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료는 연소를 통해 열이나 빛 또는 동력을 얻을 수 있는 재료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연료에는 석탄류, 석유류, 가스류, 임산연료(땔감)가 있다. 과거에는 임산연료를 사용했으나, 석탄·석유·천연가스와 같은 지하매장자원인 화석연료로 변화했다. 새로운 형태의 연료로 핵연료가 발전용 연료로 등장했다. 최근에는 바이오연료, 수소연료 등이 이용되고 있다. 2012년 기준으로 1차 에너지 공급량 중 석탄은 8100만 TOE(29.1%), 석유(에너지유)는 4400만 TOE(15.9%), LPG는 1000만 TOE(3.6%), 천연가스는 5000만 TOE(18%)이다.
우리나라의 주요 연료에는 석탄류, 석유류, 가스류, 임산연료(땔감)가 있다. 과거에는 장작 · 솔가지 · 잡목 줄기 · 낙엽 · 짚 · 건초 등 임산연료를 사용하였지만 현재는 석탄 · 석유 · 천연가스와 같은 지하매장자원, 즉 화석연료의 이용으로 변화하였다.
국민연료는 임산연료, 석탄, 천연가스 순으로 발전하였다. 천연가스는 수요 증가에 따라 안정적 공급을 위한 도시가스 배관망 확대 사업이 진행되었으며, 가스터빈 복합발전이라는 천연가스 이용 형태의 변화도 발생하였다. 또한 새로운 형태의 연료로서 석유류, 석탄류, 가스류 외에도 핵연료가 발전용 연료로 등장하였으며 최근에는 바이오연료, 수소연료 등이 이용되고 있다.
탄광 개발은 개항기인 1890년 초부터 시작되었다. 본격적인 석탄 사용은 한국전쟁 때에 처음으로 민수 연료인 22공탄이 생산 · 공급되면서 시작되었다. 급격히 증가되는 무연탄의 소비를 충족시키기 위해서 1956년에 처음으로 「석탄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여 초기 연료 개발 지원정책을 수행하였다. 그 뒤 5단계에 걸친 각종 지원정책으로 우리나라의 무연탄 생산량은 1985년 2254만 톤에 도달하게 되었다.
1966년 「석유류제품 사용억제정책」과 1차 석유파동을 전후하여 「석탄장기개발계획」이 발표되었다. 1978년에는 무연탄 수요가 국내생산 무연탄으로 소비를 충족시킬 수 없어, 처음으로 해외 무연탄 수입이 시작되었다. 2차 석유파동을 전후로 하여 에너지원 다원화 정책이 실시되면서 국산 에너지에 대한 적극적인 정책지원이 이루어진다.
또 22공탄 이용 연소기기 개발에 따라 22공탄의 소비 구성 비율은 연 20% 정도씩 증가하였다. 특히 1985년과 1986년도에는 22공탄 보일러의 보급 · 확산에 따른 무연탄 소비가 국내 생산량을 초과하여 약 230만 톤 정도의 외국 무연탄을 수입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우리나라에서 무연탄은 국내 에너지 중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으며, 국민연료로서 1990년대 초반까지 확고한 위치를 유지하게 되었다. 즉, 22공탄 또는 19공탄 형태의 연탄 연료는 가정 · 상업 부문에 있어서 취사 · 난방용으로 절대적인 연료원이었다.
에너지를 이용하는 연소기기 역시 단순 아궁이식 화덕에서 연탄보일러와 같은 보다 발전된 열이용기기의 개발로 이어졌다. 연탄보일러의 개발 · 보급은 1980년대 후반기에 연탄 소비 증가를 유발하였으며, 1990년대에는 가정 · 상업 부분에서 에너지 다소비를 일으켰다.
이는 에너지원이 국민의 음식문화와 주거환경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또 일산화탄소 감지기 개발 보급 사업에도 불구하고 연탄 연료의 연소특성상 일산화탄소에 의한 중독 및 사망사고를 완전히 해결할 수는 없었다.
