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간신앙 ()

은산별신제 / 1 강신굿
은산별신제 / 1 강신굿
민간신앙
개념
종교적 체계 없이 민간에서 전승되는 주술적인 종교용어.
내용 요약

민간신앙은 종교적 체계 없이 민간에서 전승되는 주술적인 종교를 가리키는 용어이다. 교리나 교단 조직 체계를 갖추지 않아 종교로 발달하지 못하는 상태의 신앙이고, 신앙 종사자들이 지배계층이 아니고 서민이나 대중이라는 특징을 갖는다. 대체로 신화·의례·주술·제사·행사·마을신앙·가정신앙·세시풍속·통과의례·장제·점복·금기·풍수·무속·조상숭배·동제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이 모두 포함된다고 할 수 있다. 민간신앙은 전통성이 강하고 민족적 의식이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정의
종교적 체계 없이 민간에서 전승되는 주술적인 종교용어.
개설

민간신앙이라는 말은 아직 학문상으로는 정확히 규정을 내리기 어려운 술어 중의 하나이다. 따라서, 현재 사용하고 있는 민간신앙이라는 개념은 매우 애매하여 사람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다.

속신(俗神) 또는 미신이라고 생각되는 것들만을 지적하는 경우도 있고, 점복(占卜) · 금기(禁忌) · 주술(呪術)의 현상이나 신흥종교의 특별한 점을 민간신앙이라는 명칭으로 부르는 경우도 있다. 그리고 무속신앙(巫俗信仰)을 지칭하는 경우도 있고, 원시신앙으로 한정지어 생각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의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민족적 특성이 강한 민속종교나 신앙으로 파악하는 것이 타당하다.

일반적으로 민속종교는 범세계적인 종교와 다른 몇 가지 특성이 있다. 첫째, 민속종교는 민족적 전통의 종교라는 의식이 강하다. 외래종교의 요소가 많이 혼합되어 있어도 비교적 자기 민족적 고유한 종교라는 특성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모든 민속종교가 고유한 종교라고는 할 수 없지만, 다른 외래종교에 비하면 전통성이 강하고 민족적 의식이 강하게 밀착되어 있는 종교를 뜻한다.

둘째, 흔히 미신이라고 불릴만큼 아직 원시성이 많은 종교라는 점이다. 이때의 원시성은 과학적인 입장에서 비과학적이라는 말이 아니고 종교 발달상 아직 형식이나 내용이 정립되지 않은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흔히 미신이라는 개념에는 비과학적인 점이 강조되고 있으나, 어느 종교에서나 과학성은 문제로 남아 있기 때문에 종교의 원시성 여부는 비조직성에 기준을 두게 된다.

셋째, 사회적으로 보아 신자나 신앙 종사자들이 지배계층이 아닌 서민 또는 대중이라는 점이다. 지식인이나 지배자들은 사회 지배의 원리로 종교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민속종교는 민간인들이 자신들의 생활 속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고 살아 나가는 입장에서 받아들이고 키워 나가는 종교이다.

서민 또는 대중이 중심이 된다는 점에서 민속종교는 민간신앙 또는 민중신앙이 되는 것이다. 지배자나 지식인들이 보급시킨 종교라고 하여도 민중 속에서 살아 있을 때는 민중종교로서 의미가 강하여진다.

이러한 민간신앙의 특징은 기성 고등종교가 교조(敎祖) · 교리 · 교단조직을 가진 것에 대한 대립적인 입장에서 말한 것이다. 그러나 민간신앙이라 하여도 신가(神歌)와 같은 교리를 가지고 있고, 신앙의 장소인 신당(神堂)에서 정기적인 의례를 하는 등 고등종교에 흡사한 형태를 가지고 있다. 신자들의 조직이 갖추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그 조직이 아직 소규모이거나 원시적인 단계에 있는 것이 보통이다.

그리고 민간신앙에서 발생하여 자란 종교로서 교조를 가진 신흥종교들도 있는데, 이와 같은 신흥종교는 민간신앙과 고등종교의 중간단계에 있는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나라에서 연구된 민간신앙의 범주를 종합하여 보면, 신화 · 의례 · 주술 · 제사 · 행사 · 마을신앙 · 가정신앙 · 세시풍속 · 통과의례(通過儀禮) · 장제(葬祭) · 점복 · 금기 · 풍수(風水) · 무속(巫俗) · 조상숭배(祖上崇拜) · 동제(洞祭) 등과 비집단적 신앙, 신흥종교, 민간의료 등이다.

이를 다시 분류하여 보면, 종교적 신념(신화)과 실행(의례 · 주술), 집단적인 것과 비집단적인 것, 사회적 차원에 의한 것(가정신앙 · 동족신앙 · 마을신앙), 시간에 의하여 반복되지만 일회적인 것(세시풍속과 통과의례), 전문적인 것과 비전문적인 것(무속 · 조상숭배), 혈연과 지연의 것(제사와 동제), 행위의 단순성과 복잡성에 의한 것(금기 · 주술 · 풍수 · 제사 · 굿), 조직성과 비조직성의 것(주술 · 신흥종교) 등이다.

이들 중 유교와 같은 외래성이 있는 것과 신흥종교와 같이 조직성이 있는 신앙은 민간신앙의 범주에서 제외시킬 수 있으며, 유교 이전의 조상숭배는 반드시 포함된다. 이 중 무속신앙은 넓은 의미에서 전문적인 민간신앙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무속신앙 중에서도 강신무(降神巫) · 세습무(世襲巫) · 학습무(學習巫)는 학술적인 구분도 가능하다. 그리고 판수와 무당은 서로 상극되는 상반된 유형으로서, 판수는 학습무로 분류되고 무당은 강신무 또는 세습무로 분류된다.

이전에는 이러한 학술적인 구별의식 없이 모두 하나의 개념으로 무속신앙 또는 무격신앙이라 하였지만, 현재는 이들에 대한 구분이 명확하여짐에 따라 무속신앙을 전문화된 민간신앙이라고 부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를 다시 살펴보면, 강신무에는 만신무당 · 태주무당 · 점장이 · 보살 등이 있고, 세습무에는 당골 · 심방 · 무당 등이 있으며, 학습무에는 독경(讀經) 경문장이 맹인 등이 있다.

