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인 통제구역은 휴전선 일대의 군 작전 및 군사시설의 보호와 보안유지를 목적으로 민간인 출입을 제한하는 구역이다. 1954년 미 육군 제8군단사령관의 직권으로 비무장지대로부터 5∼20㎞ 밖에 민간인 통제선을 설정하였다. 민통선에서 남방한계선까지 설정된 지역으로 비무장지대와는 구분된다.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비무장지대를 따라 띠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바다에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 민통선 북방지역에는 주민이 거주하며 영농을 위한 출입이 허용되고 있다. 최근에는 자연생태계 보존지역으로 주목받고 있으며, 통일의 전초기지로서 통일시대를 대비한 개발구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南方限界線)으로부터 5∼20㎞ 밖에 민간인 통제선(民統線 : Civilian Control Line)이 설정되어 있는데, 민통선에서 남방한계선까지의 지역을 민간인통제구역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휴전협정에 의하여 설정되어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되고 있는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 Demilitarized zone)와는 구분된다.
민간인통제구역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비무장지대를 따라 띠 형태를 이루고 있으며 바다에는 설정되어 있지 않다. 설정 당시 기준 총면적은 1,528㎢(강원도 1,048㎢, 경기도 480㎢)이며, 강원도 고성 · 인제 · 화천 · 양구 · 철원, 경기도 연천 · 파주 · 김포, 인천광역시 강화 등 2도 9시 · 군 24읍 · 면 213이(민간인 미거주 지역 포함)에 걸쳐 있다. 지역 내에서는 군 작전과 보안유지에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민간인의 영농을 위한 토지 이용이 허가되고 있으나 지역 내의 출입과 행동, 경작권을 제외한 토지 소유권의 행사 등 일부 개인의 자유와 국민의 기본권이 통제되고 있다.
민통선은 1954년 2월 미 육군 제8군단사령관의 직권으로 설정되었다. 한국전의 휴전 후 미 육군은 민간인의 귀농(歸農)을 규제하는 귀농선(歸農線)을 설정하고, 그 북방의 민간인 출입을 금지하였다. 휴전선 방어 임무를 한국군이 담당하면서 1958년 6월 군 작전 및 보안상 지장이 없는 범위에서 출입영농과 입주영농이 허가되었고, 귀농선은 민간인통제선(민통선)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민통선 통제권이 한국군에게 이양된 후에는 국토 이용의 제고와 북한의 계획적인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한 정책적 필요에 따라 1959년부터 99개의 자립안정촌(自立安定村)을 건설하였으며, 1968∼1973년에는 12개의 재건촌(再建村)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1973년에는 2개의 통일촌(統一村)을 건설하였다. 정책적 필요에 따라 조성된 이들 마을은 1985년에 강원도 고성 · 인제 · 화천 · 양구 · 철원 등 5개 군 11개 읍 · 면에 31개소, 경기도 연천 · 파주 · 김포 · 강화 등 4개 시 · 군 13개 읍 · 면에 81개소에 이르고 있다.
또 1953년 8월 사민(私民)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협의를 근거로 비무장지대 내의 군사분계선 남쪽에 대성동 마을(일명 자유의 마을)이 설치되어 민통선 북방 지역 마을은 총 112개 마을에 이르고 있다. 민통선 북방 마을은 주민이 거주하고 있는 마을이다. 그러나 주민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에도 출입영농이 허용되고 있다. 행정구역이 복구되지 않은 강원도 지역 52개 이, 경기도 지역 51개 이에 출입영농이 허용되어 사실상 민통선 북방 지역 전역에서 부분적이나마 영농이 실시되고 있다. 당시 민통선 북방 지역 인구는 총 8,799세대 3만 9725명(강원도 2,466세대 1만 939명, 경기도 6,333세대 2만 8,786명)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1980년대 중반 이후 북한의 선전촌에 대응하기 위해 설정했던 선전촌 · 자립안정촌 · 통일촌 등의 개념이 없어졌으며, 주민들의 출입 절차 간소화, 다각 영농에 따른 시설 규제 완화 등의 요구에 따라 민통선을 북상시켜 설정하기 시작하면서 민통선 북방 마을이 그 이남 지역으로 편입되는 경우가 발생했으며 상대적으로 민통선 북방 지역 면적도 줄어들었다. 1995년 현재 민통선 북방 마을은 강원도 · 경기도 9개 군에서 7개 마을이 줄어든 105개 마을이 되었으며, 민통선 북방 지역 민사 활동 규정 개정안을 마련, 같은 해 8월 1일부터 시행했다.
개정된 규정은 그 동안 가구당 3㏊까지만 허용되던 영농 범위를 10㏊(최대 20㏊)까지 확대, 영농단지 조성 허용, 주민 이주 토지개간 등 민원이나 재산권 행사에 대한 탄력적 대응, 무연고자의 출입 신청을 종전 7일에서 당일로 축소하는 것 등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 규정 시행 후 상당 지역에서 민통선이 북상됐으며, 민통선 북방 마을에도 사회간접자본 투자가 늘어나고 있다. 또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조치’를 계기로 소유권이 명확해지면서 토지의 취득 및 매각 · 임대, 토지를 이용한 금융 활동 등 정상적인 경제활동이 이루어지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은 출입 제한과 개발 억제 등 한계 지역으로서의 특수성 때문에 오랜 기간 동안 정부의 개발 계획에서 소외되어 왔으며, 일반인들의 관심 부재로 민간투자도 이루어지지 않던 지역이다. 그러나 낮은 인구밀도와 개발 억제의 반사적 효과로 양호한 자연상을 유지하게 됨으로써 최근 이 일대는 비무장지대와 함께 자연생태계 보전지역으로 주목을 받고 있다. 과거 취락지 · 경작지 · 소택지 · 계곡 등이었던 일부 지역은 수십 년간 인간 간섭을 받지 않고 있다는 점에서 자연자원으로서의 가치를 높이 평가받고 있다. 한편으로는 통일시대를 대비한 갖가지 개발구상으로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민간인 통제선은 대체로 휴전선과 평행을 이루고 있다. 따라서 민간인 통제구역은 동해안에서 서해안까지 248㎞의 휴전선을 따라 북위 37°45′∼38°40′사이에서 5∼20㎞ 너비의 띠 형태를 형성하고 있다. 태백산맥을 경계로 동부는 급사면, 서부는 완경사면을 이루어, 동서 단면은 비대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동부는 향로봉산맥이 해안까지 뻗어있으며, 서부는 광주산맥 · 추가령열곡(楸哥嶺裂谷) · 마시령산맥의 일부에 속하는 등 복잡한 지형을 이루고 있다.
