을 바탕으로 국권 회복의 방법으로 실력양성을 채택하였지만, 일부 인사들은 국권 상실의 원인을 제국주의적 침탈이 아닌 문명개화를 이루지 못한 대한제국 내부의 문제로 파악하여 일부 계몽운동가들은 일제에 타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