지방이나 특성에 따라 명칭도 다양하며, 이들은 개인이나 가정 · 마을 등의 신앙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의례를 집행한다. 전문적인 사제자(司祭者)나 무당이 행하는 것이 아니고, 일반인이 가정이나 마을 차원에서 스스로 제관이나 사제자가 되어 의례를 행하는 가정신앙이나 마을신앙도 민간신앙의 큰 범주를 차지한다.

가정에서 고사를 지낼 때 무당이나 경문장이를 불러들여 행하는 경우가 없지는 않으나 일반적으로는 식구 중에서, 특히 주부가 이 의례를 행하는 경우가 많으며, 동제의 경우 남자가 제관이 되는 것이 제도처럼 되어 있다.

그리고 가정이나 마을 차원에서 행해지는 통과의례나 민속행사 등도 민간신앙의 범주에 포함된다. 그 까닭은 세시풍속이 원시적인 신앙이나 생활습속과 밀접하게 융합되어 생겨났기 때문이다.

역사

고대

제정(祭政)이 일치되었던 부족국가시대의 민간신앙은 국조인 단군과 관련된 신화에서부터 시작된다. 이 단군신화에는 신의 종류로서 환웅(桓雄) · 동물신 · 식물신 · 자연신 · 지신(地神) 등이 등장하고, 곰이 인간으로 변화하는 방법으로서 삼칠일 · 백일의 금기와 주술이 행하여졌으며, 기자(祈子) · 이구(異媾) · 천부인(天符印) 등의 기록이 보이고 있다.

그리고 여러 가지 신비로운 과정을 거쳐서 탄생한 단군 또한 초인간적인 능력을 가지고 태어나서 바람 · 비 · 구름을 다스렸을 뿐만 아니라, 곡식의 풍년, 인간의 수명 · 질병 · 형벌 · 선악까지도 주재하였다. 따라서, 단군은 인간의 둘레를 넘어선 군주로 간주되었고, 죽은 뒤 아사달(阿斯達)의 산신이 되었으므로 깊은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각 부족국가에서는 연중행사로서 제천의식이 행하여졌다. 부여에서는 정월에 하늘에다 제사를 지내고 며칠을 계속하여 음식을 먹으면서 노래와 춤을 추는 영고(迎鼓)가 있었고, 마한에서는 씨를 뿌리고 난 5월과 추수를 끝내고 난 10월에 많은 사람들이 모여 귀신과 하늘에 제사를 지내면서 먹고 마시고 춤을 춘 천신제가 개최되었다.

또, 예(濊)에서는 무천(舞天)이라고 하여 10월이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고 가무를 즐겼으며, 고구려에서도 동맹(東盟)이라고 이름한 국중대회를 10월에 열어서 시조 주몽(朱蒙)의 모신(母神)인 수신(隧神)에게 제사를 지냈다. 이 밖에 백제에서도 왕이 하늘과 오제(五帝)의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의식이 행하여졌다.

이와 같은 제천의식들은 모두가 그 해의 풍작을 천신에게 기원하는 예축행사(豫祝行事)였거나, 그 해의 풍작을 천신에게 감사하는 추수감사제, 또는 나라의 태평을 기원하는 집단 전체의 공동제의(共同祭儀)였다.

특히, 여러 신을 섬긴 예는 부족국가시대에 널리 나타나고 있다. 고구려에서는 나라 동쪽의 대혈(大穴)에 있는 수혈(隧穴)에 수신이 있다고 하여 10월 국중대회 때 목수(木隧)를 신좌(神座)에 놓았을 뿐 아니라, 집 좌우에 대옥(大屋)을 지어 귀신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영성(靈星)과 사직(社稷)을 받들었다고 한다. 이와 같이, 고구려에서는 하늘과 귀신과 영성, 사(社)를 관장하는 토지신, 직(稷)을 관장하는 곡식의 신을 섬기는 신앙이 성립되어 있었다.

마한에서는 소도(蘇塗)라는 성스러운 곳을 정하여 거기에 대목(大木)을 세우고 방울과 북을 달아 귀신에게 제사하였는데, 죄인이 달아나서 소도에 들어가면 잡을 수 없었다고 한다. 이 소도는 신단과 수호신을 모신 성역을 상징한 것이다.

예에서는 산천을 중하게 여기고 호신(虎神)에게 제사하였으며, 사람이 죽으면 옛집을 버리고 새로운 집을 마련하여 이주하였다. 호랑이의 신을 제사한 것은 곧 산신에게 제사를 하였다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는데, 산천을 중하게 여긴 것은 제각기 신이 있다고 본 원시신앙에 의한 것이다. 그리고 예족은 별자리에 밝아서 별자리를 보고 여러 가지 일을 예지하였다고 하는데 이것은 곧 성점법(星占法)의 발달을 의미한다.

또, 진한에서는 죽은 이의 영혼을 하늘로 날아가게 하기 위하여 큰 새의 날개에 주검을 보냈다고 한다. 이는 죽은 이의 영혼을 위안하고 승천시키기 위하여 하늘을 자유자재로 날으는 새의 날개에 붙여서 날려 보낸 것으로서, 영혼을 지상에 두는 것을 금기로 삼았던 고대인의 철학과 승천사상을 보여준다.

부여에서는 전쟁에 임할 때 하늘에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 소를 잡아 발톱을 보고 소의 발톱이 벌어져 있으면 흉조라 하였고 붙어 있으면 길조라 하여 전쟁의 승패를 점치기도 하였다. 그들은 소의 발톱이 전쟁의 길흉을 미리 알려주는 것으로 생각하였던 것이다.

변한에서는 귀신에게 제사하였을 뿐만 아니라 집의 아궁이는 반드시 집의 서쪽에 만들었다. 이와 같은 구조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전승되고 있는데, 방위신을 중요하게 보고 있었음을 추정할 수 있다.