중동부의 해안분지(亥安盆地)는 가칠봉(加七峰 1,242m) · 대우산(大愚山 1,179m) · 두솔산(兜率山 1,148m) · 대암산(大巖山 1,304m) · 달산령(807.4m) 등 산릉으로 둘러싸여 남북 길이 8㎞, 동서 길이 7.5㎞의 장방형을 이루고 있다. 이곳은 분지 내 평균 표고가 450m인 데 반해 주변이 1,000m급 고봉으로 둘러싸인 모습이 화채그릇 같다고 하여 일명 ‘펀치볼(puncf bowl)’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 분지의 성인은 차별침식으로 규명됐으나 운석분지설이 꾸준히 제기되고 있다.
중부 지역은 한탄강을 중심으로 북서부 평야 지역과 남동부 산지로 구분되고 있다. 평야 지역은 200∼500m 두께의 용암대지의 일부이며, 산지는 1,000m 내외의 광주산맥 준령이 연속되고 있다. 중서부 지역은 광주산맥 · 추가령열곡 · 마시령산맥의 일부에 속한다. 연천 · 전곡 등지에서는 평강 부근에서 분출한 현무암질 용암이 한탄강과 임진강의 유로로 흘러들어 소규모 용암대지를 형성하고 있으며 하천변은 낭떠러지를 이루고 있다. 용암대지의 풍화된 토양은 비옥해서 곡창지대를 이루고 있다.
서부 지역은 추가령열곡의 비교적 넓은 凹형 계곡으로 서해안 연안에서 표고 100m 내외의 구릉을 이루고 있다. 임진강 중 · 하류는 구릉지가 더욱 낮아져 저지대는 하천에 의한 충적토가 퇴적돼 매우 비옥하다. 서해안 도서 주변에는 간석지가 매우 넓게 발달해 있다. 조수가 드나드는 갯벌은 구릉 사이의 충적지와 더불어 해안평야를 이루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은 비록 자연적 · 생태적 조건에 의한 고립은 아니지만, 인문 · 사회적 조건에 의한 지역적 고립 또는 통제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독특한 사회 문화적 현상을 발전시키고 있다. 민통선 북방 마을은 대부분 원주민보다는 외래민이 더 많은 인구 구성 비율을 형성하고 있어 각기 풍속과 풍습이 다른 이질문화가 용해되어 있으며, 여기에 접경지 특유의 군사문화까지 소화해야 하는 특수성이 있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은 면 전역이 분지 속에 들어앉아 있을 뿐더러 면 전역이 민통선 북방 지역이다. 해안분지는 일명 펀치볼로 불리기도 한다. 이 이름은 분지를 원으로 둘러싸고 있는 날카로운 봉우리와 가운데가 움푹 파인 모습이 마치 화채그릇 같아 한국전쟁 당시 종군기자들이 붙인 것으로 유래되고 있다. 고려 때는 번화라고 불렸으며, 1895년(고종 32)에 해안면이 설치됐다.
해방 이후 북한이 통치했으나, 한국전쟁 기간과 휴전 후 행정권이 회복되기까지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았다. 1956년 4월 25일 전국 각처에서 모인 160가구 965명이 유휴지 개간을 목적으로 첫 입주한 후 1997년 현재 477가구 1,802명이 거주하고 있다. 이 같은 특수한 인구 활동 환경은 오랜 기간 문화적 갈등을 거치면서 해안분지 내에만 있는 독특한 문화상을 만들어놓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의 마을들은 거의 모두 한때 인구 활동이 단절되었던 지역일 뿐더러 물리적으로 거주가 이루어져 해안분지와 비슷한 문화환경을 갖고 있다. 최근 민통선 북방 지역의 이 같은 인류사회학적 현상은 학계의 연구 대상이 되고 있으며, 일부에서는 이 일대의 독특한 문화환경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방안을 제기하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의 인구 구성에서 중요한 특징은 6 · 25 이전에 거주했던 원주민의 낮은 구성 비율이다. 지역주의 조장 또는 주민 화합을 저해한다는 이유 때문에 공식적으로 민통선 북방 마을의 원주민 구성 비율을 조사한 일은 없다. 그러나 1987년 자연보호중앙협의회가 실시한 민통선 북방 지역 자원 조사의 보고서에 따르면 민통선 북방 지역의 원주민 구성 비율은 평균 10%를 넘지 않고 있다.
이 보고서에 따르면 강원도 철원군 민통선 북방 지역의 경우 총 1,289세대 중 586세대가 원주민이어서 비교적 높은 원주민 구성 비율(45.5%)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강원도 고성군 현내면 명파리는 137세대 중 원주민은 12세대(8.8%), 면 전체가 민통선 북방 지역인 양구군 해안면은 490세대 중 원주민은 49세대(10%), 방산면 천미리는 21세대 중 원주민은 1세대(4.7%)로 낮은 구성 비율을 보이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의 경우 전 주민의 80%가 원주민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연천군 중면 회산리는 41세대 중 2세대(4.8%), 삽곶리는 30세대 중 3세대(10%)가 원주민이다. 강화군 교동면의 원주민 구성비가 높은 것은 도서 지역인 이 일대가 지역적 고립성으로 인해 6 · 25를 거치면서도 원주민의 거주가 단절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또 철원군의 민통선 북방 지역도 이 일대가 곡창지대이기 때문에 유휴지 개발에 큰 기대를 하던 원주민들이 많이 입주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민통선 북방 지역에 대한 원주민 구성 비율이 낮은 이유는 수복지구 행정권이 대한민국에 이양되면서, 이들 민통선 북방 마을들이 원주민과 함께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외래민에 의하여 건립되었기 때문이다. 실례로 강원도 고성군 명파리의 경우 1957년 5월 11일 난민개척사업으로 50세대가 첫 정착을 했으나 당시 원주민은 9세대밖에 포함되지 않았다. 또 1973년 7월 20일 정착된 철원군 김화읍 유곡리는 최초 60세대가 입주했으나 이 중 30세대는 전역을 앞둔 현역 장교와 하사관들이었으며, 나머지 30세대는 35세 이하의 예비군들로 한정하는 등 마을 인구를 물리적으로 구성했었다.
이 같은 주민 구성비는 민통선 북방 지역 마을마다 풍속과 풍습, 사회적 가치관의 차이에 따른 문화적 갈등 현상을 일으키며 새로운 풍습과 풍속을 생성했다. 특히 고유의 방언이 사라진 대신 전국 각처의 언어 습관과 군사 용어 등이 혼재한 새로운 언어 생활 형태가 나타나는 것은 대단히 주목되는 부문이다.
