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제주군 ()

인문지리
지명
제주특별자치도 남부에 위치했던 군으로 2006년 서귀포시에 통합된 행정구역.
내용 요약

남제주군은 제주특별자치도 남부에 위치했던 군으로 2006년 서귀포시에 통합된 행정구역이다. 한라산의 남동 및 남서 사면에 해당하며, 완만한 경사의 용암평원이 있다. 해안의 저지대에는 산방산·군산·모슬봉·송악산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며, 화산도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제주 성읍마을 객주집 등 제주 특유의 초가집들이 보존되어 있으며 김정희의 적거유적지(謫居遺蹟址)가 있다. 이밖에 고·양·부 삼신인이 세 공주를 맞아 혼인했다는 혼인지와 해식동굴에 부처를 모신 산방굴사 등이 있다.

정의
제주특별자치도 남부에 위치했던 군으로 2006년 서귀포시에 통합된 행정구역.
개관

동 · 서 · 남쪽은 바다에 면하고 북쪽은 제주시와 접하고 있다. 동경 126°10′∼126°56′, 북위 33°06′∼33°28′에 위치한다. 면적은 615.48㎢이다. 인구는 6만 1548명(2005년 현재)이다. 3개 읍, 2개 면, 49개 법정리로 되어 있었다. 군청 소재지는 서귀포시 서홍동이었다.

자연환경
  1. 지형

이 군은 한라산의 남동 및 남서 사면에 해당하며, 북제주군보다 완만한 경사의 넓은 용암평원을 갖는다. 해발고도 100m 이하의 저지대는 동서 근경에 해당하는 성산읍과 대정읍에 넓게 나타나고 있다. 해안의 저지대에는 산방산(山房山, 395m) · 군산(軍山, 335m) · 모슬봉(募瑟峰, 186) · 송악산(松嶽山, 104m) 등 비교적 낮은 산들이 분포하고 있다.

  1. 산 · 계곡

제주도 최고지점의 융기 흔적을 보이는 산방산은 조면암질 안산암으로 된 종상화산으로 중복에 해식동이 있고 도처에 해식을 받은 흔적이 있다. 해식을 받은 측화산으로는 화산사암으로 이루어진 바굼지오름[簞山, 158m]이 있다. 가파도를 바라보며 자리한 송악산은 3중화산체를 이룬다.

일출봉으로 잘 알려진 성산(182m)은 비고(比高)에 비해 화구의 지름이 더 큰 호마테형 화산이다. 암층은 황갈색과 암회색을 띤 세립질의 응회암과 조면암으로 되어 있으나 해수면 위로 융기하는 과정에서 해식을 받아 원지형은 파괴되고 잔류산지의 단계로 남아 있다. 성산읍 고성리와의 사이에 육계사주가 발달해 성산일출봉과 연결되고 있다.

  1. 강 · 하천

하천은 미약하게 발달했는데, 그나마도 하폭이 좁고 건천(乾川)이며 퇴적량도 매우 적다. 주요 하천으로는 창고천(倉庫川) · 효돈천(孝敦川) · 남원천 · 현석천 · 송천 · 가시천(加時川) · 천미천(川尾川) · 삼달천 · 애내천 등이 있다. 이중 상류천(常流川)의 성격을 띤 것은 창고천과 효돈천뿐이다.

이들 상류천의 하류에는 40∼50m에 달하는 심곡이 형성되고 암벽을 따라 주상절리가 발달해 있다. 특히, 효돈천의 중하류를 비롯한 곳곳에는 급경사의 암벽으로 에워싸인 골짜기가 이루어져 있다. 이는 화산열곡이나 천정이 붕락되어 버린 용암굴을 따라 하천이 흐르기 때문에 나타난 것이다.

  1. 기후

기후는 바다에 면한 관계로 해양성기후의 특색이 나타난다. 특히, 한라산이 북서계절풍을 가로막아 겨울에 매우 따뜻하다. 연평균기온은 15.5℃이며, 1월 평균기온 6.0℃, 8월 평균기온 26.6℃이다. 연강수량은 1,688㎜로 우리나라 최다우지가 된다. 남동계절풍의 상륙지대로 극히 다습한 것이 특징이다.

역사
  1. 고대

구석기시대의 유물 · 유적은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그러나 청동기시대고인돌조개더미가 관내 도처에 분포되어 있고 간석기 · 민무늬토기 등이 출토되는 것으로 보아, 신석기 말 내지 청동기시대에는 사람들이 산남지방에서 활동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영주지(瀛洲誌)』의 개벽신화에 의하면, 삼성혈(三姓穴, 혹은 毛興穴)에서 솟아난 고(高) · 양(良) · 부(夫) 세 신인(神人)이 벽랑국(碧浪國)의 세 공주를 맞이해 살면서 오곡을 심고 송아지 · 망아지를 길러 땅을 개척했다고 하였다.

또, 신라 때 고을나(高乙那)의 후손인 고후 · 고청 · 고계 등 삼형제가 입조하자 신라왕은 각각 성주 · 왕자 · 도내의 작호를 주고 국호를 ‘탐라(耽羅)’라 칭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뒤 476년(문주왕 2) 백제와 통교하여 벼슬을 받는 등 수교를 하다가 498년(동성왕 20)에는 그 속국이 되었다. 백제가 망한 뒤 662년(문무왕 2)에는 다시 신라에 귀속되었다.

