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국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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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수회의록 / 안국선
금수회의록 / 안국선
현대문학
인물
일제강점기 대한협회 평의원, 청도군수 등을 역임한 관료. 소설가.
이칭
이칭
천강(天江), 안주선(安周善), 안명선(安明善), 천강생(天江生), 안천강(安天江)
인물/근현대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878년(고종 15) 12월 5일
사망 연도
1926년 7월 8일
출생지
경기도 양지군 봉촌(지금의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
목차
정의
일제강점기 대한협회 평의원, 청도군수 등을 역임한 관료. 소설가.
생애 및 활동사항

1878년 경기도 양지군 봉촌(현 경기도 안성시 고삼면)에서 출생했다. 1895년 관비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8월 게이오(慶應)의숙 보통과에 입학, 1896년 7월 졸업했다. 졸업 후 8월 와세다대학의 전신인 도쿄(東京)전문학교 정치과에 입학, 1899년 7월 졸업했다. 졸업 후 귀국해 박영효 관련 역모사건에 관련되어 미결수로 복역했다. 1904년 종신형을 선고받고 진도에 유배되었다가, 1907년 3월 방면되었다. 1907년 박영효 귀국환영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고, 11월 제실재산정리국 사무관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국채보상기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08년 그의 대표작인 「금수회의록」을 발표했다. 1908년 대학학회 찬성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으며, 대한협회 평의원, 기호흥학회월보 저술원으로 활동했다. 같은해 7월 탁지부 서기관이 되었으며, 1909년 11월 이재국 국고과장이 되었다.

일제강점 이후인 1911년 청도군수에 임명되어, 1913년 퇴직했다. 1912년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으며, 1915년 조선물산공진회 개최에 맞춰 ‘공진회 ’를 발표했다. 3·1운동 직후인 1919년 12월 조선경제회 상무이사가 되었다. 1920년 1월에는 민원식·고희준 등이 참석한 내선인 간담회에 참여했다. 1921년 4월 자치운동을 목적으로 설립된 유민회(維民會)의 평의원으로 선출되었고, 5월에는 민족 계몽과 학술 연구를 목적으로 1918년 최남선(崔南善)·오세창(吳世昌)·박승빈(朴勝彬)·이능화(李能和)·문일평(文一平) 등 지식인 33명이 발기해, 우리 문화 증진에 공헌하고 구락부원간의 친목 도모를 목적으로 설립한 계명구락부 회원으로 활동했다. 6월에는 조선인 산업대회 발기위원회 조사위원, 해동은행 서무부장 겸 지배인사무취급이 되었다. 같은해 8월에는 송병준을 비롯한 친일 대지주들이 일제와 협력하기 위해 소작인들의 이익옹호를 명분으로 내걸고 설립한 조선소작인상조회의 발기인으로 참여했다. 1924년에는 독립사상 배척과 일선융화를 목적으로 결성된 동민회(同民會) 활동에 참여했다. 1926년 7월 8일 사망했다.

참고문헌

『친일인명사전』2(민족문제연구소, 2009)
「안국선의 생애와 계몽사상」(상·하)(최기영, 『한국학보』17-2·17-3, 일지사, 1991)
『동민』1(1924.6)
『대한제국관보』
『조선총독부관보』
『조선총독부급소속관서직원록』
관련 미디어 (2)
집필자
조성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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