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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량형(度量衡)

과학기술개념용어

 길이·부피·무게 및 이를 측정하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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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길이·부피·무게 및 이를 측정하는 도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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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역닫기영역열기개설
도량형은 길이·부피·무게 및 이를 측정하는 도구인 자(尺)·되(升)·저울(衡) 등을 말한다. 이것은 인간의 공동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기준이었기 때문에 이를 제도화할 필요가 있었다. 도량형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이에 대한 정확한 해답은 없지만, 인류가 어느 시점부터 여러 가지 사물을 수량적으로 파악하였을 것이다. 수와 양의 개념을 병행하여 사용한 것은 인간의 필요와 지혜에서 비롯되었을 것이지만, 그것은 갑자기 사용된 것이 아니고, 선사시대부터 대단히 오랜 기간 서서히 준비되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도량형 단위와 유사한 중국은 계량법을 사용하기 시작한 것은 『大戴禮記』에 의하면 황제(黃帝)가 ‘五量을 만들고’란 기록에 근거하여 이때부터라고 하기도 하고, 『상서』에 근거하여 ‘시월정일을 맞추고 율도량형을 통일했다’란 기록에 근거하여 표준량을 제정하여 국가적으로 통일된 도량형을 실시한 것은 순제(舜帝) 때부터 시작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시기의 도량형은 동률도량형이라고 말할 뿐 그 표준량의 크기와 단위가 어떠하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다만 『한서』 율력지에 의하면 길이의 표준은 황종율관의 길이로 하였음을 알 수 있는데, 그것을 90분, 10분을 1촌, 10촌을 1척으로 하였다. 1.62입방촌의 부피를 1홉(합), 10홉을 1승, 10승을 1두, 10두를 1곡, 2분의 1홉을 1약, 1약은 810입방분으로 황종율관의 용적과 같다 하여 도량형의 표준이 음율관에서 생겼음을 밝히고 있다. 따라서 중국은 계량법에 근거하여 점차 통일된 도량형을 제도화하였음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오늘날 세계 도량형의 통일된 단위인 미터법은 프랑스에서 시작되었다. 미터법의 길이 표준은 지구의 자오선 4천만분의 1로 정하여 1799년 프랑스 표준척으로 공포한 후 프랑스의 끈질긴 노력에 힘입어 국제적인 길이 표준으로 제정된 1m척이다. 이 길이를 기준하여 만든 1,000㎤의 섭씨 4도의 물 무게를 질량으로 표준으로 정하였다. 이 두 가지 표준량을 기준하여 십진법으로 만들어진 보조단위제도를 미터법이라고 한다.
영역닫기영역열기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도량형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도량형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여러 자료에 ‘寸·尺·長·匹·里·斤·斗·石·刀·苫’ 등의 다양한 용례가 기록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나름의 체계화를 갖추고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척의 길이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의 유적과 유물의 실측을 통한 연구와 최근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밝히고자 하였다. 첫째는 대표적으로 고구려의 평양 청암리 절터, 신라의 황룡사지·첨성대·석굴암·석가탑, 백제의 미륵사지 석탑·왕궁리 석탑 등 유적지의 실측을 통해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한척(22.44cm)·고한척(26.7cm)·당대척(29.7cm)·고구려척(35.5cm) 등이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둘째는 황복사 사리함기의 명문에 기록된 기록과 유물의 실측을 통해 신라는 한척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다. 셋째는 최근 고고학의 발굴 성과를 이용하여 경기도 하남시 이성산성에서 출토된 당대척(29.8cm ; 사진)과 한척(23.7.cm)을 1척 5촌화한 고구려척(35.6cm ; 사진)이 사용되었다고 이해하는 입장, 충남 부여시 쌍북리 유적에서 출토된 척(29.0cm ; 사진) 등이 삼국시대에 사용되었다고 하였다. 따라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는 시기 및 국가에 따라서 한척(약 23cm), 고구려척(약 35.6cm) 및 당대척(약 29.7cm) 등의 다양한 길이를 가진 척이 사용되었다.
양기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실물이 현재까지 발견된 사례가 없지만 다양한 용기들인 합(合)·승(刀·升)·두(抹·斗)·석(苫·石) 등이 사용되었다. 양기의 기준은 승이었다. 승의 부피가 어느 정도인가를 알 수 있다면 전체 양기의 부피를 이해할 수 있다.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승의 부피는 기존 연구에서 문무왕 21년(681)를 기준으로, 그 이전은 약 198.81㎖(약 0.2ℓ)이었고 이후는 약 3배 증대된 596.42㎖(약 0.6ℓ)이었다고 하였다. 하지만 삼국시대 1승의 부피는 김해 양동고분에서 출토된 동정을 고려할 때 기존의 연구처럼 약 0.2ℓ이었고, 통일신라시대 1승의 부피도 성덕왕 때 기아 상태에 있는 백성들에게 하루 3승이 지급되는 곡식의 양을 고려할 때 약 0.2ℓ였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1승의 부피는 약 0.2ℓ였는데, 이는 중국 한나라의 1승의 부피와 같다.