  1. 고려시대

925년(태조 8) 고려에 방물을 바쳤으며 후삼국을 통일한 뒤인 938년에는 탐라국주 고자견이 태자 말로를 입조시킴으로써 탐라는 고려의 속국이 되었다. 1105년(숙종 10)에는 탐라군으로 개편되어 고려의 직접 관할 하에 들어갔다. 1153년(의종 7)에 군 · 읍 · 현으로 강등되어 최척경(崔陟卿)이 탐라령으로 부임하게 되었다.

1271년(원종 12)에 김통정(金通精)삼별초를 거느리고 웅거하여 약 3년간 지냈는데, 김방경(金方慶)이 이를 토벌하였다. 그 뒤 원나라의 직할령이 되었으며, 1277년(충렬왕 3)에는 원나라가 제주에 목마장을 설치해 관리하였다.

1294년 고려는 원나라에 요청해 고려 땅으로 환원하고, 이듬해에는 다시 제주라 고쳐 목사를 두었다. 1300년에 탐라현 산하에 동서도현을 설치하였다. 그 명칭은 귀일 · 고내 · 애월 · 곽지 · 귀덕 · 명월 · 신촌 · 함덕 · 김녕 · 호촌 · 홍로 · 예래 · 산방 · 차귀였다. 그중 지금의 남제주군 지역에 해당하는 것은 호촌 · 홍로 · 예래 · 산방 · 차귀 등 6개 현촌이다.

이 무렵 원나라는 다시 제주도를 직할령으로 삼았고, 1305년에 환원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목호(牧胡)의 난으로 또다시 탐라만호라는 관리에 의해 관할되다가 1367년 고려의 요청으로 완전히 고려에 귀속되었다. 그리고 약 6년 뒤인 1374년에 최영(崔瑩)이 목호를 완전히 토벌하였다.

  1. 조선시대

1402년(태종 2)에 오랫동안 전래되어온 성주 · 왕자 등의 칭호가 참칭이라 하여 폐지되고 조선왕조의 실질적인 행정력 속에 포함되었다.

1416년 한라산을 경계로 산북은 제주목이라 하여 목사를 두고, 산남은 다시 동서로 양분하여 동쪽에는 정의현(旌義縣), 서쪽에는 대정현(大靜縣)을 설치해 현감을 두었다. 이때 정의현에는 호촌 · 홍로가 포함되고 대정현에는 예래 · 차귀가 소속되었다.

1466년(세조 12)에 안무사를 둔 데 이어 병마수군절제사를 두었으며, 뒤에 여러 곳에 진을 설치해 왜구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1609년(광해군 1) 판관 김치(金緻)가 동서 방리를 설치하고 약정을 두었다. 제주목은 중면 · 우면 · 좌면, 정의현은 좌면 · 중면 · 우면, 대정현은 좌면과 우면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그러나 응역(應役)에 불편하다 하여 제주목의 우면을 신우면과 구우면으로, 좌면을 신좌면과 구좌면으로 구분하였다. 또, 정의현은 동면 · 중면 · 서면의 3면으로 하고, 대정현은 동면 · 서면의 2면으로 개편하게 되었다.

  1. 근대

1864년(고종 1) 정의 · 대정 두 현을 군으로 승격시켜 전라도관찰사 관할 하에 두었다가 1880년 다시 현으로 환원하였다. 1894년 제주목을 부(府)로 개편하고 관찰사를 두었으며, 정의 · 대정에 군수를 두었다. 1897년 이를 폐지하고 종전대로 환원했다가 1906년에 목사제를 폐지하고 다시 군수를 두었다.

1911년 정의현에 서중면(西中面)을 증설함에 따라 그 동쪽을 동중면이라 했으며, 1913년 대정현에는 우면이 증설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정의현 · 대정현 두 현이 제주군에 병합되었다. 이때 정의현 좌면은 정의면으로, 대정현 우면은 대정면으로 개칭되었다.

1915년에는 군제가 도사제(島司制)로 고쳐지면서 도사를 두었고, 그뒤 면을 분합해 13개 면을 두었다. 이때 남제주군지역은 정의면을 성산면으로, 동중면을 표선면으로, 서중면을 남원면으로, 우면을 서귀면으로, 좌면을 중문면으로, 중면을 안덕면으로 개칭하였다.

1919년 3월에는 조천리에서 김장환(金章煥) 등이 「독립선언서」를 낭독하는 등 시위를 벌였으며, 만세운동은 전 지역에 파급되었다.

  1. 현대

1946년 전라남도로부터 분리, 도로 승격하였다. 이에 따라 2개 군이 설치되어 대정 · 안덕 · 중문 · 서귀 · 남원 · 표선 · 성산 등 7개 면을 관할하게 되었다. 1956년 서귀면과 대정면이 읍으로, 1980년에는 성산면 · 남원면이 각각 읍으로 승격하였다. 1981년 7월 서귀읍과 중문면이 통합, 서귀포시로 승격되어 분리되었다. 2006년 7월 1일부터 제주특별자치도가 출범함에 따라 남제주군은 서귀포시에 통합되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유물 · 유적

선사시대의 유물 · 유적으로는 대정읍 하모리 · 동일리 등지에서 발견된 고인돌 · 돌도끼 등과 안덕면 창천지석묘 1호(제주도 기념물, 1990년 지정)가 있다. 또한, 대정읍 상모리유적에서는 조개더미가 확인되었고 공렬토기 · 홍도 · 흑도 등이 수습되었다.

