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태산(泰山, 전북특별자치도 정읍시 태인면). 자는 진정(眞精). 아버지는 신호위대장군(神虎衛大將軍)을 지낸 전총문(田寵文)이며, 어머니는 허씨(許氏)이다.
성균시(成均試)를 거쳐 문음(門蔭)으로 입사(入仕)하여 권지합문지후(權知閤門祗候) · 전중내급사(殿中內給事) · 시합문지후(試閤門祗候) · 감찰어사(監察御史) · 좌사원외랑(左司員外郎) · 이부원외랑(吏部員外郎)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1170년(의종 24) 무신정변 이후 전원균이 명종의 내시(內侍)가 되었다는 것은 전원균이 명종의 측근 문신이었음을 알 수 있게 해준다. 뿐만 아니라, 이후 1218년(고종 5) 사망할 때까지 무신정권의 고위직을 차지하였다는 것은 친무신정권적인 문신 계열로도 보인다.
1182년(명종 12) 낭장 김광유(金光裕)와 함께 금나라에 가서 방물을 바치고 만춘절(萬春節)을 하례하였다. 1200년(신종 3)에는 경주 이의민(李義旼)의 족인(族人)들이 방환(放還)되어 주리(州吏)와 더불어 틈이 생겨 서로 싸워 이의민의 족인들이 패하였다. 이 때 전원균은 안찰사(按察使)로서 이 사건을 해결하지 못하여 방수(房守) · 별장(別將) · 통인(通引)이 모두 피살되고 자신도 두려워 다른 읍으로 달아나니, 부사 이적유(李迪儒)가 이를 진압하였다.
1202년(신종 5) 경주인이 다시 반역을 도모하자 최충헌(崔忠獻)이 대장군 김척후(金陟侯)를 초토처치병마중도사(招討處置兵馬中道使)로 삼고 전원균을 부사로 삼아 토벌하게 하였다. 적이 이 말을 듣고 운문산(雲門山) 및 울진(蔚珍) · 초전(草田)의 적과 규합하여 세력이 커지니 관군이 싸우지 못하였다. 다음 해에 김척후를 불러들이고 정언진(丁彦眞)으로 대신하였는데, 그 다음 해에 정언진과 함께 돌아오니 박인석(朴仁碩)으로 대신하여 진압하게 하였다.
그 뒤 늙어서 치사(致仕)한 이후 도성 서쪽의 별장에 머물면서 지내다가 1218년(고종 5) 병이 들어 75세의 나이로 죽었다.
무신정권기의 문사 이규보(李奎報)가 쓴 전원균 묘지명(墓誌銘)이 전해져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