무연탄 생산량은 약 2760만 톤에 이른 1986년을 기점으로 감소하기 시작하여, 1990년 1700만 톤, 2000년 400만 톤, 2012년 21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이러한 현상은 가정 · 상업용 부분의 연탄 소비 감소에서 비롯되었다.
연탄 소비의 직접적인 감소는 1986년과 1987년에 액화천연가스(Liquified Natural Gas, 인도네시아 아륜산)의 도입에 원인이 있다. 즉, 연탄의 단점인 무연탄에 함유된 황화합물 연소시에 발생하는 유해가스, 아궁이식 연소기기에 의한 주부 활동의 제약, 그리고 일산화탄소 발생에 의한 인명피해 등을 해결함과 동시에 이용이 편리한 순간점화식 가스 취사는 자연적으로 연탄에서 도시가스 및 프로판가스로의 전환을 가져왔다.
그 결과 1990년대 이후 무연탄, 즉 연탄의 소비는 급격히 감소하게 되었으며 국민연료로서의 위치는 가스연료로 교체되었다. 1989년에는 기존의 석탄관련법을 「석탄산업법」으로 통합하고 석탄산업의 구조조정을 추진하게 되었다.
1989년에 시행된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은 석탄산업 구조조정 정책으로 한국전쟁 이후 국민연료로서 국가 발전과 국민 생활환경 개선에 크게 이바지한 무연탄 탄광사업과 연탄산업의 기여도에 보답하는 정책의 일환으로 추진된 정부 정책사업이다.
이 사업의 핵심은 비경제적인 탄광의 폐광 유도와 경제성 있는 탄광을 중점 육성하는 것이다. 정부의 「석탄산업합리화정책」이 시행됨에 따라 무연탄 채탄이 진행 중인 탄광은 1988년 347개에서 1995년 11개로, 생산량은 1988년 2329만 톤에서 1995년 630만 톤으로 줄어들었다.
또, 1990년 하반기에는 40년간 국민연료였던 무연탄 산업이 점진적으로 정리되어 연탄 연료 시대를 마감하고 천연가스에 그 역할을 이양하게 되었다. 2010년 기준으로 무연탄 채탄이 진행 중인 탄광은 5개이며, 생산량은 210만 톤이다.
유연탄은 특성상 가정 · 상업 · 수송 분야에서의 수요가 없으므로 산업 분야에 국한되어 있다. 만일 산업 분야에서 유연탄 연료가 없었다면 다른 대체에너지원인 석유의 소비가 급격히 증가하였을 것이다. 1985년 산업부문의 최종 에너지 소비 중 유연탄의 비중은 31.5%이다. 1996년에는 약 25.2%를 차지하였으며, 2006년에는 약 18.9%, 2012년에는 약 20.1%를 차지하였다.
이에 반해 발전용 연료원에 대한 유연탄의 비율과 총 1차 에너지에서 차지하는 유연탄의 비율은 증가해왔다. 1985년의 발전용 연료원에 대한 유연탄의 구성 비율은 24%였는데, 1996년에 24.2%, 2006년에 24.7%, 2012년에 42.1%였다.
1985년 총 1차 에너지 소비에서 유연탄의 소비가 차지하는 비율은 약 17.2%였으며, 1996년에는 17.9%, 2006년에는 22.1%, 2012년에는 27%이었다. 유연탄은 국내에서 생산되지 않으므로 전량 수입에 의존하고 있다. 1981년에는 총 724만 톤을 수입하였는데 수입량은 점진적으로 증가하여 1991년에는 2790만 톤, 2001년에는 6190만 톤, 2012년에는 1억 1460만 톤을 수입하였다.
유연탄의 주요 소비처는 첫 번째로 제철 및 시멘트 산업 분야를 들 수 있다. 경제개발이 본격화되는 1970년대 후반부터 포항에 종합제철소(지금의 포스코㈜)를 건설 · 운영하였으며, 추가로 광양에 제2종합제철을 건설하여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제철사업, 즉 철강 산업은 연료 다소비형 산업이다. 그러므로 제철사업에 필요한 연료는 유연탄을 사용하는 것이 유일한 방안이다.
