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혼 ()

우계집(권4) / 간독
우계집(권4) / 간독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
이칭
호원(浩原)
묵암(默庵), 우계(牛溪)
시호
문간(文簡)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35년(중종 30)
사망 연도
1598년(선조 31)
본관
창녕(昌寧)
출생지
서울
주요 관직
공조좌랑|지평|사헌부장령|사헌부집의|이조참판
관련 사건
기묘사화|정유재란
내용 요약

성혼은 조선시대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이다. 1535년(중종 30)에 태어나 1598년(선조 31)에 사망했다. 초시에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과 교육에만 힘썼다.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주요 지도자가 되었고 이조판서로 봉사했으나 국정운영에 관한 봉사소를 올리고 귀향했다. 이이의 권유로 관직에 나아갔고 임진왜란 중에도 조정에 봉사했으나 대체로 벼슬을 극구 사양했다. 죽은 뒤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다시 복권되었고,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숙종 때 문묘에 배향되었다.

정의
조선 전기에, 이조판서, 대사헌, 우참찬 등을 역임하였으며, 『우계집』, 『주문지결』, 『위학지방』 등을 저술한 학자.
개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호원(浩原), 호는 묵암(默庵) · 우계(牛溪). 현령 성충달(成忠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주1 성세순(成世純)이고, 아버지는 현감 성수침(成守琛)이다. 어머니는 파평윤씨(坡平尹氏)로 판관 윤사원(尹士元)의 딸이다. 서울 주2에서 태어났으며, 경기도 파주시 우계에서 거주하였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51년(명종 6)에 생원 · 진사의 양장(兩場) 초시에는 모두 합격했으나 복시에 응하지 않고 학문에만 전심하였다. 그 해 겨울 백인걸(白仁傑)의 문하에서 『상서(尙書)』를 배웠다. 1554년에는 같은 고을의 이이(李珥)와 사귀면서 평생지기가 되었다. 1568년(선조 1)에는 이황(李滉)을 뵙고 깊은 영향을 받았다.

1561년에 어머니상을, 1564년에 아버지상을 당하였다. 1568년 2월에 경기감사 윤현(尹鉉)의 천거로 전생서참봉(典牲署參奉)에 임명되고, 그 이듬해에는 목청전참봉(穆淸殿參奉) · 장원서장원(掌苑署掌苑) · 적성현감(積城縣監) 등에 제수되었다. 그러나 모두 사양하고, 조헌(趙憲) 등 사방에서 모여든 학도들의 교훈에 힘썼다.

「서실의(書室儀)」 22조를 지어 벽에 걸어놓고 제생을 지도했으며, 공부하는 방법에 관한 주3의 글을 발췌하여 읽히기도 하였다. 1572년 여름에는 이이와 9차에 걸쳐 서신을 주고받으면서 사칠이기설(四七理氣說)을 논하였다.

즉, 일찍이 이황을 사숙했으나 이황의 이기호발설(理氣互發說)에는 회의를 품고 있었다. 『중용(中庸)』 서(序)에서 주자 또한 인심도심(人心道心)을 양변으로 나누어 말한 것을 보고, 이황의 호발설도 불가할 것이 없겠다고 생각하여 이이에게 질문한 데서 시작되었다.

1573년 2월에 공조좌랑에, 7월에 장원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부임하지 않았다. 그 해 12월에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에 제수되었다. 과거 출신이 아닌 사람으로서 헌관(憲官)에 임명되기는 기묘사화 이후 처음 있는 일로서, 이는 이이의 주장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다. 그러나 이를 모두 사임하였다.

1575년 6월에 다시 지평으로 불러 상경했으나 병으로 주4하니 선조는 의원을 보내 약을 지어보내기까지 하였다. 그리고 이어서 공조좌랑 · 사헌부지평 등을 제수했으나 사임하고 본가로 돌아가니 선조는 체임을 허가할 수밖에 없었다. 그 뒤 사헌부지평 · 예빈시판관 · 장흥고주부 · 종묘서령 · 광흥창주부 · 사헌부장령 · 장악원첨정(掌樂院僉正)으로 계속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1581년 정월에는 종묘서령(宗廟署令)으로 체임되었으나 귀향은 허가받지 못하였다. 그 해 2월 사정전(思政殿)주5하여 학문과 정치 및 민정에 관해 진달했으며, 왕으로부터 급록이 아닌 특은(特恩)으로 미곡을 하사받았다.