성지로는 대정읍 보성리 · 인성리 · 안성리의 대정성지(제주도 기념물, 1971년 지정), 표선면 성읍리의 정의현성지, 성산읍 수산리의 수산진성지, 성산읍 온평리 바닷가의 환해성지 등이 있다. 또, 제주도의 23개 봉수대 중 연대(제주도 기념물, 1974년 지정) 등 8기가 남아 있다.

조선시대의 건축물로는 안덕면 사계리의 대정향교(제주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표선면 성읍리의 정의향교(제주도 유형문화재, 1971년 지정) 및 정의현의 관아였던 일관헌(제주도 유형문화재, 1975년 지정) 등이 있다.

한편, 500년 가까이 정의현의 소재지였던 표선면 성읍리에는 제주 특유의 초가집들이 다수 보존되어 있다. 그중 제주 성읍마을 객주집(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 · 제주 성읍마을 고평오 고택(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 · 제주 성읍마을 고창환 고택(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 · 제주 성읍마을 한봉일 고택(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 · 제주 성읍마을 대장간집(중요민속자료, 1979년 지정)과 제주 성읍마을(중요민속자료, 1984년 지정) 등이 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그밖에 9년 동안 대정현에 유배되었던 김정희의 적거유적지(謫居遺蹟址)가 대정읍 안성리에 복원되어 있다. 역시 이곳에 유배당했던 정온의 유허비는 대정읍 보성리에 있다. 안덕면 사계리에는 1653년(효종 4)에 해안에 표류해온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 일행의 행적을 알리는 하멜표류기념비가 있다.

기타 유물 · 유적으로는 삼성신화의 고 · 양 · 부의 세 신인이 동쪽 나라의 세 공주를 맞이해 각각 혼례를 올렸다는 혼인지(제주도기념물, 1971년 지정)가 성산읍 온평리에 있으며, 성산리에는 성산일출봉(제주도기념물, 1976년 지정)이 있다. 또한, 대정읍에는 ‘무석목’(표선면 성읍리에서는 ‘벅수머리’라 불림)이라고도 불리는 돌하르방 12기(제주도민속자료, 1971년 지정)가 있다.

이 지역에는 다양한 식물이 자생하고 군락지가 발달해 있기도 하다. 특히, 남원읍 신례리에 제주 신계리 왕벚나무 자생지(천연기념물, 1964년 지정), 신흥리에 신흥 동백나무 군락(제주도 기념물, 1973년 지정), 위미리에 위미 동백나무 군락(제주도 기념물, 1982년 지정), 표선면 성읍리에 제주 성읍리 느티나무 및 팽나무군(천연기념물, 1964년 지정) 등이 잘 보존되어 있다.

민요로는 표선면 성읍리에 「오돌또기」 · 「산천초목」 · 「봉지가」 · 「맷돌노래」(중요무형문화재, 1989년 지정), 안덕면 덕수리에 「방앗돌 굴리는 노래」(제주도 무형문화재, 1986년 지정)가 전승되고 있다. 또, 덕수리의 덕수리 불미공예(제주도 무형문화재, 1986년 지정), 표선면 성읍리의 성읍 민속마을 오메기술(제주도 무형문화재, 1990년 지정) 등도 귀중한 유산이다.

교육 · 문화
  1. 교육

조선시대의 교육기관으로는 대정향교정의향교가 있다. 안덕면 사계리에 있는 대정향교는 1416년(태종 16)에 창건되어 효종 때 현재의 위치로 이전되었다.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정의향교는 1416년에 성산읍 고성리에 창건되었다가 1423년(세종 5)에 성읍리로 옮겨진 다음 1849년(헌종 15)에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1778년(정조 2)에는 정의서당, 1795년에는 대정서당이 설립되었다. 또한, 제주도에는 많은 명사와 학자들이 유배되어왔기 때문에, 이들에 의해서도 교육이 많이 행해졌다.

근대교육기관으로 1908년에 대정읍 안성리에 사립 한일학교(漢一學校)가 설립되었다가 3년 뒤에 대정공립보통학교가 되었다. 1909년 성읍리에 개교한 사립 의명학숙(義明學塾)도 같은 해에 정의보통학교로 개칭되었다.

또한, 이재교(李在喬)는 대정에 개성학교(開城學校)를 세워 민족교육을 실시하였다. 1920년대에 이르러 1면1교제 실시에 따라 공립보통학교가 늘어났다. 1930년대 이후에는 성산 · 난산 등 벽지에 간이학교가 세워졌으며, 광복 후 많은 학교가 설립되었다.

교육기관으로는 2005년 현재 초등학교 29개교, 중학교 8개교, 고등학교 4개교가 있었다. 이밖에 대정읍에 대정읍민관, 성산포에 성산읍민관, 안덕면에 안덕면민관이 있어 주민문화 향상에 이바지하였다.

  1. 문화

표선면 성읍리에 있는 성읍민속마을은 도민뿐 아니라 관광객들에게 제주의 전통적 생활상을 보여주는 교육장이 되고 있다.

(1) 민속놀이

이 고장에서는 제주도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걸궁 · 세경놀이 · 연날리기 등이 행해진다. 걸궁은 표선면 성읍리 정의고을에서 하는 농악의 일종으로, 구대진사(九代進士) · 꽹과리 · 북 · 징 · 포수 등으로 구성된다.