무게를 측정하는 저울은 삼국시대의 유적지에서 추와 ‘一斤’이라고 새겨진 돌로 만든 거푸집 등이 발견되었는데, 이를 통해 저울의 활발한 사용을 유추할 수 있다. 하지만 1근의 무게를 유추하는 것은 쉽지 않다. 중국은 1근의 무게가 한나라 때와 당나라 때에 차이가 많았다. 무게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에 큰 차이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통일신라 혜공왕 7년(771)에 제작된 성덕대왕신종은 구리 12만근이 사용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1근의 무게는 중국 한나라처럼 약 250g 내외인 것으로 유추된다. 따라서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 1근의 무게는 약 250g 정도임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고려시대의 도량형
고려시대의 도량형은 정종(靖宗) 6년(1040) 유사에게 명하여 權衡과 平斗量을 정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 때 새롭게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비탕으로 정종 12년에는 매년 봄과 가을 2회에 걸쳐 중앙의 경시서와 지방의 계수관에서 도량형기를 검사하여 부정행위를 막고자 하였고, 무신정권기에는 평두량도감을 설치하여 도량형의 부정행위를 감독하였다.
고려시대 척의 길이는 통일신라시대에 사용된 당대척을 계승하였다. 그것은 고려초기 금석문 자료인 청주 ‘龍頭寺幢竿記’에 30段(1단=63cm)의 철통으로 60尺의 기둥을 세웠다는 것과 ‘太平十年(현종 21, 1030)銘鐘’에 종의 높이가 2尺 4寸 2分(74.2cm)이라는 기록을 고려할 때 이들의 기준척이 각각 31.5cm와 30.66cm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시대 현존 건축물인 부석사의 조사당, 봉정사의 극락전, 수덕사의 대웅전, 강릉의 객사문 등의 실측에 의하면 기준척이 모두 약 31cm이고, 북한지역에 있는 고려유물인 개성 만월대, 장안사 대웅보전, 개성 현화寺 7층 석탑 등에도 31cm의 기준척이 사용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고려시대의 척의 길이는 통일신라시대 당대척보다 약간 늘어난 약 31cm임을 알 수 있다.
고려후기에는 양전용으로 지척(指尺)이 사용되었다. 지척은 성인 농부의 2지(식지·장지)와 3지(식지·장지·무명지) 등의 폭을 기준하여, 2지는 약 4.5cm, 3지는 약 7cm로 추정하였다. 이를 기준으로 상등전 20지의 양전척은 38.71cm, 중등전 25지의 양전척은 48.49cm, 하등전 30지의 양전척은 58.27cm로 환산하였다. 지척은 수등이척(隨等異尺), 즉 토지의 비옥도에 따라 다른 기준척, 즉 양전척이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1승의 부피는 어느 정도였을까? 고려시대도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처럼 현재까지 단위 양기들이 발견된 사례는 없다. 고려시대의 각 양기들의 부피는 추정할 수밖에 없다. 위에서도 언급의 것처럼 고려시대의 도량형은 정종 6년에 새롭게 제정되었기 때문에 이 때 1승의 부피에 변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문종 7년(1053) 내외관의 斛斗式을 제정한 것은 아주 주목된다. 이때 제정된 곡두식으로 米斛은 길이·넓이·높이가 1尺 2寸이고, 稗租斛은 각각 1尺 4寸 5分이고, 末醬斛은 1尺 3寸 9分이고, 大小豆斛은 각각 1尺 9分이었다. 이들의 용적비를 구하면 다음의 과 같다.
이러한 곡물의 용적을 달리 설정한 것은 미곡 1곡에 대한 가격차를 고려한 것이다. 문제는 米斛이 大小豆斛의 가격보다 낮게 책정되었다는 점이다. 조선초기만 하여도 水田의 糙米는 旱田의 黃豆의 가격보다 2배 이상의 가치를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중국의 사례, 『九章算術』 斛斗式의 容積比도 米斛:菽沓麻麥斛:粟斛은 1:1.5:1.66이었다. 중국의 경우 고려와 곡물의 종류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米에 대한 折價에서 粟이나 大·小豆의 비율은 비슷하였을 것이다. 고려의 경우 대소두곡의 ‘1尺 9分’은 기록에 약간 오류가 있었음을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문종 7년의 곡두식은 米穀의 石(斛)을 기준으로 여타 곡물의 가격을 책정하였을 것이므로, 斛斗式을 통해 승의 부피는 343.19, 즉 약 0.34ℓ이다. 고려시대 1승의 부피는 삼국 및 통일신라시대보다 크게 증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 1근의 무게는 고려 靖宗 6년에 양제와 함께 변화가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것은 정종대 이후에 제작된 유물인 飯子·禁口·鐘 등의 무게를 측정하여 볼 때 근사치가 중국 唐·宋代와 비슷하게 나타난다. 따라서 고려시대 1근의 중량은 당·송대처럼 약 630g 내외인 것으로 추측된다. 이러한 1근의 중량은 조선전기까지 변화 없이 계속 유지되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조선시대의 도량형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관련 자료와 유물들이 현재까지 많이 남아 있어서 그 실체를 해명하는데, 이전시기보다 매우 용이하다.
