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사람이나 존재를 아끼고 위하여 정성과 힘을 다하는 마음이다. 남녀 간의 애정만이 아니고 가족에서부터 각급 사회조직 내의 인간관계, 나아가서는 고향이나 산천에 이르기까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작동하는 사람의 마음을 말한다. 기독교의 사랑이나 불교의 자비처럼 신과 인간 사이에서 작동하는 기제이기도 하다. 인간의 정신과 감정 전 영역에 걸쳐 있는 마음으로, 사랑과 관련된 지적 영역도 심리학·철학·윤리학·종교 등에 걸쳐 있다. 한국인의 전통적 정서에서는 ‘정’이라는 말과 거의 동의어로 쓰이며, 보살핌·돌봄·베풂 등의 행위와 연결되어 쓰이기도 한다.
사랑은 가장 따뜻한, 가장 바람직한 인간관계이다. 또한 그러한 관계를 맺고 지켜가고자 하는 마음이자 마음의 움직임이다. 가슴을 가진 사람, 그리고 영성(靈性)을 갖춘 사람이 서로 유대 또는 사귐을 갖는 것이고, 그것들을 이어가고자 하는 마음이 곧 사랑이다. 한국인들이 관례적으로 ‘정을 주고 받는다’고 한 것은 이런 면에서 뜻깊은 말이다.
따라서 애뜻하다고 표현된 그리움, 간절하다고 말한 ‘따름’ 등 마음의 움직임을 포함하는 소망, 열정, 욕망 등이 사랑이라고 생각되어 왔다. 그런 면에서 ‘마음을 준다’ 또는 ‘마음을 바친다’라는 말로, 또는 ‘정을 준다’ 등의 말로 사랑이라는 행위를 표현해 온 것은 자못 뜻깊은 일이다.
전통적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위하고 아끼고 귀히 여기고 중히 여기고 하는 일을 사랑의 구체적인 마음을 전하는 징표라고 믿었다. 그런가 하면 공경하고 섬기고 하는 것이 그렇듯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쓰임새가 사랑이었는가 하면, 귀여워하고 예뻐하고 하는 것이 그렇듯이 손윗사람이 손아랫사람을 대하는 마음의 바탕 역시 사랑이라고 일컬어져 왔다.
또 달리는 보살핌, 돌봄, 베풂 등과 같이 시혜(施惠)라고 표현될 만한 마음씨 역시 사랑이라고 믿어 왔다. 그리고 소유욕, 욕정이 엉킨 쾌락원리의 충동 역시 사랑으로 범주화되어야 하는데, 이 점은 남녀간의 애정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사랑은 인간관계의 위아래, 대등함이 진하게 끼친 마음인가 하면, 인간 심성의 양지이면서 동시에 바닥 모를 음지이기도 한 것이다.
사랑은 복합적인 인간 심성인 만큼, 거기에는 미더움, 미쁨이 따르게 마련이고, 도덕심 또는 윤리의식도 수반되게 마련이다. 마음씨의 고움, 이쁨, 착함이며, 훈기까지도 사랑의 바탕에 깔려 있었다. 그런가 하면 적어도 종교에 버금할 만큼 믿음이 강조된 심성의 영역이 곧 사랑이기도 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랑의 담론에서는 철학, 심리학, 종교론, 윤리학, 예술론, 심지어 정치론까지 망라되어야 한다. 사랑은 한국 문화와 사화와 인간관계에 두루 걸쳐서 이야기되어 마땅하다. 사랑은 진과 선과 미를 두루 감싸고 있는 인간 심성이면서 현실적 효용성을 충족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랑과 같은 의미를 가진 낱말은 적지 않다. 그것은 사랑이 그만큼 다양하고 복합적이라는 것에 대한 반증이기도 할 것이다. 그 일군의 낱말들은 사랑이라는 개념이 가진 외연의 넓은 포괄성에 대해서 말하면서, 동시에 내포하고 있는 다양한 함축성에 대해서도 말하게 될 것이다. 사랑은 일종의 관념군이고 개념군이다. 그 점에 대해서 사랑항과 같은 의미를 가진 낱말군이 시사하고 있다.
한국인의 전통적인 정서 속에서 사랑은 ‘애정’이라는 말이 있는 만큼, ‘ 정(情)’과 거의 동의어였다. 전통사회의 한국에서는 오히려 정이 보다 더 친숙하고 관용화된 용어의 몫을 했다고 생각된다.
사랑으로서의 정은 범인간적 사랑인 인정에서부터 가족간의 그리고 남녀간의 애정까지 포괄하고 있다. 모정(母情)은 가족 차원의 정이지만 모정(慕情)이라고 하면 전적으로 남녀간의 정에 국한된다.
또한 동정을 비롯해서 온정이나 연민지정은 ‘인정’이라는 말로 포괄될, 시혜(施惠)의 사랑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정은 부모 자식간의 정, 형제간의 정, 그리고 우정 또는 이웃간의 정 외에 남녀간의 ‘정분’까지 두루 망라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정든 고향’이라는 관용어가 가리키듯이 인간과 환경, 그리고 사물 사이에서도 정이 이어져 왔다. 또, 달리 충정(忠情)이라는 말은 단심(丹心)과 더불어서 군신 사이에서 사용되기도 하였다.
정은 워낙 성정(性情)의 정이 그렇듯이 마음이거니와, 이 점은 심정(心情)이라는 낱말에서도 헤아려진다. ‘통사정’에서는 말 못할 혹은 숨겨진 속내라는 뜻과 정이 통하게 될 것이고, ‘물정’이라고 하면 세상이나 사물에게 속내가 따로 있는 셈이 될 것이므로 정이 곧 마음임을 더한층 굳히게 된다.
한국어에서 실제로 ‘정을 주다’가 ‘마음을 주다’와 거의 같은 뜻으로, 또 ‘정을 붙이다’가 ‘마음을 붙이다’와 거의 동의어로 사용되고 있는 것까지 고려할 경우, 사랑을 마음의 관계 및 마음의 움직임에서 구한 한국인다운 사유의 자취를 보게 된다. 따라서 흔히 쓰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이라는 말에서 정이 다름아닌 사랑과 맺고 있을 비중도 커질 것이다.