철광석의 환원 반응과 열 공급을 할 수 있는 제철사업에 충당되는 유연탄은 고급유연탄(코크스용 유연탄)이며, 국내 소비는 1980년대 초 연간 약 600만 톤에서 1990년대 초 약 1200만 톤, 2000년대 초 약 2000만 톤, 그리고 2012년 약 3000만 톤으로 지속적인 증가 추세를 보였다.
또 다른 산업 분야 즉, 발전 분야 역시 많은 양의 발전용 유연탄을 소비하고 있다. 발전용 유연탄은 1980년대 중반부터 수입되기 시작하였으며, 1980년대 말경에는 약 1000만 톤을 수입하였다. 그 뒤 지속적인 석탄발전소 건립으로 발전용 유연탄의 수요는 증가하여 2000년대 초에는 약 3300만 톤, 2012년에는 약 8000만 톤이 소비되었다.
이와 같이 석탄화력발전 비율이 꾸준히 증가한 원인은 국민소득 증가에 따른 동력에너지인 전력의 수요가 급격히 증가하였기 때문이다. 동시에 국내 산업의 자동화, 로봇화에 따른 산업용 전력의 수요 증가에도 원인이 있다.
석유가 우리나라에서 에너지로 사용되기 시작한 시기는 1920년대 이후이며, 최초의 정유공장은 1935년에 조선석유주식회사가 설립한 원산공장이다. 1945년 8월 미군정청에 의하여 석유배급 대행회사가 설립되었으며, 1949년 1월에 코스코(KOSCO)가 설립되어 완제품인 각종 석유류 제품을 수입 · 판매하게 되었다.
경제개발계획의 추진과 더불어 급격히 증가되는 산업용 에너지원의 확보와 석유화학공업 및 비료공업의 원료인 납사의 안정적 공급을 위하여 1962년 10월에 대한석유공사(현 SK에너지)를 설립하여 울산에 정유공장을 건설하였다. 동시에 전기 3사를 통합하여 경제개발계획에 필요한 전력 공급을 위해 석유화력발전소 건설 계획을 제1차 장기전원개발 5개년 계획에 포함시켜서 발전용 석유류 제품의 수요가 증가하게 되었다.
초기 단계의 정유능력은 하루 3만 5000배럴의 원유를 처리하여 1965년에는 총 1033만 배럴의 원유를 정제하여 에너지유계(휘발유 · 등유 · 경유 · 경질중유 · 중유 · 중질연료유 · 제트유)는 1018만 배럴, 가스계(프로판 · 부탄)는 1만 3000배럴, 비에너지계(납사)는 12만 배럴을 생산 · 공급하였다.
1967년 5월에 호남정유주식회사 설립을 시작으로 경인에너지주식회사, 극동석유주식회사, 쌍용정유주식회사가 차례로 설립되었다. 1985년에 우리나라 원유 정제능력은 5사 총합계 하루 79만 배럴을 정제하였으며, 에너지계 8종 제품, 가스계 그리고 비에너지계 4종의 석유류 제품을 생산 · 공급하였다.
그동안 석유류 제품은 각 분야, 즉 민수산업, 산업 발전 및 수송 분야의 주종 에너지원으로 경제개발계획의 원동력이 되어왔다. 1990년 최종 에너지 소비 중 제조업은 약 1억 2천만 배럴, 수송 부문은 약 1억 배럴, 가정 부문은 약 4천만 배럴을 소비하였다.
2000년 최종 에너지 소비 중 제조업은 약 3억 2천만 배럴, 수송 부문은 약 2억 2천만 배럴, 가정 부문은 약 7천만 배럴을 소비하였다. 그리고 2012년에는 최종 에너지 소비 중 제조업은 약 4억 4천만 배럴, 수송 부문은 약 2억 6천만 배럴, 가정 부문은 약 2천 5백만 배럴을 소비하였다.
