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태화는 조선후기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이다. 1602년(선조 35)에 태어나 1673영(현종 14)에 사망했다. 162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1628년 별시 문과에 급제하였다. 병자호란 때에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여 유장(儒將)으로 천거되었으며 세자시강원 보덕으로 소현세자를 따라 심양에 다녀왔다.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의 논의가 분분할 때 중진 관료로서 원만하게 잘 수습하였다고 평가되고 있다. 특히 북벌과 예송으로 반목이 격화된 시기에 5차례 영의정에 임명되어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1624년(인조 2) 진사시에 합격하고, 이어 1628년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정자로 벼슬살이를 시작하였다. 1637년 세자시강원의 보덕이 되어 소현세자(昭顯世子)를 따라 심양(瀋陽)에 가기까지, 당하관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역임하였다.
홍문관에서는 수찬 · 교리 · 응교를, 사간원에서는 정언 · 헌납 · 사간을, 사헌부에서는 집의를, 세자시강원에서는 설서 · 사서 · 필선을, 성균관에서는 사예 · 사성을 각각 지냈다. 또, 행정부서에서는 예조의 좌랑, 이조의 좌랑 · 정랑, 의정부의 사인, 예빈시(禮賓寺) · 제용감(濟用監) · 장악원의 정 등을 역임하였다.
1631년 시강(試講)에서 우등으로 뽑혀 숙마(熟馬) 1필을 수상하는 문재를 보였고, 또 사간으로 있던 1636년, 청나라 침입에 대비해 설치된 원수부의 종사관에 임명되어 도원수 김자점(金自點) 휘하에서 군무(軍務)에 힘쓰다가 병자호란을 맞자 황해도 여러 산성에서 패잔병을 모아 항전하는 무용을 보이기도 하였다. 이듬해 비변사가 유장(儒將)으로 합당한 인물 4인을 천거하는 가운데 한 사람으로 뽑힌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37년 말 심양으로부터 귀국하자 그 이듬해 충청도관찰사로 발탁되어 당상관에 올랐다. 그리고 6개월만에 승정원동부승지가 되어 조정에 돌아온 이후 1649년 48세의 나이로 우의정에 오르기까지, 육조의 참의 · 참판, 한성부우윤 · 대사간, 평안도 · 경상도의 관찰사, 도승지 등을 두루 지내다가 1644년 말부터 육조의 판서와 대사헌을 되풀이 역임하였다.
이 무렵 소현세자의 죽음과 그 후계 문제로 조정 정신(廷臣)들 사이에 심한 충돌이 일었는데, 그 결과 소현세자의 부인 강씨(姜氏)가 사사(賜死)되고 그 아들들이 제주에 유배되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며, 때문에 중진 관료로서 처신이 매우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조 · 형조 · 사헌부의 장관과 같은 난감한 직책을 되풀이 역임할 수 있었던 것은 성품이 온화하고 대인관계가 원만하여 적대세력을 두지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전한다. 심지어 뒷날에 사신(史臣)이 “조정의 의논이 자주 번복되어 여러 차례 위기를 맞았으나, 그의 영현(榮顯)은 바뀌지 않았으니, 세상에서는 벼슬살이를 가장 잘하는 사람으로 그를 으뜸으로 친다.”고 평할 정도였다.
우의정에 오른 직후 효종이 즉위하자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청나라 연경(燕京)에 갔고, 그 뒤 곧 좌의정에 승진되었으나 어머니의 죽음으로 취임하지 못하고 향리에 머물렀다. 1651년(효종 2)에 상복을 벗으면서 영의정이 되어 다시 조정에 나아갔다.
1673년(현종 14) 심한 중풍 증세로 사직이 허락되기까지 20여 년 동안 5차례나 영의정을 지내면서 효종과 현종을 보필하였다. 북벌정책과 예송(禮訟)으로 신료들의 반목이 격화되던 시기여서 당색을 기피했고, 또한 정치화 · 정만화 · 정지화(鄭知和) 등을 비롯한 일가 친족들이 현 · 요직에 많이 올라 있었으므로 매우 고통스러운 세월을 보냈다.
때문에 “이 나라를 정가(鄭哥)가 모두 움직인다.”는 야유를 듣기도 하고, 또 “재주가 뛰어나고 임기응변에 능숙하여 나라 일은 적극 담당하지 않고 처신만 잘하니, 사람들은 이를 단점으로 여겼다.”는 비평을 듣기도 했지만, 한편으로 이 시기의 예송에서 일어나기 쉬웠던 선비들의 희생을 예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수행한 것으로 평가되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그와 그의 형제들은 이 무렵 청나라와의 어려운 관계를 해결하는 데에도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청나라의 고위 관원들과도 적절히 교유했기 때문에 곤란한 경우를 당할 때마다 대체로 그와 그의 형제들에게 해결의 책무가 주어졌던 것이다. 그가 노구를 무릅쓰고 1662년에 진하 겸 진주사(進賀兼陳奏使)로 연경에 다시 다녀온 것도 이 까닭이었다.
1673년 다섯 번째의 영의정 자리에서 물러난 지 6개월이 되던 달에 나이 72세로 죽으니, 현종은 3년 동안 늠록(廩祿)과 제수를 내리도록 특명하였다. 그 뒤 현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 시 · 문을 모아 엮은 『양파유고』 2권 2책과, 1656년(효종 7)까지의 일기인 『양파연기』 2권 2책이 있으며, 시조 1수가 전한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뒤에 忠翼으로 바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