먼저 척의 종류와 길이에 대해 살펴보자.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經國大典』에 의하면 ‘諸司·諸邑의 도량형은 本曹에서 제조하고, 여러 邑에 소용되는 것은 여러 도에 하나씩 내려 보내어서 관찰사로 하여금 제도에 따라 평교와 낙인을 한다. 개인이 만든 것은 매년 추분일에 서울에서는 平市署, 지방에서는 巨鎭에서 평교와 낙인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고, 『대전회통』에서도 부분적으로 추가된 내용이 있지만 비슷하다. 이로 볼 때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본조, 즉 工曹에서 제작하기도 하지만, 개인적으로도 제작되었고, 개인적으로 제작한 경우 매년 추분 일에 중앙의 평시서와 지방의 큰 진에서 각각 검인하였음을 알 수 있다.
도량형의 기준은 척이다. 척을 이용하여 量器와 衡器를 제작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척은 『조선왕조실록』을 비롯한 여러 자료에 의하면 건국초기부터 다양한 명칭과 내용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를 고려할 때 조선전기부터 상당히 많이 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전기에 제작된 척은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대부분 소실되었기 때문에 실제 현존하지 않고, 현전하는 것은 조선후기에 제작된 것이다.
조선시대 척의 종류와 길이에 대해서는 『經國大典』에 의하면 ‘길이의 제도는 10를 1分으로, 10분을 1寸으로, 10촌을 1尺으로, 10척을 1丈으로, 周尺을 黃鍾尺에 비교하면 주척 1척은 황종척의 6촌 6리이고, 營造尺을 황종척에 비교하면 영조척 1척은 황종척의 8촌 9리이고, 造禮器尺을 황종척에 비교하면 조례기척 1척은 황조척의 8촌 2분 3리이고, 布帛尺을 황종척에 비교하면 포백척 1척은 황종척의 1척3촌4분8리이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척은 10釐가 1分, 10分이 1寸, 10寸이 1尺, 10尺이 1丈을 단위로 하고, 종류는 기준척인 황종척과 周尺·營造尺·造禮器尺·布帛尺을 黃鍾尺 등이었다. 따라서 조선시대 척의 종류는 黃鍾尺, 周尺, 營造尺, 禮器尺, 布帛尺 등이 존재하였고, 황종척의 길이를 알면 다른 척의 길이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유추할 수 있다.
黃鍾尺의 제작은 世宗 7년 經筵講義를 통해 황종척을 이해한 왕이 옛 중국 음악과 도량형의 관련성에 대해 감탄하고 藝文館 柳思訥과 集賢殿 鄭麟趾, 奉常寺判官 朴堧, 京市署主簿 鄭穰 등에게 명하여 黃鍾尺을 만들게 하고 구악을 정돈케 하였다’고 하는 기록을 통해 볼 때 세종 7년에 정비의 단서가 마련되었음을 알 수 있고, 세종 15년 해주의 秬黍의 모양을 가지고 蠟을 녹여 다음으로 큰 낱알을 만들어서 分을 쌓아 관을 만들었는데 그 모양이 우리나라 붉은 기장의 작은 것과 꼭 같았다. 곧 한 알을 1분으로 삼고 10알을 1촌으로 하는 법을 삼았는데, 9촌을 황종의 길이로 삼았으니 곧 90분이다. 1촌을 더하면 황종척이 된다’고 기록하고 하였다. 따라서 황종척은 세종 15년에 이르러 해주산 기장을 이용하여 교정하였음을 알 수 있다.