결국 한국인은 성(性)이나 심과 한동아리이되, 보다 더 감정적이고 본능적인 마음의 움직임이 곧 사랑으로서의 정이라고 파악한 것 같다.
‘정답다’ 또는 ‘정겹다’가 시사하고 있듯이, 가슴의 따뜻함과 피의 온기 등이 인간 사이에서 교류하는 경우라면 그러한 인간관계며 인간과 사물의 관계는 모두 정이라는 말로 통칭될 수 있다. 그러나 정에는 의리 또는 윤리의식도 영향을 끼치고 있었다.
‘정의(情誼)’라고 하면 정분(情分)과 마찬가지로 남녀 사이만이 아니고 인간과 인간 사이의 교분(交分)에도 원용되었거니와, 이때 정의(情誼)는 정의(情義) 또는 정리(情理)와 교차하면서 인간 의리를 내포하는 윤리의식과도 맺어진 것이다.
그러나 ‘정든 님’, ‘정인(情人)’, ‘정든 가슴’ 등의 용례는 정이 남녀간의 애정에 치우쳐서 사용되고 있는 보기이다. 또한 정담(情談) · 정염(情炎) · 정욕(情慾) · 정사(情死) 등이 보기에 들 것이다. 정은 남녀간의 애정에 두루 통용되지만, 통정(通情) · 정교(情交) · 정사(情事) · 욕정은 남녀간의 성애에 국한된다.
어느 정도까지는 ‘사랑하다’와 같은 의미인 ‘정들다’는 ‘누구에게 (내가) 정이 들다’와 ‘누가 (내게) 정들다’라는 두 용례가 보여주듯이 주체와 객체가, 곧 사랑하는 이와 사랑받는 이가 언제든 자리바꿈할 수 있는 상호간의 교정(交情)에 대해서 시사해 주고 있다. 정에서는 주고받는 자 사이의 구분이 해소되거나, 또는 대립이 지양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정은 든다고 한 것 외에 ‘정을 준다’거나 ‘정을 붙이다’라고도 해왔다. 정을 주는 것은 능동적인 애정 행위이거니와 이와 짝지어서 당연히 ‘정을 받는다/얻는다’라는 수동적인 애정 행위도 예상된다. 한국인은 주고받는 마음의 상호작용 속에서 사랑을 구한 것이다.
‘정을 붙이다’는 무엇인가 객체에다 마음을 기탁하거나 의지한다는 뜻이다. 마음의 달램을 얻는 것, 마음의 위안이나 낙을 얻는 것 등이 ‘정을 붙인다’는 표현을 통해서 사랑의 행위로 포착된 것이다. 다독거림, 보살핌, 어름 등의 주고받음이 한국인의 사랑의 범주 속에 포괄될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정은 따뜻하고도 뜨거운 것이면서 끈끈한 것, 질긴 것이라고도 했다. 세월을 들여서 익혀지고 삭여진 정은 좀체 끊어지지 않음을 의미하는 것이지만, 바로 이 때문에 ‘고운 정’ 아닌 ‘미운 정’ 또는 ‘더러운 정’이라는 말이 관용어로 사용되었다.
특히 부부 사이에서 보다 더 많이 쓰이고 있는 이들 말로 해서 한국인들에게는 정이 애증(愛憎)의 이원적 대립을 넘어선 것으로 받아들여진 셈이다. 오히려 사랑해서 갖게 된 미움 또는 사랑과 얽혀서 품게 된 미움 역시 ‘정’의 범주에 포괄된 것이다.
정은 마음의 주고받음이기는 하지만, 한국인이 정을 두고서 ‘애틋하다’, ‘사무치다’, ‘살갑다’ 또는 ‘절절하다, ’애절하다’ 등의 형용사로 정의 마음으로서의 속성을 묘사해 온 것으로 보아서는 감정, 정감 등에 기운 마음이 곧 정이라고 해석됨 직하다.
그러나 ‘맺고 끊음이 분명해야 하는 것’ 역시 정의 속성으로 표현되고 있기에, 이성이나 사리 판단력과 정을 전적으로 무관하다고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정 외에 ‘친(親)’ 역시 사랑의 동의어로 사용되어 왔다. 친은 ‘사랑할 친’ 또는 ‘가까울 친’으로 읽혀 온 만큼, 사랑과는 상당한 정도로 대등하게 쓰일 수 있는 말이거니와, 그 보기가 될 ‘친한 사이’라는 말은 ‘가까운 사이’와 마찬가지로 서로 사랑하는 사이를 지칭하게 된다.
친애(親愛) · 친화(親和) · 친밀(親密) · 친교(親交) 또는 친분(親分) 등등, 관용적으로 자주 사용되는 용어들이 함축하고 있을 사랑은 근친(近親) · 지친(至親) · 친척 등이 매우 존중되는 한국의 가족주의 속에서 더한층 돈독해진 것이다.
이 밖에 한자어로는 ‘공경할 경(敬)’, ‘섬길 사(事)’, ‘받들 봉(奉)’, ‘사랑할 자(慈)’, ‘믿을 신(信), ’어질 인(仁)’ 등 외에 ‘사모할 연(戀)’, ‘불쌍히 여길/사랑할 휼(恤)’, ‘생각 사(思)’ 등이 그때 그때 주어진 문맥에 따라 사랑과 같은 의미를 가진 말이거나, 아니면 사랑과 중첩되어서 사용되었다.