1980년대 후반까지 국내 정유회사의 원유 정제산업은 원유의 물리적 분리 공정인 정유시설과 일부 비연료유제품(아스팔트) 생산에만 국한되어 있었다. 이는 국가에서 1·2차에 걸친 석유파동의 결과 석유의 안정적인 공급을 위해 가격과 공급물량을 정책적으로 관리하였기 때문이다.
즉, 초기 경제개발 단계를 성공적으로 수행하여 국가 산업 경쟁력 향상을 위한 국가 기간산업에 대한 정책적인 배려였다. 1990년대 초반까지 가정 · 상업용 핵심연료는 연탄인 반면, 수송 · 산업용 핵심연료는 석유였다. 따라서 1990년대까지 우리나라 원유 정제능력은 하루에 약 백만 배럴을 처리 가공하는 정유능력을 보유하였다.
이후 정유능력이 급격하게 증가하는데 이는 석유화학산업의 원료인 납사공급과 증가하는 승용차용 휘발유 · 디젤유 공급을 위한 정유 4개 회사인 SK에너지㈜(구 SK정유), S-OIL(구 쌍용정유), 지에스칼텍스㈜(구 LG정유), 현대오일뱅크(구 극동정유 · 한화에너지)의 경쟁적인 설비 확장의 결과이다.
1996년 말 국내 정유능력은 하루 약 240만 배럴이었으며, 2013년에는 약 304만 배럴로 확대 증설되었고, 가동률 역시 80% 이상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기 이후부터 본격화된 수송연료 수요 증가와 가정 · 상업 부문에서의 난방유 수요 증가 등으로 정부와 정유회사는 석유연료의 안정 · 안전공급을 위해 정책 변화와 설비투자를 실행하였다.
1994년 2월부터 석유제품의 가격연동제도를 실행하였으며 성공적인 유가연동제 실시 이후 1997년 1월부터 본격적인 석유제품의 가격 자율화(유가 자율화)를 실시하게 되었다. 유가 자율화는 석유연료가 국가의 관리 체제에서 벗어나 자유로운 경쟁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함과 동시에 공급자 위주의 연료 정책이 소비자 위주의 시장경쟁 체제로의 전환을 의미한다.
각 정유사는 단순 정유설비에 추가하여 석유제품의 고급화와 중질제품의 경질화에 필요한 추가 설비투자를 경쟁적으로 수행하였다. 이러한 현상은 동절기의 경질 난방유와 하절기의 수송용 연료를 충분히 공급하기 위한 기업 경영 기법의 변화로 이해할 수 있다.
울산과 여수로부터 최대 소비지역인 수도권에 경질제품의 원활한 수송을 위하여 1997년 9월에 약 900㎞의 송유관 건설을 완료하였다. 또 원유 도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하여 국제협력 사업과 외교를 활발히 진행하여, 중동 산유국과 1995년 8월에 에너지자원 실무협의회 구성을 합의하였다. 또한 국내 석유 유기에 대비한 원유 비축사업 역시 1980년대 초반부터 활발히 진행하였다.
지상 원유 비축기지는 1981년 8월에 1차 기지를 완공하고, 특히 원유 지하 비축설비는 외국 기술을 도입하여 1981년 9월에 착공하여 1985년 11월에 완공시켰다. 2014년 3월 말 기준, 4개의 비축기지(서산, 여수, 거제, 울산)를 운영하고 있으며, 총 127백만 배럴 정도를 비축하고 있다.
석유 부존자원에 대한 국민의 기대는 남해안 및 부산 · 포항 지역의 대륙붕 탐사 · 시추활동을 시작하게 하였으며, 많은 시행착오를 거친 뒤에 6-1광구 돌고래 지층대에서 1987년 천연가스를 확인하게 되었다. 또 1998년 7월 동해-1 가스전 탐사시추에 성공하여 2002년 3월 15일 생산시설 착공하고 2004년 7월 11일 생산을 개시하였고, 이러한 동해-1 생산시설과 연계하여 2016년 6월 동해-2 가스전을 개발하여 2016년 7월 생산을 개시하였다. 대한민국 자원안보에 기여하였던 동해가스전은 자원의 고갈로 2021년 12월 31일 생산이 최종 종료될 때까지 17년동안 천연가스 4,100만 배럴(원유 환산시) 및 콘덴세이트 390만 배럴 가량을 생산하여 24억달러 가량의 수입 대체효과를 냈다. 투자액은 1조 2천억원에 대하여 회수액은 2조 6천억원으로 220%의 회수율을 달성했다.
