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불교조계종 제9교구 본사인 동화사(桐華寺)의 말사이다. 557년(진흥왕 18)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한 신승(神僧)이 수행하다가 560년(진흥왕 21)부터 건물을 지어 ‘대작갑사(大鵲岬寺)’라는 이름으로 창건하였다. 이어서 동쪽에 가슬갑사(嘉瑟岬寺), 서쪽에 대비갑사(大悲岬寺), 남쪽에 천문갑사(天門岬寺), 북쪽에 소보갑사(所寶岬寺)를 지었다. 이때 창건한 다섯 갑사를 오갑사(五岬寺)라고 한다.
600년(진평왕 22) 원광(542~640)이 수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대작갑사에 3년간 머무르며 중창하였다. 이후 가슬갑사로 옮겨 수행하고 있을 때 화랑 귀산(貴山)과 추항(箒項)이 찾아와 세속인으로서 평생 동안 교훈이 될 말을 물으니 세속오계(世俗五戒)를 지어 주었다.
937년(태조 20)에는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돌아와 후삼국의 통일을 위해 왕건을 도왔던 보양(寶壤)이 중창하고 ‘작갑사(鵲岬寺)’라 하였다. 태조 왕건이 보양의 공에 대한 보답으로 오갑사에 토지 500결(結)을 하사하고 작갑사에 ‘운문선사(雲門禪寺)’라고 사액한 뒤부터 ‘운문사’라고 불렀다.
1129년(인종 7) 원응국사 학일(10521144)이 만년에 운문사에 머물면서 크게 중창하였다. 그는 일찍이 대각국사 의천(10551101)이 천태종을 세우고 선문의 승려들에게 승적을 천태종으로 옮기도록 유도할 때 선문을 지킨 바 있었다. 예종이 즉위한 후 삼중대사가 되었고, 1108년(예종 3) 선사, 1114년(예종 9) 대선사가 되었으며, 1122년(인종 즉위) 왕사에 올랐다. 입적 후 국사에 추대되고 운문사에 그의 비석이 세워졌다.
조선 전기 운문사에 관한 기록은 보이지 않고, 임진왜란 이후 중창 사실이 확인된다. 1654년(효종 5) 화재로 전각이 소실된 후 곧바로 재건되었는데, 당시 기록에 보이는 가람의 건축물은 금법당, 대웅전, 극락전, 동미타전, 미륵전, 동 관음전, 십육전, 향적오백, 작탑, 조전, 명월료, 만월당, 은월당, 정문, 문수전, 객실, 삼보위, 승당, 여래전, 식당, 계본료, 계월당 판전, 미랑, 소재전, 탕재방, 선당, 종각, 행랑 비각, 2기의 탑, 3기의 광명대 등이다. 그리고 1678년(숙종 4)에 만세루를 중건하였다.
18세기 전반기에 설송 연초(1676~1750)가 주석하며 중창하였다고 전하지만 구체적인 사실은 전하지 않는다. 다만 이천보가 찬술한 「설송대사비」가 운문사에 세워져 있다.
19세기에는 운악 두안이 만일염불회를 개최하면서 법당, 시왕전, 오백나한전, 종각 등 모든 건물을 새롭게 중수하였다.
부속 암자로 절의 동쪽에 청신암(淸神庵)과 약수로 이름난 내원암(內院庵), 북쪽에 북대암(北臺庵), 동남쪽에 사리암(舍利庵), 서쪽에 호거암(虎踞庵) 등이 있다.
운문사는 1958년 비구니 전문 강원으로 선정되어 비구니 교육과 경전 연구기관으로 유명하다.
운문사에는 국가문화유산으로 보물 9점,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 3점,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 4점, 그리고 천연기념물 1점이 있다.
보물로는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동 · 서 삼층석탑, 청도 운문사 금당 앞 석등, 석조 사천왕상이 있고, 고려 전기에 조성된 석조 여래 좌상, 청도 운문사 동호(銅壺), 원응국사비, 조선 후기에 조성된 대웅보전, 비로자나삼신불회도, 대웅보전 관음보살 · 달마대사 벽화가 있다.
경상북도 유형문화유산으로는 소조비로자나불좌상, 사리기(舍利器), 만세루(萬歲樓)가 있다.
경상북도 문화유산자료로는 대웅보전 앞 석등, 설송대사비, 내원암 석조아미타불좌상, 내원암 산신도가 있다.
천연기념물로는 운문사 입구에 있는 처진소나무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