이들 가운데 ‘연’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유교적인 윤리의식과 맺어져서 사용되어 왔다고 보이거니와, 적어도 중세기를 거쳐 근대에 이르도록 한국인의 사랑은 강하게 인간 윤리, 인간의 덕성(德性)과 깊이 연관되어 있었다고 말할 근거를 여기서 얻게 된다. 그것은 덕(德), 품격, 심지어 도(道)와 의(義)마저도 한국인의 사랑 속에 깃들여져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가령, ‘부모 덕에’라고 말할 때 그 덕은 자식이 입은 사랑을 의미한다. 따라서 당연히 ‘은(恩)’, 그리고 은덕(恩德), 은혜 등이 사랑에 포괄되어야 한다. 그런 까닭에
“살아서 同室하고 죽어서 同穴하니
恩情도 重커니와 禮法을 차릴 것이
금슬을 鼓타시 하여 相敬如賓 하여라”
같은 시조가 부부간의 은정을 예와 하나로, 그리고 금슬을 손님 대하듯 하는 경과 하나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와 같이 예와 경이 사랑에 개재되는 것은 부부 사이만이 아니다. 부모 자식 사이, 군신 사이 그리고 사제 사이 및 어른과 어린 사람 사이에서도 역시 그 점은 마찬가지로 지적되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사랑이
“思郞도 하였노라 이별도 지내였노라
雪月 紗窓에 기들여도 보왔노라
前前에 괴든 思郞이 語僞런가 하노라”
이 시조에서처럼 ‘思郞(사랑)’이라고 표기될 경우, 사랑에서 무엇인가 두 가지가 갖는 비중의 크기를 지적할 수 있다. 하나는 사랑에서의 ‘思’가 갖는 몫의 크기이고, 다른 하나는 ‘낭군 랑’에서 유추되듯이 남성이 갖는 몫의 크기이다. 사랑의 객체로서는 남성이, 그리고 사랑하는 주체로서는 여성이 상대적으로 보다 크게 인식되었음 직하다는 것을 바로 이 ‘思郞’에서 헤아리게 된다.
그런가 하면 思는 사모(思慕) · 사미인(思美人) · 상사(相思) 외에도 사친(思親) 등이 시사하고 있듯이, 역시 사랑의 범주에 포섭될 개념의 하나이다. 누군가를 마음에 품어서 늘상 생각에 머물게 하고 있는 상태가 사랑인 이상, ‘생각 사’가 사랑이라는 개념과 이웃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런 뜻에서 중세 국어사의 어느 계제까지 ‘ᄉᆞ랑’이 오늘날의 생각과 동의어고, 그 대신 이 시조에 나와 있듯이 ‘괴다’가 오늘날의 ‘사랑’과 동의어였는지를 참조함으로써 생각과 사랑 사이의 중첩관계에 대해서 말해도 좋을 것이다. 이 시조만 해도 이미 ‘ᄉᆞ랑’과 ‘굄’이 같은 의미를 가진 동의어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점은 다음과 같은 일부 시조에서 정이 생각과 다를 바 없이 사용된 보기에서도 지적될 수 있을 것이다.
“솔 아래 앉은 중아 너 앉아서 몇 천년고
山路이 험하야 갈 길을 모르난다
앉고도 못 니는 정이야 네나 내나 다르랴”
한편, 순수한 국어 낱말로는 이미 나온 ‘괴다’, ‘ᄉᆞ랑ᄒᆞ다’ 외에 ‘그리워하다’, ‘마음을 주다’, ‘못 잊어 한다’, ‘귀여워하다’, ‘예뻐하다’, ‘고와하다’, ‘섬기다’, 심지어 ‘모시다’ 등이 사랑과 동의어로 제시될 수 있는데, 이들 가운데는 남녀간의 사랑 말고도 상당수의 낱말이 나이나 신분의 상하관계가 전제된 한국인의 사랑을 포함하고 있다.
귀여워하고 예뻐하는 것에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는 관념을 적용할 수 있다면, 이들 순수한 한국어의 사랑에 관한 낱말들은 하나같이 ‘애지중지(愛之重之)’의 보기가 보여주고 것처럼 애와 중을 겸전하고 있다고 생각된다.
정(情)으로 포괄될 한국인의 사랑은 몇 가지 상징, 또는 상징성을 갖추고 있다.
“사랑 사랑 고고이 매인 사랑
왼 바다를 덮는 그물처럼 맺은 사랑 왕십리 답십리 참외 넌출이 얽어지고 틀어져서 골골이 두루 뒤틀어진 사랑
아마도 이 님의 사랑은 갓없은가 하노라”
여기에서 사랑이라는 인간관계는 그물이나 넌출로 상징되어서 무엇인가 맺히고 매어진 것에 비유되어 있다. 이들 외에도 끈, 줄 등이 같은 의미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며 따라서 동사로는 얽힘 · 맺힘 · 매임 · 틀임 등이 사랑의 행위 또는 상태를 위한 비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명사나 동사는 원한의 비유법으로도 능히 활용될 수 있는 것인데, 사랑과 그 역인 원한의 상호 의존성에 대해서 시사하는 것 외에 사랑도 결국 인간관계인 이상, 연줄 · 인연 등의 시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그렇기에 사랑도 끊고 자르고 할 수 있는 것으로 비유되는 것은 당연하지만, 이로써 생긴 정신적인 상처가 곧 원정(冤情)이라고 불리는 사랑의 음지인 셈이다.
한편, 다음 시조에서 사랑은 불이거나 불길이다.
“사랑 모여 불이 되어 가슴에 피여 나고
간장 섞어 물이 되어 두 눈으로 솟아난다
일신에 水火 相侵하니 살똥말똥 하여라”
“사랑은 불붙듯 하고 말일 이는 빗발치듯
말려서 말 님일량이면 처음에 아니 말렸으랴
말려서 마지 않을 님이니 던져 둘까 하노라”
물과 대비시켜서 불길임이 강조된 사랑의 상징성은 이미 신라시대에까지 소급된다. 그것은 ≪수이전 殊異傳≫에 수록되어 있었다는 <심화요탑 心火繞塔>은 그 주인공 지귀(志鬼)가 그의 연모의 정이 꺾이자 그 자리에서 죽어 불덩이가 되었노라고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한국 상고대 신화로는 무엇보다도 ‘고조선 신화’에서 사랑의 주지를 만나게 된다. 바로 ‘ 홍익인간’이 그렇거니와, 이것은 천신과 군주를 겸한 사람을 통해서 실천될 ‘하늘의 뜻’이자 ‘하늘의 사랑’이라고 할 만한 것이다.
