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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계몽운동(愛國啓蒙運動)

근대사사건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의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역사적 개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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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목명애국계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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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근
분야
근대사
유형
사건
성격
사회운동, 국권회복운동
시대
근대
영역닫기영역열기 정의
1905∼1910년 사이에 전개된 개화자강파(開化自强派)의 국권 회복을 위한 실력양성운동을 총칭하는 역사적 개념.
영역닫기영역열기역사적 배경
한국 민족은 1905년 11월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해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의 일부를 빼앗기자 새로이 당면한 민족적 과제로서 국권회복운동을 광범위하게 전개하였다.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양면에서 전개되었다. 개항 후 한국 민족이 상당 기간 열강의 침입에 대해 완강한 항쟁을 전개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제국주의자들에게 국권을 박탈당한 것은 ‘힘’과 ‘실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라는 인식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널리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빼앗긴 국권을 다시 찾는 것은 힘을 기르지 않는 한 어려운 과제였고, 당시 한국 민족의 국권회복운동은 처음부터 장기전을 전제로 한 운동이 될 수 밖에 없었다. 장기전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전력의 장기간 공급 능력을 의미하는 ‘실력’의 배양과 축적이었다.
영역닫기영역열기내용
애국계몽운동은 한말 한국 민족의 국권을 빼앗아간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과 국권을 빼앗긴 한국민족의 ‘실력’의 격차를 객관적으로 인식한 한국인들이 자기 민족의 ‘힘’과 ‘실력’을 양성하여 궁극적으로 자기 민족의 힘으로 국권을 회복하려는 운동을 포괄적으로 일컫는 말이다.
애국계몽운동은 통시대적인 일반적 개념이 아니라 한말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의 실력양성운동에 한정하는 역사적 개념임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 개념으로서의 계몽운동은 1905년 이전에도 있었고, 1910년 이후에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계몽운동들은 여기서 말하는 애국계몽운동에는 포함되지 않고, 1905∼1910년 사이의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서 개화자강파가 전개한 운동만이 여기에 포함된다.
애국계몽운동에는 문화운동 뿐만 아니라, ① 신교육구국운동, ② 언론계몽운동, ③ 실업구국운동(민족산업진흥운동), ④ 국채보상운동, ⑤ 신문화·신문학운동, ⑥ 국학운동, ⑦ 민족종교운동, ⑧ 해외독립군기지 창건운동 등이 주요내용을 이루었다.
당시 개화자강파들은 국권을 회복하는 일을 다른 강대국들에 의뢰해서는 안 되고, 국민의 실력을 양성하여 전력(戰力)을 민족사회의 기저층에서부터 증강시켜야 한다고 생각하였다. 특수한 지배계급이나 식자층이 아니라, 모든 국민과 민중을 ‘신국민’으로 만들어 민지(民智)를 계발하고 민력을 양성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개화자강파들은 ① 국내에서는 민력을 양성하기 위해 위에서 든 사업들을 수행함과 동시에 특히 청소년들을 국권 회복을 위한 새로운 민족 간부로 양성하여 실력을 준비하는 한편, ② 국외에는 무관학교를 중심으로 독립군 기지를 설치하고 독립군을 양성하여 실력을 준비해 두었다가, ③ 일본이 전쟁에 휩싸여 감당하기 힘겨운 절호의 기회가 오거나 한국 민족의 실력이 대폭 증강되면, 독립군이 국내로 진입하여 독립전쟁을 전개하고 국내에서는 그 동안 준비한 민중의 실력으로 총단결하여 내외가 호응해서 일본 제국주의세력을 몰아내고 국권을 회복하려는 전략을 세워 그 운동을 전개하였다.
종래 운동의 형태에만 집착하여 애국계몽운동이 국권을 잃고도 즉각 총을 들지 않았다는 점을 지적하여 이를 소극적 운동으로 평가하는 견해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구조적으로 보면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은 방법만 달랐을 뿐, 내용에 있어서는 동일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권회복운동의 양면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의병운동은 국권을 빼앗긴 이상 패하여 죽더라도 총을 들지 않을 수 없다고 결의한 사람들의 무장항쟁이다. 당시의 이 운동은 승패를 초월하여 즉각의 결전을 요구한 것이었다. 이 운동은 가장 강렬한 애국주의의 전통을 수립한 것이었으나 또한 패전을 각오한 것이었다.