삼국시대

삼국시대에는 불교 · 도교 등 여러 외래종교가 유입되었다. 그러나 제정일치의 형태는 삼국시대 초기에 그대로 남아 있었고 신앙의 대상이 된 신들도 매우 다양하여, 성격을 규정하기 어려운 도깨비를 비롯하여 우상(偶像) · 역귀(疫鬼) · 자연신 · 동물신 · 식물신 · 왕신 · 장군신 등 많은 신들이 믿어지고 있었다.

천신에 대해서는 하늘과 큰 인물을 직접적으로 잇는 독특한 신앙형태를 보이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은 33천왕인 제석천(帝釋天)의 아들로서 사람으로 태어나 신라통일한 뒤 죽어서는 다시 천신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리고 진평왕의 즉위 때 천사가 내려와서 “상황(上皇)의 명을 받아 옥대(玉帶)를 주노라.”고 하였다. 또, 연오랑(延烏郎)세오녀(細烏女) 부부는 해와 달의 정(精)으로서, 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자 신라의 천지는 광명을 잃었던 일이 있다.

이러한 기록들은 민간신앙에서 말하는 천신 · 상황 · 일신 · 월신 · 천사 등의 여러 신을 인정하고 있었다는 증거가 된다. 특히, 백제와 신라에서는 산신을 숭상하여 산신에게 제사지내기를 좋아하였다.

백제에서는 부여 풍(扶餘豊)이 신라의 김법민(金法敏)백마(白馬)를 잡아 맹(盟)하기에 앞서 산곡(山谷)의 신에게 제사하였고, 신라의 탈해왕은 죽어서 동악신(東岳神)이 되어 문무왕의 꿈에 나타났다고 하며, 박제상(朴堤上)아내는 여산신(女山神)이 되었다.

그리고 신라에서는 동쪽의 토함산, 남쪽의 지리산, 서쪽의 계룡산, 북쪽의 태백산, 중앙의 부악(父岳) 또는 팔공산을 오악(五岳)이라 하고, 이들 오악신들에게 제사를 지냈는데 이는 중국의 오악사상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산악신앙과 함께 삼국시대에 강하였던 신앙은 용에 대한 신앙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은 신라의 문무왕이 죽어서 호국룡이 되어 왜구로부터 나라를 지키기 위하여 감포 앞바다의 수중릉에 묻혔다는 것이다.

또, 헌강왕이 개운포(開雲浦)로 나갔을 때 용의 장난으로 인한 갑작스런 운무(雲霧)로 길을 잃은 일이 있었으며, 동해의 용왕이 일곱 왕자를 거느리고 나와 문안을 드렸고, 그 중의 한 아들인 처용(處容)을 보내어 왕을 보좌하게 하였다.

순정공(純貞公)은 아내인 수로부인(水路夫人)과 함께 강릉에 갔다가 해룡에게 납치당한 일도 있었다. 백제의 무왕은 그의 어머니와 남지(南池)의 지룡(池龍)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전한다. 이들은 모두 물에 사는 용과 인간과를 밀접하게 연결시키는 민간신앙의 한 유형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삼국유사』 등에는 역신과 동물신, 기타 특별히 이름을 명확히 할 수 없는 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병의 신인 역신은 처용의 설화에 나타나고 있다.

역신이 사람으로 변하여 천하의 절색인 처용의 처와 관계를 맺었으나 이를 본 처용은 오히려 태연한 자세를 보였으므로, 역신이 감동하여 처용이 있는 곳에는 다시는 침범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였다. 그 뒤부터 민간에서는 역신을 쫓기 위한 처용 부적이 생겼다고 한다.

소지왕 때의 사금갑(射琴匣) 고사에는 까마귀 · 쥐 · 돼지 등의 신령스러운 동물들이 등장한다. 그리고 원성왕 때의 김현(金現)흥륜사(興輪寺)에서 미녀를 만나 정을 통한 뒤에 알고 보니 호랑(虎娘)이었다는 것, 진성여왕 때의 활의 명수였던 거타지(居陀知)가 해룡의 청으로 고도(孤島)에 남아 있다가 괴신을 활로 쏘았는데 늙은 여우의 정(精)이었다는 것, 선덕여왕이 병들었을 때 밀교 승려 밀본(密本)이 『약사경』을 읽은 뒤 손에 쥐고 있던 석장(錫杖)을 날려 보내니 늙은 여우를 잡아 마당에다 쓰러뜨렸다는 이야기 등은 모두가 동물신에 관한 것이다.

이를 통하여 볼 때 여우의 신인 호신(狐神)은 신앙의 대상이 되는 선신이라기보다는 악한 신으로 간주되었다. 이 밖에 잡신으로는 진지왕도화녀(桃花女)가 생전에 나누지 못한 정을 죽어서 이루어 낳은 비형(鼻荊), 선덕왕 때 어린 김양도(金良圖)를 벙어리로 만들어 버린 뒤 횡포를 부렸던 대귀(大鬼) · 소귀(小鬼)에 얽힌 설화 등은 도깨비신앙의 모태가 되었다고도 보고 있다.

그리고 민간신앙에서 한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장승 또한 신라 때부터 있었다. 경상북도 청도군 운문산선원(雲門山禪院)에는 ‘장생’이 있었고, 운문산선원의 ‘장생표탑(長生標塔)’ 공문에는 청도 경내에 장승 11개가 있다고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당시에 장승의 수가 매우 많았으며, 장승이 사찰과 관계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유사』에는 돌백사(堗白寺)백암사(伯巖寺)에 주첩(柱貼)이 있다고 하였는데, 장승과 주첩은 동일한 것으로서 오늘날의 사찰 입구나 민간에서 볼 수 있는 장승의 전신으로 보고 있다.

이들 장승은 경계의 표시, 거리표, 악을 막는 귀표(鬼標) 등으로 사용되었다. 사찰 입구에 세우는 것은 경내의 표시이면서 부정을 막는 이중역할을 담당하였고, 장승에 다음 읍촌까지의 거리를 표시하는 것은 거리표 역할을 하였다. 촌락의 입구에 세워 축귀대왕(逐鬼大王)이라고 쓰는 것은 악귀의 부정을 막는 민간신앙적인 의미를 가진다.