그것은 익(益), 곧 이익이자 남에 대한 베풂이고 혜택이라고 표현되어 있다. 혜택과 이익을 인간 세계에 널리 펴는 것이 곧 ‘홍익인간’이거니와, 이것은 고조선 신화에서 하늘 및 신의 의지이자 정치이념이고, 아울러 통치 지표로 잡혀 있다. 여기서는 인류애에 버금할 만한 ‘인간애’라는 개념의 유추도 가능할 것이다.
한편, 여기서 한국 문화 내부에서 자생적인 천군(天君) 또는 천제(天帝)라는 개념을 도출할 수 있지만, 아울러서 천익(天益)을 받을 지상의 사람에게서는 당연히 ‘경천(敬天)’이란 개념도 이끌어낼 수 있을 것이다. 유교적인 ‘경천애인(敬天愛人)’에 견줄 만한 자생적인 개념을 고조선 신화에서 이미 찾을 수 있다.
하늘에서 내린 신이 군주로서 ‘곡식과 인간 목숨과 질병과 형벌과 선악을 모두 다스렸다’고 하는 진술은 정치의 덕목이 미친 범역이 곧 ‘홍익인간’의 구체적인 실천이라는 것에 대해서 말해 주고 있다. 이 점은 일부 지역의 전설, 예컨대 경북 경산지역의 ‘교구(交媾) 바위’ 전설에서처럼 직접 천신과 지모(地母), 곧 대지의 여신 사이의 짝지어짐의 형태로 후대에까지 전승된다.
이와는 달리 『삼국유사』 「가락국기(駕洛國記)」에서는 부부간의 인연에 관해 언급한 것을 보게 된다.
가락국의 창건 군주인 수로(首露)와 아유타국 공주가 배필이 되는 것이 천명(天命)임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가락국기」의 대목에서 상고대 왕과 그 후의 짝지어짐이 ‘신성혼’이되, 하늘의 뜻이 개재된 ‘우주혼’임을 확인하게 되는 바이지만, 이 점은 신라의 신화에서 혁거세(赫居世)와 그 비, 알영(閼英)의 배필이 곧 하늘의 원리와 지상의 물의 원리가 짝이 된 것임에 대한 시사(示唆)에서 구체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한편, 「가락국기」는 수로라는 신랑과 허황옥(許黃玉)이라는 신부의 혼례 절차에서 신랑측 일행과 신부측 일행 사이의 ‘패다툼’을 그려 보임으로써 혼례가 결연과 갈등의 주제를 동시에 내장(內藏)하고 있음을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 점은 고구려 신화의 해모수(解慕漱)와 유화부인(柳花夫人) 사이의 혼례 절차에서도 확인된다. 그것은 다시 신라의 서동(薯童)과 선화공주(善花公主) 사이, 그리고 고구려의 온달(溫達)과 평강왕의 공주 사이의 혼담에 계승되어 나타난다.
뿐만 아니라, 근세에까지 시행된 전통 혼례 절차에서도 두고두고 재현된다. 이것은 좁게는 남녀의 혼사를 통한 결연이, 그리고 넓게는 보통 남녀간 사랑의 맺어짐이 필연적으로 갈등을 내포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매우 존중되어 마땅할 것이다.
또한 신화(神畵), 곧 신화적인 도형(圖形) 및 조형물에서는 상고대 사회의 또 다른 사랑들을 만나게 된다. 청동기 유물 가운데 소위 ‘대전 괴정동 출토 방패형 청동기’로 알려져 있는 것에는 ‘나경(裸耕)’, 곧 ‘알몸갈이’하는 사내의 모습이 새겨져 있는데, 이것 또한 앞에서 보인 교구바위와 더불어 ‘우주적 에로스’의 전형적인 본보기의 하나로 생각해도 좋을 것이다.
발가벗고 양물을 노출한 채로, 이랑 모양이 뚜렷한 밭에서 따비질을 하고 있는 이 사내는 그의 양물과 따비 사이에 은유(隱喩)의 매듭을 엮음으로써, 그의 밭갈이가 유사 성행위 또는 유사 사정 행위가 되도록 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는 곧 대지를 여성삼아 밭갈이를 하면서 동시에 씨(정자) 뿌림도 하고 있는 것으로 해석될 만한 것이다.
이와 같은 ‘우주적 에로스’는 이 유물 뒷면에 그려진 솟대로 보이는 도형에 기대어서 대지 및 농사의 풍요를 다지는 주술적 의례(儀禮)로 해석될 것이지만, 이것은 조선시대에 한반도 북부에서 실제로 시행된 ‘나경’에까지는 전해졌지만 그 후대의 한국인들로서는 놓치고만 성(性)의 일부이다.
이 같은 에로스의 전통은 일부 신라 토기에 전승된다. ‘토우 장식 장경대호(土偶裝飾長頸大壺)’라고 알려져 있는 토기에는 음악이 연주되는 현장에 자라 · 뱀 · 개구리 등이 나도는 가운데 남녀가 알몸으로 네 발 짐승들처럼 어우러져 있는 장면이 조형되어 있거니와, 이것은 봄날을 맞은 공동체를 위한 판굿에서 연출된 주술성 강한 우주적 에로스라고 보인다. 남녀의 성이 갖춘 생산력과 자연의 봄기운이 갖춘 생명력 사이의 상호 감염이 추구된 것이라고 관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남녀의 성과 자연의 풍요 및 공동체 풍요 사이의 대비관계는, 예컨대 서낭굿과 같은 마을 공동 굿에 개재된 남녀 서낭의 결합 절차를 비롯해서 암석으로 된 양근(陽根) 주물(呪物) 숭배, 암줄과 숫줄의 교합으로 시작되는 줄다리기 등에 걸쳐 민속신앙 현장에서 널리 또 보편적으로 관찰되고 있다.