한편, 애국계몽운동은 자기 민족의 실력이 일본 제국주의의 실력보다 현저히 부족하다는 사실을 객관적으로 인식한 사람들이 국권 회복의 장기전에서 최후의 승리를 거두기 위해 전개한 민력양성운동이었다.
이 두 방면의 국권회복운동의 목표가 완전히 합일되고 실제로 상호협조적이었기 때문에,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은 구조적으로 상호보완적이었다. 의병무장항전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1907년 고종 양위 직후 일제에게 병탄될 뻔했던 나라가 3년을 더 버텼다.
그리고 바로 애국계몽운동이 가장 치열하게 전개되어 뿌리를 깊이 내린 시기가 1907년부터 1909년의 기간이었다. 의병운동의 전력 소모는 구조적으로 애국계몽운동의 전력의 더 큰 생산을 위한 보위전(保衛戰)의 역할도 수행한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기 때문에 의병운동의 지원 세력이 강화되고 근대 교육을 받은 중견 간부들이 공급되어 의병전쟁이 근대적 독립항전으로 실질적인 큰 전과를 올리며 더욱 장기간 전개될 수 있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이 국외에 독립군 기지를 창설했기 때문에 의병운동의 퇴조기에 의병이 독립군으로 합류 발전하여 장기적 무장독립항전을 전개할 수 있었다.
애국계몽운동의 주체로는 애국계몽운동가·애국계몽운동단체·민중 등을 들 수 있다.
① 애국계몽운동가 : 당시의 개화파·독립협회·만민공동회파의 인사들과 종래의 동도서기파(東道西器派)·위정척사파(衛正斥邪派) 중에서 국권 피탈이라는 대충격을 받고 대오각성하여 개화자강 노선으로 전환한 인사들이 중심이 되어 거대한 세력을 이루었다.
② 애국계몽운동단체 : 보안회(輔安會)·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대한자강회·신민회·대한협회·서우학회(西友學會)·한북흥학회(漢北興學會)주 01)·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관동학회(關東學會)·교남교육회(嶠南敎育會)·호남학회·흥사단·대한흥학회(유학생 단체) 등 다수가 있었다.
③ 민중 : 애국계몽운동의 객체임과 동시에 주체이기도 하였다. 당시 민중들은 선각적 개화사상가들의 계도를 받아들여 나라를 근대화시키지 못해 국권을 빼앗기게 된 사실에 대한 반성과 함께 이제는 자발적으로 분발하는 자발성을 상당히 보이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민중은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애국계몽운동단체의 계발 대상이 됨과 동시에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하는 주체가 되기에 이르렀다. 이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전국 규모의 애국계몽운동단체인 대한자강회·신민회·대한협회의 경우를 간단히 살펴보기로 한다.
당시 개화파·독립협회·만민공동회파 인사들은 이른바 을사조약에 의한 사태의 근본적 변동에 대처하기 위해 종래의 개화운동을 국권회복운동으로 전환시키게 되었다.
이와 동시에 개화자강파들은 먼저 1904년 7월 보안회(輔安會), 합법단체로서는 1905년 5월 헌정연구회(憲政硏究會)를 조직하였다가 이를 확충 개편하여 1906년 3월에 대한자강회를 조직하였다.
대한자강회는 윤치호(尹致昊)를 회장으로 하고, 장지연(張志淵)·윤효정(尹孝定)·심의성(沈宜性)·임진수(林珍洙)·김상범(金相範) 등이 발기인이 되어 ‘교육의 확장과 실업의 발달을 연구 실시함에 대강의 부강을 이루고 타일 독립의 기초를 만드는 것’을 목표로 창립되었다.
서울에 본부를 두고 각 지방에 지회를 설립하여 전국적 규모의 협회를 조직해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대한자강회가 가장 강조한 것은 국권 회복의 기초로서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 국민들에게 애국주의적 신지식을 교육하고 근대 산업을 일으켜 자강을 실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대한자강회의 애국계몽운동은 일제 통감부의 탄압으로 큰 제약을 받았다. 소위 통감정치는 대한제국정부를 그대로 두고 감독지배정치를 하였다. 한편으로는 일본군을 배경으로 국권회복운동을 근본적으로 제약하고 탄압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합법적 애국계몽운동의 여지를 일부 남겨놓았다가 점차 단계적으로 좁혀나갔다.