신라시대에 있어서의 장승이나 주첩은 신역(神域)의 표시와 축귀의 의미를 가지고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며, 목주(木柱) · 석주(石柱) · 입석(立石) 등을 사용하여 만들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또, 삼국시대에는 비를 빌기 위하여 산천과 하늘에 제사지내는 기우제 의식에 대한 기록이 있다. 고구려에서는 563년(평원왕 5) 큰 가뭄이 있어서 왕이 식사량을 줄이고 근신하면서 산천에 기도하였다.

백제에서는 227년(구수왕 14) 3월 큰 가뭄이 있었고 4월에 우박이 내려 농작물에 큰 피해가 있었으므로 동명묘(東明廟)에 기우제를 지냈다. 신라에서는 753년(경덕왕 12) 큰 가뭄이 있자 내전에서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하여 단비를 기도하였다.

이 밖에도 삼국시대에는 기우제에 관한 단편적인 기록들이 많이 남아 있다. 당시의 기우제의식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진평왕 때 시장을 옮기고 용을 그려서 기우제를 지냈다는 『삼국사기』의 기록으로 미루어 형상주술(形象呪術)을 썼으며, 용신의 뜻을 받들어 비를 기원하는 것도 대표적인 방법이었음을 알 수 있다. 삼국시대의 민간신앙은 오늘날에도 많은 부분이 전승되고 있다.

고려

고려시대는 생활면에서 민간신앙이 널리 적용되었던 시대이다. 병이 생기면 약물치료보다는 귀신에게 제사를 하는 데 주력할 정도였으며, 크게는 국가의 행사에서부터 작게는 개인의 일상생활에 이르기까지 무격(巫覡)을 불러들여 의지하려는 경향이 뚜렷하였다.

기우제 · 기은제(祈恩祭), 재앙을 물리치고 병을 치료하는 일에서부터 서낭과 산신에게 비는 의식에까지 무격이 참여하였고, 때로는 무속에 의한 피폐가 크다고 하여 금하는 일까지도 있었다.

그리고 민간의 신에 대한 신앙도 불교와 혼합하여 매우 다양하게 신봉되었다. 불교의식과 민간신앙이 결합하여 깊이 뿌리를 내린 대표적인 행사로는 연등회와 팔관회를 들 수 있다. 연등은 원래 불교의 행사였으나 민간에 널리 전해짐에 따라 이전의 천신제와 혼합을 이루어 토착화하기에 이르렀다.

연등회는 고려 초부터 왕궁은 물론 향읍(鄕邑)에까지 널리 전하여졌는데 정월 15일 또는 2월에 행하여졌다. 팔관회는 10월 망일(望日)에 성대히 거행되었는데, 나라 동쪽의 혈(穴)에 있는 세신(歲神)을 모셔다가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고려시대에는 삼국시대의 산신사상을 이어받아 산신을 숭상하고 제사를 지냈다. 고려의 4대산으로는 덕적산(德積山) · 백악산 · 송악산 · 목멱산(木覓山)이 있었으며, 이들 4대산의 산신에게 봄 · 가을로 제사를 지냈는데, 이때는 무녀가 의식을 거행하였다.

특히, 송악산신은 거란족의 침공이 있을 때 소나무로 변신하여 수만 명과 이야기하는 것처럼 떠들어서 적을 물리쳤다는 고사도 전한다. 그리고 산신이 정인(定印)의 꿈에 나타나서 이름을 고치게 한 일도 있다.

고려시대에 민간에서 신령하게 생각한 동물로는 사슴 · 거북 · 까치 등이 있다. 사슴을 구해주고 그 보은으로 자손들이 여러 대에 걸쳐서 재상을 지냈다는 이야기, 바다에서 거북을 잡았다가 놓아 주어 그 보은을 받은 서신일(徐神逸)의 일화 등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또, 까치집을 길조로 보고 거미를 흉조로 해석한 예도 있다. 울타리 옆에서 까치가 우는 것과 거미가 아침 밥상에 내려오는 것은 길조이고, 거미가 저녁에 내려오는 것은 근심될 일이 생기거나 불길한 징조라고 하였는데, 이는 현재의 민간에서도 그대로 믿어지고 있는 속신이다.

신령하게 생각한 식물로는 거목 · 쑥 · 복숭아나무 등이 있다. 마을에 있는 거목은 마을을 지키고 소원을 들어주는 신이 있는 곳이라고 하여 거목을 신수(神樹)로 받들었고, 그 신수를 함부로 벌채하면 신벌을 받는다고 보았다.

그리고 단옷날 한낮에 쑥잎을 뜯어 두었다가 약용으로 쓰면 모든 병을 물리칠 수 있다는 속신도 고려 때부터 비롯되었고, 복숭아나무의 가지나 잎, 도부(桃符)로써 귀신을 쫓는 속신도 고려시대에 이미 행하여지고 있었다.

또한, 벽사(辟邪)를 기도하고 상서롭지 못한 것을 쫓기 위하여 동짓날에 팥죽을 먹는 것과 세말에 잡귀를 쫓고 신성한 신년을 맞이하기 위한 구나의식(驅儺儀式)도 고려 때부터 이미 있었다.

고려왕실과 관련된 민간신앙으로는 용신제가 있었다. 왕씨(王氏)들은 해룡신의 후손이라 하여 겨드랑이 밑에 용의 비늘이 있다고 전하여졌던 만큼 용신에 대한 믿음은 각별하였다.

급수문(急水門) 위의 합굴룡사(蛤窟龍祠)에는 신상을 봉안하여 두었는데, 제사를 지낼 때는 주사(舟師)들이 작은 배로 영신(迎神)하여 제사를 지냈고, 군산도에 있는 오룡묘는 사우의 정면에 다섯 신상을 그렸으며 선원들은 금기를 엄격하게 지키면서 성심껏 제사를 지냈다.

또, 성종은 991년 윤2월 길지를 택하여 사직단을 처음으로 건립하였다. 사직신으로는 토지신과 곡식의 신을 모셨으며, 봄에는 기원하고 가을에는 보은하는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문종 때는 신성진(新城鎭)에 성황사(城隍祠)를 두었는데 이것이 서낭당에 관한 최초의 사실로 보고 있다. 그 뒤 전주성황에게 제사를 올린 것과 한발이 계속되었을 때 기우제를 계양성황께 올렸다는 등의 기록이 많이 남아 있다.