그 해 3월에는 사헌부장령에서 내섬시첨정(內贍寺僉正)으로 전직되고, 4월에는 장문의 봉사(封事)를 올렸다. 그 요지는 신심(身心)의 수양과 의리의 소명(昭明)을 강조하는 한편 그 방법을 제시한 것이었다. 이와 아울러 군자와 소인을 등용함에 따라서 치란(治亂)이 결정된다고 역설하였다.

또 역법(役法)과 공법(貢法)의 민폐를 논하고 주6을 역설하되 혁폐도감(革弊都監)의 설치를 제의하였다. 그러나 성혼의 주장은 채택되지 못했으며, 그렇다고 귀향이 허가된 것도 아니었다. 녹봉을 거부하면 주7을 하사하면서까지 귀향을 허가하지 않았다.

이어 내섬시첨정 · 풍저창수(豊儲倉守)를 역임하면서 선정전(宣政殿)에 등대했으며, 특별히 경연에 출입하도록 명을 받았다. 그 뒤 전설사수(典設司守) · 충무위사직(忠武衛司直)에 제수되었다. 성혼은 경연석상 또는 상소로 계속 그만두고 물러날 것을 청했지만, 도리어 겨울용 주8을 명급하고 용양위상호군(龍驤衛上護軍)에 승진되었다. 그 해 연말에 선조의 윤허를 받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1582년에는 다시 사헌부집의(司憲府執義) · 사옹원정(司饔院正) · 사재감정(司宰監正) 등으로 불렀으나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 이듬해 특지로 통정대부(通政大夫)주9하여 병조참지(兵曹參知)로, 이어 이조참의에 전직, 은대(銀帶)를 하사받았는데, 이는 이이가 이조판서로 있으면서 상경을 권유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곧 이조참판에 특배되었다.

이러한 성혼의 관계 진출은 이이의 권유에 의한 것이었다. 이 후 이이가 죽자 사양하면서 돌아갈 것을 청했으나 허락되지 않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맡았다. 그 해 7월에 주10으로 돌아와 사직소를 올렸으나 겸직만 면하고, 그 해 12월에는 경기감사를 통해 내린 식물(食物)을 사급받았다.

1585년 정월에 찬집청당상(纂集廳堂上)으로, 5월에는 동지중추부사로 불렀으나 나가지 않았다. 그 뒤 동인들이 득세하여 자신을 공격했으므로 주11를 하였다. 1587년에는 주12을 지어두기까지 하였다.

성혼은 이이가 죽은 뒤 서인의 영수 가운데 중진 지도자가 되었다. 1589년 기축옥사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이조판서에 복귀했는데, 동인의 최영경(崔永慶)이 억울하게 죽자 동인의 화살이 성혼에게 집중되었다. 그러나 사실 성혼은 정철(鄭澈)에게 최영경을 구원하자는 서신을 보내기까지 하였다.

1590년에는 양민(養民) · 보방(保邦) · 율탐(律貪) · 진현(進賢)의 방도를 논하는 장문의 봉사소(封事疏)를 올리고 귀향하였다. 1591년에 『 율곡집(栗谷集)』을 평정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아들 성문준(成文濬)에게 국난에 즈음하여 죄척지신(罪斥之臣)으로서 부난(赴難)할 수 없는 자신의 처신을 밝히고, 안협(安峽) · 이천(伊川) · 연천(連川) · 삭녕(朔寧) 등지를 전전하면서 피난하였다.

이 후 세자가 이천에서 주13하면서 불러들여 전삭녕부사 김지(金潰)의 의병군중(義兵軍中)에서 군무를 도왔다. 8월에는 개성유수 이정형(李廷馨)의 군중에서 군무를 도왔고, 성천(成川)의 분조에서 세자를 배알하고 주14로 나갈 것을 청하였다. 성혼이 성천을 떠나 의주로 향했다는 말을 듣고 대조에서 의정부우참찬에 특배하였다.

성혼은 의주의 행조(行朝)에서 우참찬직을 사양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편의시무9조(便宜時務九條)」를 올렸으며, 이어 대사헌 · 우참찬을 지냈다. 1593년에 잦은 병으로 주15정주 · 영유(永柔) · 해주를 거쳐 서울로 환도할 때 따르지 못했고, 특히 해주에서는 중전을 곁에서 호위하였다.

1594년 석담정사(石潭精舍)에서 서울로 들어와 비국당상(備局堂上) · 좌참찬에 있으면서 「편의시무14조」를 올렸다. 그러나 이 건의는 시행되지 못하였다. 이 무렵 명나라는 명군을 전면 철군시키면서 대왜 강화를 강력히 요구해와 성혼은 영의정 유성룡(柳成龍)과 함께 명나라의 요청에 따르자고 건의하였다. 그리고 또 주16을 건의한 이정암(李廷馣)을 옹호하다가 선조의 미움을 받았다.