신화시대와 그에서 멀지 않은 상고대, 그리고 그 전통이 이어지던 시대까지 한국인의 사랑은 이 같이 우주 규모의 정치이념과 맺어진 범인간애 외에도 종교이념과 맺어진 우주적인 에로스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이는 한국적인 자연관 및 그와 맺어진 샤머니즘에서 비롯되고 있다고 보인다.
천지의 교응(交應), 그리고 자연과 인간 사이의 교응을 전제하지 않고는 이 같은 사랑, 그리고 성의 관념이 도출될 수 없기 때문이다.
삼국시대 및 신라시대에 들어서면 다양한 사랑의 관념과 만나게 된다. 수절의 사랑, 신의의 사랑 외에도 자기 희생이 따르는 사랑, 죽음을 초극하는 사랑, 그리고 애정이 극단적으로 이상화된 사랑 등을 보게 되기 때문이다. 달리는, 이른바 ‘출천지효’의 아주 오래된 보기 또한 이미 이 시대에서 만나게 된다.
욕정에 눈이 먼 왕의 갖은 박해와 위협에도 불구하고 남편을 저버리지 않은 도미(都彌)의 아내 이야기( 『삼국사기』, 열전 제8)에서는 수절의 사랑을, 그리고 자신의 아버지를 대신해서 전역(戰役)을 맡아 싸움터로 간 약혼자가 기약한 3년을 넘기고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함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이 헤어질 때 서로 신표로 나누어 가진 반으로 쪼개진 거울에 의지해서 뜻을 바꾸지 않은 설씨녀(薛氏女) 이야기(『삼국사기』, 열전 제 8)에서는 신의(信義)의 사랑을 각각 만나게 된다.
박제상(朴堤上)(『삼국사기』, 열전 제5) 또는 김제상(삼국유사)의 일화에서는 남편의 충정(忠情)과 짝지어진 아내의 애절한 절의(節義)의 사랑을 만나게 되거니와, 이는 후대의 유교에 감염된 열녀 관념 및 망부석(望夫石) 관념의 원형으로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그런가 하면 이들과는 달리 남녀간의 애정을 표현한 것으로, 자기 희생이 따른 사랑(「호원虎願」, 『삼국유사』)과 죽음을 초월한 사랑(「수삽석남首揷石楠」) 등이 전설 혹은 허구로 전해져 있다.
또한 막중한 현실적 제약이며 불이익을 무릅쓸 뿐만 아니라, 적국의 왕자라는 사실도 개의치 않고 뜻을 지켜낸 낙랑공주(樂浪公主) 이야기(『삼국사기』)에서는 당대로서는 매우 드물게 절대화되어서 지상(至上)의 가치가 부여된 남녀간의 애정, 달리 말해서 이른바 ‘로맨스의 애정’을 만나게 된다.
이 같은 경지의 남녀간의 애정은 후대에 「춘향전」과 「운영전」 등 문학작품에 계승되거니와, 이들은 특히 유교적인 도의의 사랑, 또는 신의의 사랑 혹은 부모에 의해서 선택된 ‘천정배필의 사랑’에 젖어 있던 조선시대에 새삼 혁명적인 의의를 가지고 크게 부각된 것이지만, 그 원형이 이미 「수삽석남」이나 낙랑공주 이야기에서 구해지는 한, 「춘향전」과 「운영전」은 오히려 이들 상고대의 ‘로맨스의 사랑’이 부활된 것이라고 보일 것이다.
그리고 그 흐름은 현대 초기 이광수(李光洙)의 문학에서 또다시 꽃피게 된다. 이런 면에서 흔히 서구 세계 특유의 것으로 이야기되고, 따라서 동양이 으레 제외되곤 하는 남녀간 사랑의 가장 큰 주제 가운데 하나인, 이른바 ‘로맨스의 사랑’을 다시 살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런 몇 가지 서로 다른 범주의 사랑에 공통된 것이 있으니, 그것은 가령, ‘도미 이야기’이며 ‘설씨녀 이야기’가 그렇듯이, 사랑의 열정이 수난이나 장애를 더불고 있다는 점이다. 사랑이 고난을 감당함으로써 비로소 열정이 되고, 또한 사랑이 비극을 겪으면서 비장미를 갖추게도 된다는 것을 삼국시대 및 신라시대의 사랑에 관한 일화들이 전해주고 있다.
사랑은 얻거나 주는 것이면서 동시에 싸워서 능동적으로, 또 적극적으로 성취하는 것이라는 관념도 여기서 추출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 말고도 사랑이 고난으로 더한층 빛을 발하듯이 고난이 사랑을 통해서 긍정되고, 더 나아가서 적극적으로 수용된다는 국면 또한 이들 오래된 일화들이 오늘에 생생하게 일러주고 있다.
좌절, 수난에 더한 비탄과 고통을 더불어서 비로소 사랑이 그 미학을 그리고 정화(精華)를 이룩하게 된 것이지만, 아울러 ‘고통의 학’이 정립될 바탕도 마련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고통이며 간난이 사랑의 적극적인 대상(代償)으로 받아들여질 여지를 이들 상고대 기록들이 열어 놓은 것이라고까지 평가되어도 좋을 것 같다. 이 점은 한국인의 사랑의 역사에서 매우 높이 평가되어도 좋을 것이다.
한편, 이 시대의 남녀간의 애정, 그 중에서도 성애에 관한 특수한 국면을 보여주는 일화가 있다. 그것은 선덕여왕이 남긴 것으로, 『삼국유사』의 「선덕왕지기삼사(善德王知畿三事)」에서 여왕은 남녀간의 성애를 전쟁으로 비유하되 여성의 승리로 끝나게 마련인 전쟁으로 비유하고 있거니와, 이로써 여왕은 남녀간의 애정이 ‘힘의 갈등’이라는 것에 대해서 시사하고 있는 셈이 된다. 넓은 뜻의 권력과 사랑, 혹은 힘 겨루기와 사랑을 밀착시킨 관념의 효시로 받아들일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다음과 같은 기녀들의 시조를 통해 조선시대에 전승된다.