황종척은 현존하는 황종척의 실물을 통해 길이를 추정할 수 있는데, 창덕궁 소장 황종척은 사각으로 된 鍮尺으로 제작된 솜씨가 매우 정교하며 다른 면에 주척·조례기척·영조척·포백척 등이 새겨 있다. 조선시대 다섯 표준척을 한 개의 사각기둥에 적절히 배치한 것은 관에서 척을 제작하여 관청과 각 지방에 보급하기 위한 것이다. 사각 鍮尺의 황종척은 제작 시기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관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는 점에서, 다른 어떤 척의 길이보다 신빙성이 높다. 또 다른 창덕궁 소장 유척인 황종척은 ‘戶曹 黃鍾尺’이라는 글이 쓰여 있는데, 이도 관에서 제작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따라서 양 황종척은 半尺이 171.76mm·173.04mm로 각각 측정되었으므로 1척의 길이는 각각 343.52mm·346.08mm이다. 황종척의 길이는 약 34.48cm 정도였다.
주척은 조선전기 各品과 庶人의 墳墓 步數를 산정하는데 사용한 것을 비롯하여 훈련장 교장의 거리 측정·세공마 크기 측정·무덤의 穿壙·測雨器 製造·양전을 위한 隨等周尺 등으로 아주 다양하게 사용되었다.
주척의 길이는 창덕궁 소장의 사각유척, 鍮尺과 함께 고려대 박물관 소장품인 柳磻溪遺品周尺 등이 주목된다. 사각유척의 주척은 ‘周尺准黃鐘尺長六寸六里’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이들 주척은 제작시기를 알 수 없지만 약간의 오차가 있지만 20.5~7cm의 범위에 있고, 특히 유척 주척의 20.46~20.64cm와 아주 미세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주척은 책에 도면으로도 많이 그려져 있는데, 특히 『전제상정소준수조획』의 도본에 20,6cm라는 점은 주목된다. 주척은 길이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고 있고, 특히 제작 시기를 알 수 없는 문제점은 있지만 관에서 제작된 점을 고려한다면 이를 통한 주척의 길이를 유추할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주척의 길이는 약 20cm에서 오차가 있겠지만 약 20.6cm 정도로 유추된다.
營造尺은 건물·산릉의 축조·양기의 제작 등에 기준척으로 사용되었다. 영조척의 제작 시기는 알 수 없지만 실물 길이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임란 이후에는 임전이전에 제작된 모든 척들이 없어졌다는 것을 고려한다면 현재 남아있는 실물 영조척들은 모두 조선후기 이후에 제작된 것일 것이다. 주목되는 것은 영조척 실물의 길이가 거의 대다수 31cm보다 짧은데, 창덕궁 소장의 사각유척은 반척으로 154.38mm인데 ‘營造尺’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고, 또 다른 창덕궁 소장의 유척은 반척으로 151.41mm인데 ‘戶營造尺’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다. 도본 영조척의 실측길이는 실물 영조척의 측정치보다는 오차 범위가 크지만 약 30cm~31cm 사이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영조척은 약 31cm에서 오차가 있겠지만 약 30.8cm 정도인 것으로 유추된다.
禮器尺(=造禮器尺)은 宗廟 및 文廟 등의 각종 禮器를 제작하는데 사용하는 자이다. 세종 4년 儀仗제도를 造禮器尺으로 만들도록 하였다는 것을 통해 볼 때 의장 등의 특수한 경우에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조례기척의 길이는 실물 조례기척이 많이 남아 있지 않은데, 그것은 조례기척 자체가 특수한 경우에만 사용되었기 때문이다. 제작된 시기를 알 수 없지만 창덕궁 소장의 사각 유척과 국립 전주박물관 소장의 길이는 각각 27.474cm와 27.876cm로 비슷하다는 측면에서 주목된다. 『세종실록』에 조례기척도가 실려 있는데, 길이를 28.67(태백산본은 28.93)cm, 28.9cm, 및 28.75cm(정족산본)로 달리 측정하였다. 이는 조례기척의 실물과 『세종실록』의 도본 측정 길이와 다소 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布帛尺은 포의 수취와 의복의 제작에 주로 사용되었다. 중국 宋代에 포백척이란 이름으로 널리 사용되었고, 우리나라에서는 世宗 4年 ‘왕실의 의장제도인 喪帷에 포백척을 사용한다’는 기록이 처음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볼 때 조선초기부터 널리 사용하였다. 이러한 포백척은 세종대에 새롭게 교정하였다.