말관 모양의 종이모자와 수염이 달린 탈을 쓰고 도포를 입은 구대진사가 담뱃대를 물고 앞장을 서면 초록색 등의 색수건을 쓰고 소매를 걷어붙인 일행이 뒤따르면서 농악을 울려댄다. 이때 걸궁패들은 구경꾼에 둘러싸인 채 예고 없이 집집을 방문한다. 구대진사가 집주인과 인사하고 한바탕 신나게 놀고 나면 주인은 쌀이나 돈 혹은 술을 내놓는다. 모여진 돈은 마을 공동비용으로 사용된다.

세경놀이는 큰굿 때 행해지는 제차로서 풍년을 비는 농경의례이다. 연극적으로 실연되는 이 놀이에는 수심방[首巫] 1명, 소미[樂巫] 3명, 여인 분장의 소무(小巫) 1명이 등장한다. 먼저 수심방이 세경놀이의 시작을 알리는 창을 하면 임신한 소무가 나와 배가 아프다는 시늉을 한다.

이윽고 아들 ‘팽돌이’를 낳아서 서당에 보내지만, 글을 읽지 못하므로 농사를 시킨다. 심방들은 밭을 갈아 조를 심었는데, 풍년이 들어 ‘고팡’에 저장까지 하게 된다. 그래서 ‘산판점’으로 흉풍을 점치고 하위신들을 대접하는 사설을 창하면서 놀이는 끝을 맺는다.

연날리기는 보통 섣달 보름께부터 시작한다. 보름달이 뜨면 동산에 모여 연을 날리는데, 이때 낙화라고 하는 불이 붙은 화봉을 연줄에 건다. 불길이 연줄에 닿으면 연줄이 끊어지면서 연이 날아가는 것이다. 이 연에는 주인의 이름과 생년월일이 적혀 있으며, 연이 날아갈 때 “나의 액도 함께 날아가라!”고 외침으로써 액막이를 하게 된다.

(2) 동제

이 고장의 동제는 제주도내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남성 위주의 유교식 포제(酺祭)와 여성 위주의 무속식 당굿으로 선명하게 이중성을 보인다. 성산읍 수산리의 포제는 연 1회 정월 어느 날을 택해 자시(子時)에 마을에서 멀리 떨어진 동산에 올라 돌담 속에 마련된 제단에서 지낸다.

제관은 초헌관(初獻官) · 집례(執禮) · 대축(大祝) 등 14명이며, 음력 12월에 선출해 제일 3일 전에 확정짓고 사가를 빌려 합숙, 재계하게 한다. 홀기(笏記)대로 제사가 끝나면 음복을 하고 나서 마을의 고령자 3명과 이장에게 제물을 싸서 보낸다. 제사비용은 각 호에서 공동부담하며, 제사 일체에 여자는 관여하지 않는다.

표선면 토산리의 당굿은 여드렛당에서 지낸다. 본풀이에 따르면, 본래 나주 금성산의 사신(蛇神)이 처녀로 변신, 입도(入島)하여 이곳의 당신(堂神)이 되었다 한다. 이 신은 잘 위하지 않으면 여러 병을 내리므로 숭앙(祟殃)을 받는다. 제상은 연양탁상 · 공싯상 · 데령상 · 액막잇상과 마을의 각 가정에서 차려오는 축원상 등으로 한다.

쾌자차림의 매인심방이 서서 ‘삼천벵맷대세움’으로 제사를 시작하고 제차마다 심방들이 교대한다. 제사 때는 모든 악기가 사용되며, 초감제 · 추물공연 · 석살림 · 소지사름 · 본향다리 · 배방선 도진의 순으로 거행된다. 이처럼 당제는 여성들에 의해 관리되고, 심방의 무속의례방식에 따라 거행된다.

(3) 설화

제주도는 설화가 풍부하기로 유명하다. 특히, 섬이라는 지리적 환경과 어울리는 지명전설민간신앙 관련 설화 등이 다채롭고 풍부하게 전한다. 그중 「광정당과 이목사 설화」는 이 고장에 민간신앙이 얼마나 만연했는지를 잘 말해 준다.

안덕면의 광정당은 신령이 세기로 유명한 곳이어서 누구나 앞을 지날 때는 말에서 내려 절을 해야만 하였다. 하루는 제주목사 이형상(李衡祥)이 이곳을 지나면서 하마하라는 부하의 권유를 듣지 않고 그대로 지나쳤다. 그러자 말의 발이 떨어지지를 않았다.

이에 당을 관장하는 무당을 불러 굿을 시작하니 커다란 이무기가 나타났으므로 군졸을 시켜 이무기를 베어 버렸다. 관아에 돌아간 목사는 그길로 제주도의 사당 500채와 절 500채를 폐하고 무당을 관노로 삼아 중과 무당으로 인한 폐해를 근절시켰다 한다.

또한, 「마마를 면한 산호 해녀설화」가 대정읍 모슬포에 전해 온다. 마마를 앓지 않은 해녀가 밀물에 밀려온 대모(玳瑁)를 잡았다가 놓아주었다. 그 뒤 해녀는 용머리에서 전복을 따러 바다에 들어갔다가 조개로 장식한 대궐을 발견하였다.

해녀가 대궐로 다가가니 한 할머니가 나와 “자식을 살려줘서 고맙다.”며 마마를 면할 수 있다는 산호꽃 한 가지를 꺾어주었다. 과연 그 해녀는 늙도록 마마를 앓지 않았다 한다.

성산리 앞바다에 있는 소섬[牛島]이 지금처럼 떨어지게 된 데는 다음과 같은 유래가 있다. ‘설문대할망’이라는 키가 큰 할머니가 있었는데, 한번은 양쪽 발을 식산봉과 일출봉에 디디고 앉아 오줌을 누었다.