“솔이 솔이라 하니 무슨 솔 인줄로만 아난다
천심 절벽 위의 낙락장송 그 내로다
길 아래 저 초동의 낫이야 걸어 볼 줄 있으랴”(솔이 「松伊」)
“묏버들 가려 겪어 보내노라 님의 손데
자시는 창 밖에 심어 두고 보소서
밤비에 새 닢 곧 나거든 날인가도 여기소서”
이들 두 시조에서 남/녀는 ‘꺾는 자/꺾이는 자’의 양립관계로 잡혀 있거니와, 이것은 분명히 또 확연히 조선시대적인 남녀관계 일반에 두루 적용되어도 좋을 것이다. 거기에는 ‘가해/피해’의 양립관계 외에도 ‘강자/약자’의 양립까지도 끼쳐 있거니와, 이로써 남녀의 에로스는 역학관계로도 잡히게 된다. 이 점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여러 가지 성의 속어들을 통해서 거듭거듭 확인되고 있다.
예컨대, “따 먹는다”, “낚는다”, “정복한다”, “내 것으로 만든다” 외에 “짓밟는다”, “처녀 버린다” 등은 좋은 보기들이다. 두 편의 시조 중에서도 상대적으로 솔이의 시조에서 이 점이 더한층 확연하게 두드러진다. 작품 중의 ‘점낫’이란 작은 낫이지만, 그것은 다름아니고 남자 성기의 암유일 수 있기 때문이다. 선덕여왕에게서 남녀의 에로스가 전쟁이었듯이, 솔이에게는 남자에 의한 여자에 대한 ‘낫질’이었다.
이들 ‘무력(武力)의 에로스’와 나란히 「도화녀비형랑(桃花女鼻荊郞)」(『삼국유사』)에서는 왕의 권력 남용과 야합한 충동적인 남성 욕망의 망집(妄執)성이 생사를 넘나들면서 묘사되어 있다.
전혀 억제되지 않는, 프로이트적인 의미의 ‘이드(id)’ 차원의 에로스의 맹목성과 야수성이 그리고 가학성이며 공격성이 왕권을 통해서 묘사되어 있다. 여기에서 앞에서 언급한 도미 내외의 일화 가운데 왕이 차지하는 독선이며 횡포까지 고려하게 되면, 사랑 특히 남녀간의 성애에는 갈등, 불법, 폭력, 타락, 죄악 등이 달라붙게 마련임도 이미 당대의 기록들에서 확인하게 된다.
한편, 흉년이 들어 굶주리고 있는 아버지에게 그 허벅지살을 잘라서 먹게 한 효성(『삼국유사』 권제5 「향득사지할고공친(向得舍知割股供親)」) 말고도 어머니를 배부르게 하기 위해서 어린 자식을 버리려 든 효성(『삼국유사』 권제5 「손순매아(孫順埋兒)」)도 전해져 있다.
노모(老母)의 끼니를 어린 자식이 빼앗아 먹는 것을 보다 못한 아들 내외가 품팔이로 살아가는 가난한 처지로는 더 이상 어떻게 할 길이 없어서 어린 자식을 산에다 버리려 든 것인데, 뜻밖에 자식을 생매장하려고 판 땅에서 석종(石鐘)을 얻고 그것이 계기가 되어 왕에게서 후한 보상을 받게 된다는 이야기이다.
이와 같은 이야기 등에서 조선시대의 유교를 기다리지 않고도 이미 자기 희생으로 부모를 섬기는 효의 전범을 보게 된다.
이 시대에 와서는 비교적 많은 시가문학을 통해 사랑을 노래하고 있다. 앞 시대를 이어서 부부 사이의 신의의 사랑, 특히 여성이 남성에게 바치는 신의의 사랑을 노래하고 있는데, 이때 ‘지켜짐/범해짐(잃어짐)’에 수반된 ‘깨끗함/더럽힘’의 이원적 대립으로 아내가 남편을 대하는 사랑이 재량(裁量)되고 있는 것이 눈에 띈다.
여기에서는 남성으로서는 여성이 독점되어야 할 소유물이라는 관념이 유추될 수 있을 것이므로 남녀, 특히 남편과 아내 사이에서 주/종, 상/하의 관계가 형성된다는 추리도 가능해진다.
그것은 가사가 전해지지 않고 있는 노래 가운데 하나인 「안동자청(安東紫靑)」에 관한 기록에서 ‘부인이 그 몸으로 사람을 섬김에 있어서 한번 그 몸을 잃으면……’이라는 문면에서 확실해진다.
이것은 이미 고려시대에서 유교적 윤리관념에 제약된 부부관계가 설정되어 있었다는 것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안동자청」만이 아니고 『고려사』 악지(樂誌)에 실린 「제위보(濟危寶)」 · 「예성강(禮成江)」 · 「거사련(居士戀)」 및 「원흥(元興)」 등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한편, 통일신라시대의 시가에서와는 달리 고려시대의 것에서는 욕정 또는 성애가 혹은 우원하게 혹은 직접적으로 노래의 주제가 되고 있다. 「만전춘(滿殿春)」 · 「쌍화점(雙花店)」 · 「이상곡(履霜曲)」 등이 이에 속한다. ‘사향 각시를 안고 누워 약든 가슴을 맞추압사이다’라는 「만전춘」의 가사는 중세기까지 한국 시가에서 ‘에로스’의 묘사로는 아주 특이한 것이다.
그러나 「가시리」 · 「서경별곡」은 「동동」과 함께 다른 차원의 남녀간의 애정을 노래하고 있다.
이들 노래는 별리와 고독으로 사랑이 동경의 대상으로 승화된 경지를 보여주고 있거니와, 그 중에서도 「동동」은 각별하다. 이른바 ‘달거리 노래’인 「동동」은 ‘사랑의 송도(頌禱)’라고 일컬어질 만한 서정성을 갖추고 있다.