통감정치의 기본 방향은 처음부터 합법적 애국계몽운동의 폭을 조직적으로 좁혀가고 있었으므로, 어떠한 계기가 있을 때마다 합법단체의 활동 영역은 제한되고, 반면에 비밀결사의 활동의 중요성이 더욱 증대하게 되었다.
그 전형적인 계기가 1907년 7월 24일의 이른바 ‘정미7조약’이었다. 일제 통감부는 ‘헤이그 밀사사건’을 구실로 고종을 양위시킴과 동시에 정미7조약을 체결하였다. 식민지화의 또 하나의 단계적 조처로 대한제국정부에 일본인 차관을 임명하여 이른바 차관정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였다.
이와 함께 일제는 애국계몽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적극적인 조처를 하였다. 그들은 1907년 7월 24일 「신문지법」을 공포하여 언론·출판의 검열을 강화하고, 7월 27일 「보안법」을 공포하여 언론·집회·결사의 자유를 더욱 제한하였다. 뒤이어 8월 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를 해산시켜 한국을 전적으로 무방비 상태에 두었다.
대한자강회는 고종 양위와 정미칠조약에 대한 반대 시위를 주도하였다는 이유로 1907년 8월 19일 강제해산당하였다. 그러나 대한자강회가 전국 규모로 애국계몽운동을 시작한 사실은 참으로 큰 업적을 남긴 것이었다.
대한자강회가 강제해산되고, 그 뒤를 이어 합법적 애국계몽운동단체로서 1907년 11월에 대한협회가 창설되었다. 대한협회는 남궁 억(南宮檍)을 회장으로 하고, 권동진(權東鎭)·남궁 억·여병현(呂炳鉉)·유근(柳瑾)·이우영(李宇榮)·오세창(吳世昌)·윤효정·장지연·정운복(鄭雲復)·홍필주(洪弼周) 등이 발기인이 되어 창설한 것이었다.
대한협회의 애국계몽운동은 대한자강회와 궤도를 같이하였다. ① 교육의 보급, ② 산업의 개발, ③ 생명 재산의 보호, ④ 행정제도의 개선, ⑤ 관민폐습의 교정, ⑥ 근면·저축의 실행, ⑦ 권리·의무·책임·복종 사상의 고취 등을 내세웠다.
그러나 이 때에는 이미 정미7조약이 체결된 이후였으므로 대한협회는 대한자강회와 같이 그러한 운동이 후일 국권 회복의 기초로서의 실력양성운동임을 강조하여 직결시키기가 어려웠다. 대한협회는 일진회(一進會)의 친일 노선에 반대하여 끝까지 애국 노선을 견지한 전국 규모의 애국계몽운동단체이기는 했다.
그러나 일본인 고문 오가키(大垣丈夫)의 작용과 그에 부화뇌동하여 일진회와의 연합을 주장하는 일부 간부층의 분열로 말미암아 국권 회복의 본래의 목표에 충실하기가 어려웠다. 따라서, 1907년 이후의 국권 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전국 규모의 단체는 비밀결사로 창건된 신민회라고 할 수 있다.
신민회는 1907년 4월에 안창호(安昌浩)의 발기에 의하여, 양기탁(梁起鐸)을 총감독으로 하고, 양기탁·전덕기(全德基)·이동휘(李東輝)·이갑(李甲)·유동열(柳東說)·안창호 등을 창건위원으로 하였다.
이와 함께 최광옥(崔光玉)·노백린(盧伯麟)·이승훈(李昇薰)·안태국(安泰國)·이시영(李始榮)·이회영(李會榮)·이상재(李商在)·윤치호·조성환(曺成煥)·김구(金九)·박은식(朴殷植)·신채호(申采浩)·이강(李剛)·임치정(林蚩正)·이종호(李鍾浩)·주진수(朱鎭洙) 등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비밀결사였다.
신민회의 회원은 전국에 걸쳐 약 800명에 달하여 당시 전국 각지의 개화자강파 인사의 정예는 모두 망라되어 있었다. 대한자강회와 신민회는 모두 1896∼1898년의 독립협회·만민공동회를 계승한 개화자강파 계통의 단체이다.
그런데 대한자강회는 합법공개단체로 조직되고 신민회는 비밀결사로 조직된 것은 전적으로 당시 일제 통감정치가 합법적 국권회복운동의 폭을 좁혀가고 있던 조건 때문이었다.