특히 왜적과 내통하며 강화를 주장한 변몽룡(邊蒙龍)에게 왕은 비망기를 내렸는데, 여기에 유식인(有識人)의 동조자가 있다고 지적하여 선조는 은근히 성혼을 암시하였다. 이에 성혼은 용산으로 나와 주17를 올린 후, 그 길로 사직하고 연안군의 각산(角山)에 우거하다가 1595년 2월 파산의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7년에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윤방(尹昉) · 정사조(鄭士朝) 등이 부난의 취지로 상경하여 주18할 것을 권했지만, 죄가 큰 죄인으로 엄한 문책을 기다리는 처지임을 들어 대죄하고 있었다. 저서로 『우계집(牛溪集)』 6권 6책과 『주문지결(朱門旨訣)』 1권 1책, 『위학지방(爲學之方)』 1책이 있다.

죽은 뒤 1602년에 기축옥사와 관련되어 삭탈관직되었다가 1633년에 주19되었다. 좌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문간(文簡)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1681년(숙종 7)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1689년에 한때 주20되었다가 1694년에 다시 주21되었다.

제향서원으로는 여산(礪山)의 죽림서원(竹林書院), 창녕의 물계서원(勿溪書院), 해주의 소현서원(紹賢書院), 함흥의 운전서원(雲田書院), 파주의 파산서원(坡山書院) 등이 있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우계집(牛溪集)』
『우계연보(牛溪年譜)』
『계곡집(谿谷集)』
『청음집(淸陰集)』
『월사집(月沙集)』
『신독재유고(愼獨齋遺稿)』
『우계선생연보부록(牛溪先生年譜附錄)』
『우계선생연보보유(牛溪先生年譜補遺)』
『우계선생연보후록(牛溪先生年譜後錄)』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유교연원(儒敎淵源)』(장지연)
『조선유학사』(현상윤, 민중서관, 1949)
『동국문묘십팔현연보』(한국명현유적연구소, 1966)
『한국유학사』(배종호, 연세대학교출판부, 1974)
『한국유학사』(이병도, 아세아문화사, 1987)
주석
주1

조선 시대에, 중추부에 속한 정이품 무관(武官) 벼슬.    우리말샘

주2

지금의 종로구 순화동.

주3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1130~1200). 자는 원회(元晦)ㆍ중회(仲晦). 호는 회암(晦庵)ㆍ회옹(晦翁)ㆍ운곡산인(雲谷山人)ㆍ둔옹(遯翁). 도학(道學)과 이학(理學)을 합친 이른바 송학(宋學)을 집대성하였다. ‘주자’라고 높여 이르며, 학문을 주자학이라고 한다. 주요 저서에 『시전』, 『사서집주(四書集註)』, 『근사록』, 『자치통감강목』 따위가 있다.    우리말샘

주4

벼슬자리를 내놓고 물러남.    우리말샘

주5

어전(御前)에 나아가 임금을 직접 대함.    우리말샘

주6

고쳐서 확장함.    우리말샘

주7

쌀과 콩을 아울러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8

땔나무와 숯, 또는 석탄 따위를 이르는 말.    우리말샘

주9

조선 시대에, 관원들의 임기가 찼거나 근무 성적이 좋은 경우 품계를 올려 주던 일. 또는 그 올린 품계. 왕의 즉위나 왕자의 탄생과 같은 나라의 경사스러운 일이 있거나, 반란을 평정하는 일이 있을 경우에 주로 행하였다.    우리말샘

주10

경기도 파주의 별칭.

주11

스스로 자신을 탄핵하는 상소.

주12

자신이 죽은 뒤에 성명이나 행적 등을 밝힌 글.    우리말샘

주13

임금이 거둥하는 중간에 어가(御駕)를 멈추고 머무르거나 묵던 일.    우리말샘

주14

당시 임금인 선조가 있는 곳.    우리말샘

주15

임금이 타던 수레.    우리말샘

주16

군사적인 대치 상태를 풀어 강화함.

주17

나이가 많은 관원이 사직을 원하는 소.

주18

대궐 안으로 들어감.    우리말샘

주19

관작이 회복되고 제향의 허락이 내려짐.

주20

종묘나 문묘에 배향한 위패를 거두어 치우던 일.    우리말샘

주21

학덕(學德)이 있는 사람이 문묘(文廟)에 올려져 함께 제사 지내지는 것.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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