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필자 : 오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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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실파려안은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18세기 후반 조선으로 유입된 유럽의 광학기기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유리 눈을 단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로 부른 명칭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카메라의 전신인데, 라틴어로 카메라는 ‘방' 옵스쿠라는 ‘어두운' 이라는 뜻으로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칠실파려안의 ‘칠실'은 '어두운 방', ‘파려'는 '유리', ‘안’은 '눈'의 한자어로서 ‘유리의 눈을 단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중 「복암 이기양의 묘지명」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칠실파려안 (漆室玻瓈眼)
칠실파려안은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이 18세기 후반 조선으로 유입된 유럽의 광학기기인 카메라 옵스쿠라를 ‘유리 눈을 단 어두운 방’이라는 의미로 부른 명칭이다. 카메라 옵스쿠라는 카메라의 전신인데, 라틴어로 카메라는 ‘방' 옵스쿠라는 ‘어두운' 이라는 뜻으로 ‘어두운 방'을 의미한다. 칠실파려안의 ‘칠실'은 '어두운 방', ‘파려'는 '유리', ‘안’은 '눈'의 한자어로서 ‘유리의 눈을 단 어두운 방’이라는 뜻이다. 정약용의 『여유당전서』 중 「복암 이기양의 묘지명」에서 사용된 용어이다.
칠실관화설은 조선 후기 정약용이 칠실파려안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를 이용하여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을 서술한 글이다. ‘캄캄한 방에서 화상을 보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정약용이 서양에서 유입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서양광학기기에 대한 이해와 실험을 기록한 것으로 실학자인 정약용의 서학에 대한 관심, 과학적 실험정신,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화론이 반영된 글이다.
칠실관화설 (漆室觀畵說)
칠실관화설은 조선 후기 정약용이 칠실파려안 원리에 대한 구체적인 이해를 바탕으로 카메라 옵스쿠라 장치를 이용하여 그림을 제작하는 과정을 서술한 글이다. ‘캄캄한 방에서 화상을 보는 이야기’라는 뜻으로 정약용이 서양에서 유입된 카메라 옵스큐라의 원리에 대해 설명한 것이다. 서양광학기기에 대한 이해와 실험을 기록한 것으로 실학자인 정약용의 서학에 대한 관심, 과학적 실험정신, 사실주의를 지향하는 그의 화론이 반영된 글이다.
YMCA 사진과는 1910년 한성부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공적 사진 교육기관이다. 국민 계몽을 위한 교육과 기술교육을 강조하였던 YMCA는 1910년 사진과를 개설하여 사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간섭과 탄압,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폐과가 결정되자, 한국 사진사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가 YMCA 사진과를 인수하여 1929년 2월 경성사진학강습원으로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진관을 운영한 초기의 사진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한국의 사진 문화를 이끄는 데 기여한 교육기관이었다.
YMCA 사진과 (YMCA 寫眞科)
YMCA 사진과는 1910년 한성부에 설립한 한국 최초의 공적 사진 교육기관이다. 국민 계몽을 위한 교육과 기술교육을 강조하였던 YMCA는 1910년 사진과를 개설하여 사진 교육을 실시하였다. 일제의 간섭과 탄압, 재정적인 어려움으로 폐과가 결정되자, 한국 사진사 단체인 경성사진사협회가 YMCA 사진과를 인수하여 1929년 2월 경성사진학강습원으로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 한국의 사진관을 운영한 초기의 사진사들을 많이 배출하였으며, 한국의 사진 문화를 이끄는 데 기여한 교육기관이었다.
「시상대 위의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중 손기정의 모습을 담은 『오사카아사히신문』 게재 사진으로서 일장기 말소사건 사진의 원본이다.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진부 사사키 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서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월계수 화분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하여 큰 파장을 일으킨 일명 ‘일장기 말소 사건 ’ 또는 ‘일장기 표식 말소’의 원본이 되는 사진이다.