신민회의 애국계몽운동의 목적과 이념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주독립국을 세우고 정치체제를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하는 것이었다. 신민회가 국권 회복 후에 아예 군주제(君主制)를 폐지하고 신공화국(新共和國)을 수립하려 한 것은 한국 역사상 최초로 공화정의 수립을 민족운동의 공식목표로 설정한 획기적인 것이었다.
신민회는 국권 회복을 위한 독립전쟁 전략과 기회론(機會論) 전략을 수립하고 실력 양성을 중요시하였다. 신민회는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새롭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여 신국민(新國民)의 형성을 주장하였다.
신민회가 주장한 실력은 국민의 실력, 즉 ‘민력’이었다. 이것은 신민회가 국민주권론의 민권사상에 기초하여 공화정체의 국민국가(國民國家)의 수립을 목표로 한 사실과 관련되고 있었다. 신민회는 신민이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주체적으로 하는 자신(自新)이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신민회는 실력양성을 위한 사업으로서 ① 신문·잡지 및 서적의 간행, ② 계몽 강연, ③ 학교의 설립과 인재양성, ④ 각급학교 교육방침의 지도, ⑤ 실업, 민족산업자본의 진흥과 실업가의 영업방침 지도, ⑥ 국외에서의 무관학교의 설립, ⑦ 국외에서의 독립군기지 창건 등의 운동을 전개하였다.
당시 신민회가 존재하던 시기에 합법적인 애국계몽운동 단체는 앞에서 든 대한협회가 있었고, 지방별 애국계몽운동 단체로서도 서북학회·기호흥학회·관동학회·교남교육회·호남학회·대한흥학회 등이 있었다. 이러한 각종 애국계몽운동단체의 간부에는 신민회 회원이 참여하여 그들의 운동을 신민회의 국권회복운동에 일치하도록 활동했다.
또한 신민회는 단계적으로 각 애국계몽운동단체들을 연합해나가면서 전국의 애국계몽운동을 국권회복운동에 직결시켰다. 이 때문에 신민회의 영향은 실로 지대하여 1907년 이후의 모든 애국계몽운동을 배후에서 사실상 지도하고 추진하였다. 그들이 활동한 부문들에서는 다대한 성과를 내고 국권회복을 위한 민족 역량을 대폭 증강시켰다.
(1) 신교육구국운동
처음에는 애국계몽운동가들 및 대한자강회의 사립학교 설립 호소와 신교육 운동에 민중들이 호응함으로써 비롯되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민중들이 자발적으로 학교 설립을 추진하여 신교육구국운동이 요원의 불길같이 전국적으로 확대되었다.
신교육구국운동에 처음 매우 큰 자극을 준 것은 대한자강회의 의무교육운동이었다. 대한자강회는 1906년 ‘의무교육조례대요(義務敎育條例大要)’를 입안하여 전국의 모든 청소년에게 학구별로 의무교육을 실시할 것을 제안했다. 이 제안은 중추원을 거쳐 대한제국정부의 내각회의에서 통과되었다.
대한자강회의 의무교육안의 특징은 무엇보다도 ① 학구(學區)를 설정하여 학구 내의 주민들이 학교를 설립하고 학무위원을 선거하여 학교를 운영하도록 하는 민립학교(民立學校)의 의무교육제도이고, ② 의무교육 연한을 원칙적으로 8년으로 하되 당분간 경비 부담능력을 고려하여 5년으로 했다가 확충하며, ③ 의무교육 학령은 만 7세로부터 만 15세까지로 하고, ④ 만 7∼15세의 남자아동은 즉시 전원 의무교육을 실시하며, 여자는 당분간 만 7∼8세까지는 의무적으로 취학하게 하고 만 9세 이상은 임의로 취학하게 하다가 의무교육을 일반화하도록 한 것이었다.
이것은 한국 사상 최초의 의무교육안으로서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그러나 이러한 의무교육 실시 제안은 중추원과 내각회의를 통과했음에도 불구하고 일제 통감부는 이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간주하여 탄압, 중지시켜버렸다.
그렇지만 신민회를 비롯하여 각종 애국계몽운동단체들과 민중들은 일제의 탄압에 굴복하지 않고 민중의 자발적인 의무교육 실시운동을 전개하였다. 이것은 민중 스스로에 의한 신교육구국운동의 발전에 하나의 큰 전환점을 만들어주었다.