세종대의 포백척은 『大典』칫수에 따라 교정하게 하면, 황종척·주척·예기척·영조척도 다 그 제도에 맞아 차이 나지 않을 수 있을 것이고, 완성되고 나면 중외에 반포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자료를 고려할 때 영조 16년 척을 새롭게 교정할 때 이용되었음을 엿볼 수 있다. 이렇게 교정된 포백척은 조선전기와 후기 사이에 많은 변화가 있었을 것으로 유추된다. 왜냐하면 『증보문헌비고』에 의하면 영조 26년 포백척을 제작한 이후 英祖와 柳拓基는 布帛尺에 대해 다음과 같이 대화하고 있는데, ‘왕이 말하기를 세종조의 제작이 아름답고 뛰어나구나. 그 척을 지금의 척과 비교하면 어떤가 하였다. 유척기가 말하기를 지금 사용하는 포백척과 비교하면 긴 것은 1寸, 짧은 것은 5分을 줄여야 합니다고 하니, 왕이 말하기를 該曹로 하여금 가져오게 하여 비교해서 표준으로 삼아 다른 척을 만들어 반포해 쓰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고 하고 있기 때문이다. 영조 16년에 교정된 포백척은 길이가 긴 것이 1寸(전체 길이의 1/10), 짧은 것은 5分(전체 길이의 1/20) 정도가 오차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현존하는 포백척은 영조 16년 이후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많은데, 주목되는 것은 덕궁 소장의 포백척은 호조포백척이란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488.75mm이고, 역시 창덕궁 소장 사각유척은 반척으로 246.18mm인데, 紙苧竹氈席皮物金絲樺皮繩索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양 포백척의 길이는 48.875cm와 49.236cm로 약간 차이가 있다. 도본 포백척의 측정 길이는 대체로 약 44.4cm~47.4cm인데 전기와 후기의 차이가 있고, 포백척의 실물 측정 길이와 다소 오차가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 포백척은 전기보다 후기로 갈수록 점차 늘어났는데, 전기의 경우 황종척의 비율 등을 고려할 때 약 46.66cm 정도이고, 후기는 유척과 사각유척을 고려할 대 이보다 약간 신장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조선시대 척의 종류는 황종척·주척·영조척·조례기척·포백척 등이 있었고, 그 길이도 다양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양기의 부피는 어떠하였을까? 양기들은 척보다 더 민간의 생활과 밀접하게 운용되었다. 조선은 화폐를 통한 물물의 교환과 수취가 이루어지지 않고 현물을 중심으로 교환·수취되었으므로 양기는 더욱 중요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양기의 부피가 어느 정도였고, 어떻게 변화되었는지를 살펴보자.
먼저 양기의 단위는 조선전기 『經國大典』에 의하면 ‘勺·合·升·斗·石’으로 이루어져 있고, ‘勺·合·升·斗’은 10진법으로 이루어져 있는데, 반해 두와 석의 관계는 15斗=1石과 20斗=1石이었다. 양기의 부피는 『세종실록』에 의하면 세종 28년 ‘議政府에서 호조의 呈狀에 의거하여 계청하기를 새로운 營造尺으로 斛·斗·升·合의 체제를 다시 정하여 斛의 용적이 20斗인 것은 길이 2척, 너비 1척 1촌 2분, 깊이 1척 7촌 5분으로 용적이 3,920촌이고, 용적이 15斗인 것은 길이 2척, 너비 1척, 깊이 1척 4촌 7분으로 용적이 2,940촌이고, 斗는 길이 7촌 너비 7촌 깊이 4촌으로 용적이 196촌이고, 升은 길이 4촌 9분, 너비 2촌, 깊이 2촌으로 용적이 19촌 6분이고, 合은 길이 2촌, 너비 7분, 깊이 7촌 4분으로 용적이 1寸 9分 6리가 되게 하소서 하니 이를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즉 조선전기 양기의 부피는 ‘곡·두·승·합’의 규정에 따라 세종 28년에 제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검토한 것처럼 조선시대 영조척은 정확한 것은 아니지만 약 30.8cm 정도였다고 하였다. 이를 통한 양기의 부피는 다음과 같이 로 정리될 수 있다. 실제 세종 28년 이후에 경정된 1승의 부피는 이러한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않을 것이다. 조선전기 1승의 부피는 약 0.57ℓ, 즉 0.6ℓ정도일 것으로 추산된다. 이는 오늘날 1승의 부피와 비교하여 볼 때 약 1/3 정도에 약간 미치지 못하는 부피이다.