① 의례생활 : 민통선 북방 지역은 과거 농경생활을 해오던 지역이기 때문에 다른 지역처럼 산천제(山川祭) · 도산천제(都山川祭) · 산신제(山神祭) · 천신제(天神祭) · 당신제(堂神祭) 등의 동제가 행하여져 왔다. 그러나 민통선 북방 마을의 인구 구성에서 보듯이 이를 계승 발전시킬 사람이 없는 데다, 개척민이 갖는 특유의 가치관, 기독교(개신교) · 천주교 등의 포교로 동제의 의미와 기능이 약화되거나 사라져버렸다.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 만대리의 도산천제는 일제강점기에 면장이 제주(祭主)가 되고, 각 마을 이장들이 제관(祭官)이 되었으며,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제비(祭費)를 내던 제였다. 도산천제는 지난 1970년대 말까지 전통이 이어져 왔으나, 상당수 주민이 기독교(개신교) · 천주교를 믿기 시작하면서 그 세가 약화되다가 최근에는 제의 비용이 걷히지 않아 명맥만 유지되고 있다.
인천광역시 강화군 교동면 난정리에서도 1970년대 초반까지 마을의 평안과 풍년을 기원하는 산제(山祭)를 지내오다가 주민들로부터 제비 모금이 안 되어 중단되었다. 그러나 강화군 서도면 볼음도에서는 현재까지 음력 정월 말이나 2월 초에 길일을 택해 마을 주민들이 성의껏 내는 추렴으로 비용을 만들어 당제(堂祭)를 지내고 있다. 이는 마을 사람 대부분이 원주민으로 비교적 전통 계승 의식이 강하기 때문인 것으로 풀이된다. 동제 형식의 새로운 민 · 군 공동 제례가 행해지는 곳도 있다. 철원군 철원읍 대마리에서는 매년 10월 16일 인근 군부대와 함께 백마고지 참전용사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② 언어의 변화: 중부 방언권에 속하는 강원도 영서 지방과 경기도 북부 지방의 방언에는 자음이 첨가 또는 탈락되거나 음절의 축약, 구개음화 · 경음화현상이 두드러진 것이 특징이다. 예를 들면 ‘가을[秋]에→가을게’(ㄱ음의 첨가), ‘고치다→곤치다’(ㄴ음의 첨가), ‘대싸리→댑싸리’(ㅂ음의 첨가), ‘가[邊]에→가생이’(○음의 첨가), ‘못자리→모자리’(○음의 탈락), ‘물레방아→물방아’(음의 축약), ‘고깔→꼬깔’, ‘조금→쬐끔’, ‘성냥개비→성냥개피’(이상 경음화), ‘까마귀→까마구’, ‘거머리→그머리’, ‘치마→치매’, ‘딸기→딸구’, ‘벼락→베락’, ‘다리미→대리미’(이상 모음의 교차) 등이다. 또한 ‘감기→고뿔’, ‘수제비국→뜨데기국’, ‘타작→마뎅이’, ‘호주머니→엽착’ 등처럼 어휘 자체가 다른 경우도 있다.
이들 방언은 지금도 강원도 영서, 경기 북부 지방에서 통용되고 있거나 그 흔적이 남아 있다. 그러나 민통선 북방 지역과 그 인근 지역에서는 이들 방언이 표준어 또는 타 지역 방언과 혼용되고 있거나 빠른 속도로 소멸되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특정 지역 주민이 다수 거주하거나, 특정 지역 주민이 집단 이주한 지역에서는 그 지역 언어 습관이 보전되고 있는 특수한 현상도 나타나고 있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는 지난 1959년 4월 7일, 경상북도 울진군에서 사라호 태풍 이재민 66세대가 집단 이주한 마을이다. 이 마을은 현재 133세대로 늘어났으나 대부분 ‘민통선 1세대’로부터 분가한 주민들이며 민통선 북방 지역의 특수 상황인 이주 및 통행 제한을 받아와 이주 당시의 언어와 생활습관이 고스란히 보전되어 있다. 일상 생활에 군사문화가 유입되어 있는 것도 민통선 북방 지역 언어 습관의 특징이다.
예를 들면 ‘반찬→부식’, ‘전화로→유선상으로’, ‘볼 일 있다.→용무 있다’, ‘먹는 물→식수’, ‘소금→식염’, ‘뛰어서→구보(驅步)로’, ‘밤에→야간에’, ‘이해된다→감이 잡힌다’, ‘고개→고지’ 등이다. 옛 지명이 대부분 통용되지 않는 것도 두드러진 특징이다.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에서는 ‘지상짓개’가 ‘부대(部隊)골’로, ‘샘밭고개’가 ‘사격장골’로, ‘이둔지’가 ‘큰길가’로, ‘뱀청골’은 ‘관사마을’로 개명되어 쓰이고 있으며, 전 지역에서 무명 능선은 ‘낙타봉우리’로 불리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의 경제활동은 접경 지역의 특수한 환경으로 다양한 투자활동이 사실상 불가능한데다 바다를 이용할 수 없다는 한계가 있다. 이 때문에 경제활동은 전적으로 농업에 의존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토지 소유권 문제는 민통선 북방 지역의 최대 쟁점이 되어왔다.
1982년부터 1993년까지 시행된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법’으로 토지 소유권 분쟁은 거의 해소되었다. 그러나 토지 소유권 분쟁을 거치는 동안 원소유자와 개척자 사이에서 빚어졌던 갈등은 아직도 많은 지역에서 앙금으로 남아 있다.
토지 소유권 분쟁은 토지의 소유자를 가리기 어려운 것이 문제의 발단이었다. 같은 민통선 북방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강원도와 경기도는 수복지구냐, 아니냐는 차이점이 있다. 강원도 민통선 북방 지역은 전 지역이 해방 후 북한 통치하에 있다가 휴전협정으로 대한민국 주권하에 귀속된 수복지구인 데 반해 경기도 지역은 연천군 일부(신서면 · 중면 · 왕등면 전 지역과 위산면 · 백학면 일부)를 제외한 전 지역이 해방 이후부터 남한의 통치권에 있었다.
따라서 토지 소유권 분쟁은 주로 강원도와 경기도 연천군에서 발생하였다. 이들 지역의 영농은 수복지구이어서 토지대장 · 등기부 등 근거 서류가 갖추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착수되었다. 당초 출입영농을 소유자를 가려서 허가한 것이 아니었으므로 토지의 소유자와 경작자는 처음부터 다를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입주 또는 출입이 허가된 민통선 북방 지역의 토지를 농토로 개간한 경작자에 대해 토지의 소유권자가 소유권을 주장, 토지 반환을 요구함으로써 경작자와 소유권자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기 시작하였다.