당시의 애국계몽운동가들과 애국계몽운동단체 및 민중들은 전국 방방곡곡에서 사립학교 설립운동을 전개하여 그 열기가 요원의 불길처럼 타올랐다. 예컨대,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의 짧은 기간에도 민중들의 힘으로 자발적으로 세운 사립학교수가 무려 3,000여 개교에 달하였다.
일제 통감부는 한국 민중의 신교육구국운동의 교육열에 놀라 1908년 8월 「사립학교령」을 제정, 공포하여 탄압을 획책하였다. 일제는 높은 시설기준을 제정하고 모든 사립학교에 대해 학부대신의 심사와 재인가를 법령화했다.
그러나 한국 민중은 이에 굴하지 않고 의연금을 모아 다시 일어서서 1909년 11월까지 결국 인가를 받아낸 각종의 학교수가 모두 2,232개교에 달하게 되었다.
또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서울을 비롯하여 전국 각지의 주요 도시에 중학교와 전문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교육과 고등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간부를 양성하였다.
그들은 또한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실시하여 교사를 양성했고, 이들 교사들은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설립하고 청소년들에게 국권 회복의 이념과 목적에 적합한 신교육을 실시하였다.
그리하여 이 시기의 애국계몽운동가들의 신교육구국운동은 당시 한국의 교육·지식·문화 체계를 근본적으로 변혁시켰다. 뿐만 아니라, 그 뒤의 국권회복운동에 있어서 중추적인 구실을 담당한 민족 간부가 된 수십만의 애국청년들을 양성하는 데 성공하였다.
(2) 언론계몽운동
《대한매일신보 大韓每日申報》·《황성신문 皇城新聞》·《제국신문 帝國新聞》·《만세보 萬歲報》·《대한민보 大韓民報》·《공립신문 共立新聞》(뒤에 新韓民報로 개칭) 등의 신문, 《소년》 등을 비롯한 잡지, 그리고 학회보를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이 중에서 《황성신문》은 1898년 9월에 남궁 억·유근 등에 의해 독립협회 기관지의 하나로 창간되었다. 《제국신문》은 1898년 8월에 이종일(李鍾一) 등에 의해 창간되어, 그뒤 계속하여 애국계몽운동 기간에도 언론계몽활동에 종사하였다.
특히, 《황성신문》은 1905년 11월 20일자 사설에서 장지연이 「시일야방성대곡 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폭로, 규탄하는 유명한 논설을 게재하여 80여 일간 정간당한 뒤, 1906년 2월 22일에 복간되어 언론계몽활동을 계속하였다.
《제국신문》은 국문전용 신문으로서 한문을 모르는 일반 민중과 부녀층에 파고들어 사회의 최저변층을 계몽하고 국권 의식을 갖게 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만세보》는 1906년 6월에 오세창 등이 손병희(孫秉熙)의 지원을 얻어 창간한 신문으로 1년 만에 경영난으로 정간했지만, 일진회를 비판하고 언론계몽활동을 펴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대한민보》는 1909년 오세창·장효근(張孝根) 등이 중심이 되어 대한협회의 기관지로 창간되어, 일진회에 대한 투쟁과 국권 회복을 위한 언론계몽운동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신문·잡지들은 「신문지법」의 제약과 신문의 사전 검열 등 일제 통감부에 의해 큰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위의 신문 잡지들은 일진회의 매국활동과 그 기관지인 《국민신보 國民新報》 및 일제 통감부와 일본인 거류민의 기관지인 《한성신보 漢城新報》에 대항하여 민중들에게 국권회복사상을 고취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애국계몽운동 기간에 가장 과감하게 일제의 침략정책을 규탄하고 국권회복을 위한 구국언론활동을 전개한 것은 《대한매일신보》였다. 《대한매일신보》는 양기탁 등이 영국인 베델(Bethell, E.T.)을 사장으로 추대하고 양기탁이 주필이 되어 한·영합작으로 1904년 7월 창간한 신문이다.
영문판 《The Korea Daily News》와 국문전용판 《대한ᄆᆡ일신보》를 동시에 간행하였다. 공식적으로 사주가 영국인[외국인]이었으므로 일제 통감부의 「신문지법」에 의한 검열을 거치지 않고 신문을 발행할 수 있었다.
1907년 4월 신민회가 창립된 이후에는 신민회 기관지의 역할도 수행하였다. 이 때문에 《대한매일신보》는 각 부문의 애국계몽운동을 적극적으로 주도하고 지원하였을 뿐 아니라, 당시 다른 신문들이 하지 못하던 의병운동을 지원하고 대변하는 구실까지 할 수 있었다.