시상대 위의 손기정 (施賞臺―孫基禎)
「시상대 위의 손기정」은 1936년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 시상식 중 손기정의 모습을 담은 『오사카아사히신문』 게재 사진으로서 일장기 말소사건 사진의 원본이다. 『오사카아사히신문』 사진부 사사키 기자가 촬영한 사진으로서 손기정 선수는 월계관을 쓰고 손에는 월계수 화분을 들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 이 사진은 『동아일보』와 『조선중앙일보』 가 손기정 선수의 가슴에 붙어있는 일장기를 지우고 게재하여 큰 파장을 일으킨 일명 ‘일장기 말소 사건 ’ 또는 ‘일장기 표식 말소’의 원본이 되는 사진이다.
『순종서북순행 사진첩』은 1909년 순종의 서북 지방 순행의 전 과정을 찍은 총 62장으로 구성된 사진집이다.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동안 순종이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평양, 신의주 등 한반도 서북 지역을 순행할 당시의 사진 기록집으로, 총 6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촉탁 형식으로 고용된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관 소속 사진사들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순종서북순행 사진첩 (純宗西北巡行 寫眞帖)
『순종서북순행 사진첩』은 1909년 순종의 서북 지방 순행의 전 과정을 찍은 총 62장으로 구성된 사진집이다. 1909년 1월 27일부터 2월 3일까지 7박 8일동안 순종이 남대문역을 출발하여 평양, 신의주 등 한반도 서북 지역을 순행할 당시의 사진 기록집으로, 총 62장으로 구성되어 있다. 촉탁 형식으로 고용된 무라카미 텐신의 사진관 소속 사진사들이 촬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항억은 1862년 청나라에 연행사로 파견되어 최초로 사진을 접한 조선인이다. 1862년 이의익을 정사로 하는 삼절연공행이 청나라에 파견되었을 당시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베이징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사진을 접하고, 그 경험을 『연행일기』에 기록하였다.
이항억 (李恒億)
이항억은 1862년 청나라에 연행사로 파견되어 최초로 사진을 접한 조선인이다. 1862년 이의익을 정사로 하는 삼절연공행이 청나라에 파견되었을 당시 수행원으로 동행하였다. 베이징 러시아 공사관에서 처음 사진을 접하고, 그 경험을 『연행일기』에 기록하였다.
조선풍속사진은 근대 사진 엽서와 예술 사진의 대표적인 주제로 한국의 풍속 및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재현한 사진이다. 사진엽서의 활성화와도 관계가 있는 조선풍속사진은 1900년의 사제엽서 허가 이후 대량으로 복제되어 유통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예술 사진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풍속 사진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정해창의 풍속을 주제로 한 다수의 사진 작품들이 있다.
조선풍속사진 (朝鮮風俗寫眞)
조선풍속사진은 근대 사진 엽서와 예술 사진의 대표적인 주제로 한국의 풍속 및 일반인들의 생활상을 재현한 사진이다. 사진엽서의 활성화와도 관계가 있는 조선풍속사진은 1900년의 사제엽서 허가 이후 대량으로 복제되어 유통되었다. 또한, 일제강점기 예술 사진의 주요 주제 중 하나는 풍속 사진이었으며 대표적으로 정해창의 풍속을 주제로 한 다수의 사진 작품들이 있다.
경성사구회는 1930년대 YMCA 황성 기독교 청년회 학관 사진과 출신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진가 단체이다.일제강점기 경성 사진사 협회, 경성 아마추어 사진 구락부, 백양 사우회 등과 더불어 한국인 사진가들로만 결성된 단체로서 다수의 재한 일본인 사진가 단체들과 경쟁을 하며 사진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경성사구회 (京城寫究會)
경성사구회는 1930년대 YMCA 황성 기독교 청년회 학관 사진과 출신을 중심으로 결성된 사진가 단체이다.일제강점기 경성 사진사 협회, 경성 아마추어 사진 구락부, 백양 사우회 등과 더불어 한국인 사진가들로만 결성된 단체로서 다수의 재한 일본인 사진가 단체들과 경쟁을 하며 사진 예술의 방향을 모색하였다.