그 오줌줄기의 힘이 어찌나 세었던지 육지 한 조각이 떨어져나가 지금의 소섬이 되었고, 깊이 팬 곳은 바다가 되었다. 오줌이 흘러가던 흔적으로 지금도 이 바다는 조류가 세어 지나가는 배가 형체를 찾을 수 없을 정도로 파선하는 일이 많다고 한다.

장수설화는 이 고장의 대표적인 설화로 정운디 · 논하니 · 양태수 · 오찰방 등 다수가 전한다. 그 가운데 「오찰방설화(吳察訪說話)」는 조선조 현종 때 대정고을에서 태어났다고 하는 찰방 오영관에 관한 이야기이다.

오찰방의 아버지는 부인이 오찰방을 임신했을 때 소 아홉마리를 잡아먹였다. 그렇게 해서 낳은 아들은 과연 장사였고, 아주 장난이 심한 아이로 자랐다. 하루는 혼내주려는 아버지를 피해 천애절벽인 칼바위까지 도망을 가게 되었다.

아버지가 오찰방을 잡으려는 순간 그는 아버지의 손을 빠져 절벽 아래로 떨어졌다. 아버지는 오찰방이 죽은 줄 알고 집에 와보니 먼저 와 기다리고 있었다. 이상히 여긴 아버지가 오찰방이 잠든 뒤에 옷을 벗겨 보니 날개가 돋아 있었다.

오찰방은 자라서 벼슬을 하려고 서울로 상경하였다. 그때 마침 무술이 뛰어난 도둑을 잡기 위한 방이 붙어 있었다. 급기야 오찰방과 도둑이 맞붙게 되었는데, 천기를 짚어본 도둑이 순순히 목숨을 내놓았다. 오찰방은 도둑의 머리를 말에 묶어 궁중으로 갔다. 그런데 “제주놈이 말 탄 채 들어갈 수 없다.”는 말에 순순히 내려 걸어 들어갔다.

임금은 무서운 도둑을 잡아온 것을 보고 역적질을 할 우려가 있다 하여 그를 하옥시켰다. 그러나 곧 그가 제주사람이고 궁중에 들어올 때 순순히 걸어 들어왔다 하여 찰방 벼슬을 주어 보냈다 한다. 이밖에도 산방굴(山房窟)의 여신 이야기인 「산방덕설화(山房德說話)」, 「현지관과 정지관 설화」, 「도깨비설화」 등 많은 설화가 전한다.

(4) 민요

이 고장에 구전되고 있는 민요는 그 종류가 매우 다양하다. 특히, 「맷돌노래」 · 「방아노래」를 비롯해 「해녀노래」 · 「김매기노래」 · 「타작노래」 · 「밭 밟는 노래」 등의 각종 노동요는 수집된 민요의 반 이상을 차지하며 질도 우수하다. 또한, 「상여노래」 · 「달구노래」 · 「진토굿소리」 등의 의식요는 제주도 전역에 널리 구전되는 것으로서, 이 고장 일대에서도 많이 불린다.

이 고장에서 특이하게 불리는 노래들 가운데는 각 지역의 특성이나 생업과 관련이 깊은 것들이 많다. 안덕면 덕수리에서는 연자매의 맷돌을 들판에서 마을로 굴려오면서 부르는 「방앗돌 굴리는 노래」와, 풀무질할 때 부르는 「토불미노래」 · 「디딤불미노래」 · 「똑딱불미노래」, 그리고 제주도 특유의 초가지붕을 바둑판처럼 얽어맬 집줄을 꼬면서 부르는 「집줄 놓는 노래」 등의 노동요가 집중적으로 불린다.

대정읍 신평리에서는 질그릇을 굽기 위한 흙을 이기면서 희귀하게 「흙 이기는 노래」를 부른다. 표선면 성읍리에서는 사설이 서로 넘나들고 특이한 가락으로 전개되는 「아웨기」 · 「홍애기」라는 김매기노래가 불린다. 성산포 일대에서는 「나무 켜는 노래」 · 「나무 내리는 노래」가 성행하였다.

이 고장에는 타령 · 잡가류의 비기능요도 풍부하게 전해진다. 특히, 표선면 성읍리에서는 색다른 것들이 불린다. 1423년(세종 5)부터 1914년까지 약 500년 가까이 정의현의 치소였던 표선면 성읍리는 관기(官妓)들의 영향이 남아서인지, 제주도 다른 마을에서는 접하기 어려운 「용천검」 · 「관덕정 앞」 · 「중타령」 · 「질군악」 · 「오강산타령」 · 「사랑가」 · 「잦은 사랑가」 · 「계화타령」 · 「동풍가」 등의 노래가 부녀자들에 의해 구성지게 불린다.

이들 노래의 가락은 전라도나 경상도와는 교류되지 않고 경기 · 서도 민요가락의 영향을 간직하고 있다. 따라서, 경기 · 서도와 타도에서 이미 사라졌거나 희귀한 민요들과의 상관성을 살펴보는 귀중한 자료로서의 가치가 있다. 이밖에도 「자장가」나 동식물을 주제로 한 동요 등 다양하면서도 특이한 노래들이 많이 불린다.

산업 · 교통

이 군의 총 경지면적은 196.9㎢로 경지 중에서 밭이 차지하는 면적은 전체 경지의 58%인 114.2㎢이며 논은 0.7%인 1.4㎢에 불과하다. 과수원은 41.3%인 81.3㎢로 기후가 온화한 남원읍을 중심으로 동부에 주로 분포하며, 반대로 밭농사는 군의 서부 읍 · 면에서 주로 행해진다.