(3) 실업구국운동(민족산업진흥운동)
각종의 근대회사 설립과 한국인 상공회의소 및 경제연구단체와 실업장려단체들의 활동이 있었다. 이 시기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은 일제의 경제침략을 군사침략과 마찬가지로 극히 위험시하였다.
실업·민족산업의 진흥이 신교육구국운동과 마찬가지로 실력양성의 길임을 강조하고, 민족산업자본 발흥의 촉진운동을 전개하여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다.
(4) 국채보상운동
1907년 1월 31일 대구의 광문사(廣文社) 회장 김광제(金光濟)와 부회장 서상돈(徐相敦) 등 10여 명이 「국채일천삼백만환보상취지서 國債一千三百萬圜報償趣旨書」라는 격문을 전국에 돌리자, 전국 각지에서 호응하여 일어나면서 시작되었다.
일제가 한국을 종속시키기 위해 준 정치차관 1,300만환을 국민이 담배를 끊어 절약한 돈으로 상환해 버리자는 운동이었다.
이 운동은 《대한매일신보》·《황성신문》·《제국신문》·《만세보》·《대동보 大同報》 등 언론기관이 적극적으로 지원하고, 함경북도에서 제주도에 이르기까지 전국 각계각층의 모든 국민이 참여하여 한때 전국을 휩쓸었다.
민중들의 국채보상운동에 대한 참여는 매우 자발적이고 열성적이어서 전국 각지에 무수한 국채보상기성회(國債報償期成會)·단연회(斷煙會) 등이 조직되었다. 성인들은 자발적으로 단연(斷煙)을 실천하였고, 부녀자들은 비녀와 가락지를 내놓았고, 머리털을 잘라 팔아 호응하는 여학생들도 다수 나오게 되었다.
일제 통감부는 이 운동을 탄압하는 방법으로 대한매일신보사 내의 국채보상기성회 간부인 양기탁을 근거도 없이 국채보상의연금 횡령 혐의라는 누명을 씌워 구속하였다가 무죄로 석방하였다.
이 사건이 계기가 되어 국채보상운동은 점차 퇴조했다. 그러나 전국 방방곡곡 각계각층의 국민들을 애국운동에 직접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 뒤의 국권회복운동의 고양에 크게 기여하였다.
(5) 신문화·신문학운동
신소설과 신체시가 출현하였으며, 창가(唱歌)가 널리 불렸다. 특히 창가는 애국·독립·신교육·신문화 등을 고무하고 예찬하는 내용이 많아서 온 국민의 노래로서 전국 방방곡곡에서 애창되었다.
(6) 국학운동
국사·국어·국문·지리 등의 근대적 학문체계를 수립하려는 노력으로 나타났다. 근대적 민족사학을 수립하는 운동은 주로 신채호·박은식·장지연 등이 중심이 되었다.
국어·국문의 근대적 연구와 보급운동은 주로 주시경(周時經)·최광옥·유길준(兪吉濬)·지석영(池錫永) 등이 중심이 되었다. 자기 나라의 지리의 체계를 세우려는 노력은 주로 장지연이 중심이 되어 전개하였다.
(7) 민족종교운동
이 시기에 대한제국의 종교계를 친일화하려는 일제 통감부의 공작에 대한 저항과 국권회복운동의 일환으로 일어났다. 손병희 등은 1905년 12월 천도교를 창건하여 동학계의 일진회에 대결하면서 동학교도들을 다시 애국운동 쪽으로 끌어왔다.
윤치호·이상재 등은 황성기독교청년회(皇城基督敎靑年會) 등을 비롯하여 각종의 기독교 조직을 통해서 기독교도들을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였다.
유교계에서는 박은식·장지연 등이 대동사상(大同思想)을 주장, 1909년 대동교(大同敎)를 창건하여 친일적인 대동학회(大東學會)와 공자교(孔子敎)에 대결하면서 유림계를 국권회복운동 편에 서게 하였다.
나철(羅喆)·오혁(吳赫) 등은 1909년 단군을 국조로 신봉하는 단군교(檀君敎)주 02)를 창건하여 민족주의를 고취하고 교도들을 국권회복운동과 독립운동에 동원하였다. 이러한 민족종교운동은 당시 종교가 일반 민중의 생활 속에서 중요한 측면을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큰 의의가 있었고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이 시기 애국계몽운동을 주도한 개화자강파의 무장투쟁을 위한 무력양성운동으로서,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추진한 운동이었다. 신민회 등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국외의 독립군기지와 독립군의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경이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년부터 1908년까지는 의병운동의 문제점과 이의 현대화의 필요성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으면서도 대책은 세우지 못하고 있었다.