고려시대에는 장승 또한 많이 세웠으며, 국장생(國長生)이라고 하여 국명에 의해서 세운 바가 있다. 고려의 장승 또한 마을과 사찰의 입구에 세워졌고 액과 잡귀를 막는 수호신, 경계의 표시 등으로 이용되었으며, 서낭 · 소도 등과 함께 마을 신앙의 대상이 되었다.

조선

조선시대에는 불교가 억압된 것과는 달리 무속신앙은 계속 번창되었으나, 금무(禁巫)라는 국가정책에 따라서 지나친 행동이나 무속이 표면에 나타나는 것은 다소 제한되었다. 특히, 무격을 전담하는 관청으로서 성수청(星宿廳) · 활인서(活人署) 등이 있었다.

또, 기우 · 기은 · 기자 · 산천제 · 성황제 등은 사제무가 맡아서 하였으며, 성수청과 활인서에 국무(國巫) 또는 무녀를 두어 국민의 질병을 치료하게 하였다. 그리고 인간사의 길흉을 점치는 점복무(占卜巫)가 크게 성행하였다.

또한, 여러 신에 대한 민간신앙도 고려시대 못지 않게 성행하였다. 건국 초 태조는 원단(圓壇)을 한강 서쪽에 설치하고 천신에게 제사하였으며, 마니산단을 설치하여 천신에게 제사를 지냈다.

그리고 영성단과 노인성단(老人星壇)을 서울 남쪽에 두었다. 태백성은 이성계(李成桂)가 즉위하기 전에 빌었더니 감응이 있었다고 하여 등극한 뒤 함흥 남쪽에 제성단을 만들어 매년 단오에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산신제는 백악산 · 송악산 · 감악산 · 삼각산 등 4악산의 산신단을 비롯하여, 전국의 주요 산들과 모든 마을에서 거행되었으며, 이 밖에도 천신(川神) · 삼해신(三海神) · 칠독신(七瀆神) 등이 있어서 무녀를 비롯한 기복자들이 즐겨 기도를 드렸다. 산신과 연관되어 암석신의 신령을 믿는 암석숭배도 토착화되었다.

대표적인 기자암(祈子巖)으로는 경주 금오산의 산아당암(産兒堂巖)과 상사암(想思巖), 서울 자하문 밖의 기자암과 인왕산 선바위 등을 들 수 있다.

동물신으로는 산군(山君)이라 하여 산신으로 숭상하였던 호랑이를 비롯하여, 재산신으로 숭상되었던 두꺼비, 제주도 차귀당(遮歸堂)에서 제사를 지냈던 사신(蛇神), 수신으로 받들어졌던 용에 대한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또, 수목 하나하나에도 신령이 있다고 보았으며, 특히 오래된 거목의 수정(樹精)은 신수라고 하여 함부로 하지 못하도록 하였고, 마을 안에 있는 거괴수(巨槐樹)는 당신목(堂神木)으로 숭상하였으며, 서낭당 · 산신당 · 장승 근처에 있는 수목들은 신목으로 인정되어 벌채를 함부로 하지 못하게 하였다.

특히, 조선시대에는 가택 안에 좌정한 많은 가택신들이 나타나고 있다. 집안의 신들 중에서 가장 높아서 대들보 위에 있는 성주신은 집안의 평안 · 무병 · 장수 · 행운 · 다남 등을 관장하는 매우 중요한 신으로 섬겨져서 상달인 10월에 성주굿이 열렸다.

이 밖에도 지신이라고 불리는 토주신(土主神), 재산신인 사창신(司倉神), 곡식을 관장하는 제석신(帝釋神), 부뚜막신인 조왕신(竈王神), 문간의 출입을 단속하는 수문신(守門神), 변소의 신인 측신(厠神), 천연두의 방지를 위하여 모신 역신(疫神) 등이 신봉되었다. 이들 신에 대해서는 나름대로의 독특한 신앙방법과 의식, 민속 등이 전래되고 있다.

또, 수호신으로는 고려 때와 같이 서낭 · 장승 · 소도 등을 모셨는데 이 중 서낭의 신앙이 크게 성행하였다. 전국의 명산을 비롯하여 마을 입구, 고갯마루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서낭당이 있었다.

이 밖에 부근신(付根神) · 대감신(大監神) · 풍신(風神) · 태자귀(太子鬼) · 미명귀(未命鬼) · 야광귀(夜光鬼) · 도깨비 등에 대한 다양한 속신이 생겨나게 되었다.

부근신은 부군신(府君神)이라고도 하는데, 중종 때는 전국의 사내(司內)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대감신은 무격신으로서 전내대감(殿內大監) · 토주대감 등 10여 종으로 분류되며, 풍신은 영동할머니로서 2월 1일 천계에서 지상에 하강하였다가 20일에 승천한다고 전한다. 태자귀는 명두라고도 하는데 어린아이의 죽은 영혼을 신으로 삼으며, 점이 잘 맞는다고 하여 부녀자들이 많이 신앙하였다.

미명귀는 억울하게 죽은 사람이 세상에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여 사람에게 붙은 경우로서 악행을 많이 하는 악귀로 보고 있다. 따라서, 민간에서는 불의의 사고로 죽은 사람이 있을 때는 위령제를 지내주어 미명귀가 되는 것을 예방하였다. 특히, 민간의 전설에는 이 미명귀에 얽힌 것들이 많다.

야광귀는 천계에 살다가 설날 밤에 인가로 내려와서 신발을 신고 간다고 하여 설날 밤에는 뜰에 있는 신발을 모두 방 안에 감추어 두고 잔다. 이 야광귀에게 신을 잃은 사람은 연중 불길하고 흉사가 있다고 하며, 이 귀신을 막기 위하여 뜰에 장간(長竿)을 세우고 체를 달아매어 두었다고 한다.

개화기 이후

조선시대에 특히 성행하였던 민간신앙은 개화기 서구문물의 유입과 함께 크게 위축되었다. 특히, 서양의학이 들어오면서 무당의 의술적 기능은 크게 위축되었고, 1910년 이후 일본은 고유신앙을 일소하기 위하여 민간신앙을 미신으로 간주하여 미신타파를 주장하였고, 무당이나 점복사에 대하여 엄한 강압을 가하였으며, 마을의 동제를 중단시키거나 신사를 파괴하기까지 하였다.