경성사진학강습원은 1934년 경성사진사협회의 주도로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진 교육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사진 교육기관이었던 YMCA 사진과가 폐과되자, 경성사진사협회는 경성인상사진연구회와 경성사구회 등과 협력하여 사진 교육의 정상화를 꾀하였다. 당시 사진계의 역량이 총동원된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진요람』을 간행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체계적인 교육의 기틀을 갖춘 대표적인 사진 교육기관이었다.
경성사진학강습원 (京城寫眞學講習院)
경성사진학강습원은 1934년 경성사진사협회의 주도로 경성부에 설립되었던 사진 교육기관이다. 한국 최초의 공식적인 사진 교육기관이었던 YMCA 사진과가 폐과되자, 경성사진사협회는 경성인상사진연구회와 경성사구회 등과 협력하여 사진 교육의 정상화를 꾀하였다. 당시 사진계의 역량이 총동원된 교육기관이었으며, 『사진요람』을 간행하여 교재로 사용하였다. 일제강점기에 체계적인 교육의 기틀을 갖춘 대표적인 사진 교육기관이었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1937년경 박영진을 초대 회장으로 서울의 아마추어 사진가 23명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진단체이다. 전쟁으로 인해 사진 활동이 원활하지 않던 1943년 해산했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인 사진인들에 대항하고자 한다는 사진 단체 결성의 의지를 다지는 한편 사진예술 발전을 도모하며 회원들의 이론 및 실기 향상을 위해 활발한 사진활동을 이어나갔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 (京城―寫眞俱樂部)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1937년경 박영진을 초대 회장으로 서울의 아마추어 사진가 23명이 중심이 되어 결성한 사진단체이다. 전쟁으로 인해 사진 활동이 원활하지 않던 1943년 해산했다. 경성아마추어사진구락부는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단체로서 민족 정신을 바탕으로 일본인 사진인들에 대항하고자 한다는 사진 단체 결성의 의지를 다지는 한편 사진예술 발전을 도모하며 회원들의 이론 및 실기 향상을 위해 활발한 사진활동을 이어나갔다.
구왕삼은 「군동」, 「콩나물」 등의 작품을 남긴 리얼리즘 사진가이자 사진 평론가이다. 1909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대에 대구에서 사진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결성된 경북사진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살롱사진 경향을 거부하고 리얼리즘 사진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구왕삼 (具王三)
구왕삼은 「군동」, 「콩나물」 등의 작품을 남긴 리얼리즘 사진가이자 사진 평론가이다. 1909년 경상남도 김해군에서 태어났으며, 1930년대에 대구에서 사진 활동을 시작하였다. 해방 이후에는 1946년 결성된 경북사진연맹에 참여하여 활동하였다. 당시 유행하던 살롱사진 경향을 거부하고 리얼리즘 사진론을 주장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동경사진전문학교는 1923년 일본 도쿄에 창설된, 사진가 신낙균이 졸업한 사진 교육 전문대학이다. 스기우라로쿠우에몬 가문의 사진 학교 개설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교명은 고니시사진전문학교였으며, 1926년에 동경사진전문학교로 학교 이름을 변경하였다. 신낙균은 동경사진전문학교의 대표적인 한국인 졸업생이다. 동경사진전문학교는 현 동경공예대학의 전신이다.
동경사진전문학교 (東京寫眞專門學校)
동경사진전문학교는 1923년 일본 도쿄에 창설된, 사진가 신낙균이 졸업한 사진 교육 전문대학이다. 스기우라로쿠우에몬 가문의 사진 학교 개설 계획에 따라 설립되었다. 설립 당시 교명은 고니시사진전문학교였으며, 1926년에 동경사진전문학교로 학교 이름을 변경하였다. 신낙균은 동경사진전문학교의 대표적인 한국인 졸업생이다. 동경사진전문학교는 현 동경공예대학의 전신이다.
오리엔탈사진학교는 1929년 일본 도쿄 신주쿠에 설립되었던, 한국 사진의 주요 인물 현일영·유영국·김진수 등이 수학한 사진 교육기관이다. 일본 최초의 사진 사업체였던 오리엔탈사진공업소가 일본 사진계의 수준 향상과 자사의 제품 홍보 및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현일영과 임정식, 유영국, 김진수, 김주성 등 다수의 한국인 학생들이 수학하였다.
