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천광산은 함경남도 단천군 수하면에 있는 철광산이다. 대한제국 시기 궁내부 소속 광산으로 지정되었다. 사금 채취로 유명하던 단천광산은 1943년에 노천광이 발견되면서 철광으로 전환하였다. 남대천 강바닥의 자갈을 채취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었다. 단천광산은 생산 계획이 연간 5만 톤인 소규모 광산이었지만, 68.39%의 높은 철분 함유량과 낮은 유해 성분으로 주목받았다. 조선인 최남주가 1943년부터 개발에 착수하여 1944년 8월 주식회사로 운영하였으나 해방 이후 조선식산은행으로 소유권이 양도되었다.
단천군은 함경남도와 함경북도의 경계에서 동해안과 맞닿아 있다. 대한제국에서는 유망한 광산을 궁내부 내장원 소속으로 두었는데, 재령군의 철광과 더불어 단천군의 금, 은, 구리, 철, 옥 등의 광산도 그에 해당한다. 대한제국 황실에서는 칙령 제59호 궁내부 소속 광산 제1조, 「광업법」 제25조 및 「사금채취법」 제14조 규정에 의하여 궁내부 소속 광산을 지정하면서 함경남도 단천군[지금의 함경남도 단천시]의 광산의 사금(砂金)을 지정하였다. 단천 지역은 금을 함유한 모래를 채취하여 금을 얻는 광산이었다.
1944년 사금을 채취하던 기자재를 일부 사용하면서 철광으로 바뀌었다. 단천광산은 하천 광산으로 풍산군에서 단천군으로 흐르는 남대천 강바닥의 자갈을 실어내는 사리채취(砂利採取) 방식으로 채굴하였다. 노천광인 단천광산은 100만 톤 정도의 자철광(磁鐵鑛)이 매장된 비교적 소규모 광산으로 연간 5만 톤 생산 계획으로 출발하였다. 1944년 한 해에 무산철광 105만 톤, 재령광산 57만 톤, 개천광산 47만 톤, 양양광산 28만 톤, 이원광산 28만 톤 생산에 비춰보면 매우 작은 규모였다. 그렇지만 단천광산은 철분 함유량이 68.39%로 당시 한반도에서 채굴되고 있던 철광석 중 최고 수준이었다. 조선총독부 중앙시험소는 단천광산 생산물은 제철 상의 유해 성분[규산, 유황, 인]도 최저라고 분석하였다.
단천군에는 서부의 수하면(水下面)에 있는 자철광인 단천광산 외에도, 북부의 북두일면(北斗日面)에도 단천광산이 일제강점기부터 존재하였다. 북두일면의 단천광산은 주1 생산으로 유명하다. 1936년에 등장한 북두일면의 단천광산의 광구 등록번호는 10,202 및 10,203으로 광업권자는 시마다 킨시로[島田金四郞]이다. 시마다 킨시로는 1940년대 들어 대구에서 극장을 운영하기도 하였다.
철광인 단천광산은 조선인 최남주[1911년생, 본적은 전남 광주, 주소는 서울 종로구]가 개발사업에 착수한 것을 시발로 꼽는다. 1933년부터 전남 광산군과 나주군 일대에서 광산업을 하던 최남주는 1943년 산금정비령에 의해 광산이 폐쇄되자 단천광산으로 눈을 돌렸다. 1943년 3월 단천광산의 철광 발견, 1943년 8월 광산 매입, 1944년 5월 법인 신청, 8월 주식회사 설립 절차를 마쳤다. 박준규, 구다[具田直會], 오형남 등 총 6명의 주식회사[단천철산]로 출발한 단천광산의 자본금은 200만 엔이었다. 국내에는 단천광산의 자료가 많지 않은데, 배석만이 「일제말 광산업자 최남주의 단천광산 개발과정과 귀결」이라는 논문을 통해 상세하게 제시하고 있다.
단천광산은 1944년 8월에 노동자 150명으로 생산에 들어갔는데, 10월에는 250명으로 증가하면서 하루 15톤을 생산하였다. 1945년 3월에는 350명으로 늘었으며, 해방 직후 해산될 때의 노동자는 460명에 이르렀다. 해방 이후 단천광산의 소유권은 조선식산은행에 양도되었다. 1945년 10월 조선광업회가 결성될 때 최남주는 광산업자로 이름을 올렸다.
한편, 단천 지역은 북한에서도 손꼽히는 광업지구로 북한 최대의 아연 산지인 검덕광산, 세계적인 마그네사이트 단지인 룡양광산 · 대흥광산이 있다. 또 광산뿐만 아니라 아연 제련소, 마그네사이트 가공 공장, 비료 공장, 시멘트 공장, 광산기계 제작소 등의 공업 시설이 많다. 게다가 검덕공업대학, 단천광업단과대학, 광물자원연구소 등을 통한 우수한 기술 인력과 철도 · 항만에 이르기까지 공업 인프라가 완벽한 지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