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만중은 조선후기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을 저술한 문신이자 소설가이다. 1637년(인조 15)에 태어나 1692년(숙종 18)에 사망했다. 부친이 1637년 정축호란 때 순절한 후 어머니 윤씨의 특별한 가정교육을 받으며 자랐다. 과거급제 후 대제학까지 지냈으며 서인 계열에 속했다. 숙종 대의 환국정치 속에서 유배와 관계 복귀를 반복하는 삶을 살았다. 주희의 논리를 비판하고 불교용어를 사용하는 등 진보적인 사상을 지녔고, 국문가사 예찬론을 펼치는 등 국문 시가와 소설에 대한 식견도 높았다. 국문소설을 다수 창작했고, 363편에 달하는 시를 남겼다.
김만중은 성장하면서 어머니의 남다른 가정교육을 통해 많은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아버지 김익겸은 일찍이 1637년(인조 15) 정축호란 때 강화도에서 순절한 까닭에, 형 김만기와 함께 어머니 윤씨만을 의지하며 살았다. 윤씨부인은 본래 가학(家學)이 있어 두 형제들이 아비 없이 자라는 것에 대해 항상 걱정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키우기 위해 모든 정성을 다 쏟았다고 전해진다.
궁색한 살림 중에도 자식들에게 필요한 서책을 구입함에 값의 고하를 묻지 않았으며, 또 이웃에 사는 홍문관 서리를 통해 책을 빌려내어 손수 등사하여 교본을 만들기도 하였다. 『소학』 · 『사략(史略)』 · 『당률(唐律)』 등을 직접 가르치기도 하였다. 연원 있는 부모의 가통(家統)과 어머니 윤씨의 희생적 가르침은 훗날 그의 생애와 사상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김만중은 그는 어머니로부터 엄격한 훈도를 받고 14세인 1650년(효종 1)에 진사 초시에 합격하고 이어서 16세인 1652년(효종 3)에 진사에 일등으로 합격하였다. 그 뒤 1665년(현종 6)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갔다. 1666년(현종 7)에는 정언(正言)을, 1667년(현종 8)에는 지평(持平) · 수찬(修撰)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668년(현종 9)에는 경서교정관(經書校正官) · 교리(校理)가 되었다. 1671년(현종 12)에는 암행어사로 신정(申晸) · 이계(李稽) · 조위봉(趙威鳳) 등과 함께 경기 및 삼남지방의 진정득실(賑政得失)을 조사하기 위해 분견(分遣)된 뒤에 돌아와 부교리가 되었다. 1674년(현종 15)까지 헌납 · 부수찬 · 교리 등을 지냈다.
1675년(숙종 1) 동부승지(同副承旨)로 있을 때에 인선대비(仁宣大妃)의 상복문제로 서인이 패배하자 관작을 삭탈당했다. 30대의 득의의 시절에서 고난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던 것이다. 그 동안에 그의 형 김만기도 2품직에 올라 있었고 그의 질녀는 세자빈에 책봉되어 있었다. 그러나 2차 예송(禮訟)이 남인의 승리로 돌아가자, 서인은 정치권에서 몰락되는 비운을 맛보게 된 것이다. 그로부터 5년 뒤인 1680년(숙종 6) 남인의 허적(許積)과 윤휴(尹鑴) 등이 사사(賜死)된 이른바 경신대출척에 의해 서인들은 다시 정권을 잡게 된다.
그는 이보다 앞서 1679년(숙종 5) 예조 참의로 관계에 복귀하였다. 1683년(숙종 9)에는 공조 판서로 있다가 대사헌이 되었다. 당시에 사헌부의 조지겸(趙持謙) · 오도일(吳道一) 등이 환수(還收)의 청(請)이 있자 이를 비난하다가 체직(遞職 : 직무가 바뀜)되었다. 3년 뒤인 1686년(숙종 12)에는 대제학이 되었다.
1687년(숙종 13)에 다시 장숙의(張淑儀) 일가를 둘러싼 언사(言事) 사건에 연루되어 의금부에서 추국(推鞠 : 특명으로 중죄인을 신문함.)을 받고 하옥되었다가 선천으로 유배되었다. 1년이 지난 1688년(숙종 14) 11월에 배소에서 풀려 나왔다. 그러나 3개월 뒤인 1689년(숙종 15) 2월 집의(執義) 박진규(朴鎭圭), 장령(掌令) 이윤수(李允修) 등의 논핵(論刻)을 입어 극변(極邊)에 안치되었다가 곧 남해(南海)에 위리안치(圍籬安置)되었다. 이같이 유배가게 된 것은 숙종의 계비인 인현왕후 민씨(仁顯王后閔氏)와 관련된 앙화(殃禍)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와중에 어머니 윤씨는 아들의 안위를 걱정하던 끝에 병으로 죽었다. 효성이 지극했던 그는 장례에도 참석하지 못한 채 1692년(숙종 18) 남해의 적소(謫所)에서 56세를 일기로 숨을 거두었다. 1698년(숙종 24) 그의 관작이 복구되었으며, 1706년(숙종 32)에는 효행에 대하여 정표(旌表)가 내려졌다.