오리엔탈사진학교 (오리엔탈寫眞學校)
오리엔탈사진학교는 1929년 일본 도쿄 신주쿠에 설립되었던, 한국 사진의 주요 인물 현일영·유영국·김진수 등이 수학한 사진 교육기관이다. 일본 최초의 사진 사업체였던 오리엔탈사진공업소가 일본 사진계의 수준 향상과 자사의 제품 홍보 및 보급을 목적으로 설립하였다. 일제강점기에 현일영과 임정식, 유영국, 김진수, 김주성 등 다수의 한국인 학생들이 수학하였다.
전조선사진연맹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조직한 사진 단체 연맹체이다. 1920년대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도하는 예술사진의 경향이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예술 사진에 대한 열기를 식민지배의 정당성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를 교두보로 하여 조선내 사진을 연구하는 단체들을 통합하는 연맹체로서 전조선사진연맹가 결성되었다. 연맹에 참여한 단체의 수는 50여 개에 달했고 조선사진전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전조선사진연맹 (全朝鮮寫眞聯盟)
전조선사진연맹은 1934년 조선총독부가 문화정치를 효율적으로 달성하기 위해 조직한 사진 단체 연맹체이다. 1920년대부터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도하는 예술사진의 경향이 중요한 문화적 현상으로 대두되었다. 조선총독부는 예술 사진에 대한 열기를 식민지배의 정당성에 적극 활용하고자 하였다. 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를 교두보로 하여 조선내 사진을 연구하는 단체들을 통합하는 연맹체로서 전조선사진연맹가 결성되었다. 연맹에 참여한 단체의 수는 50여 개에 달했고 조선사진전람회를 성공적으로 개최했다.
조광사진구락부는 1948년 좌익 성향의 사진가 단체인 조선사진동맹의 산하 조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조광사진구락부의 구성원들은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현실 도피적이고 혁명의식과 배치되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주제를 다르는 사진 및 살롱사진 스타일의 예술 행위를 비판하면서 민중들의 생활상과 노동현장, 사회의 주변인인 하층민의 실상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재를 사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광사진구락부 (朝光寫眞俱樂部)
조광사진구락부는 1948년 좌익 성향의 사진가 단체인 조선사진동맹의 산하 조직으로 설립된 단체이다. 조광사진구락부의 구성원들은 예술이라는 미명하에 현실 도피적이고 혁명의식과 배치되는 낭만적이며 목가적인 주제를 다르는 사진 및 살롱사진 스타일의 예술 행위를 비판하면서 민중들의 생활상과 노동현장, 사회의 주변인인 하층민의 실상 등 사회주의 리얼리즘 소재를 사진 재현의 대상으로 삼았다.
조선사진건설위원회는 1945년 8월 박필호가 중심이 되어 신문화건설운동에 가담하고 한국사진의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결성한 사진 단체이다. 해방 직후 최초로 조직된 사진 단체로서 일반적인 사진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 영업, 화학, 기술 등 사진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활동 목표를 갖고 활동을 했다.
조선사진건설위원회 (朝鮮寫眞建設委員會)
조선사진건설위원회는 1945년 8월 박필호가 중심이 되어 신문화건설운동에 가담하고 한국사진의 미래에 대한 방향을 제시할 목적으로 결성한 사진 단체이다. 해방 직후 최초로 조직된 사진 단체로서 일반적인 사진 활동뿐만 아니라 교육, 영업, 화학, 기술 등 사진 전반에 걸친 광범위한 활동 목표를 갖고 활동을 했다.
조선사진동맹은 1947년 6월 좌익 성향의 사진가들이 결성한 사진 단체이다. 일제의 잔재로 여겨졌던 살롱사진의 경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진예술의 발전을 도모했던 사진인 약 100여명이 동참하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실현 및 노동자의 해방과 전인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을 단체의 목적으로 삼고 사회주의자로서 사진가의 역할을 제시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을 내세워 좌익 계열 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자 회원들의 월북과 함께 와해되었다.