토지 분쟁은 처음 이들 토지가 대부분 전쟁으로 점유권이 이탈된 ‘주인 없는 땅’이고, 군 작전 지역에 포함되어 사실상 소유권자라 하더라도 마음대로 경작할 수 없는 ‘허가 받은 땅’이라는 점 때문에 경작자에게 유리한 입장이었다. 그러나 법정 소송에서 소유권자가 잇따라 승소하면서 토지 분쟁은 소유권자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갔다.
당시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있었던 토지 분쟁 사건에 대해 대법원 판례는 분쟁 토지에 대하여 첫째, 군 작전 지역이라 하더라도 소유권을 배제하려면 헌법 정신에 준한 법적 근거가 있어야 하며, 둘째, 한국동란에 의한 점유권 이탈은 농지개혁법 상 불경농지(不耕農地)의 개념에 속하지 아니하며, 셋째, 군이나 행정 당국에서 민통선 지역의 유휴지를 경작자에게 분배한 것은 임시적 조치에 불과한 것으로 소유권 자체를 부인하는 구속력은 가지지 못한다는 이유를 들어 토지 소유권자의 토지에 대한 권리를 인정하고 있다.
현재 민통선 북방 지역의 경작 토지는 이 같은 토지 분쟁과 수복지역 소유자 미복구 토지의 복구등록과 보전등기에 관한 특별 조치법 시행으로 대부분 소유권자가 소유하고 있다. 그러나 소유권자에게 반환된 토지는 대부분 토지를 개간해 경작하던 경작자들이 매입했거나 임대 또는 소작 형식으로 경작되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민통선 북방 지역의 자연생태계는 태백산맥과 광주산맥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다. 강원도 김화 동쪽은 1,000m 이상의 높은 산지로 형성되어 있다. 그 서쪽은 철원평야가 시작되어 서해안까지 구릉과 평야로 이어진다. 또 이 일대는 태백산맥 동쪽의 해안성기후, 태백산맥 서쪽의 내륙성기후, 다시 서해안에서 해안성기후가 만나는 절묘한 지역이다.
생태적으로는 남쪽과 연결된 온대 중부림과 북쪽과 연결되는 온대 북부림이 만나는 곳이다. 즉, 식물 분포 구계상 남북방 한계선이 되고 있기 때문에 남북방 식물이 다양하게 공존하는 지역이다. 이에 따라 동물 서식상과 곤충상이 다양하고 그 밀도도 높아 과거 풍부한 생물종 다양성(生物種 多樣性 : Biodiversity)을 보여왔던 지역이다.
민간인통제구역이 갖는 폐쇄적 속성은 자연에 대한 인간 간섭을 극히 제한할 수 있었을 것이란 가정이 가능하다. 이 때문에 일반인들은 반세기 가까이 민간인 출입이 제한된 이 일대의 자연생태계가 어느 지역보다도 잘 보전되고 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지배적이다. 그러나 각종 학술 조사는 이 일대의 자연상, 특히 삼림상이 기대만큼 잘 보전되지 않은 것으로 보고하고 있다.
환경부가 조사 발표한 비무장지대 인접 지역의 녹지 자연도 현황에 따르면, 강원도 지역은 20년생 미만의 나무가 숲을 이루고 있는 정도를 일컫는 등급7 이하가 전체의 88.4%를 점유하고 있다. 향로봉산맥 일대는 50년생 이상의 나무가 주를 이루는 등급9의 임상을 보이고 있으나 전체의 1.5%에 불과하다. 경기도 지역도 마찬가지 사정이어서, 등급7 이하가 87.3%를 점유하고 있다.
특히 등급2 이하가 51.2%나 되어 사실상 삼림 생태계의 발전이 중단된 상태를 보이고 있다. 이 자료는 민통선 북방 지역을 포함한 비무장지대 인접 지역의 삼림생태계가 상당한 범위에서 생태적 천이(生態的 遷移 : Ecological Succession)가 중단된 방해극상(妨害極相)으로 유지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 온대지방의 경우 삼림이 파괴된 후 극상림(極相林 : Climax Forest)에 도달할 때까지 150∼200년이 걸린다고 볼 때 현재 이 일대는 생태적 천이가 지속 중이거나 천이 자체가 방해받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6 · 25 당시 이 일대는 장기간 치열한 전장의 한가운데였으며 휴전 후에도 군대의 주둔으로 사실상 삼림생태계의 보전은 보장되지 않았다. 그러나 과거 농경지와 취락지는 오랜 기간 동안 방치됨으로써 습원 생태계가 잘 발달된 지역이 많다. 김화 서쪽부터 임진강 하류까지는 습원 생태계가 잘 발달된 대표적 지역이다. 습지는 다양한 식물이 모여 살기에 좋은 땅이며 각종 미생물의 번식을 돕고 토양 소동물을 증식시킴으로써 자연적으로 양서류 · 파충류 야생조류 등에 좋은 서식환경이 되고 있다.
최근에는 국지적으로 인위적 파괴가 심각하기 때문에 이를 보호해야 한다는 비판이 일고 있다. 또한 학계에서도 이 일대의 자연 생태계를 전쟁 파괴로부터 복구되어 가는 생태적 천이과정, 과거에는 나타나지 않았던 새로운 자연질서의 형성, 생물종 다양성 문제에 더 비중을 두고 접근하는 경향이다.
⑴ 샘통과 절종위기의 조류(鳥類)
국제조류협회(ICBM)은 남북한을 통틀어 우리나라에 노랑부리백로 · 황새 · 저어새 · 원앙이사촌 · 가창오리 · 붉은가슴흰죽지 · 호사비오리 · 참수리 · 흑두루미 · 두루미 · 재두루미 · 알락뜸부기 · 넓적부리도요 · 뿔쇠오리 · 쇠청다리도요사촌 · 검은머리갈매기팔색조 등 17종의 새들이 멸종 위기라고 경고하고 있다. 이 가운데 흑두루미 · 두루미 · 재두루미 · 호사비오리 등의 4종은 민통선 북방 지역 철원평야에 도래하는 철새이다.
철원평야에는 이 밖에 쇠기러기 · 큰기러기 · 청둥오리 · 쇠오리 등 겨울 철새가 집단으로 도래하고, 중간 기착하는 이동 철새의 이정표가 되어 세계적으로 주목받고 있는 지역이다. 철원 민통선 북방 지역에 철새가 도래하는 가장 큰 이유는 얼지 않는 샘인 샘통이 만들어놓는 커다란 늪과 인공호수, 풍부한 먹이 때문이다.