사랑이 삶의 대표적인 덕(德)이며 복으로 노래되고 있되, 일 년 열두 달 사시 따라 드는 세시(歲時)의 징표, 말하자면 매달 매달 번갈아서 운영되는 자연의 전형적인 징표와의 서정적 합일/단절과 은유적인 매듭을 이룰 사랑의 성취 혹은 상실을 노래하고 있다.
달마다 자연의 표정에 어울리는 사랑이 인생의 복으로 또 덕으로 갖추어지기를 송축(頌祝)하고 있는 것이다. 자연의 섭리와 함께 할 사랑이 기축(祈祝)되고 있음으로 해서 「동동」은 또 다른 차원의 ‘우주적 사랑’을 주제로 삼고 있는 것이다. 이 고려가요는 안쓰러운 그리움, 절절한 ‘애탐’ 등, 누군가에게 마음을 붙이는 일이 곧 사랑임을 노래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이 작품은 후기의 시조, 아리랑 등에 의해서 전승될 ‘사랑의 서정’의 원점에 자리한다(이하 조선시대는 다음 ‘사랑의 몇 가지 범주’에서 다룸).
사랑은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인간 정신과 감정의 전 영역에 걸쳐 있기에 그것들과 관련된 지적인 영역 역시 다양해서 심리학, 철학, 윤리학, 종교 등에 걸쳐 있게 된다. 전통 한국인의 사랑의 관념이나 사념에 영향을 미친 지적인 범주로는 앞에서 들어 보인 신화적인 사고체계 외에는 대관(大觀)해서 불교와 유교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불교가 무엇보다 자비(慈悲)라는 대승적인 사랑을 한국인의 마음에 심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것은 훨씬 후대에 기독교를 통해서 받아들이게 되는 박애라는 개념에 대비됨 직하거니와, 이로써 부처가 중생에게 자비를 베풀 듯이 중생 사이에서 상호간의 자비가 베풀어져서 이룩될 또 다른 범인간적인 사랑 및 생명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사랑을 한국인은 경험하게 된 것이다.
이에 관해서 전자의 보기로는 전란으로 젖먹이를 강보에 싸서 부처 상 자리 아래 기탁하고 반 달을 지나서 돌아오니 애기가 오히려 입에서 젖내를 풍기면서 건강해져서 그것을 부처의 ‘대자지력(大慈之力)’으로 돌리고 있는 일화(『삼국유사』 권3, 삼소 관음)를 들 수 있고, 후자의 보기로는 화랑도의 ‘금 살생’이나 백제 제29대 법왕이 금살생령을 내리면서 백성들 집에서 기르고 있던 매와 같은 조류를 풀어 주고 어렵(漁獵)의 연장을 불태우도록 왕령을 내린 사례를 들 수 있다.
그러나 이 같은 일반론적인 차원이 아닌, 특수한 국면에 걸친 사랑의 속성 또한 불교와 맺어져 한국인에 의해서 경험되었다. 거기에는 불교적인 부부의 인연이 있는가 하면, 친구 사이의 우정이 있는 것 외에 불교에 비추어서 재정립되는 형제간의 우애 등이 속해 있다. 당연히 새로운 불교적인 사랑의 비유법도 있게 된다.
광덕(廣德)과 엄장(嚴莊) 두 승려는 좋은 벗으로 사귀면서 평소에 서로 맹세하되 먼저 저승으로 가는 자가 반드시 알리도록 하자고들 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광덕이 엄장에게 자신이 먼저 세상 떠남을 알려 왔다.
광덕의 아내와 함께 친구의 초상을 치른 엄장은 의외로 한집에서 살자고 했고, 광덕의 아내도 이에 응했다. 밤이 되어 엄장이 잠자리를 함께 하고자 하니, 광덕의 처는 “남편은 나와 십 년을 넘게 함께 하였으되 단 하루 저녁인들 자리를 함께 한 적이 없었거늘, 하물며 어찌, 내 몸에 손이라도 대었단 말입니까.”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이 일화(『삼국유사『, 권제5)에서 남녀간, 그것도 부부간이 오직 도반(道伴)이기만 했던 보기와 만나게 된다. 그런가 하면 일시에 한뜻으로 가족과 세속을 떠나 한 산 속에서 수도하다가 드디어는 더불어서 성불하게 된 두 도반 사이의 우정에 대한 일화(『삼국유사』, 권제3, 남백월 이성)도 만나게 된다.
이 두 일화에는 남녀간의 애정이며 벗 사이의 우정이 구법(求法)의 역정(歷程)으로 승화되기를 바란 신라인의 신심이 어려 있다고 보인다.
세속적인 사랑을 감싸안았거나, 아니면 넘어선 두 초월적인 사랑의 경지를 여기에서 확인하게 되지만, ‘ 에밀레종’의 전설은 후자의 보기에 들 것이다. 한 경망한 젊은 어미의 실수에 빗대어서 어미에 의한 딸의 희생이 불타의 세계에 대한 귀의심으로 드높여져 있는 것이 이 애잔한 전설의 숨겨진 뜻으로 읽힐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라인은 세속적인 사랑과 초월적인 사랑, 둘 중의 한쪽이 다른 한쪽을 버리거나 희생하는 것이 아니고 서로 하나로 지양(止揚)되는 경지도 불교의 품속에서 추구하였다. 그것은 「제망매가(祭亡妹歌)」(『삼국유사』)와 그것을 에워싼 일화에서 확인된다.
신심과 시적인 서정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이 노래에서 누이를 잃은 오라비 승려인 월명(月明)은 비탄의 소리로 부모는 한갓 한 가닥의 나뭇가지로 형제는 다만 거기 매달린 잎새로 비유하고 있다.