조선사진동맹 (朝鮮寫眞同盟)
조선사진동맹은 1947년 6월 좌익 성향의 사진가들이 결성한 사진 단체이다. 일제의 잔재로 여겨졌던 살롱사진의 경향을 극복하고 새로운 사진예술의 발전을 도모했던 사진인 약 100여명이 동참하였다. 마르크스 레닌주의 실현 및 노동자의 해방과 전인민의 자유를 위해 투쟁할 것을 단체의 목적으로 삼고 사회주의자로서 사진가의 역할을 제시했다. 1948년 8월 15일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고 정부가 국민보도연맹을 내세워 좌익 계열 단체들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시작하자 회원들의 월북과 함께 와해되었다.
최계복은 일상생활과 자연적 요소를 주제로 서정성과 민족문화적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사진가이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1933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최계복사진기점을 열었다. 1934년에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대구아마추어사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인지도를 얻었다. 해방 이후에도 조선예술사진공모전 및 예술사진동인전에 참가하는 한편, 경북사진문화연맹 결성과 한국사진작가협회 출범 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최계복 (崔季福)
최계복은 일상생활과 자연적 요소를 주제로 서정성과 민족문화적 특성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작업한 사진가이다. 일본에서 사진을 배우고 1933년 귀국하여 대구에서 최계복사진기점을 열었다. 1934년에 한국인만으로 결성된 대구아마추어사우회를 조직하였으며, 다수의 공모전에서 수상하여 인지도를 얻었다. 해방 이후에도 조선예술사진공모전 및 예술사진동인전에 참가하는 한편, 경북사진문화연맹 결성과 한국사진작가협회 출범 등에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에 미국으로 건너갔다.
최창근은 일제강점기 YMCA 사진과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사진 교육의 초석을 다진 사진가이다. 1904년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간 이민 1세대이다. 하와이에서 사진을 배우고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1910년 YMCA 사진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최초의 영한 번역 사진 기술서 『자택독습최신사진술』을 출판하여 사진술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사진 작품 활동을 병행하여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
최창근 (崔昌根)
최창근은 일제강점기 YMCA 사진과 교수로 활동하며 한국 사진 교육의 초석을 다진 사진가이다. 1904년 미국 하와이로 노동 이민을 간 이민 1세대이다. 하와이에서 사진을 배우고 사진관을 운영하다가 1910년 YMCA 사진과 교수로 초빙되었다. 최초의 영한 번역 사진 기술서 『자택독습최신사진술』을 출판하여 사진술의 대중화에 공헌하였다. 사진 작품 활동을 병행하여 사진 공모전에서 수상한 경력도 있다.
『국제보도』는 1945년 11월 국제보도연맹이 창간한 광복 이후 최초의 시사 사진 화보 잡지이다. 광복 이후 한국의 문화 건설과 건국에 기여하고, 한국의 역사·전통·현실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한문과 영문을 병기하여 창간되었다. 송정훈이 편집·발행을 맡았으며, 전국의 사진가, 전속 기자들의 협력으로 정치·사회·역사적 사건, 한국전쟁, 대통령 선거, 문화·예술 등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이를 통해 대중 계몽과 건전한 보도 문화를 지향했으며, 사진 연구와 작가 활동을 본격화한 최초의 한국인 주도 전문 잡지로 평가된다.
국제보도 (國際報道)
『국제보도』는 1945년 11월 국제보도연맹이 창간한 광복 이후 최초의 시사 사진 화보 잡지이다. 광복 이후 한국의 문화 건설과 건국에 기여하고, 한국의 역사·전통·현실을 해외에 알리기 위해 국한문과 영문을 병기하여 창간되었다. 송정훈이 편집·발행을 맡았으며, 전국의 사진가, 전속 기자들의 협력으로 정치·사회·역사적 사건, 한국전쟁, 대통령 선거, 문화·예술 등을 생생한 사진과 함께 보도하였다. 이를 통해 대중 계몽과 건전한 보도 문화를 지향했으며, 사진 연구와 작가 활동을 본격화한 최초의 한국인 주도 전문 잡지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