조선시대 量器의 부피
반면 조선후기 양기의 부피는 어떻게 운용되었는지를 검토하여 보자. 조선후기 양기의 부피는 영조 16년 비국(備局)에 명하여 경외의 斗斛을 校正하게 하였다는 기록을 고려할 때 새롭게 교정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대전회통』에 양기의 부피에 대해 자세한 기록을 남기고 있는데, 이를 검토하면 큰 변화가 없었음을 알 수 있다. 대곡(20말)의 부피를 『세종실록』에 1척 7촌 5분인 것을 『대전회통』에서 1척 7촌 2분으로, 양기의 단위인 合의 기록을 생략하고 있고, 그리고 용어를 深을 高로 기록한 것 외에는 큰 차이가 없기 때문이다. 이는 조선전기와 조선후기의 사이에 각 양기의 부피에 큰 변화가 없었음을 암시한다. 따라서 조선후기와 조선전기의 양기의 부피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고 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조선시대 1근의 무게는 어느 정도였을까? 『경국대전』에는 ‘물의 중량 88分’을 이용하여 중량을 체계화하였다고 한다. 이를 로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따라서 조선전기의 중량체계는 고려시대의 중량과 비교하여 볼 때 큰 변화가 없었다. 중국의 경우 명·청시대의 형제가 唐·宋·元의 형제와 무게 차이가 없다는 점을 통해서도 고려시대와 조선전기와 차이가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世宗代 저울의 단위 무게
한편 조선후기의 중량은 다음의 유물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아래의 를 통해 살펴보자. 康熙 13년(현종 15; 1674) 통도사 향완은 중량이 45근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측정된 중량은 25.24kg이다. 그리고 금영측우기는 공주 감영에 설치되었던 것으로 현재 기상청에 보관되어 있다. 道光 丁酉(헌종 3; 1837)년 제작된 것으로 무게가 11근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측정된 무게는 6.2kg이라고 한다. 따라서 1근의 단위 무게는 조선후기에도 조선전기처럼 변화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조선시대의 도량형은 『응지논농정소』에 ‘지금 만 가지 말과 천 가지 섬이 마치 사람의 얼굴 같아서 얼핏 보면 서로 비슷해 보이지만, 실제 사용하면 틀린다. 서울과 지방이 서로 고르지 않고, 이웃 고을이 서로 같지 않은 것은 말할 것도 없이 한 고을에서도 官斗, 市斗, 里斗가 따로 있다. 또 官斗라도, 관청과 司倉이 서로 다른 말을 쓰며, 市斗라도 이 시장 저 시장이 서로 다르며, 里斗라 하여도 東村과 西村이 서로 다르다’고 기록하고 있는 점을 통해 국가 통제에서 일탈된 모습들이 나타나고 있었고, 이는 현재 여러 박물관에서 전시하고 있는 도량형기를 통해서도 이해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근·현대의 도량형
근현대시기의 도량형은 기존의 우리의 전통 도량형과 서구의 도량형, 즉 미터법과 갈등 관계가 나타나면서 소위 미터법으로 점차 통일되어간 시기이다.
이 시기 도량형의 인식에 대해서는 1883년 『한성순보』에서 ‘각국도량형표’와 ‘각국도량형비례표’를 소개하였는데, 전자에서는 일본, 영국, 프랑스, 러시아, 미국 등 5개국을, 후자에서는 우리의 도량형과 외국의 것을 비교하여 일목요연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는 점이다. 그런데 ‘각국도량형비례표’에서는 우리나라와 외국의 척을 비교하면서 ‘我國曲尺比例’라고 하여 우리나라의 주척을 일본의 곡척으로 인식하려는 의도를 드러내고 있다. 반면 『독립신문』은 1898년의 논설 ‘승두척평’에서 세계가 미터법을 사용하고 있으니 우리도 미터법을 도입하자는 안을 제시하였고, 『황성신문』은 우리의 전통 도량형을 준수할 것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결국 도량형은 1902년 평식원(平式院)을 설립하고, 평식원 주도하에 36조의 ‘도량형규칙(1902.10.10)’을 관보에 공포하여 광무 7년(1903) 7월 1일부터 시행하고자 하였다. 길이는 와 같이 里와 毫가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길이의 단위
부피는 升을 기본으로 하나 1升을 21,609立方分으로 정하였다. 조선시대의 경우 勺, 合, 升, 斗, 15斗를 小斛平石, 二十斗를 大斛全石 등이 있었으나 小斛平石과 大斛全石를 와 같이 石(15두)으로 통일하였다.
부피의 단위
무게는 釐, 分, 戔, 兩 및 16兩이 1斤, 大稱은 一百斤, 中稱은 三十斤·七斤, 小稱은 三斤·一斤 등이 있었지만, 과 같이 여러 稱을 없애고 斤과 兩을 기본으로 하며 毫를 추가하였다.
무게의 단위
땅의 면적은 곡물의 생산량에 따라 그 면적을 정한 結負法을 사용하였으나 周尺을 기준하여 절대면적으로 5周尺平方을 1把로 정하였고, 명칭은 과 같이 勺, 合, 把, 束, 負, 結 등으로 하였다.
「표 7」땅의 면적 단위
도량형규칙은 우리의 단위와 미터법을 비교하였는데, 길이의 경우 과 같이 1尺은 0.30303m로, 1미터[米突]는 3.3尺으로 하였다.
「표 8」 미터법의 길이의 단위
부피의 경우 미터법의 부피단위인 리터(ℓ)를 漢譯으로 翊突로 하였고, 와 같이 1升을 기준으로 하였다.