석유연료에 대한 국민의 욕구는 해외 석유자원개발사업으로 표출되었다. 해외 석유개발사업의 시초는 1981년 인도네시아 마두라 지역 개발이었으며, 최초의 상업성이 있는 해외 석유개발사업은 1984년 3월 중동 북예멘 마리브 유전 개발 · 참여였다. 1995년 해외 석유자원개발사업은 생산 및 개발사업 참여 8개 지역과 탐사사업 18개 지역이었다.
1997년 외환위기로 인해 해외 개발사업 진출에 난항을 겪었으나 2000년대 후반 에너지 안보의 중요성이 대두됨에 따라 해외 석유개발사업 진출이 확대되면서 2011년 기준으로 석유가스개발사업은 생산 및 개발사업 32개국, 탐사사업 27개국에 이른다.
인간이 천연가스를 최초로 이용한 기록은 중국 서한 왕조시대에 황하유역이었다. 우리나라 역시 천연가스 또는 석유로 명확히 구분되지 않은 상태의 가연성 연료에 대한 역사적 기록이 존재한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본기 신라 진평왕조의 기록에 따르면 경주 동해안 지역의 모혈암이라는 곳에서 너비 4보 5척의 별로 크지 않은 구덩이에서 불이 타기 시작하더니 비바람에 관계없이 연중 타오르다가 10월에야 그쳤다는 기록과 또 신라 태종무열왕 때에도 토함산 기슭에서 땅이 타다가 3년 만에 꺼졌다는 기록이 있다.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에도 경주의 동쪽인 포항 · 울산 · 울진 바닷가에서 땅이 탔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1637년(인조 15)에 신라 문무왕 태종릉 대왕암이 불타올라 부수어졌다는 기록도 있다.
이와 같은 기록을 현재의 연료기술 전문지식을 근거로 분석한다면 영남 남해안 지역에 천연가스가 존재하며, 이들 천연가스가 지각변동에 의해 지상으로 분출된 현상으로 유추할 수 있다. 이는 1998년에 동해에서 천연가스 매장을 확인하고 2004년에 생산을 개시함으로 과거 기록의 신빙성을 높여준 결과가 되었다.
가스연료의 직접적인 이용은 1909년 10월 서울 용산에 위치한 일한와기주식회사(일한가스㈜)로부터 최초로 석탄건류가스가 생산 공급됨으로써 가스연료 시대가 시작되었다. 초기 가스연료의 용도는 조명용이었으며 추가적으로 취사용으로 보급되었는데, 1915년 조명등 보급은 약 1만 5000개였다.
점진적으로 왕십리 코크스제조소, 부산 일한가스, 인천가스제조설비가 운영되었다. 한국전쟁으로 서울과 인천가스제조설비는 파괴되었으며 부산가스제조설비 역시 경제적인 이유로 폐쇄되었다.
액화석유가스(LPG)의 경우 1959년 미군부대로부터 유출된 LPG가 소수 가정에서 이용되기 시작하였으나 1964년 4월 대한석유공사의 가동으로 LPG가 공급되기 시작하여 일반 가정 · 상업용으로 보급됨으로써 제2기의 가스연료 시대를 맞이하게 되었다.
초기 LPG는 1964년에 약 1,000톤, 1965년에 2,000톤을 소비하였다. 동시에 1971년 5월 서울특별시는 용산구에 LPG/AIR 방식 가스설비를 완공하여 이촌동 약 3,000가구에 가스를 공급하였다. 1972년 11월 14일 서울특별시 직영으로 염창동에 납사분해 방식 도시가스설비가 완공되어 본격적인 도시가스를 서울시 전 지역에 공급하게 되었다.