샘통은 제4기 화산활동 기간에 생긴 경미한 온천과 같은 천연샘이다. 철원읍 내포리에서 용출된 물줄기는 양지리 한탄강까지 6㎞ 길이의 작은 하천을 만들며 얼어붙은 겨울 벌판에서 오아시스 같은 역할을 하고 있다. 또 농경지를 개발하면서 평야 한가운데 조성된 강산 · 학저수지 등 대형 인공호수들도 철새들을 유인하고 있다. 민통선 북방 지역의 농경지 개발은 두루미 등 희귀 철새들을 불러모으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철원평야는 대부분 지역에서 비무장지대 남방한계선까지 농경지가 개발되어 있다. 이들 농경지는 일부 정착촌락을 제외하고 대부분 지역에서 민간인이 거주하지 않는 출입영농으로 경작되고 있으며 영농단위가 크기 때문에 다른 어느 곳보다도 기계화 영농방식이 정착되었다. 기계화 영농은 효율성에서는 크게 앞서지만, 낱곡을 많이 떨어뜨려 섬세성에서는 재래 농법에 비해 뒤진다. 바로 이 같은 농지개발과 기계화 영농 도입은 철새들에게 풍부한 먹이를 제공하고 있다.
⑵ 귀화식물
민간선 북방 지역 전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식물 생태계 변화의 하나가 귀화식물 돼지풀(英名 : Hogweed)의 출현이다. 북아메리카가 원산지인 이 풀은 국화과의 1년초로 7∼8월에 피는 노란 꽃의 꽃가루가 건초열(乾草熱, Hay · fever) 알레르기를 일으키는 독초로 분류되고 있다. 「만주식물목록」(1925년) 에는 오래 전부터 만주 벌판에 돼지풀이 자생했으며, 풀 화분병을 일으킨다고 기록하고 있다.
북아메리카나 지중해 연안에는 20여 종의 돼지풀이 분포하고 있으나 현재 민통선 북방 지역에는 단풍잎돼지풀과 둥근잎돼지풀 2종류가 가장 많이 자생하고 있다. 이 풀은 나대지 등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며, 어느 곳이든지 한번 침입하면 2∼3년 내에 대군락을 이루는 왕성한 생명력이 특징이다. 이 풀이 어떻게 우리나라에 귀화했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다.
다만 지난 1980년대 초 ‘구제(驅除)해야 할 독초’로 신문에 보도되면서 세상에 알려졌다. 돼지풀이 민통선 북방 지역에서부터 출현해 전국에 분포하게 되었다는 추정에 따라, 6 · 25 당시 군수품에 묻어 들어와 자생하기 시작하였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있다.
이 풀은 특별히 자생지를 지적할 수 없을 만큼 민통선 북방 지역 전역에 퍼져 번성하면서 토착 식물 생태계를 간섭하고 있다. 주둔 군인들은 이 풀의 꽃가루가 두드러기를 일으키며 잎이 쑥처럼 생겼다고 하여 ‘두드러기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⑶ 유행성출혈열 · 광견병 · 말라리아
과거 농경지이거나 촌락이었던 지역이 오랜 기간 방치된 상태인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북방 지역의 자연환경이 특정 질병을 유발시킬 수 있는 조건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한 조사보고는 아직 없다. 그러나 민통선 북방 지역에서는 한국전쟁 중 유행성출혈열이 창궐했으며, 1990년대 들어서는 오래 전 자취를 감췄던 광견병과 말라리아 같은 후진국형 질병이 발생하고 있다. 이 같은 현상은 새삼 이 일대에 특수한 자연환경이 질병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① 유행성출혈열 : 아시아 · 북아메리카 · 아프리카 등 전세계적으로 출현하는 유행성출혈열의 병원체는 ‘한탄 바이러스(Hantaan Virus)’이다. 이 병원체는 1976년 고려대학교 미생물학 교실의 이호왕(李鎬汪) 교수팀에 의해 흰등줄쥐의 폐 조직에서 발견되었으며, 1981년 한탄강 유역에서 발생한 질병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 최초로 한국 지명을 따 등록되었다.
이 병은 한국전쟁 중이던 1951년 우리나라에 처음 알려졌다. 당시 전선은 현 휴전선 일대에서 교착 상태에 있었으며, 1951년 가을부터 1953년 여름까지 철원 · 파주 일대에 주둔하던 미군 병사들이 이 병을 많이 앓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1930년대 과거 소련 연방 극동 지방에서 나타났던 신증후출혈열(新症候出血熱), 1940년대 만주에서 나타났던 송고열(Songo fever) 등과 임상 증세와 병리적 소견이 유사했으나 병원(病原)을 몰라 ‘한국형 출혈열’이라고 불렀다.
이 병은 우리나라의 주둔 군인을 괴롭혔으며 1970년대에 들어서는 농민들이 많이 앓았다. 예방 백신이 개발되기까지는 가을철 철원 · 파주 · 연천 지방에서 발병하는 괴질로만 알려졌었다. 유행성출혈열은 현재도 주로 철원 · 파주 · 연천 등 전방 지역에서 발생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이 병은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민통선 북방 지역에 대한 바이러스의 잠재성을 인식시키고 있다.
② 광견병 : 우리나라에서 제22종 법정 전염병인 광견병이 마지막 발생한 해는 1987년으로 기록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민통선 북방 지역 일대에서는 거의 해마다 이 병이 발생하고 있다. 1993년 9월 18일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에서 개 한 마리가 한 어린이와 또 다른 개 한 마리를 물고 달아났다가 이틀 후 죽은 모습으로 발견된 사건이 발생했다. 죽은 개의 병성 감정 결과 진성 광견병으로 밝혀졌다.
1994년 2월 12일은 연천에서, 13일은 철원에서, 15일은 화천에서, 다시 20일 · 25일 · 27일은 철원에서 광견병이 발생했다. 광견병이 발생한 지점들을 선으로 이으면, 대개 민통선을 넘나들며 비무장지대와 평행선을 이루고 있다. 이 일대에서는 1993년 이래 해마다 광견병이 발생해 주민들을 긴장시키고 있다.