「표 9」 미터법의 무게의 단위
무게의 경우 미터법의 무게단위인 그램(g)을 久覽으로 하였으며, 과 같이 1兩을 기준으로 37.5그램으로 정하였다.
「표 10」미터법의 무게 단위
거리 측정의 경우 미터법의 길이단위인 미터를 기본으로 하여, 과 같이 1周尺을 0.2미터로 계산을 하였고,
「표 11」 미터법의 길이 단위
땅의 면적의 경우는 미터법의 면적단위인 아르(a)를 기준으로 하였는데 1아르는 100㎡로 정하였는데, 와 같이 把를 기준으로 환산하면 1아르는 100把로 비교되며 이 수치를 확장하면 1結은 10,000㎡의 절대면적을 뜻하게 된다.
「표 12」 미터법의 땅의 면적 단위
이러한 도량형의 규칙은 1903년 7월 1일부터 시행토록 하였지만, 1904년 평식원이 혁파되면서 제기능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결국 1905년 3월 21일 ‘도량형규칙’을 법률로 발표할 것을 발의하여 3월 29일 법률 제 1호 ‘도량형법’을 공포하였다. ‘도량형법’은 부피의 경우, 되(升)의 부피를 ‘도량형규칙’의 21,609立方分을 64,827立方分으로 바꾸었고, 1石을 150升에서 100升으로 축소하였다. 1되의 부피를 환산하면 1.8039리터가 되었다.
「표 13」 1905년「度量衡法」의 부피 단위
되의 부피가 늘어났기 때문에 이에 따라서 미터법의 부피단위 리터에 대한 비례수치도 함께 커졌다. 이에 「도량형규칙」에서 정한 수치의 2배만큼 용량이 늘어나서 1升을 환산하면 0.6013리터에서 1.8039리터가 되었다.
도량형법은 1905년 乙巳條約 체결이후 1906년 統監府가 설치되면서 급변하였다. 일제는 조선의 도량형을 일본과 동일하게 하여 식민지 지배의 근간으로 삼기 위해 1909년 으로 일본 도량형의 명칭과 제도를 시행하였다. 1909년 9월 「도량형법」의 특징은 길이와 무게의 단위를 변경하였는데, 와 같이 길이의 경우 尺을 기본으로 町과 間을 사용하고 毫를 毛로 명칭을 바꾸었고 里의 명칭을 일본의 것으로 변경시켰다. 무게의 경우 와 같이 兩과 錢을 없애고 貫을 기본으로 삼았을 뿐만 아니라 돈(匁)을 삽입하였으며 그 명칭도 완전히 바뀌게 하였다.
1909년 무게의 단위
그리고 면적 단위는 전통의 결부법이 소멸되고, 일본의 면적단위인 평(坪)이 기본단위가 되었다는 점이다.
1909년 토지 면적의 단위
일제는 을 통해 일본에서 제작된 도량형기를 수입할 수 있도록 하였고, 이로 인해 일본인들이 도량형기 수입을 시도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었고, 1909년 11월 1일부터 도량형법을 서울을 비롯한 전국에 시행하였다. 일제는 평식원이 주관하여 제작한 도량형기를 1912년 6월에 공식적으로 폐기하였고, 1926년 2월 27일 「조선도량형령」을 공포하여 5월 1일부터는 일본 미터법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도록 하였고, 이에 대한 후속작업으로 1926년 5월 7일 「도량형기 및 계량기구조 규칙」도 더불어 개정하였다. 따라서 일제강점기의 일본의 도량형은 무분별적으로 사용되었고, 이는 식민지배 수탈의 도구로 활용되었다.
해방이후 도량형은 1959년 6월 국회 상공위에서 소위 척관법폐지를 위한 계량법안이 통과 되었고, 1962년에는 미터법으로 통일을 위해 1964년 1월 1일부터 척관법단위를 폐지하기로 결정하였다. 미터법을 사용하면서 1승을 2ℓ, 1두는 20ℓ로 정하였고, 무게의 표준은 1근(=16량)을 600g으로 하였는데, 이를 정리하면 다음의 과 같다.
「표 17」미터법의 무게 단위
미터법 사용이후에도 미터법 사용의무화를 위해 토지와 건물의 면적을 평 대신에 제곱미터를 표시토록 하였지만, 계속 사용되고 있었다. 2007년 7월 1일부터는 정부에서 `법정계량단위 정착방안'에 따라 초기단속범위를 `평'과 `돈' 단위로, 우선 단속대상을 공공기관과 대기업으로 한정해 1개월간 단속과 홍보계도를 병행하는 한편, 제도정착 추이를 지켜보면서 재래시장에서 주로 사용되는 `근', `관' 등 기타 단위로 단속대상을 확대할 방침이라고 밝히기도 하였지만, 과거의 단위들이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우리나라의 도량형은 삼국시대부터 활발하게 되었다. 그것은 삼국시대의 문헌 자료인 『삼국사기』 및 『삼국유사』뿐만 아니라 금석문 자료에서 도량형의 단위들이 기록되어 있고, 최근에는 발굴을 통해서도 여러 도량형기들이 출토되고 있기 때문이다. 삼국시대의 도량형은 구체적으로 언제 어느 시기에 정비되었는지는 명확하게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로 계승되었을 것이다.