1970년대 초반기의 가스연료는 수도권에 국한하여 도시가스가 공급되었으며, 타 지역은 LPG가 공급되었다. 초기 단계 가스연료의 용도는 가정, 상업 분야의 취사용이었다. 연탄의 국민연료 퇴색과 더불어 1980년대 후반부터 도시가스(천연가스)와 LPG가 새로운 국민연료로 등장하였다.
초기에는 LPG 중 프로판은 취사용, 부탄은 수송용으로 연탄, 등유 및 휘발유의 위치를 점진적으로 대체하기 시작하였으나, LPG 가스연료의 한계성 때문에 1980년 후반부터 액화 천연가스(LNG) 도입과 더불어 천연가스연료가 국민연료의 위치를 확보하게 되었다. 가정 및 상업 부문의 LPG 소비량으로 말하면, 2023년 기준 1907천톤 수준이다.
우리나라의 국민연료로 도시가스가 자리를 차지하면서 이용기기 역시 연탄식 아궁이 · 연탄보일러 · 등유 곤로 · 등유 스토브에 병행하여 가스보일러 · 가스레인지, 그리고 LPG용 이동식 히터 등 새로운 연소기기의 생산 · 보급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취사용 가스레인지의 경우 1996년 200만 개를 생산 · 공급함으로써 우리나라 가옥구조 중 부엌의 내부 구조변경을 유발할 정도로 변화를 초래하였다. 또한 우리 고유 온돌( 구들)문화의 시작이었던 신탄용 아궁이 구조는 가스 난방, 온수온돌구조로 변화되면서 우리 고유의 문화와 서구문화를 접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리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임산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높았으나, 석탄연료의 도입으로 인해 의존도가 낮아져 현재는 거의 쓰이지 않는다. 김해패총에서 나무막대를 비벼 불이 일어나게 하는 유물이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이미 난방이나 음식 조리의 수단으로 불을 사용하였고 이에 따라 알맞은 땔감을 채집하였던 것으로 추정된다.
함흥 · 웅기 등지의 신석기시대 주거지에서는 지금의 구들장과 비슷한 평평한 돌을 깔고 그 밑에 불을 피우던 흔적이 발견되었고, 삼국시대에 와서 지금과 비슷한 온돌구조가 발달된 것으로 보이는데, 조선 인조 때에는 온돌 축조를 널리 보급하였다고 한다.
우리나라는 대륙성기후로서 춥고 긴 겨울을 가지고 있다. 겨울을 따뜻하게 지내기 위해서는 다량의 땔감 준비가 필요하였고, 따뜻한 음식을 즐기는 우리 민족의 식생활은 취사용으로도 다량의 땔감을 소비하였다.
우리나라 세시풍속의 하나로 ‘정월 보름날 나무 아홉 짐’이라는 것이 있다. 이것은 정월 대보름에 나무 아홉 짐을 하면 큰 부자가 된다는 의미로 부지런함과 땔감의 중요성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또 땔나무는 겨울철에 주로 장만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취사 · 난방에 소요되는 연료 이외에도 농경생활에 소의 사육은 거의 필수적이었고, 땔감이 풍부할 때는 비료용 재를 얻기 위하여 막대한 연료가 소요되었다. 이 밖에 우리의 식기문화(食器文化)에서 도자기가 중심을 이루면서 도자기를 만드는데 막대한 양의 연료가 소요되어 산을 황폐시키는 요인이 되었다고도 한다. 또 기록에 따르면 기왓장을 굽고 제염(製塩) 또는 엽전 만드는데 다량의 연료재가 소비되었다.