광견병은 처음 개가 개를 물어 전염시켰으나, 나중에는 너구리나 오소리 등 야생동물이 가축 우리를 침입해 소를 물어 전염시키는 바람에 양축 농가들이 대책에 부심하기까지 했다. 어떻게 민통선 북방 지역 일대에서만 광견병이 지속적으로 발생하고 있는지에 대한 역학조사 결과는 보고되지 않고 있다. 다만 서식밀도가 높아진 야생동물들이 이 병을 옮기고 있다는 개연성은 대단히 높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광견병이 첫 발생했던 철원군 동송읍 오지리에서는 사건 한 달 전인 1993년 8월 18일 문제의 개가 오소리와 싸운 사실이 확인되었다. 당시 병인 조사단은 문제의 개가 광견병을 앓고 있는 오소리와 싸우다 물려 공수병원균에 감염되었으며 1개월간의 잠복기를 거쳐 발병했을 것으로 추정하였다.
③ 말라리아 : 말라리아는 학질모기가 매개하는 원충(原蟲) 감염증이다. 이 병을 앓고 있는 사람의 피를 빨아먹은 모기가 종충을 또 다른 사람에게 매개하는 병이다. 이 병은 1966년 집단 발병한 이래 자취를 감추었다가 1993년 여름 파주 · 김포에서 군인과 민간인 5명에게 발병하여 민통선 북방 지역을 포함한 비무장지대 인접 지역에서 연례적으로 발생하고 있다.
⑷ 대암산 고층습원(高層濕原)
용늪은 강원도 인제군 서화면과 북면양구군 동면 · 해안면의 경계 인부 대암산(1,304m) 정상 부근 해발 약 1,280m에 위치하고 있으며, 1967년 비무장지대 학술 조사에서 고층습원(high moor)으로 밝혀졌다. 대암산 일대는 연중 기온 차가 클 뿐 아니라 연중 5개월 이상이 영하권 기온을 보이고 있으며, 동해에서 불어오는 습한 바람 때문에 안개 일수가 170일 이상 되고 있다. 용늪은 이 같은 특수한 기후 조건 때문에 지표가 결빙과 해빙을 반복하는 기계적 풍화작용이 지속되었으며, 그 뒤 습지 식물의 유체가 퇴적되어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변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용늪은 숲이 들어설 수 없는 빈영양과 과습 등의 혹독한 조건에서 발달한 자연초원이다. 따라서 이곳은 독특한 생물군을 지니는 특별한 생태계가 유지되고 있을 뿐 아니라, 퇴적층인 이탄층(泥炭層)은 시대별 주변 생태계를 밝혀줄 수 있는 단서가 되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강조되어 왔다. 또한 수원 칠보산 습원(1995년), 울산 무제치늪(1997년) 등 산지 습원의 식생이 밝혀지기 전까지는 남한의 유일한 고층습원으로 주목받아 왔다.
용늪의 이 같은 중요성 때문에 정부는 이곳을 1989년 12월 29일에 자연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하였으며, 1994년 8월 1일부터 1997년 7월 31일까지 출입을 금지시켰다. 또 지속적인 보전을 위해 자연생태계 모니터링(monitoring) 지역으로 지정되어 정기적인 감시를 받고 있다.
그러나 한국 자연생태계의 상징으로까지 주목을 받고 있는 용늪은 오히려 학계로부터 빠른 속도로 파괴되고 있는 민통선 북방 지역 자연생태계의 실상을 말해주는 실증적 자료가 되고 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용늪 주변의 산악도로 등 군사시설은 늪 생태계의 자연 천이를 방해하는 직접적인 영향을 주고 있다. 특히 1970년대 말 주둔 군인이 용늪에 둑을 막은 사건(학계서는 스케이트장으로 주장)은 늪의 육화(陸化)를 가속시킨 결정적 계기가 되고 있다. 늪이 일반에게 알려지자 각종 학술 조사 및 탐사 명목으로 일반인 출입이 늘어나, 늪을 밟아 쳐(treading) 습원 식생의 조성을 방해했다.
이 늪이 학계에 알려졌을 당시 대암산에는 큰 용늪과 작은 용늪 두 개의 늪이 50여m 간격으로 나란히 있었으나 작은 용늪은 1980년대 중반 사라져버렸다. 환경부는 1996년부터 3개년 계획으로 용늪 생태계의 보전을 위한 타당성 조사를 하고 있다.
용늪은 최장 거리 320m, 폭 180m이며, 습원 면적은 7,490㎡에 이르고 있다. 습원 표면은 20∼30㎝ 높이의 습지소철(濕地小凸) 돌기로 메워져 있으며, 끈끈이주걱 · 참사초 · 산사초 · 가는오이풀 · 물이끼 · 대암물이끼 · 자주물이끼 · 비로용담 · 처년치마 · 과남풀 · 묏미나리 · 감자개발나물 · 바늘사초 · 기생꽃 · 콩제비꽃 · 개발통 등이 자라고 있다.
⑸ 지뢰 미확인지대
민통선 북방 지역은 과거 촌락 · 경작지 · 산악지대 · 소택지 · 계곡 등 인간활동이 영위되던 곳이다. 민통선은 대체로 휴전선과 평행선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 일대는 한국전쟁의 휴전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교착 상태에 있던 전선에 해당된다. 따라서 이 일대는 민통선이 설정되어 출입영농이 허용될 때까지 민간인이 소개되어 있었고, 전장의 한복판이던 촌락 · 경작지 · 산악지대 · 소택지 · 계곡 등은 지뢰 등 폭발물이 제거되지 않은 ‘지뢰 미확인지대’로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입주 영농이 허용으로 개간지가 확대되면서 지뢰 미확인지대는 상대적으로 좁아졌다.
현재 지뢰 미확인지대는 강원도 고성 · 인제 · 양구 등에서는 과거 산간 농경지나 취락지, 철원 · 파주 · 김화 · 강화 등에서는 평야지대이었던 곳으로 군사전략상 농지 개간을 허용할 수 없는 지역에 한정되어 있다.
지뢰 미확인지대는 안전상의 이유로 민간인은 물론 군사작전도 통제되어왔기 때문에 민통선 북방 지역 내에서 휴전후 반세기 동안 인간의 직접적인 간섭을 받지 않은 유일 장소가 되고 있다. 따라서 이 일대는 과거 취락지 · 경작지 · 소택지 · 계곡 등이던 곳이 인간 간섭을 받지 않고 자연 생태적 천이(遷移)가 진행되어 가고 있는 ‘자연생태계의 교실’로 평가되고 있다.