고려는 후삼국의 혼란을 통일하고 제도를 정비하였는데, 도량형은 정종 6년(1040)에 이르러 도량형을 정비하였다. 이러한 도량형의 정비를 토대로 정종 12년에는 도량형기를 봄과 가을에 중앙의 경시서와 지방의 계수관을 담당하여 도량형의 혼란을 막고자 하였다. 고려전기에 정비된 도량형은 고려후기에도 그대로 사용되었다. 다만 고려후기에는 원의 부피단위와 저울들이 들어오면서 고려 도량형을 혼란스럽게 한 측면이 있었고, 이로 인해 부정행위들이 빈번하였다.
조선은 세종대에 대대적인 도량형의 정비를 시도하였다. 자와 자의 길이, 부피와 부피의 단위, 그리고 무게와 무게의 단위가 정비되었는데, 이는 조선전기뿐만 아니라 조선후기에도 큰 변함없이 통용되어 조선 500년의 근간이 되었다.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도량형은 1902년 일제의 식민지 침략 때 미터법이 도입되면서 변화를 맞이하였다. 결국 우리의 도량형은 1909년 일본의 도량형 단위들과 혼효되면서 일본의 도량형 단위들이 사용되면서 일본의 잔재가 우리의 도량형에 기생하고 있다.
도량형은 길이·부피·무게 및 이를 측정하는 도구인 자·되·저울 등을 말한다. 길이를 측정하는 도구인 척은 삼국시대부터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최근 발굴된 하남 이성산성의 당대척과 한척 혹은 고구려척, 부여 쌍북리의 당대척 등을 통해 알 수 있다. 고려시대의 척은 현재까지 출토된 사례는 없지만, 문헌 자료에 척·촌이 기록된 사례를 통해 자가 널리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선시대는 『경국대전』에 자의 근간이 되는 황종척, 건물을 만들 때 사용된 영조척, 토지의 측정에 이용된 주척, 의기의 제작에 사용된 조례기척, 포의 길이 측정에 사용된 포백척 등의 명칭이 기록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척은 용도에 따라 척이 다르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길이를 측정하는 척은 고대사회에서 조선시대로 내려오면서 종류와 기능을 다양화하여 사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부피를 측정하는 단위는 홉(合), 되(升), 말(斗), 섬(石) 등이 있다. 이러한 용례들은 삼국시대의 문헌자료인『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기록되어 있고, 『고려사』뿐만 아니라 여러 자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세종실록』에는 부피의 단위와 크기도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부피를 측정하는 용기는 여러 종류였고, 이러한 단위를 통해 부피의 계량화를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무게를 측정하는 단위는 근·량이 중심이었다. 『삼국사기』를 비롯한 여러 문헌 자료에 나타나는 무게의 단위와 함께 최근 출토된 ‘근’명의 거푸집과 저울 추 등을 고려할 때 저울은 전근대시기에 활발하게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저울은 무게를 측정하는 중요한 기구였고, 이를 통해 무게의 계량화를 도모하였음을 알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현황
길이·부피·무게를 측정하는 도량형기는 다양하였다. 이를 측정하는 도량형기는 최근 발굴된 삼국, 통일신라시대 그리고 고려시대의 몇몇 자료를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조선시대 혹은 조선시대 이후 자료들이다. 이러한 도량형기들은 현재 국립민속박물관을 비롯한 여러 박물관에 다양하게 보관·전시되어 있는데, 이를 통해 도량형기들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이해할 수 있다.
영역닫기영역열기의의와 평가
도량형은 삼국 및 통일시대부터 제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도량형의 틀은 변화지 않았지만, 길이·부피·무게를 측정하는 단위의 증가와 세분화가 이루어졌다. 도량형은 전근대사회의 사회경제적 발전과 함께 그 변화를 같이하였을 하였을 뿐만 아니라 표준화를 도모하였다.
영역닫기영역열기 참고문헌
  • 한국중세도량형제연구  (이종봉, 혜안, 2001)

  • 국립민속박물관,『한국의 도량형』,1997

  • 박흥수,『민족문화대백과사전』,1988

  • 박흥수,『한·중도량형제도사』,1999

영역닫기영역열기 집필자
집필 (1995년)
박흥수
개정 (2011년)
이종봉(부산대학교 사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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