그 이유는 신민회의 실력은 부족했던 반면, 의병운동은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기지와 독립군의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1909년 봄이었다.
이 때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독립군 기지를 만들어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 사관을 양성하여 현대전에서 승전할 수 있는 독립군을 창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어서 독립전쟁전략을 최고전략으로 채택하였다. 그 골자는 다음과 같다.
① 독립군기지 : 일제의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청국령 만주일대를 자유지대로 보고 이 곳에 설치하되, 후일 독립군의 국내 진입에 가장 편리한 지대를 최적지라고 결정하였다.
② 최적지 선정 및 이주 : 최적지가 선정되면 자금을 모아 일정 면적의 토지를 구입하되, 이에 소요되는 자금은 국내에서 신민회의 조직을 통해 비밀리에 모금하고, 이주민에게도 어느 정도의 자금을 휴대하도록 하였다.
③ 신한민촌(新韓民村) : 토지가 매입되면 국내에서 애국적 인사들과 애국청년들을 중심으로 하여 계획적으로 단체 이주시켜 신영토로서의 신한민촌을 건설하도록 하고, 또 한편으로는 토지를 개간하여 농업 경영을 통해서 경제적 자립을 실현하도록 하였다.
④ 민단조직과 사관양성 : 새로이 건설된 신한민촌에는 이주민과 애국청년들을 망라하여 강력한 민단(民團)을 조직하기로 하였다. 또한 신한민촌에는 학교와 교회, 기타 교육·문화시설을 세우는 한편 특히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문무쌍전교육을 시켜 사관을 양성하기로 하였다.
⑤ 현대적 독립군 편성 : 동시에 무관학교를 근거로 무관학교 졸업생과 이주한 애국청년들을 중핵으로 하여 강력한 독립군을 창건하기로 하였다.
이 독립군의 장교와 사병은 무관학교에서 근대교육과 전략전술을 익히는 강력한 정병주의를 채택하고, 철저한 현대적 군사훈련과 현대무기로 무장시켜 일본 정규군과의 현대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강력한 현대적 독립군을 편성하기로 하였다.
⑥ 독립전쟁 : 독립군이 강력하게 양성되면 최적의 기회를 포착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하기로 하였다. 최적의 기회는 일본 제국주의의 힘이 증강되고 침략 야욕이 더욱 팽배하여 만주지방이나 태평양지역으로 팽창하려고 할 때 불가피하게 발발하게 될 중일전쟁·러일전쟁·미일전쟁이 일어날 때라고 추정하였다.
이러한 전쟁은 일제에게도 힘겨운 전쟁이 될 것이므로 이 기회를 빨리 포착하여서 그동안 국외에서 양성한 독립군으로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내에 진입해 들어가고, 국내에서는 신민회가 주체가 되어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각계각층의 국민과 단체를 통일연합, 내외 호응하여 일본 제국주의 세력을 물리치고 국권을 회복하기로 하였다.
이것이 주도적 애국계몽운동 단체인 신민회가 채택한 독립전쟁전략이었다. 애국계몽운동파의 독립군 창건과 독립전쟁전략은 크게 볼 때는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의 진전에 대응해 종래의 갑신정변, 1894년의 농민혁명운동,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의 실제적 경험을 변증법적으로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으로서, 한국 민족의 근대민족운동에 있어서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은 것이었다.
1910년 4월에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金羲善)·이종호·김지간(金志侃) 등이 출국하였다.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李東寧)·주진수 등이 만주일대를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였다. 1910년 12월부터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신민회는 1911년 봄에 대대적인 단체 이주를 실행할 계획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이러한 움직임을 포착하고, 1911년 1월에 ‘안악사건’과 ‘양기탁 등 보안법위반사건’ 등으로 신민회 중앙본부와 황해도지회 회원 160여 명을 체포하였다.
1911년 9월에는 소위 ‘데라우치총독 암살미수’ 혐의를 날조하여 신민회 평안북도지회와 평안남도지회 회원을 비롯하여 전국의 애국계몽운동가 약 700명을 체포하였다.