그럼으로써 가는 곳도 모르게 흩날려 떨어져 가는 것이 누이의 죽음으로 비유된다. 친동기이며 부모 자식의 인연이 실로 덧없는 허무로 포착되어 있다. 하지만 그것이 개안(開眼)의 계기가 됨으로써 아미타불의 정토에서 다시금 재회할 것을 발원하고 있다.
이 경지에서 세속적인 인연을 넘어선 또 다른 동기간의 인연이 긍정되어 있다. 인간 세상에서 자식은 나뭇잎, 부모는 가지에 불과하다. 이에 비해서 「제망매가」는 부처는 뿌리 아니면 기둥이라는 비유법을 담고 있음으로써 신라인들로 하여금 부처가 지닌 사랑이라는 도량의 절대적 크기와 더불어 그 초월성을 넘어다보게 유도한 것이다.
유교에서 가장 큰 범인간적인 사랑의 관념은 ‘경천애인’의 ‘애인’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결국 경(敬)의 대상인 하늘이 민(民)과 하나임으로써 경천하듯이 인을 사랑한다는 범인간적인 사랑의 관념이 존립하게 된다.
특히 왕자의 ‘경천애인’에서 ‘이민위천(以民爲天)이 강조되는 만큼, 경천 곧 애인이라는 등식도 이끌어 낼 수 있다. 이 같은 치자(治者)의 백성 사랑은 관념적으로 또는 적어도 이념상으로는 벼슬아치들의 백성 대하는 태도에까지 확대 적용될 성질의 것이었다.
이 같은 천이 곧 인이요 하늘이 곧 민이라는 위에서 아래로의 범인간적 사랑의 이념은 역설적으로 천도교의 아래에서의 혁명을 위한 기치가 되었다. 따라서 한국인이 관용적으로 사용하는 ‘하늘 같은 사랑’은 아래를 향한 통치자의 큰 시혜(施惠)만이 아니고, 인간 상호간의 드높은 사랑에 대해서도 십분 시사하게 된다.
그러면서 유교는 궁극적으로는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으로, 드디어는 경천애인의 경지에까지 나아가야 하는 것이었기에, 또한 그것이 존선(尊善)하는 학문의 길이었기에, 윤리도 지(智)도 드넓은 뜻으로 인간애의 실천이라는 면을 지니게 된다. 그러면서 그것은 사랑에 짙은 실천적인 윤리의식이 참여하게 되는 단서가 되기도 하였다. 가족끼리의 사랑에도 또한 우정에도, 나아가서는 부부 사이의 사랑에도 의리며 도(道) 혹은 예(禮)가 요구된 것으로도 이 점이 시인된다.
경천애인에서 이미 드러나는 사랑의 계층성 및 그에 수반된 윤리의식은 한국 사회의 경우, 유교에 의해서 더한층 강화되었다. 이 점은 ‘부자유친’, ‘부부유별’로도 이미 짐작되는 바이지만, 구체적으로 부모의 자애와 자식의 효친(孝親)은 가족 내에서 계층의식이 관여하고 있는 대표적인 사랑의 관념들이다. 그것은 효성이 효도라고도 일컬어진 데서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자유친이라는 관념에서는 아래를 향해서 베푸는 사랑과, 역으로 위로 향해서 받드는 사랑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전자에서는 보살핌 · 다독거림 등이 사랑의 표현이 될 것이지만, 후자에서는 공경 · 존대(尊對) 혹은 섬김 등이 사랑의 표현이 될 것이다. 이 점은 ‘애친경장(愛親敬長)’에서 사뭇 두드러진다. 어버이를 섬기고 어른을 공경하는 것이 곧 애친경장이다.
부부 사이에서도 상당한 정도 상하의 계층성이 반영된 사랑이 요구되었다. 남편은 아내를 거느리는 사랑으로, 아내는 남편을 섬기는 사랑으로 서로간에 마음을 주고받은 것이다. ‘거느림/섬김’이라는 부부간의 사랑의 계층성은 ‘다스림/따름’이라는 군신간의 혹은 부자간의, 또는 치자와 피치자 사이의 계층성과 나란한 꼴로 시행된 것이다.
이 경우 아내의 처지로는 ‘부덕(婦德)’, ‘여도(女道)’와 같은 것이 지켜져야 했던 것만큼, 또 남편의 처지에서는 제가(齊家), 곧 집안 다스림의 덕이 지켜져야 했던 것만큼, 남녀 상호간에 그 사랑이 윤리성의 제약을 받고 있었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여성 쪽에 훨씬 더 큰 부담이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급기야는 남녀 성차별의 기층이 되고, 더 나아가서는 온갖 사회적 · 국가적 차별의 전범이 되기도 하였다.
이 경지가 심해지거나 지나치게 강조되면 사랑이 덕행 또는 도리라는 명분으로 크게 의무지워진 느낌마저 받게 되거니와, 이 때문에 한국인의 사랑에는 ‘의무’ 또는 ‘책무’라는 관념이 크게 작용하게 된 것이다.
실제로 사랑과 관련되어 ‘도리’를 말했을 때, 이를테면 ‘자식된 도리’, ‘부모의 도리’, 또는 ‘부부의 도리’ 등이 운위되었을 때, 한국인의 사랑은 막중한 책임감의 무게를 스스로 짊어지고 있었다.
국가와 사회 차원에서 이것이 논란이 되었을 때, 인간적 책무로서의 사랑은 보다 더 적극적으로 기능할 수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랑의 인간적 상황은 물론, 사회적 · 문화적 상황 또한 엄청 달라지는 가운데서도 유교적 범주에 속할 사랑 혹은 그에서 연유하고 있을 사랑일수록 크고 두드러지게 달라지고 말았다.
그 전에 이미 우주와 교감할 인간적 사랑, 그리고 자연과 교감할 에로스 등, 상고대 이래의 사랑은 무너진 지 훨씬 오래되었지만 유교적 이념에 젖은 사랑은 한국인의 일상생활에서 극히 근자에까지 규범노릇을 다해 온 만큼, 그 변화는 오늘의 새로운 사랑과 대조적으로 훨씬 더 심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