밭농사의 주요 작물은 맥류로서 맥주보리가 주종을 이루고 쌀보리는 약간 재배될 뿐이다. 잡곡으로는 메밀이, 두류로는 을 중심으로 약간의 · 녹두 등이 재배된다. 서류로는 감자의 생산량이 두드러지고 고구마도 다소 재배되고 있다.

과채류로 토마토호박 · 오이의 생산량이 급증하고 있으며 수박도 약간씩 생산되고 있다. 엽채류로 양배추와 취나물 등의 생산이 증가하는 가운데 근채류로 당근도 재배된다.

이 지역의 공업활동 역시 제주도 전체와 마찬가지로 미약하다. 다만, 대정읍 일과리에 농공단지가 설치되어 제조업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전분 제조업은 1980년대에 들어 외부에서 고구마를 수입하면서 재차 활기를 띠었으나 그다지 활발한 편은 아니다. 대정읍 서광리에 입지한 장원산업은 대규모 녹차단지를 조성하여 녹차를 생산하고 있다.

이밖에도 과일을 이용한 청량음료 제조업과 기타 지역의 알로에 제조업, 제주 토착의류인 갈옷 제조업, 어구 제조, 유기질비료와 도자기 제조업 등이 성업 중이다. 특히, 표선면을 중심으로 한 남원읍 · 성산읍의 관광목 · 산호공예업은 특화공업으로 주목된다.

상업활동은 대정읍의 상설시장을 제외하고는 읍 · 면마다 하나씩 있는 5일 정기시장뿐이다. 가장 규모가 큰 모슬포장은 1·6일, 성산장 역시 1·6일, 안덕장과 표선장은 2·7일, 남원읍의 남원장과 성산읍의 신산장은 3·8일, 성산읍의 고성장은 4·9일에 열린다. 여기서는 주로 일용잡화와 농산물을 비롯해 한약제 등이 거래된다. 그러나 대체로 인접한 서귀포시의 상업에 의존하고 있다.

교통은 남원읍을 잇는 동부산업도로와 제주시와 안덕면 창천을 잇는 서부관광도로가 개통되어 있어 편리하다. 또, 한라산의 내륙우회도로인 중산간지대의 도로가 확장, 포장되어 도내가 1시간대의 생활권에 속하며, 지방도가 있어 교통이 좋은 편이다. 해상교통은 대정읍 하모리에서 가파도와 마라도 간의 정기여객선이 운항된다.

관광

이 군은 서귀포시를 사이에 두고 제주도 남사면의 동서 양면으로 양분되어 있는 관계로 서귀포시와 비슷한 관광 특성을 보이고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에 위치하여 기후가 따뜻하며, 화산도의 자연경관이 수려하여 훌륭한 관광자원이 되고 있다. 또한, 조선시대에 정의현과 대정현이 설치되었던 성읍과 대정에 현청 · 향교 등 역사적 유적을 가지고 있는 것이 특색이다.

산악관광지로는 깊은 계곡과 계류 그리고 오백장군설화가 깃든 영실, 굴사(窟寺) 외에도 독특한 식물상이 천연기념물로 지정 · 보호되고 있는 안덕면 사계리의 산방산, 기암절벽의 99암봉이 외륜산을 이루고 해돋이가 장관이어서 예로부터 영주10경 중 제1경으로 꼽히는 성산읍의 일출봉, 모슬포의 ‘알드리’라고 불리는 3중화산의 기묘한 형상과 해안단애가 절경을 이루는 대정읍 상모리의 모슬봉과 송악산 등이 있다.

섬관광지로는 마라도가파도, 그리고 형제섬이 있다. 우리나라 최남단인 마라도는 주변이 장엄한 해식애와 해식동, 해식교 등이 발달하여 경관이 뛰어날 뿐만 아니라 모든 해안가가 낚시터가 된다.

이밖에 계곡관광지로 안덕계곡이 있다. 화산열곡에 하천이 형성된 이곳은 조면암의 기암절벽에 담팔수상사화 등의 난대수목을 포함, 300여 종의 식물이 분포하여 학술적인 가치도 높다.

해수욕장으로는 주변 경관이 수려한 안덕면의 화순해수욕장, 해양 레크레이션 관광지로 발전하고 있는 성산읍의 신양해수욕장, 표선면의 표선해수욕장 등이 유명하다. 화순해수욕장의 서쪽에 이어지는 용머리해안은 해식애와 그앞의 형제섬 · 가파도 · 마라도가 독특한 경관을 이루고 하멜표류기념탑이 건립되어 있는 관광명소이다.

문화관광지로는 고 · 양 · 부 삼신인이 벽랑국의 세 공주를 맞아 혼인했다는 성산읍 온평리의 혼인지, 해식동굴에 부처를 모신 산방굴사, 전통 그대로를 살린 성읍민속촌과 전통문화를 복원한 표선민속촌, 향청과 추사 김정희의 적거유적지가 있는 대정고을이 볼 만한 곳들이다. 최근에는 대정읍에 소인국테마파크 등이 건립되어 새로운 관광명소로 등장하고 있다.

읍 · 면
  1. 남원읍(南元邑)

군의 중앙에 위치한 읍. 면적 188.51㎢, 인구 1만 9555명(2005년 현재). 읍 소재지는 남원리이다. 본래 정의현 지역으로 서중면이라 하여 면 소재지가 중산간지대의 의귀리였다가 1926년 남원리로 이전되었고, 1980년 읍으로 승격되었다.