이러한 일제의 대탄압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신민회 회원들과 애국계몽운동가들은 1911년 봄 만주 봉천성(奉天省) 유하현(柳河縣) 삼원보(三源堡)에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1913년에는 왕청현(汪淸縣) 나자구(羅子構)에 동림무관학교(東林武官學校), 밀산현(密山縣) 봉밀산자(蜂蜜山子)에 밀산무관학교(密山武官學校) 등 세 곳에 3개 무관학교를 설립하는 데 성공하였다.
신민회를 주체로 한 애국계몽운동가들의 독립군기지 창건운동은 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회원 검거로 말미암아 사실상 해체되는 도중에 진행되었기 때문에 원래의 계획대로 이루어지지 못하고 부분적으로만 성공하였다. 그러나 이 세 곳의 무관학교의 창건은 3개의 독립군기지를 창건한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설립한 무관학교에서는 철저한 애국주의로 정신무장되고 현대적 사관교육을 받은 유능한 장교들이 양성되었다. 이들을 중심으로 현대적 독립군이 조직되었으며, 의병들도 재훈련되어 현대적 독립군으로 발전하였다.
이러한 독립군의 창설은 과거의 의병과는 달리 일본 정규군을 현대전에서 실력으로 능가할 수 있는 막강한 정예의 독립군 창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이러한 사관 중심의 독립군은 사병만 공급된다면 단시일에 대군단으로 발전할 수 있는 정예들이었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군에 반대하여 항전한 한국민족의 독립군의 원류의 하나는 이 때 애국계몽운동가들이 만든 것이었다.
애국계몽운동은 이상과 같이 이 시기에 국민의 사상과 지식과 문화와 경제와 정치의식 등을 모든 면에서 일신시키고, 국민의 실력을 비약적으로 크게 양성시켰다.
그리하여 국권을 빼앗기고 나라가 식민지로 전락하게 될 절망적인 절박한 최후의 5년을 도리어 ‘대각성의 시대’, ‘대분발의 시대’로 만들어 대대적인 민족역량 증강의 시대로 전환시켰다.
일제 통감정치의 온갖 탄압 속에서도 열정적인 애국계몽운동의 결과로 민족역량이 대대적으로 증강되고, 지극히 어려웠던 이 시기가 오히려 대각성의 시기가 되어 그 뒤의 국권 회복과 독립 쟁취의 실력을 양성, 공급할 수 있게 된 것은 엄연한 객관적 사실이다.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은 그 뒤 지금까지의 교육과 근대민족문화의 창조, 발전에 커다란 분수령을 만들었다. 당시 애국계몽운동가들이 독립전쟁전략을 수립하여 독립군기지를 창건해 놓고 기다리던 독립전쟁의 결정적 기회는 1914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오지 않았다.
중국·러시아·미국 등과 교전에 들어가지 않고 도리어 연합국에 가담한 일본 제국주의세력이 더욱 팽창해서 만주에까지 진출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1919년 1월 전후문제 처리를 위한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자 한국 민족은 국제정세의 변동을 기회로 포착하여, 한말에 애국계몽운동가들이 양성하고 축적한 실력을 폭발시켜 3·1독립운동을 일으키는 데 성공하였다.
기다리던 기회가 ‘전쟁’이 아니라 ‘평화’의 형태로 왔기 때문에 비폭력시위의 형태로 3·1운동에 봉기했다고 볼 수 있다. 애국계몽운동가들의 피땀어린 실력양성운동은 3·1운동의 민중봉기에 의해 다른 형태로 일단 열매를 거둔 것이었다.
뿐만 아니라, 애국계몽운동가들이 국외에 창건한 독립군은 3·1운동 후 애국청년들이 이 곳으로 물밀듯이 찾아들자 갑자기 대독립군단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3·1운동 직후부터 본격적으로 대폭 증강된 독립군이 만주 도처에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 대소규모 ‘독립전쟁’의 혈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었고, 국경지방에서는 국내진입 유격전이 크게 증강되었다.
한말의 애국계몽운동은 한국민족의 새로운 민족문화를 창조하고 발전시켰으며, 자기의 사회를 발전시켰을 뿐 아니라, 3·1운동과 독립군 무장투쟁의 직접적인 원류를 이룬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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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01
뒤에 서우학회와 한북흥학회는 西北學會로 통합
주02
뒤에 大倧敎로 개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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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필 (1995년)
신용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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