지뢰 미확인지대는 국지적이긴 하지만 자연 생태적 천이가 진행되면서 다양한 식물상을 보이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는 다양한 동물 서식을 가능케 해 예기치 않았던 생물 천국이 되고 있다는 새로운 인식이 필요해지고 있다. 이 지대는 대부분 과거에 논이나 밭이던 경작지가 반세기 동안 방치된 지역이기 때문에 많은 식물이 모여 살게 되었고, 이들이 분해되면서 많은 유기물과 다양한 미생물을 번식시켜 각종 토양 소동물 · 곤충 · 양서류 · 파충류 · 조류 · 수류를 유인시키고 있다. 따라서 민통선 북방 지역에 흩어져 있는 지뢰 미확인지대는 작은 면적 속에 다양한 생물상을 담은 ‘생물다양성의 표본’으로 평가되어야 한다는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민통선 북방 지역에 대한 상징성이 바뀌어가고 있다. 이 일대는 과거 전장이었으며, 휴전 후에는 이 지역을 담보로 다른 지역의 평화가 유지될 수 있었다. 따라서 이 지역은 바로 남북 분단을 의미하는 곳이며, 군사 · 긴장 · 도발 · 음모 · 침묵 · 고통 등으로 관념화되어 왔다. 그러나 차츰 그 관념은 생명이라든가, 평화 · 창조 · 희망 등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분단의 현장 그 자체를 통일의 전초기지 등으로의 의미 변화가 이루어지고 있다.
이 같은 상징성의 변화는 외적으로는 냉전체제의 붕괴에, 내적으로는 경제성장에 따른 삶의 질 향상, 정치적 변혁에 따른 의식과 가치관의 새로운 정립에 기인하고 있다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 지역에 대한 이 같은 상징성의 변화는 이 지역을 시대별로 묘사하고 있는 문학 속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 지역이 우리 시에 처음 등장한 것은 1956년 박봉우의 「휴전선」이다. 이 시에서는 분단의 비극적 상황을 ‘믿음이 없는 얼굴이 마주 향한 항시 어두움 속’으로 묘사하고 있다. 또한 ‘언제 한 번 붙고야 말 독사의 혀같이 징그러운 바람/꼭 한번은 천둥같은 화산이 일어날 것’이란 위기의식으로 연결되고 있으며, 휴전선은 과거의 사건이지만 현재 진행 중이고, 미래와 직접으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이다.
1960년대 말 신동엽은 「녹슨 경의선」에서 “아 총구 사이로만 서로 건너다보는 눈망울이어/피안처럼 돌아앉아/칼을 갈고 있는 슬픈 그림자여/아! 녹슨 쇠덩이는/오늘도 북을 향해 우짖고 있다”고 읊고 있다. 이 시는 분단 비극이 통일의 열망으로 전환되는 모습을 제시하면서 분단 극복의 확실한 이념적 지표를 마련하고 있다.
1970년대 김진한의 「DMZ」는 “수염긴 염소라도 대안의 풀밭에 들어갈 순 없어/……때론 北의 꽃사슴 야음타고/자유로이 귀순한다지/어미곰 한마리 피붙이 새끼곰 찾다가/무서운 人間들의 덫, 지뢰에 죽었다지만/……”이라고 이 지역의 비극적인 상황 인식을 반영하면서 DMZ 그 자체에 대한 관심을 제시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 들어 이러한 비극적인 인식은 또 다른 인식의 전환으로 나타난다. “들국화 핀/골짜기 길을 오르다가/구멍뚫린 철모 하나를 보았다/총소리와 함성이 뒤섞이던/삼십오년 전 그날/이 철모의 임자는 쓸어졌을까?/이름없는 죽은 전사여/그대가 어는 편 사람이었든/상관하지 않으마/아, 가을빛 짙은 철원평야/억새풀 흐느끼는 옛 싸움터에/오늘도 국경없는 바람만 분다.”(민영‘추석날 고향에 가서’) 이 시 속에는 냉전논리라든가 적대의식이 희석되어 있다.
현대시 속에 그려진 이 같은 1980년대의 인식의 변화를 놓고 김재홍은 “DMZ는 아직도 국토와 민족의 허리를 가로지르고 있지만 그곳은 어느새 중립의 공간, 화해와 용서의 장으로 서서히 변모해 가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인식의 변화는 비단 문학에서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이 지역에 대한 상징성은 이미 전 분야에서 바꾸어지고 있다. 정치가는 평화 도시의 구상을 발표하고 있으며, 생태학자들은 생물종 다양성 공원을, 문화예술인들은 축제의 공간을, 기업인들은 관광단지나 사회간접자본 투자를 꿈꾸고 있다. 이미 지방자치단체들은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북방 지역을 상품화한 관광코스를 개발하고 있다. 또한 이 지역의 지가(地價)가 상승함으로써 향후 부동산 투자가치에 대한 일반인들의 기대 심리를 반영하고 있다.
비무장지대와 민통선 북방 지역에 대해 이같이 다양한 상징성이 제시될 수 있는 것은 ‘이 일대가 자연생태계가 잘 보전된 채 미래를 위해 개발이 유보된 잠재력이 있는 땅’이라는 생각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통일과 평화 · 미래를 위해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 현실적 과제이면서도 어떻게 이용할 것인가를 놓고는 벌써부터 심각한 갈등이 빚어지고 있다. 이 지역은 통일이 되면 사라질 수밖에 없는 한시적 지대이기 때문에 이 문제는 통일 문턱에서 이 지역이 안고 있는 최대의 과제가 되고 있다.
(1) 자연생태계 보호를 둘러싼 생각의 차이
1995년 9월 강원도 철원 · 양구 · 인제 · 고성 등 4개 군의 민통선 북방 지역 609㎢를 자연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하기로 했다. 예정지는 향로봉산맥 보호지역 363㎢(고성 · 인제), 대암산 두타연 보호지역 155㎢(양구 · 인제), 철원평야 보호지역 91㎢(철원) 등이다. 정부는 이 일대가 수십 년간 일반인의 접근 통제 및 개발 금지로 희귀 동식물의 서식지로 확인됨에 따라 유네스코의 인간과 생물권 계획에 따른 생물권 보전지역으로 유네스코에 지정을 요청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이 같은 계획은 지역 주민 지방자치 단체의 반발로 제도를 개선한 뒤 재추진하기로 하였으며, 이 방침에 따라 1996년 7월부터 1년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는 자연생태계보호지역 예정지를 중심으로 ‘민통선 지역의 생태계 보전과 지역사회 활성화 동시 달성을 위한 조사연구’를 단행했다. 당시 지역 주민과 지방자치단체들은 이 일대가 그 동안 군사시설 보호 등 각종 규제를 받아와 지역 개발에서 소외되어왔다는 점을 들어 향후 자연생태계 보호지역으로 지정될 경우 건축물의 증 · 개축, 토지의 개간, 벌채 등 18종에 걸친 규제를 받게되어 주민 생활과 지역 개발에 결정적인 지장을 받게 된다며 반발했다.