지형은 동부의 완만한 평원지대와 서부 서귀포시 지역의 경사지대 중간에 위치하여 완경사지를 이룬다. 북쪽에는 한라산의 연봉인 사라오름악 · 성널오름 · 논고악 · 물오름 등 고준한 측화산이 분포하나 해발고도 300m 이하의 해안지대는 드문드문 측화산이 분포할 뿐이다. 곳곳에 한라산 산정부의 측화산에서 발원한 짧은 유로의 건천이 용암터널의 붕락로를 따라 형성되어 있다.

2005년 현재 농경지 총면적은 54.84㎢로 논은 전무하다. 전체 경지가 과수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과수농업이 활발하다.

키위도 일부 재배하지만 거의 대부분은 감귤원이 들어서 있다. 특히, 근년에 시설감귤재배가 급증세를 보이면서 우리나라 감귤농업의 메카로 성장하고 있다. 이 감귤을 원료로 하는 청량음료 제조공장도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신례리의 왕벚나무자생지, 위미리와 신흥리의 동백나무군락, 태흥리의 고분, 신흥리의 관광농원 등이 있다. 또한, 신례리의 공천포해수욕장과 관광지로 지정된 하례리 예촌망의 해안경관은 절경을 이룬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7개교, 중학교 2개교가 있다. 남원(南元) · 태흥(泰興) · 한남(漢南) · 수망(水望) · 의귀(衣貴) · 신흥(新興) · 위미(爲美) · 하례(下禮) · 신례(新禮) 등 9개 법정리가 있다.

  1. 대정읍(大靜邑)

군의 서부에 위치한 읍. 면적 78.46㎢, 인구 1만 7765명(2005년 현재). 읍 소재지는 하모리이다. 본래 1416년(태종 16)에 산남이 대정 · 정의 두 현으로 나뉠 때 지금의 보성리에 현청이 설치되었다. 1914년 행정구역개편 개편에 따라 제주군에 편입되어 대정면으로 개칭되었고, 1946년에 남제주군 대정면이 되었다. 1956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동서로 긴 타원형을 이룬 한라산의 서사면에 해당하며 완경사지대가 널리 퍼져 전 지역이 해발고도 200m 이하의 용암평원지대를 형성하고 있다. 다만, 군데군데 모슬봉 · 가시오름 · 송악산 · 단산 등 구릉성 측화산이 있어 평원의 단조로움을 깨뜨린다. 농경지 총면적은 47.85㎢로 대부분이 밭으로 이용된다.

감귤원이 최근 들어 개원되고 있지만, 영락벌을 중심으로 제주도의 곡창지대를 이룬다. 감자를 주작물로 해서 보리 · 콩 등이 주로 재배된다. 논은 점토질의 토양이 발달한 무릉리와 신평리를 중심으로 약간 분포한다. 모슬포항을 전진기지로 한 연근해어업도 활발하다.

목축업은 비교적 넓은 초지가 있으나 규모가 큰 기업목장은 없고, 농가별로 소규모의 축산이 이루어지는 정도이다. 예로부터 점토질 토양이 분포하고 있는 구억리와 신평리 일대는 옹기그릇 생산지로 유명하였다.

1991년 일과리에 대정농공단지가 조성되면서 알긴산소다 공장, 강관파이프 제조업, 의류 편조업, 젓갈 제조업과 보트 · 어선 제조업 등의 업체들이 입주하여 공업활동을 하고 있다. 또한, 고구마를 원료로 한 전분공업이 발달해 있으며, 양질의 지하수를 이용한 탁주 양조업도 성업 중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안성리 · 보성리 · 인성리에 대정성지와 돌하르방 12기가 있고, 상모리에 조개더미, 안성리에 김정희 적거유적지가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6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2개교가 있다. 상모(上慕) · 하모(下慕) · 안성(安城) · 인성(仁城) · 일과(日果) · 가파(加波) · 신평(新坪) · 동일(東日) · 보성(保城) · 구억(九億) · 무릉(武陵) · 신도(新桃) · 영락(永樂) 등 13개 법정리가 있다.

  1. 성산읍(城山邑)

군의 동부에 위치한 읍. 면적 107.67㎢, 인구 1만 5006명(2005년 현재). 읍 소재지는 고성리이다. 조선시대에 정의현 좌면으로 불리다가 1914년 행정구역개편에 따라 정의현으로 개칭되었고, 1935년에 성산면으로 다시 개칭되었다. 1980년에 읍으로 승격하였다.

장축의 능선을 이루는 한라산의 동쪽 끝에 위치하기 때문에 대부분의 지역이 해발고도 200m 이하의 용암평원으로 되어 있다. 두산봉 · 대수산봉 · 대왕산 · 일출봉 · 독자봉 · 모구리오름 · 궁대악 등의 측화산이 군데군데 분포하고 있다. 본섬 가까운 해중에 솟아오른 일출봉이 고성리에서 이어지는 육계사주로 육계도화했기 때문에 이 지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해안선이 복잡하며 일찍부터 천연의 양항을 이루었다.

전체 면적 중 경지면적은 37% 정도이며, 이중 밭은 65%이며 나머지는 과수원으로 이용된다. 논은 전무하다. 밭작물로는 당근을 중심으로 하여 감자가 주로 재배되고 있고 보리 재배도 성하다. 과수원은 거의 감귤이 차지하고 있고 키위가 약간 생산된다.