인구가 증가함으로써 마을 주변의 숲은 땔감 채취로 말미암아 황폐화되었고 나무의 질이 퇴화되었다. 지난날의 역사를 보더라도 한때 세력이 왕성하였던 도읍도 주변의 숲을 탕진하게 되자 영광이 기울어져간 것을 찾아볼 수 있는데 신라의 도읍 경주도 그 당시 인구의 팽창에 의한 땔감 채취와 식림(植林)을 게을리한 탓으로 생활의 기반이 깨어져 쇠퇴해간 것으로 추측된다.
지난날 우리나라의 산림천택(山林川澤)은 모조리 왕토(王土)이고 사점(私占)이 금지되었지만 땔감의 채취는 막을 수가 없었는데 이것을 입산관행(入山慣行)이라 하였다. 조선시대 각 관사에서 필요로 하는 땔감은 공조에서 담당하였다. 『경국대전』에는 각 고을의 향리는 해마다 차례로 상경하여 땔감과 숯을 준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때 향리의 수는 332인이고 한 사람이 한 달에 땔나무 57근, 그리고 이틀에 싸리나무 일병(一柄: 10근에 해당함)을 납입해야 한다는 조항이 있다.
또 『경국대전』에는 시장(柴場)의 제도를 마련하고 있다. 즉, 땔나무를 사용하는 각 관사에게는 땔나무 채취장을 준다는 것이고, 관사에 따라 시장의 크기에 차이가 있어 큰 것은 주위 20리, 작은 것은 주위 5리의 시장이 배정되고 있다. 서민들은 공산(公山)을 공동의 힘으로 가꾸어 공동 이용하는 송계(松契) 또는 금송계(禁松契)를 조직해서 시장을 확보하였다. 이러한 자치적인 송계가 발달한 지역에서는 삼림 황폐가 방지되어 좋은 임상이 유지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는 일본인들이 삼림을 강점하게 되자 시초(柴草)를 채취할 곳이 줄어들어 주민들은 좁은 한국인 소유의 삼림에서 집중적으로 땔감을 채취하여 삼림의 황폐는 더욱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땔감의 문제가 심각해지자 1937년에 「속성연료림조성계획요강」을 내놓았다.
당시의 통계에 따르면 총 농가 호수의 약 56%는 임야를 소유하지 않아서 땔감 취득 문제가 대두되어 이러한 요강을 설정한다고 하였다. 이 요강 안에는 땔감 생산에 알맞은 수종으로 포플러류 · 아카시아 · 물오리나무 · 산오리나무 · 싸리류 · 족제비싸리 · 고리버들 · 갯버들 · 비술나무 등이 열거되어 있다. 이러한 조치도 제2차 세계대전으로 인하여 성과를 올리지 못하였고, 오히려 석유 부족으로 목탄 자동차가 사용되기 시작하면서 활엽수림이 벌채되어 삼림 황폐가 촉진되었다.
광복이 되자 남벌된 황폐한 임야를 물려받았고 한국전쟁 후에는 무분별한 땔감 채취로 삼림자원은 고갈되었다. 정부는 1959년부터 연료림조성사업을 실시하였고, 1966년부터 1967년에 걸쳐서는 연료림단기조성사업을 실시하였다. 1973년부터 실시된 치산녹화10년 계획의 하나로 연료림조성사업이 추진되었다. 이것을 「제1차 치산녹화10년 계획」이라고 하는데 그 간 20만 8000㏊에 약 10억 3700만 그루의 연료림수종이 식재되었고, 초년도의 활착률(活着率)은 89%로 집계되었다.
이 계획이 단축 실시되면서 1979년부터 1988년에 이르는 제2차 계획이 실시되었는데 이 계획안에는 연료림 조성은 없었다. 그것은 석탄연료의 보급이 증가되면서 임산연료에 대한 의존도가 낮아졌기 때문이라 할 수 있다. 최근 들어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와 신재생에너지원에 대한 관심이 대두되어 임산연료의 일종인 목재, 임업 부산물 등을 이용한 바이오에너지가 주목받고 있다.
최근에는 핵연료, 바이오연료, 수소연료 등 새로운 연료들이 사용되고 있다. 핵연료는 원자로 안에서 핵분열을 연쇄적으로 일으켜 에너지를 얻을 수 있는 물질을 말하며, 해당 물질로는 우라늄, 플루토늄 등이 있다.