(2) 접경지역 개발을 둘러싼 생각의 차이
① 접경지역 개발 지원법의 추진 : 정부는 1995년부터 민통선 인근 지역을 개발 또는 보전하기 위한 ‘통일 기반 조성을 위한 접경지역 지원에 관한 법률안’을 추진해 오고 있다. 이 법안 추진은 비무장지대 및 접경지역이 향후 남북간에 경제협력 등 접촉과 교류가 본격화될 경우 중요 거점이 될 수밖에 없다는 판단에 따라 이 지역을 세계 평화를 상징하는 평화지역(Peace Zone)으로 만든다는 구상에 근거한 것이다.
이 법안 시안에 따르면 정부는 접경 지역 개발 종합계획과 연도별 투자계획을 수립, 이 지역에 대해 사회 간접자본을 확충하고 민간투자를 유치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 시안은 또 투자 재원 마련을 위해 접경 지역 특별회계를 설치토록 했으며, 이 지역 시 · 군에 대해 지방교부세 양여금과 국고 보조금을 특별 지원토록 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안을 둘러싸고 정부 부처간, 지방자치단체 및 지역 주민과 환경단체간 의견 차가 상당해 논란이 거듭되고 있다.
우선 강원도와 경기도 등 관련 지역 지방자치단체와 지역 주민들은 이 법률안 마련에 적극적인 자세를 보이고 있다. 이들은 통일 전초 기지로서 이 지역의 역할과 그 동안 주민들이 겪어온 불편을 내세우며 이 지역의 개발에 숨통을 터놓아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이 법안은 지금까지 정부가 환경부를 중심으로 추진해오고 있는 ‘자연생태계 보전지역 지정’계획과 근본적으로 배치되고 있다. 이 때문에 환경부와 환경단체는 비무장지대를 포함한 민통선지역이 자연의 보고라는 점을 들어 이 지역의 개발 확대에 반대하고 있다.
② 안보관광지 개발 : 민통선 북방 지역의 관광개발은 1990년 정부가 12년 계획으로 강원도 철원 · 화천 · 양구 · 인제 · 고성 등 5개 군 8개 지구를 포함한 민통선 북방 전 지역에 대한 안보 관광벨트 개발 구상을 발표하면서 본격화되었다.
강원도 철원군은 제2땅굴과 전적지를 중심으로 안보 관광코스를 개발하여 일반인을 유치하고 있으며, 양구군은 해안분지의 이색적 지형과 제4땅굴을 관광 상품화하여 일반인을 유치하고 있다. 1997년부터는 지방자치단체가 민통선 북방 지역을 안보관광 상품화하여 공개함으로써 일반 여행사들도 참여하고 있다. 이 밖에 사회단체 환경단체를 중심으로 문화탐방 · 생태기행 형식의 비영리 학술탐방도 성행하고 있다.
(3) 학술조사 · 학술대회의 학자들 생각
① 자연생태계 조사 : 민간인통제구역에 대한 자연생태계 조사는 1966년과 1967년 한국자연보존회가 미국 스미소니언 연구소의 지원으로 실시한 DMZ 인접지역 종합학술 조사가 효시이다. 이어 1974년 문화공보부의 지원으로 재조사를 실시 최초의 보고서를 냈다.
1985년에는 강원대학교와 강원일보가 공동으로 강원도 지역에 대한 ‘민북지역 종합학술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87년에는 자연보호중앙협의회가 자원문화유적 자연생태 등 3개 분야 17개 반으로 조사단을 편성, 종합학술조사를 실시하여 같은 해 「민통선북방 지역 자원조사보고서」 강원도편과 경기도편을 발간했다. 정부는 1995년 환경부 주관으로 식물 · 곤충 · 포유류 · 조류 · 담수어류에 대한 자연생태계 조사를 실시하였다.
② 학술대회 : 한림대학교 국제문제연구소는 1996년 5월 강원도 양구군 해안면에서 ‘DMZ의 오늘과 내일’이란 주제로 학술회의를 개최하였다. 이날 학술회의에서는 DMZ의 평화화 구상, 국제법상 DMZ의 발전적 활용, DMZ의 남북관광자원 공동개발, 남북한 영공개방, DMZ의 사회학적 접근과 이해 등 5개 주제가 발표되었으며, 사상 처음 민통선 북방 지역 남방한계선상에서 개최되어 화제가 되었다.
한반도 비무장지대의 환경보전과 개발에 관한 국제심포지엄이 1996년 6월 한국조경학회와 중앙개발연구소 주최로 서울에서 열렸다. 이 심포지엄에서는 국토 계획 및 지역 개발, 환경 보전 정책, 조경 및 환경 계획, 민간 부분 개발 사업 등의 주제 발표가 있었다. 또한 비무장지대의 보전 · 이용 · 개발을 위한 정책 · 계획, 그리고 정책 대안을 모색하고 현재 비무장지대가 안고 있는 과제와 현안에 관한 학술적 검토에 초점을 맞추고 진행되었다.
(4) 문화예술인 · 민간단체의 생각
① DMZ예술문화운동작업전 : 비무장지대 예술문화운동협의회가 한국비무장지대를 주제로 열고 있는 비엔날레이다(일명 FRONT DMZ 작업전). 1991년부터 2년마다 한 번씩 개최되고 있으며 1995년 대회까지 770여 명의 작가가 참여하였다. 이것은 비무장지대는 정치적 산물이지만 이 역사적 공간을 완벽한 생태계 공간으로 보전함으로써 ‘비탄의 땅’을 ‘영광의 땅’으로 승화시키고 한민족의 공동체적 미래와 삶의 터전을 이룩한다는 뜻을 담고 있다. 1995년에는 이 전람회에 참가한 작가들의 작품은 물론 DMZ를 축으로 역사 · 해방 · 민족 · 분단 · 관용 · 자유 · 생태 · 생명 · 환경 등에 관한 문화 · 예술 · 학술인들의 시대적 발언을 담은 「비무장지대의 과거 · 현재 · 미래」를 발간하였다.
② 금강산 남강 연어 방류 : 강원도에 있는 강원도민일보사와 사단법인 우리밀살리기 운동은 1997년부터 비무장지대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는 금강산 남강의 지류에서 연어 치어를 방류하고 있다. 이 신문은 과거 이 일대의 자연생태계 학술 조사를 토대로 1995년부터 연어 방류 타당성 조사를 실시하였으며, 1997년 4월 2일 양양 내수면 연구소의 지원을 받아 1만 마리의 어린 연어를 첫 방류하였다. 이 사업은 모천 회귀성 어류인 연어를 통해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이용 방안과 남북 교류 및 경제협력 방안을 모색하는 데 목적을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