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봉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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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기 내무대신서리, 봉상사제조, 제실회계심사국장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916년 4월 9일
출생지
경기도 이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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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대한제국기 내무대신서리, 봉상사제조, 제실회계심사국장 등을 역임한 관료. 친일반민족행위자.
생애 및 활동사항

경기도 이천 출신이다. 1899년 비서원승이 되었다. 1900년 한성부 판윤으로 임명되었고, 한성부재판소 수반판사를 겸임하였다. 1901년 서북철도국 의사장 · 중추원의관 · 내부협판으로 발령 받았고, 1902년 혜민원 의정관을 겸임하였다. 1904년 내부대신 서리로 임명되었고, 1905년 남산 왜장대에서 러일전쟁 해전 승리를 축하하기 위해 열린 축첩회에 참여하였다.

1906년 의병장 민종식(閔宗植) 관련 혐의로 일본 헌병사령부에 체포 · 구금되었다가 무죄로 석방되었다. 당시 의병진과 고종의 연계를 의심한 일본헌병대에서 측근 관료를 체포한 것이었다. 이 해 4월 대한제국 정부로부터 훈3등 태극장을 받았다. 1907년 봉상사제조 · 제실회계심사국장으로 임명되었고, 의병진압을 목적으로 하는 자위단 설립을 지원하기 위해 일진회에서 조직한 자위단원호회의 간사원을 맡았다. 1908년 동양화재보험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였고, 한성 미동에 봉명학교를 설립하였다. 이 해 10월 일본적십자사로부터 유공장을 받았다.

1909년 이완용이 일진회 주도의 ‘합방’을 저지하고 자신들의 명의로 합방을 추진하여 정치권력을 유지하고자 조직한 국민연설회의 간사원을 맡았고, 백완혁 · 엄주익 등과 함께 10만원을 마련하여 합방청원운동을 위해 일본으로 갔다. 이등박문송덕비 건설을 위한 협의회의 임원으로도 활동하였다. 또한 이 해부터 1912년까지 주식회사 대한천일은행 은행장 · 이사를 지냈다. 1910년 이재극(李載克) · 이하영(李夏榮) 등과 대한작잠주식회사를 설립하였고, 농무조합 부조장과 위생회 부회장, 평화협회 실업부총장 등을 역임하였다.

1912년 일본 메이지천황이 사망하였을 때 상장 2,000개를 민간에 무료로 배급하였다. 또한 이 해 제당회사 조선측 발기인, 주식회사 한일은행 이사, 조선상업은행 감사역을 역임하였다. 1913년 화폐재정정리사업에 대한 금융상 공적을 인정받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또한 이 해부터 조선무역주식회사 발기인으로 참여하여 이사가 되었다. 1915년 조선총독부 주도로 식민 지배를 정당화하고 시정사업을 선전하기 위해 열린 ‘시정 5년 기념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유공회원이 되었다.

참고문헌

『매일신보(每日申報)』
『황성신문(皇城新聞)』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13(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현대문화사, 2009)
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www.koreanhistory.or.kr)
집필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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