3 · 1운동 이후 군중이 모이는 것을 싫어한 일제는 산신제 · 기우제 · 별신제 등의 제사와 석전(石戰) · 차전(車戰) 등의 민속놀이까지 위생과 치안을 이유로 거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일제 36년을 거쳐 8 · 15광복을 맞이하였으나 그 뒤 서구의 교육방법과 생활방법에 크게 영향을 받아 민간신앙은 현대생활 속에서 거의 자취를 찾아보기 어렵게 되었다. 다만, 일부 지방에서 전승되어 온 굿이나 마을신앙, 우리 것을 찾겠다는 뜻있는 사람들의 연구와 노력에 의해서 민간신앙의 원형이 다시 복구되고 계승되어 가고 있다.

그러나 민간신앙은 민족의 향수와 같은 것으로서 완전히 축출될 수는 없는 것이다. 오늘날 토정비결을 보고 산신제를 지내며 미륵에게 치성을 드리고 점을 치며 귀신을 두려워하고, 동짓날 팥죽을 쑤어 악귀를 쫓는 등 민속명절을 지키고 따르는 것도 민족의 마음속에 흐르고 있는 민간신앙의 향수라고 볼 수도 있다.

유형 및 현황

민간신앙은 주로 가정이나 마을이라는 지역 생활 공동체를 바탕으로 형성되고 발전한 종교라는 점에서 가신신앙마을신앙이 그 중심을 이룬다고 할 수 있으나, 무속신앙의 전문 사제자가 등장하여 이러한 가신신앙이나 마을신앙을 흡수하고 발전시켜 왔기 때문에 무속신앙과 구분하기 어려운 경우가 흔하다. 따라서, 민간신앙을 가신신앙, 마을신앙, 무속신앙 등으로 분류하여 그 현황과 실태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신신앙

가신신앙은 집을 중심으로 한 신앙이다. 집이란 가족이 주거하는 장소이고, 그 집은 일정한 장소에 있다. 이 집은 집터와 가옥을 포함하고 있으며, 전통적으로는 조상이 대대로 살아온 혈통의 전통성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집은 가족의 전통을 여는 곳이고 인간의 안락처로 상징되는 것이기 때문에 집을 짓는 데도 의례가 따르게 마련이다.

집터를 다질 때는 토지신에게, 상량(上樑)할 때는 성주신을 모시는 등 우리의 조상들은 집 짓는 것을 단순한 건물의 창조로 보지 않고 신과 더불어 만드는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집의 건조와 집의 관리를 넘어서서 가족의 수호신이 되는 성주신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가 전해지고 있다. 집을 짓는 재목 등은 하늘에서 내려온 솔씨로부터 자라난 신비한 물건이라는 이야기를 비롯하여 집 안은 신성한 곳이고, 집의 바깥은 부정하고 위험이 노출 확대되어 있는 곳이라는 신앙을 낳기까지 하였다.

집 안의 장소를 중심으로 신들을 분류하면 안방의 조상신과 삼신, 마루의 성주신, 부엌의 조왕신, 뒤꼍의 택지신(宅地神)과 재신(財神), 출입구의 수문신, 뒷간의 측신, 우물의 용신 등을 들고 있다. 이들 신들이 언제나 그곳에 임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그 신들에 대한 신격의 특성은 지역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다.

성주신의 경우를 보면 서울지방에서는 집의 주신처럼 되어 있고 부정한 일이 있으면 나가 버린다고 보고 있다. 경상도지방에서는 성주신이 인격적인 신으로 묘사되고 있고, 제주도에서는 성주신 대신에 수문신을 집의 주신으로 삼고 있다.

또, 집터를 관할하는 대감신은 집을 보호하는 일을 하지만 적극적으로 재물을 집안으로 불러들이는 신이다. ‘욕심이 많은 대감, 탐심이 많은 대감’이라는 무가의 구절은 재산을 벌어들이고자 하는 인간의 마음을 잘 표현하고 있다.

안방에는 아기를 낳고 자손을 보호하는 삼신 또는 제석신이 있는데, 어린이의 수명장수를 위한 신이다. 부엌의 조왕신은 매년 2월중 하늘에서 내려왔다가 올라간다는 신화가 있다.

조상신은 유교 제사에 거의 흡수되어 있어서 가정신앙에서의 비중이 약해진 것이 사실이지만, 아직도 유교 이전의 조상숭배의 신앙으로 전승되고 있다. 제석항아리 · 제석단지 · 조상단지 등으로 불리는 것들은 조상숭배의 신체(神體)이다. 대개 항아리에 백미를 담아 모시지만 중부지방에서는 고리짝에 옷이나 옷감을 넣어둔다. 이 항아리는 객사한 조상이나 무당과 같이 특수한 조상을 모시게 된다.

그리고 집 밖에는 또 다른 잡신들이 있다. 이들 잡신은 때때로 집안으로 들어가고자 하여 사람들에게 불안과 공포를 주는 존재들이다. 잡신들이 집안으로 들어오지 않도록 집에서는 대문에 가시나무를 걸거나 금줄을 쳐서 출입을 제한하는 풍습이 있다. 집의 신들은 이들 잡신들과 대치하여 집을 수호하는 입장에 있게 된다.

가신신앙의 의례방법 중 가장 간단한 형태는 손비빔이다. 이를 비손이라고도 하는데, 손을 모아 비는 간단한 의식이다. 주부가 가족의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행하는 경우가 많고, 이때 간단히 음식을 차려서 신에게 비는 것이 중심을 이룬다.

잡귀를 쫓는 주술적 의례는 전문사제자인 무당이 행한다. 비록, 잡귀가 원인이 되어 병이 난 경우라 하여도 주부가 의례를 행할 때는 신에게 인간의 잘못을 비는 형식을 취한다. 때로는 칼을 던지고 주술적으로 하는 예도 있기는 하지만, 그것은 무당의 의례를 모방한 것으로 보여진다.