또한 바이오연료는 생물유기체(바이오매스)를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에너지를 총칭하며, 동물 · 식물 · 미생물의 유기물, 유기계 폐기물 · 농산폐기물 · 임산폐기물 · 축산폐기물 · 산업폐기물 · 도시 쓰레기 등이 이에 해당된다. 마지막으로 수소연료는 석유 · 가스등에서 추출된 수소를 연료로 공급해 공기 중의 산소와 반응시켜 전기와 열을 생산하는 것으로 수송 · 발전 · 가정 · 휴대용 등 다양한 분야에서 응용되고 있다.
한정된 영토 내에서 주거생활환경 개선과 편리한 생활 추구는 연료의 이용 형태에도 많은 변화를 일으켰다. 이러한 주거환경에서 연료 분야의 변화는 1990년에 본격화되었다. 발전연료 분야에 있어서 원자력발전체계의 도입과 천연가스에 의한 가스 터빈식 복합발전의 도입은 1980년 중반 LNG 도입과 더불어 우리나라 발전 분야에 발생한 큰 변화이다.
복합발전은 발전설비의 기능상 동력과 열을 동시에 제공하는 발전 공정으로 1990년대 우리나라 사회문화에 적합한 공정으로 선택되어 급속히 증가되었다.
복합발전설비는 1996년에는 11개소가 가동 중이었으며 발전설비 용량은 약 870만㎾였다. 2001년에는 약 1140만㎾, 2012년에는 1980만㎾로 증가하였다. 가스복합발전설비는 원자력발전과 더불어 새로운 발전 공정으로 발전기술이 진일보한 수준으로 상승시키는 결과를 유발하였다.
1970년대 초 LPG 보급과 더불어 잉여 부탄가스의 이용방안을 모색 중에 수도권 택시연료의 부탄가스화를 시작하게 되었다. 199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부탄 연료에 추가해서 압축천연가스(CNG)가 승용차 대체 가스연료로 연구 · 검토되었다. 수송용으로 쓰이는 도시가스는 2001년에 약 1000만㎥ 소비를 시작으로 2006년 4억 5000만㎥ 등 지속적으로 증가하였으며, 2012년에는 약 11억 9000만㎥가 수송용으로 소비되었다.
도시가스 수용가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도시가스를 안정적으로 공급하기 위하여 1995년 말 기준 총 6만 1723㎞의 가스배관을 매설하였다. 6만 1723㎞ 구성은 전국 주배관 3,977㎞, 도시가스 공급관 6,747㎞, 수용가 배관(저압용) 5만 989㎞으로 구분된다.
2012년 기준으로 우리나라의 도시가스 수요가 수는 1576만 가구에 이르며, 도시가스사업자들이 최초 도시가스사업을 시작한 후 지금까지 7조 5700억 원을 투자한 결과 배관연장은 24만 8816㎞에 이른다. 2012년 기준으로 경인지역에 7개, 광역시에 5개 회사, 각 지방에 20개의 도시가스회사가 도시가스를 공급하고 있으며 2013년 약 5300여억 원을 투자하여 약 1,500㎞의 배관망을 추가 건설할 계획에 있다.
2012년 기준으로 1차 에너지 공급량 중 석탄의 공급량은 8100만 TOE이며 29.1%의 비율을 차지하고 있다. 석유(에너지유)는 4400만 TOE(15.9%), LPG는 1000만 TOE(3.6%)가 공급되었다. 또한 천연가스는 5000만 TOE로 전체 공급량의 18%를 차지하고 있다.
반면 2012년 최종 에너지 소비량 중 석탄의 소비량은 약 3200만 TOE(15.4%)이며 석유(에너지유)는 4100만 TOE(19.5%)가 소비되었다. LPG는 900만 TOE(4.4%)가 소비되었으며, LNG(도시가스 포함)는 2500만 TOE(12.2%)가 소비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