천연 양항인 성산항은 제주와 서귀포 다음의 제3의 항구로 동부 해상교통의 중심지 역할을 한다. 우도를 연결하는 도항선의 발착지점이 된다. 뿐만 아니라 국내 10대 어업전진기지로 가장 먼저 시설을 갖추어 수산활동이 매우 활발한 지역이다.

관광자원으로 영주 제1경인 성산리의 일출봉과 일출광경은 아름답기로 유명하다. 문화유적으로는 온평리에 고 · 양 · 부의 삼성이 혼인을 했다는 혼인지, 고성리 · 온평리 · 성산리에 봉수대가 있다. 해수욕장이자 해양 레포츠장으로 잘 알려진 신양해수욕장이 있으며, 해안 곳곳이 낚시터가 되고 있다. 또한, 성산에서 신양에 이르는 해안지대는 최대의 해양관광단지가 들어설 예정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7개교, 중학교 2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성산(城山) · 오조(吾照) · 시흥(始興) · 고성(古城) · 수산(水山) · 온평(溫坪) · 신산(新山) · 삼달(三達) · 신풍(新豊) · 신천(新川) · 난산(蘭山) 등 11개 법정리가 있다.

  1. 안덕면(安德面)

군의 서부에 위치한 면. 면적 105.54㎢, 인구 1만 349명(200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화순리이다. 본래 1416년에 제주섬이 3현으로 분현되면서 안덕면은 대정현의 동면좌면에 속해 오다가 1913년 중면으로 불렸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제주군에 편입되었다. 1935년에 안덕계곡의 이름을 따서 안덕면이라 개칭하였으며, 1946년에는 남제주군에 편입되었다.

한라산의 남북으로 긴 면에 위치하며, 북쪽에는 돌오름 · 영아리오름 · 당오름, 남쪽에는 산방산 등의 측화산이 산재한다. 창고천이 서귀포시와 경계를 이루며 흘러 동중국해로 흘러간다. 제주도내에서는 가장 고지대에 취락이 분포해 있고, 중산간지대에 비교적 많은 취락이 발달한 것도 특색이다.

총 경지면적은 28.6㎢로, 이중 밭이 약 60%를 차지하며 나머지는 과수원이다. 밭의 주작물은 감자이며 이밖에 양배추와 채소류, 그리고 약간의 고구마가 재배되는 정도이다. 과수원은 모두 감귤원이다. 서광리에는 대규모 녹차재배단지가 있다.

제주 최대의 천연 양항인 화순항을 끼고 있어 수산업이 활발하고 기업목장도 광활한 중산간지대에서 행해지고 있다. 이 지역의 공업으로는 제주도에서 가장 역사가 깊은 전분공업을 위시해서 남제주화력발전소가 있다.

문화유적으로는 창천리의 지석묘를 비롯해 산방산 · 용머리해안 · 형제섬 · 하멜표류기념물 · 안덕계곡 · 화순해수욕장이 있으며, 덕수리의 조각공원과 서광리의 녹차다원도 주요 관광명소이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1개교가 있다. 화순(和順) · 창천(倉川) · 감산(柑山) · 상창(上倉) · 사계(沙溪) · 덕수(德修) · 서광(西廣) · 동광(東廣) · 광평(廣坪) · 상천(上川) 등 10개 법정리가 있다.

  1. 표선면(表善面)

군의 동쪽 중앙에 위치한 면. 면적 135.16㎢, 인구 1만 1072명(2005년 현재). 면 소재지는 표선리이다. 조선 초기부터 정의현의 소재지였다. 정의현은 본래 성산읍 고성리에 설치되었으나 1423년 내륙지인 성읍리로 옮겼다. 1934년에 표선면으로 개칭되었다가 1946년 남제주군에 편입되었다.

해안지대보다 내륙지대가 더 넓어 취락도 내륙지에 더 많이 분포되어 있다. 총 경지면적은 33.51㎢로, 이중 약 67%가 밭이고 나머지는 과수원이다. 논은 없다. 밭작물로는 감자와 당근이 주로 재배된다. 그밖에 화훼류 · 채소류가 있고 고구마 · 유채 · 보리 등도 일부 재배되고 있다. 과수원에서는 감귤을 주로 재배한다.

광활한 용암평원이 펼쳐져 있어 축산업이 매우 활발하다. 1967년 500여㏊의 주축단지를 조성한 것을 비롯해서 가시리지구에는 동양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제동목장과 남영목장 등 대단위 기업목장이 들어서 있다. 특히, 녹산장이라 불리는 내륙지대는 제주도에서 가장 광활한 용암평원을 이루어 제주축산의 메카로 기대되는 곳이기도 하다. 공업은 극히 미미하여 고구마를 원료로 하는 전분공장이 있는 정도이다.

문화유적으로는 ‘정의골’이라 불렸던 성읍리에 현청 · 정의향교 · 일관헌 등과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느티나무 · 팽나무가 있으며, 표선리에 제주민속촌이 있다.

교육기관으로는 초등학교 5개교, 중학교 1개교, 고등학교 1개교가 있다. 표선(表善) · 하천(下川) · 성읍(城邑) · 가시(加時) · 세화(細花) · 토산(兎山) 등 6개 법정리가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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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고을』(김영돈,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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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발견』제주도(뿌리깊은나무, 1983)
『한국지명요람』(건설부국립지리원, 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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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행정구역요람』(행정자치부, 2000)
『제주교육통계연보』(제주도교육청, 2005)
『제45회 제주통계연보』(제주도,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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