김만중의 사상과 문학은 이전의 여느 문인과는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그는 말년에 불운한 유배생활로 일생을 끝마쳤다. 그러나 생애의 전반부와 중반부는 상당한 권력의 비호를 받을 수 있는 득의의 시절을 보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총명한 재능을 타고났으며 가학(家學)을 통해 상당한 경지의 학문적 성과도 성취하였다. 그가 종종 주희(朱熹)의 논리를 비판했다든지 불교적 용어를 거침없이 사용했다든지 한 것은 위와 같은 배경이 없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김만중 사상의 진보성은 그의 뛰어난 문학이론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의 문학론에도 어느 정도 한계가 있다는 후대의 평가 속에서도, 그가 주장한 ‘국문가사예찬론’은 상당히 주목을 받는 논설이다. 그는 우리말을 버리고 다른 나라의 말을 통해 시문을 짓는다면 이는 앵무새가 사람의 말을 하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한문을 ‘타국지언(他國之言)’으로 보고 있는 까닭에 정철(鄭澈)이 지은 「사미인곡」 등의 한글 가사를, 굴원(屈原)의 「이소(離騷)」에 견주었다. 이러한 발언은 그의 개명적(開明的) 의식의 소산으로 평가된다.
연구자들 사이에서 김만중이 ‘국민문학론’을 제창하였다고 할 만큼 그의 문학사조상의 공로는 매우 큰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학계에서는 이와 같은 용어의 사용이 적절한 것인지에 대한 재론이 이루어지고 있다. 김만중이 살던 시대는 분명 중세의 봉건질서가 붕괴된 시대는 아니었던 만큼 국민문학이라는 용어도 성립할 수 없었을 것임은 자명하다. 적어도 ‘국민문학론’이 제창되는 것은 조선왕조가 끝나고도 한참 뒤에나 가능할 노릇이기 때문이다.
김만중의 우리말과 우리글에 대한 일종의 ‘국자의식(國字意識)’은 충분히 강조될 만하다고 평가된다. 더구나 그가 「사씨남정기」와 같은 국문 소설을 상당수 창작했다는 점과 관련해 보면 허균(許筠)을 잇는 문학사적 역할과 함께, 조선 후기 실학파 문학의 중간에서 훌륭한 소임을 수행한 것으로 결론지을 수 있겠다. 김만중은 시가와 소설에 대해서 상당한 이론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소설의 통속성에 대하여 진수(陳壽)의 『삼국지』나 사마광(司馬光)의 『통감(通鑑)』, 그리고 나관중(羅貫中)의 「삼국지연의(三國誌演義)」를 서로 구별하여 통속소설에 대한 예술적 기능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한편 김만중은 한시 시학의 표준으로 고악부(古樂府)와 『문선(文選)』의 시를 생각하였다. 말하자면 율시(律詩) 이전의 시를 배울 것을 주장한 것이다. 이 점은 주희의 학시관(學詩觀)과 상통하면서도 인간의 정감과 행동을 중요시하는 연정설(緣情說)을 시의 본질로 본 것이 특징이다. 이러한 생각들은 363수에 이르는 그의 시편들의 주조를 형성하는 단서로 작용하였다.
김만중의 많은 시들에서 그리움의 정서가 자주 표출되고 있는 점은 그의 생애와도 관련이 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고시 계열의 작품을 애송하였던 것과도 맥이 닿고 있다. 장편시인 「단천절부시(端川節婦詩)」는 그의 주정적(主情的) 시가관(詩歌觀)에서 지어진 작품으로 보인다. 그 밖에 그의 소설이나 시가에서 많은 인물이 여성으로 나타나고 있는 점도 흥미 있는 현상으로 여겨진다. 국문학 연구자들 사이에서 지금까지 관심의 대상이 되어 온 것은 주로 「구운몽」 · 「사씨남정기」 등과 같은 소설이었는데, 근년에 들어 이와 같은 시가에 대한 검토가 진행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