병을 치료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고 일방적으로 신을 모시는 의례로는 고사가 있다. 고사는 보통 여름과 가을에 행한다. 여름에는 밀전병을 신에게 바치는 의식이 있고, 가을에는 추수가 끝난 다음인 시월 상달에 고사를 지낸다.

중부 이북지방에서의 고사는 주부가 떡을 하여 집안 곳곳의 신이 있는 곳에 바치는 것이다. 남부, 특히 전라도에서는 ‘올게심니’라는 의식이 있는데, 가장이 정장하고 유교식 제사를 지낸다.

대체로 고사는 주부가 떡을 해놓고 손비빔을 하는 정도이지만, 개인의 능력에 따라서는 축원을 하는 경우도 있다. 고사에 떡이나 밀전병 등의 특식 별미를 바치는 것은 신에게는 일상적으로 먹는 밥이 아니라 별식을 바친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신이라 하여도 죽은 지 얼마 안 되는 조상에게는 밥을 바치게 된다.

마을신앙

집의 차원을 넘어서 사람이 생활하는 공간은 마을이다. 이차적인 생활공동체가 마을이며, 가신신앙의 확대연장이 마을신앙이라고 할 수 있다. 가족의 확대는 친족이 되고 마을은 친족이 사는 곳이기도 하지만, 친족이 아닌 사람도 살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마을은 집의 수호신이 살 수 있는 곳이기도 하지만, 잡귀나 잡신이 떠도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며, 잡신과 선신(善神)이 함께 공존하는 공간이라는 것이 집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점이다.

마을을 지키는 수호신으로는 산신 · 동신 · 골매기신 등으로 불리는 인격신과 비인격인 신이 있다. 마을의 특성에 따라서 신도 달라진다. 산신이 수호신이 되거나 원통하게 죽은 여신이 되는 곳도 있다. 다른 마을에서 흘러들어 왔다는 신, 땅에서 솟아나거나 하늘에서 강림하였다는 신화를 가진 신들도 모신다.

대부분의 마을에서는 하나의 주신을 섬기고, 하위신으로 장승이나 기타 수부신을 모시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신의 분화가 생겨서 여러 신이 함께 모셔지는 경향도 있어서, 산신과 해신을 위한 마을 신당을 여러 개 갖추고 있는 경우도 있다.

마을신에 대한 의례는 부락제 또는 동제(동신제)라고 한다. 동제는 동민이 직접 또는 간접으로 하나의 신을 모시는 의례로서, 두 가지 종류로 나누어진다. 하나는 무당이 사제하는 당굿의 형태이고, 다른 하나는 유교식 제사에 의한 동제이다. 두 가지가 모두 지연공동체의 의례라는 점에서 공통되고 사회적 종교적 기능 등이 일치하지만 형식은 다르다.

이러한 차이점이나 유사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견해가 있다. 무속적 당굿의 의례가 유교에 의하여 형식화되거나 대치된 것이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는가 하면, 처음부터 동제가 있었던 것이 유교에 의하여 형식화되었다는 의견도 있다.

마을신앙은 대체로 하나의 마을에 한정되지만, 때로는 마을 밖으로 확대되어 마을과 마을의 연합으로 농경의례를 하거나 동제를 공동으로 행하는 경우도 있다.

마을을 상징하는 농기(農旗)를 세우고 이웃마을과 함께 의식이나 경기를 벌이는 기세배(旗歲拜)는 마을들의 결합을 위한 동제의 전통으로 볼 수 있다. 산을 중심으로 산하(山下)의 마을들이 공동으로 제례를 행하는 단오굿이나 영산의 줄다리기 등도 있다.

이 밖에 마을에서는 혼례식이나 상례 · 제례 · 농경의례 등을 통하여 신앙행위를 행하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세시풍속이나 통과의례에서 취급되고 있다.

무속신앙

고대 부족국가시대에는 무속신앙이 뚜렷이 나타나 있지 않으나, 삼국시대 이후는 무속신앙이 여러 국가적 차원에까지 참여하여 행사를 담당하였고, 차차 가정과 마을신앙으로 정착되어 갔음을 알게 하는 많은 사료들이 남아 있다.

그 뒤 무속에서는 신의 체계에 따른 신화를 창출하거나 신격의 설명 등을 의례로 표현하여 불분명한 신관이나 신앙체계를 정리하고 체계화시켜 갔던 것이다.

이러한 체계화에 대해서는 무속신앙 자체의 노력도 있었겠지만, 불교나 유교 등 외래종교의 형식이나 조직성을 모방하였으며, 이에 따라 무속은 다른 종교와의 습합(習合)이라는 특징을 두드러지게 나타내게 되었다. 그리고 불교나 유교도 이러한 무속의 기반을 무시할 수 없었고 민간에 맞는 신앙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불교 사찰 안에 민간신앙에서 중요시하는 산신이나 삼성각을 짓게 된 것은 무속의 신앙을 수용한 것이라고도 한다. 유교에도 제물에서 떡을 중시하는 시제가 있는데, 이는 무속신앙의 형식이나 신앙의례를 상당히 가미한 것이다.

무속신앙과는 아주 대립적이라 하여 무속을 미신이라 보는 기독교에도 그 신앙의 기반에는 무속의 엑스터시적인 요소가 있다. 이것은 기독교에서 볼 수 있는 하나의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특히, 갑자기 부흥하는 교회들은 무속신앙과 밀착되어 있다고 지적되고 있다.

무속신앙이 때로는 많은 외래종교와 습합하고 때로는 미신이라는 차별을 받기도 하지만, 전체적인 한국사회의 구조 안에서 볼 때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유교가 행하지 못하거나 대상으로 삼지 않았던 원통한 영혼의 문제를 무속이 담당하거나, 지식인 중심의 외래종교에 대하여 민간대중의 민간신앙으로 기능하고 담당하는 등 전반적으로 보아 외래종교 · 고등종교 등과 민간신앙의 상호보완적인 관계를 무속신앙이 담당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무속신앙을 미신시하고 타파하려는 것이 일반적인 추세이기는 하지만, 그 존재양상을 변화시킬 수는 있어도 전혀 없앨 수는 없다. 그것은 한국인의 의식 속에 무속이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속이 보다 의식화하고 종교적인 면모를 갖추지 않고는 현대인의 의식구조에서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의례의 간소화와 함께 형식화, 그리고 신에 대한 체계화가 필요할 것이다.

특징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특징은 크게 여섯 가지로 설명할 수 있다. 첫째, 신앙의 대상이 되는 신이 매우 다양하다는 다신론적인 특징이 있다. 신앙의 대상으로는 천신 · 산신 등에서부터 사령(死靈) 등의 귀신까지를 포함하고 있다. 즉, 주로 산이나 바다 · 우물 · 들 등 자연에 존재하는 수많은 정령을 비롯하여 동식물의 영혼, 집안의 여러 곳에도 모두 개개의 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이들은 구체적인 생활이나 생산에 관한 것이나 재물 등에 구체적인 역할을 하는 신들이다. 그리고 전지전능한 신이라기보다는 인간적인 제약이나 개성을 가진 신이 많다. 때로는 신이라 하여도 불행한 상태에 있으면서 인간의 존경을 받지 못하고, 그렇다고 크게 공포의 대상도 되지 않는 신들이 많다. 그러나 민간신앙의 의례는 오히려 이러한 신들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둘째, 민간신앙은 개인신앙이라기보다는 생활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점이다. 가정의 신앙이거나 마을 전체의 신앙이지 어느 개인을 위한 개인 단위의 신앙이 아니다. 개인이 병이 나서 굿을 하는 경우에도 집 전체, 가족 전체를 위한 굿을 하게 되고, 동제의 경우에도 마을 전체를 위한 것이라는 데 의미가 있다.

가령, 가신신앙이 가장에게 비중을 두는 경우가 많지만, 가장은 개인적인 의미보다는 집안 대표로서의 의미가 있다. 또, 마을의 대표자나 제관이 제사를 행한다고 하여도 그를 위한 것이 아니며, 제사로부터 오는 행운이나 악운도 대표자에게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전체 마을사람들이 함께 한다는 의식이 있다.

셋째, 다른 외래종교와 부단한 습합을 통해서 상호 영향을 받았다는 점이다. 민간신앙은 다른 종교로부터 많은 경멸이나 차별을 받았지만 다른 종교로부터 형식을 체계화하는 방법을 배웠다. 그 대표적인 것이 불교와의 습합으로서, 서로의 빈번한 교류에 의하여 무불습합이라는 말이 생겨나게 되었다.

유교와는 상치되기 때문에 그렇게 습합되지는 않았지만 서로 영향은 받았다. 즉, 습합보다 상호보완적인 입장에서 이중적 기능을 하여 왔다고 할 수 있다. 유교신앙이 정상적인 규칙적 문제를 취급하고 있음에 비하여, 무속신앙은 비정상적이고 비규칙적인 문제를 처리하는 메카니즘으로 기능하였던 것이다.

또, 기독교는 바탕이 다른 이교(異敎)로서 이 땅에 발을 붙이기 어려웠으나, 무속신앙의 강신적 엑스터시를 기반으로 비교적 쉽게 부흥한 것으로 보고 있다. 민간신앙은 두 가지 상반된 종교도 하나의 가정신앙이나 마을신앙으로 받아들인다는 뚜렷한 특색을 지닌다.

넷째, 민간신앙은 구체적 생사화복(生死禍福)에 집착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비가 내리지 않고 농사의 위협이 있을 때는 기우제를 지내는 것처럼, 장사가 잘 되지 않거나 농사가 잘 안 될 때, 병이 많고 우환이 많은 경우 등에 구체적인 목적을 가지고 신앙행위를 한다. 특히, 재물을 얻기 위하여 기원하는 의례가 많다.

신에 대한 태도는 서로 주고받으며 은혜를 베푸는 대등한 관계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신이 인간의 추상적인 신앙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하나의 기능신으로서의 역할을 하게 된다.

원초적인 인간의 존재에 대한 의미나 죽음에 대한 원초적인 해결보다는 죽음을 어떻게 피하고 장수할 것인가 하는 현실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따라서, 매우 현세 이익적인 신앙이 되고 있고, 의례도 이익을 추구하는 주술적인 것이 대부분이다.

다섯째, 윤리의식의 결여라는 점이다. 지연이나 혈연을 중심으로 한 생활공동체의 신앙이라는 점에서 지연이나 혈연이 없는 사람에게는 매우 폐쇄적이며, 타인을 적대시하는 경향까지 나타낸다. 예를 들어, 남의 집 부뚜막의 흙을 훔쳐서 자기 집으로 가져오면 자기 집은 부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자기 위주의 심리를 표현하고 있다. 다른 마을의 것을 훔쳐서라도 우리 마을을 부자마을로 만들겠다는 의례까지도 있다.

물론 정상적인 생활의 보호, 경제적 자극, 유인 등 긍정적인 윤리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비윤리적인 요인이나 감정적 요소가 많다. 고등종교처럼 윤리관이나 조직적 체계를 세운 창시자가 없는 것이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라고 하겠다.

여섯째, 민간신앙은 사회적 모순이나 사회적 제도에 대한 원한, 한 많은 인생의 복수심을 해결하는 등 사회적 통합기능 등을 가지고 있다.

사람들로 하여금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개인과 집단 사이에서 생기기 쉬운 갈등이나 원한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복수를 행하게 하지 않고, 죽은 뒤 원령(怨靈)이 되어 복수를 하게 하는 등 간접적인 방법을 취하여 사회적 정면대립을 피하게 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생활공동체의 통합성을 고조시키는 점이다.

근대화를 추구하는 국가들 가운데 민간신앙을 근대화의 장해 요소라 하여 미신시하고, 심지어는 미신타파를 정책으로 삼는 나라들이 있다. 하지만 이는 경제 일방적으로 단순하게 사회를 본 견해로서, 사회의 균형 있는 발전을 위해서는 사회적 협동체제를 간과해서는 안 된다.

민간신앙에서 민족의 신, 마을의 신, 가정의 신을 모시고 존경하여 집단의식을 가지는 것은 사회협동체제의 유지에 크게 이바지한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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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신신앙」(장주근, 『한국민속대관』 3,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1982)
집필자
최길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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